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사진: 한겨레출판 제공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온 사진 작가 강재훈의 별명은 ‘분교 사진가’다. 1983년 소규모 학교 통폐합 정책이 발표된 후 전국의 많은 분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그때부터 작은 학교들을 찾아 사진에 담아 왔다.
나무를 만나러 다니기 전 강재훈의 오랜 시간에는 ‘분교’가 있었다. 무려 30년. 나무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사람에겐 뼈가 굽고 닳는 인고의 시간. 강재훈의 땀내 나는 목격, 집요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남은 ‘분교 이야기’는 너무 초라해 창피했을 것이다. _노순택(사진 작가)
이렇게 30년 동안 분교를 찾아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얻은 또 하나의 행복이 있었으니 바로 수많은 나무와 친구가 된 일이다. 제 살이 찢기는 고통에도 길가의 철망을 품은 채 자라는 가로수, 커다란 바위를 가르며 자라는 소나무,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나이테에 새긴 채 한결같이 폐교를 지키는 포플러, 쇠락한 마을 한가운데서 주렁주렁 감을 매단 채 아이들의 돌팔매질을 그리워하는 감나무, 담벼락에 그려진 나무 그림과 어우러져 자라는 장미, 스스로 열을 내어 눈얼음을 뚫고 꽃을 피우는 복수초, 붉은 꽃과 흰 꽃이 한 몸에 핀 매화 등 저마다의 모습과 사연을 가진 나무들과 우정을 나눈 것이다.
이 듬직한 친구들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저자를 반겨 주고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때로는 누구보다 수다스럽게 자기가 겪은 눈보라와 비바람, 야생동물과 곤충들의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무의 사진을 찍는 것보다 그들과의 대화가 더 즐거울 때도 많았다. 이러한 소통과 교감은 저자의 일상과 마음을 한결 단단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 에세이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은 이토록 멋지고 소중한 친구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강재훈 작가가 특별히 마련한 장이다. 전시회에 걸렸던 작품들 중 100여 컷의 사진을 엄선하고 여기에 섬세한 감성이 돋보이는 글을 곁들였다. 소설가 현기영은 “이 책에 실린 나무 사진들은 신비롭게 아름다우며, 그 사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또한 우리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드는 시적 감화력을 갖고 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나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나무를 그려 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30년 넘도록 나무와 교류해 온 사진 작가의 경이롭고 낭만적인 탐목기(探木記)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나무와 자연이 선사하는 평온과 위안을 만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삶과 일상을 싱그럽게 만들어 줄 멋진 친구들이 생각보다 주변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책 속으로
그저 산등성이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을 뿐 나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의지할 친구 없이 혼자 서 있는 나무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십수 년이 되었다. 해마다 계절마다 그 나무를 만나러 가서 사진으로 남겼다. 사계절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어 ‘바람불이’라 이름 지어진 능선을 눈 부릅뜨고 지키는 파수 나무. 이제는 만나면 반갑다고 인사도 나누고 지난여름 비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지난겨울 눈보라가 얼마나 매서웠는지 묻고 대답하는 사이가 되었다. 최근 몇 번은 분교에 들르지 못해도 일부러 그 나무만을 보러 달려갈 만큼 보고 싶은 사이가 되었다. _20~21쪽
폐교되기 전까지 교문 옆에서 30여 년 동안 마을 아이들 169명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포플러. 폐교된 뒤로 또 20여 년이 지났다. 나이테마다 아이들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 같고 재잘거림이 녹음되어 있을 것 같다. 끌어안고 살포시 귀를 대 보니 1998년 여름의 순애, 영광이, 수창이, 보람이가 내 마음속으로 달려와 인사를 한다. 마치 연포분교에 다녔던 벼루메마을 아이들이 여기 다시 모여 수다를 떠는 것처럼 햇살을 받은 포플러 잎이 바람에 팔랑이며 반짝인다. 나무껍질을 손으로 쓰다듬으니 우듬지 끝 나뭇잎이 한결 더 떨리는 것 같다. 분교에 다니던 시절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와 노랫소리는 물론 웃고 울고 뛰놀던 모든 추억이 기록되어 있을 타임캡슐이 열리는 것인가. 하늘로 연결된 안테나가 작동을 시작한 것이리라. _48쪽
피앗재와 사무곡의 감나무는 둘 다 산 깊은 골짜기에 뿌리를 내린 탓에 수령이 오래되도록 그 자리에서 감꽃을 피우는 것 같다. 농원처럼 감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드리로 큰 것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사람의 왕래가 적고 외딴곳에 자리한 나무들이 보호되는 시대다. 하지만 홀로 외로운 이 감나무는 오히려 개구쟁이 동네 아이들의 팔매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이 익을 무렵이면 길 가던 아이들이 나뭇가지나 돌을 던져 감을 떨어뜨리고 그 감이 아직은 덜 익어 떫더라도 그것으로 주전부리를 대신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마을을 떠나간 그 아이들과 함께 추억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시대다. 피앗재에도 사무곡에도 함께 살던 많은 사람이 점점 떠나고 마을이 소멸할 날마저 머지않은 듯하다. 안타까움이 인다. _63~64쪽
나무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했다. 나무는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려고 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어려워서 그렇지, 나무처럼 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참 잘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되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이웃이 되고 마을이 되고 국가가 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나부터 나무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숲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곧 한 그루의 나무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에...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