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론 마을--내 마음의 오지에 들다
2012-05-03 13:43:05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알랭드 보통 - 여행의 기술 중
충북 괴산의 갈론 마을은 오늘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오지중의 오지라고 하여 한껏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마을, 세상살이에 이리저리 볶이고 마음이 심란해지면 문득 이상향처럼 떠오르는 곳이다.
차는 괴산읍을 거쳐 국내 최초의 수력발전소인 괴산호를 향해 달린다. 늦은 봄이지만 햇살은 초여름처럼 따갑다. 쏟아지는 햇살을 않고 호수는 물비늘처럼 반짝인다.
갈론 마을의 전경
쑥을 뜯는 여인네들
괴산호를 사이로 왼쪽 포장길을 타고 오르면 갈론 마을이고 오른쪽은 산막이 마을에 닿는 길이다. 괴산호가 생기기 전에는 두 마을 사람들이 강을 건너 왕래를 했지만 지금은 괴산댐까지 내려오는 수고를 아껴야 한다.
그러나 갈론 마을이 입소문을 탄 것은 인접한 산막이 마을의 영항이 크다. 산막이 옛길이 인기를 끌자 갈론 마을도 덩달아 신바람을 탔다. 그 때문에 갈론 마을은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차량들로 북적이는 명소가 되었다..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곁눈질하며 올라오자 금세 갈론 마을에 닿았다.
원래 갈은 마을이라고도 불렀던 갈론 마을, 칡뿌리를 캐먹으면서 숨어 지낼 정도로 험준한 산 속에 숨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낡고 쇠락한 빈집이나 금방 쓰러질 듯한 흙집, 그리고 큰길가의 장작들이 마을에 스산함을 안겨 주지만 색색의 양철지붕과 민박집이 그나마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마을의 끝자락에는 폐교가 된 갈론 분교가 있다. 한때는 60여명의 아이들이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고요만 맴돌고 있다. 운동장은 거뭇거뭇 풀들로 덮여 있고 하늘을 치솟은 우람한 플라타너스가 그 옛날을 회상하듯 낡은 교실을 굽어보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폐교를 방치하지 않고 산촌 체험관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두 여인의 정겨운 풍경
제비꽃
갈은 구곡은 갈론 분교 옆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계곡 길 입구는 튼실한 쇠줄을 늘어뜨려 더 이상 차들의 진입을 막았다. 구불거리는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계곡의 아홉 절경마다 멋진 이름을 붙인 구곡이 등장한다.
중국 남송 때의 학자인 주희가 무이산의 아홉 구비 절경에 반해 이름 붙였다는 무이구곡을 본떠 조선 시대 성리학을 숭상한 선비들이 즐겨 이름을 사용했다.
일행들이 발걸음을 옮기자 산 관리인이 다가와 주의를 환기시켰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지 말고 산나물도 채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무분별하게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 때문에 국립공원도 몸살을 앓는다는 소식이다. 몸에 좋은 산나물과 진귀한 꽃들을 마구 캐가는 사람들 탓에 산은 얼마나 몸살을 앓았던가. 연두 빛 내음에 묻혀 편히 휴식을 취해야 할 산들이 되레 외지인들로 몸살을 앓게 되니 주객이 뒤바뀐 꼴이 되고 말았다.
양지꽃
길을 걷는 일행들
작은 다리를 건너자 마자 길 모퉁이 산자락이 눈길을 잡아끈다. 산자락을 뒤덮은 쑥 사이로 봄맞이꽃과 양지꽃이 따끈한 햇살에 졸고 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쑥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 흔한 쑥도 여기서는 진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지 쪼그려 앉아 쑥을 뜯는 여자들의 모습이 정겹다. 하기야 시장에서 사먹는 쑥보다도 자연의 바람을 쐬며 자란 쑥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어디 쑥뿐이랴, 시장에서 유통되는 먹거리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건강보다 돈을 앞세운 사람들 때문에 빚어진 그릇된 현상이 사람들의 눈길마저 돌려 버렸다. 쑥을 뜯는 여자들의 등 뒤로 나비들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닌다. 여기저기 꽃들을 찔러보는가 싶더니 향긋하게 봄 내음 풍기는 길을 환히 열어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구부러진 포장도롤 타고 오르면 구곡의 절경이 펼쳐진다. 굽이치는 산자락은 연두빛 물에 흠씬 젖어있고 정갈하게 일군 마늘밭과 감자밭이 호젓함에 한 폭 풍경을 더한다. 밭둑에 모여 앉은 제비꽃과 애기똥풀도 앙증맞다.
녹음에 묻혀 걷는 길은 여유롭다. 계곡길이 깊어질수록 귓전을 스쳐가는 물소리도 더욱 세차다. 계곡에 뒹구는 암반에는 나무들이 넝쿨을 뻗어 시원한 그늘을 깔고 있다. 바위 틈 새 조팝나무도 쌀밥 같은 꽃망울을 눈부시게 매달고 있다.
훤히 뜷린 포장도로 옆으로 거대한 암반이 솟아있다
집채만한 바위에는 갈은 동문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산길은 적막강산으로 더 깊어지고 팔랑거리는 나비를 따라 눈길이 머문 곳에 일망무제 앞이 확 트인 절경 지대가 나타났다. 떡살 같은 바위들이 층층이 벼랑을 이루고 비단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계곡에는 진달래꽃이 무리를 지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 마다 진달래는 흘러가는 물길을 부여잡고 사뿐히 꽃잎을 흩날리고 있다. 말로만 듣던 별유천지 비인간이 바로 이곳이다.
벼랑 위의 집채만한 바위에 새겨진 갈은 동문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 바위 아래에 새겨진 싯귀가 갈은 동문의 풍광을 알려주듯 절창의 가락들이 구구절절 내 마음을 흔들어댄다.
겨울에는 따슴따슴 여름에는 서늘서늘,
태고의 자연과 벗하며 사노라니 마냥 좋아라,
평평하고 하얀 암반은 채소밭 하면 안성맞춤,
청산은 겹겹이 높이 솟아 담장이어라
갈은 동문 말고도 계곡에는 아홉 절경마다 이름을 붙인 구곡이 등장한다. 미처 찾지 못했지만 갈천정, 강선대, 옥류벽, 금병, 구암, 고송유수제, 철학동천, 선국암 등 멋진 이름을 붙인 구곡들이 흩어져 있다. 계곡이 얼마나 절경인지는 구곡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구곡의 이름엔 하나같이 장수의 상징인 학과 거북, 신선이나 신선들의 놀이인 바둑에 관련된 이름이 들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갈은 구곡은 학자나 선비들의 은신처로도 이름이 높다. 제 7곡인 고송유수제에는 은둔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한말 국어학자인 이능화의 부친인 이원극과 벽초 홍명희의 조부인 흥승목 의 이름도 들어 있다. 그리고 구한말 갈레 신부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행들이 쑥과 나물을 뜯느라 분주하다
갈은 동문에서부터 9곡까지는 구비구비 절경으로 수놓고 있다. 울창한 수목에 가려진 계곡이 나뭇가지 틈새로 희끗희끗 암반을 드러낸다. 암반을 매끄럽게 스치며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귓속을 쨍쨍하게 울렸다.
갈은 동문을 조금 벗어난 밭둑에는 속리산 국립공원 사무소장의 명의로 된 경고판이 서있다. 이 일대가 멸종위기 식물 2급인 망개나무의 자생지라는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흔한 망개나무가 이곳에서는 멸종위기 식물이 되었다니 보나마나 산꾼들의 손을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산길가 묵정밭도 황량한 모습이다. 주인이 버리고 떠난 밭은 잡풀이 헝클어지고 쑥과 취나물도 지천이었다. 희희낙락 나물을 뜯는 여자들의 웃음에 섞여 오지 마을의 서글픈 현실이 떠올랐다.
허기진 살림 앞에서 절경인들 무슨 대수랴, 자연은 절경을 빚어냈지만 오지 마을 사람들은 생계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지 오래다. 자연이 빚어 만든 절경을 되레 외지인들이 찾아와 오붓이 즐기고 있으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으랴,
그래도 도시락을 까먹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나물을 뜯는 여자들을 뒤로 하고 몇 명이 계곡 길을 타고 올라 도시락 펼쳐 놓을 자리를 찾았다. 계곡의 바닥은 거대한 암반 투성이다. 그늘이 내려깔린 암반은 일행들이 모두 둘러앉아도 될 만큼 크고 넓었다. 각자 암반위에 집에서 싸들고 온 도시락을 펼쳐 놓았다.
도시락 꽃밭이 따로 없다. 두릅과 머위, 돌나물, 연밥, 오미자, 청포도들이 암반위에서 채마밭처럼 되살아났다. 일행의 웃음소리에 뒤섞여 반찬은 특유의 맛과 향기를 뿜어댔다. 흐드러진 꽃으로 눈을 씻고 맑은 물소리에 귀를 적시면서 맛에 취하다 보니 저 멀리에서 꽃잎 몇 장이 살포시 날아와 눈발처럼 흩날린다.
그나마 여기서 마음껏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산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탓이다. 여기가 끝인가 싶었는데 계곡 건너편 호젓한 산길로 산객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지나갔다.
온몸이 나른해질 무렵, 무작정 계곡 건너편 산길을 타고 올랐다. 풀들이 치솟은 묵정밭에는 복사꽃과 조팝나무꽃들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산딸기꽃과 병꽃도 있고 붓꽃도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복숭아밭 입구를 막고 있는 녹슨 철조망
쑥을 뜯는 마눌님
그러나 더 이상 산행은 접어야 했다. 희고 고운 연분홍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밭 주변으론 철조망이 처져있고 복숭아밭 속으로 훤히 뚫린 길에는 녹슨 철문이 입구를 굳게 닫아 걸고 있었다. 그렇다고 철문을 타고 넘어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현듯 복숭아 밭 너머에 있을 세상이 궁금했다. 그곳에도 별천지가 존재할까. 도연명이 "도화원기"에서 말한 무릉도원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한 어부가 물결에 떠밀려 내려오는 복사꽃을 따라 올라가다 만난 도원경이 무릉도원이다. 그러나 도원경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과 동경의 세계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별천지는 이 세상에 없는 듯하다. 실제로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누군들 그것을 찾지 못할까.
우리네 인생도 늘 저랬으면
조팝나무꽃을 뒤로 하고 다정하게 걷는 길이 즐거워 보인다
복숭아밭 저 너머에 있을 이상세계는 이제 상상 속에나 남겨둔 일이다. 복숭아밭을 머리맡에 남겨 두고 내려오는 길에 계곡의 지류에서 탁족을 즐겼다. 물은 뼛속까지 차고 시리다. 지금 산속은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들이 절정이지만 골짝의 물은 아직도 겨울의 냉기를 품고 있다. 단 몇 분 동안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도 발등이 깨질 듯 저려온다.
탁족을 즐기면서도 선국암을 미처 찾지 못한 것이 후회막심하다. 선국암은 이 계곡의 마지막인 제 9곡의 절경에 속한다. 암반위에 바둑판을 그어놓고 바둑알을 담는 홈까지 파놓고 신선 놀음을 즐겼다는 선국암, 얼마나 바둑에 몰두해 있었으면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것도 잊고 그 다음 날 바둑을 두려고 다시 와 보니 바둑알들이 바위틈을 뚫고 꽃으로 피어났다는 꿈결 같은 싯구는 안빈낙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엿보게 한다.
옥류봉 산마루에 해가 저물어
바둑을 끝내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네
다음날 아침 생각이 나 다시 찾으니
바둑알 알알이 바위위에 꽃이 되어 피어있네
갈론 마을을 향해 내려온 길에서 드문드문 바위틈에서 피어난 꽃들을 만났다. 새하얀 꽃들이 바둑알처럼 눈부시다. 너울거리는 꽃그늘 속으로 갈론 마을의 풍경이 서서히 눈속에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