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방과 백이문 (3)
-꽝!
육십년 전 신도방이 처음으로 둥지를 틀 때, 태호의 가장 이름 높은 장인(匠人) 노문덕(盧門?)이 만들어 바쳤다는 유서 깊은 석상이 산산조각 났다.
여의주를 문 용은 꼬리만 남긴 채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방주(幇主)가 가장 아끼는 석상이 부서져 내리고 있음에도 신도방의 제일모사(第一謀士) 백리준(百里俊)은 그냥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날쌔고 용맹하기로 이름난 수십 명의 무인들 역시 고개만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펑!
이번에는 정원의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부러져나갔다. 그것 역시 방주가 가장 소중히 가꿔 온 나무였지만,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소동의 주인공이 바로 신도방주 임철군(林鐵君) 본인이었던 것이다.
“상방(上方)의 모든 무사들을 다 불러들여! 신도단(神刀團), 철마대(鐵馬隊), 호위단(護衛團) 남김없이 불러들여! 전쟁이다!”
방주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대며 지금의 신도방을 있게 한 가장 큰 힘이자, 자신의 성명절기(盛名絶技)인 벽력신장(霹靂神掌)을 연이어 쏟아 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무사들 사이로 거센 장력이 휘몰아쳤다. 흥분이 가라앉으면 분명 후회할, 깨어져서는 안 될 귀중한 것들이 또 다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하들을 향해 그 무시무시한 장력을 날리진 않는다는 정도였다.
백리준은 그런 방주의 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헉헉!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임철군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방주님.”
백리준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하라고? 방금 진정하라고 했나?”
평소 수하들 앞에서 만큼은 백리준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임철군이었다. 그만큼 지금 화가 나 있다는 소리였다.
“저걸 봐, 저걸 보라고!”
방주가 가리키는 곳에는 시체가 한 구 누워 있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온 얼굴을 시커멓게 덮은 채 흉측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바로 한선의 시체였다.
한선은 임철군의 의동생이었다.
비록 속가(俗家)였지만, 화산의 제자인 한선이 이곳 신도방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바로 임철군과의 그러한 관계 때문이었다.
하촌(下村)의 세력다툼에 백이문이 개입했다는 소리에, 바람이나 쐬라 보냈던 한선이었다.
한선이라면, 간단하게 해결하고 돌아올 거라 당연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한선이 두 눈이 휑하니 빠진 채, 끔찍한 몰골로 돌아왔다.
한선의 시체를 보자, 방주의 발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모두들 평소 방주와 한선 사이의 깊은 우애(友愛)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터라 감히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더러운 백이문 놈들!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리겠어!”
방주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출동 준비하라는데 뭣하고 있어? 다 불러 모아!”
“안됩니다.”
백리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뭣?”
“침착하셔야 합니다.”
“네놈이 감히.”
방주가 백리준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방주의 광기(狂氣)에도 불구하고 백리준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모두들 두 눈을 감았다. 아무리 방주의 신임(信任)을 받고 있는 백리준이라지만, 지금 방주는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방주님!”
백리준이 나지막이 방주를 불렀다.
그것은 고함을 질러 방주를 말리는 것이나, 무작정 고개를 숙인 채 방주의 흥분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방법에 비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방주님!”
다시 한 번 백리준의 나지막하고도 준엄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흔들리던 방주의 눈빛이 차분하게 자리 잡았다.
방주의 손이 천천히 내려졌다.
“미안하네. 내가 잠시 흥분했네.”
방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흥분과 분노가 사라졌다. 방주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방주의 저런 점 때문에 강소성(江蘇省) 제일의 귀재(鬼才)라 불리던 백리준이 신도방을 태호 제일의 방파로 만드는 선두에 기꺼이 섰던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힌 방주가 태사의에 앉았다. 어쩌면 이런 상황까지 예측한 흥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냥 둘 수는 없네.”
방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우리를 건드린 대가를 열배 백배 돌려줘야겠지요. 하지만 흥분만 앞세워 대책 없이 움직였다가는 저들의 함정에 빠져들게 될 겁니다.”
백리준의 말에 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게다가, 이번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
“네, 우선 백이문에서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은 전면전(全面戰)을 각오했다는 것인데, 그들에게 심어져 있는 우리 측 비선(秘線)으로부터 그러한 움직임을 전혀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방주가 신음성을 터뜨렸다.
백리준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백이문이 전쟁을 일으키려는데, 백리준이 미리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의 백리준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신도방은 백이문에게 먹혔을 것이다.
“게다가, 방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한대협의 무공은 가히 절정고수라 할 수 있습니다. 백이문내에서도 한대협을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은 한정이 되어 있지요.”
방주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번에 한대협께서 당하신 괴이한 수법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과연 그랬다.
임철군 역시 한선의 시체를 면밀히 살펴보았지만, 이토록 잔인한 수를 사용하는 자가 백이문에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번일은 신중히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백리준의 말에 방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네.”
말을 마친 방주는 안으로 들어갔다.
백리준은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를 생각하다가, 우선 객잔에서 데려온 목격자들부터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백리준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떤 위기가 닥쳐온다 해도 자신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위선자(僞善者)!”
멀리서 신도방주 임철군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녀가 말했다.
“전부 거짓말이야! 저 사람은 차가운 피를 가진 냉혈한일 뿐이야. 모두들 속고 있는 거야.”
소녀는 더욱 격분된 어조로 말했다.
“비영,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지?”
자신의 뜻에 동조해주기를 바라며 소녀가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나 비영이라 불린 사내는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방주님은 아가씨를 아끼고 계십니다.”
“그만!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소녀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국수집에서 소동을 피웠던 이 소녀가 바로 신도방주의 무남독녀(無男獨女) 임화경(林華境)이었다.
원래 그녀에게는 위로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어린 시절 병을 앓아 죽고 말았다. 그 슬픔에 그녀의 어머니 역시 병을 얻었고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
그때가 화경의 나이 일곱이었다.
오빠 병수발에 엄마를 뺏기고, 신도방에 아빠를 뺏긴 채 그녀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경은 엄마와 오빠가 너무나 미웠다.
먼저 죽어버린 오빠도 미웠고, 엄마는 더욱 미웠다. 오빠가 죽자 엄마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자신을 봐서라도 용기를 내고 힘을 냈어야 했다고 화경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엄마는 자식은 오직 오빠뿐이었다는 그릇된 오해만을 그녀에게 남긴 채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졸지에 아들과 아내를 잃은 슬픔을 오로지 일에 열중하는 것으로 잊으려 한 아버지도 미웠다.
증오(憎惡)와 외로움만이 남았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호위무사인 비영은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 비영의 나이 열아홉, 화경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비영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삐뚤어지기만 하는 화경을 위해 나름대로 온갖 힘을 다 쏟았지만,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열아홉의 비영, 어린 소녀의 결핍된 사랑을 채워줄 만한 나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단지 그 여자만 사랑해!”
말을 마친 화경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 모습에 비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화경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간, 화경의 아버지인 임철군은 한 발 앞서 화경이 가고자하는 그곳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모든 호위(護衛)를 물리고, 이십 년을 함께해 온 자신의 호위무사인 자단(姿丹)만을 데리고 하촌과 상촌의 경계부근에 있는 국수집에 왔던 것이다.
천막에 들어서자, 몇 몇 장사치들이 국수를 먹고 있었다.
철군이 한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철군을 보자 여인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저 담담한 표정이었다.
“국수 한 그릇 주시오.”
철군의 말에 여인은 말없이 국수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철군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호위무사 자단이 철군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자단이 철군을 호위한지도 벌써 이십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주군(主君)이라는 감정보다는 혈육(血肉)의 정이 느껴졌다. 자단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십 오년 전, 백이문과의 싸움이 한참일 때였다. 자단이 잠시 방심한 사이, 철군이 암습(暗襲)을 당해 크게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철군은 닷새가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그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 옆을 지키던 자단이었다.
그날 밤, 자단이 검을 뽑아 들었다. 방주를 지켜보던 자단이 결국 괴로움에 견디지 못하고 죽음으로 그 책임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것이다.
방주가 기적처럼 손을 내밀어 자단의 손을 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내밀어진 철군의 손.
그 따뜻함을 자단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자단은 하나의 은혜를 받으면 열 개를 돌려주는 사내였고, 그 열개조차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내였다. 아마, 앞으로 찾아 올 방주의 위기(危機)는 자단의 시체 너머에 있을 것이다.
그 방주가 새로이 빠져든 여인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부인이 죽은 지 십년이 지났으니 이제 새 출발 할 때도 되었다. 그동안 신도방을 키우느라 새 가정이란 꿈도 꾸지 못한 임철군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지나치다 보게 된 국수 파는 여인에게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신도방주라는 자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방주는 가끔 이곳에 와 말없이 국수만 먹고 갔다. 여인도 그러한 방주의 마음을 알 법도 한데, 단 한번도 다른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오늘같이 심란한 날이면, 방주는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자단은 그러한 방주의 뒤늦은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때, 두 사내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명문가의 자제처럼 보이는 청년과, 표사복장을 한 청년이었다. 어울리지는 않는 복장의 만남이었지만, 두 청년 모두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국수 두 그릇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이 근처에서 어디 묵을만한 곳이 있나요?”
두 사내 중 표사복장의 사내가 여인에게 물었다.
“음, 글쎄요?”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어제 이곳을 찾은 청년이 생각났다.
“아, 저 아래로 좀 내려가시면 영춘객잔이라고 있어요.”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왕이면 그 마음씨 좋은 청년이 일하는 곳을 소개해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내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 훌훌 마시고는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꽈당!
그러나 급하게 나가려다 표사차림의 사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던 이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얏!”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합니….”
-짝!
표사차림의 사내 뺨에 작고 귀여운 빨간 손자국이 생겼다.
자신과 부딪혔던 어린 소녀가 사정없이 자신의 뺨을 때렸던 것이다.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불시에 뺨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표사차림의 청년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실수였잖소, 게다가 사과까지 했는데.”
그 말에 소녀가 지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미안해요’한마디만 하면 되겠군.”
표사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경우와는 다르지요.”
“흥! 내겐 같아. 사내대장부라면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지.”
깜찍한 얼굴에서 끔찍한 말들이 이어졌다.
소녀는 바로 화경이었다.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가 표사사내를 잡아끌었다.
그냥 이만하고 나가자는 표정이었다.
표사사내도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했지만, 바쁜 일이 우선이었는지 그냥 참고 나가려고 했다.
화경이 두 팔을 벌려 그들 앞을 가로 막았다.
“이대로는 못가!”
기가 막히는 표정으로 표사사내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자, 그를 제지하며 뒤에 있던 다른 사내가 말했다.
“그럼 어찌하면 우릴 보내 주시겠소?”
“이 집 국수 먹었지?”
“그렇소.”
“맛있었어?”
이 소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두 사내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맛있었소. 됐소? 이제 우린 가겠소.”
“안돼! 내가 먹어보고, 맛있으면 보내주겠어.”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이오?”
두 사내가 나가려고 하자 화경이 소리쳤다.
“비영!”
비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두 사내를 막아섰다.
그때였다.
“이게 도대체 뭔 짓이냐!”
임철군이 그 모습을 내내 인상을 쓰며 보고 있다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화경은 아버지를 보았음에도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철군이 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흥! 역시 여기 와 계셨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임철군은 이런 일이 한 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음에 이 여인을 숱하게 괴롭혔으리라.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임철군이었다.
“제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마세요.”
-짝!
철군이 화경의 뺨을 때렸다.
화경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말했다.
“그래요, 전 필요 없으시겠죠. 저 여자랑 잘 사세요.”
눈물을 뿌리며 화경이 달려 나갔다.
철군을 바라보는 비영의 얼굴에 송구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철군은 비영에게 별다른 책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통 성격으로는 화경의 비위를 맞추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런 철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볍게 인사를 건넨 비영이 화경의 뒤를 따라 황급히 나섰다.
“미안하오.”
철군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두 청년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급히 서둔 저희잘못도 큽니다. 그럼 저흰 바빠서 이만.”
두 청년이 나가자 철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이번의 사과는 여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가까운 두 여자에게 모두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철군이었다.
자단이 방주의 몫까지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임철군이 이런저런 시름에다 자식걱정까지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그때, 백이문주(百二門主) 공야무(公冶無)는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촌 뒷골목 싸움에 신도방이 끼어들었다는 소리에, 적당히 압력도 가할 겸 기세(氣勢)도 눌러놓을 겸해서, 어지간한 큰 일이 아니면 안 쓰는, 그야말로 아끼고 아끼는 살귀삼웅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피떡이 되어서 돌아왔다.
뭐, 싸움을 하다보면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었다. 백이문주 공야무는 한 두 번의 패배(敗北)로 수하들을 모질게 몰아세우는 속 좁은 주인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팔이 잘렸다든지, 내장을 상했다든지 하는 부상을 입고 돌아온 게 아니라, 그야말로 얻어터지고 돌아왔다는데 있었다.
얼굴이 잘려 나간 게 아니라 퉁퉁 부어올랐다.
내장이 상한 게 아니라 온 몸이 그저 멍 투성이였다.
한 마디로 신나게 두들겨 맞고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셋이 입을 모아 죽여 달라고 복창을 하고 있다.
이러니 공야무가 어찌 황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권왕(拳王)이라도 만난 게냐?”
공야무의 힐책(詰責)에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랬다면 돌아와서 할 말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셋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어져 열리지 않았고, 고개는 버드나무 잎처럼 숙여졌다.
“에잇, 못난 놈들! 모두 물러나랏!”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셋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문주 옆에 서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스물 두셋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인상이 간사(奸邪)해 보였다. 게다가 눈가가 어둡고, 목소리 또한 착 가라앉아 있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공야무의 아들이자, 백이문의 소문주(小門主)인 공야패(公冶狽)였다. 어려서부터, 무공보다는 잔머리 굴리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공야패는 꾸준히 그 성정을 발달시켜 지금은 백이문의 소문주 자리보다는 머리 쓰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중이었다.
“신도방! 이놈들!”
공야무가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삼웅의 말에 의하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신도방 쪽에서 새롭게 고수를 영입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야무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우릴 무시한 게야. 날 희롱하려고 삼웅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 것이야.”
“태호를 독식(獨食)하려는 더러운 본색(本色)을 드러낸 것이지요.”
“안 될 말이지!”
신도방이 육십 년 역사라면, 백이문은 구십 년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태호에 뿌리를 내린 것도 백이문이 먼저였다.
강자의 아량으로 굴러들어 온 돌을 방치했더니, 어느새 턱밑까지 파고 들어와 삽질을 하고 있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백이문이 아니었다.
백이문이 이 태호에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줄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한낱 뜨내기들의 삽질에 흔들릴 백이문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백이문에게 있어 신도방은 언제나 뜨내기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이다.
“삼웅을 저 지경으로 만든 정도면, 보통 고수가 아닙니다.”
공야패의 말에 공야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네가?”
공야패의 말에 공야무가 짐짓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 백마단(百魔團)을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백마단을?”
“네.”
“진정 전쟁이라도 할 작정이냐?”
백마단이란 말에 공야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기습(奇習)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공야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라면?’
“좋다. 백마단을 네게 맡기겠다.”
“감사합니다.”
사실 백마단은 백마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지만, 백 명의 마인(魔人)이 모인 그런 무시무시한 조직은 아니었다.
백이문의 무사들 중, 성격이 잔인하고 난폭한 이들을 따로 뽑아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를 백마단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다. 처음 만들었을 때 숫자가 백 명이었는데, 그때는 백이문이 가장 잘 나갈 때였고, 현재는 사십여 명 정도 남아있었다.
신도방 쪽에서는 이 조직을 가리켜 백견단(白犬團)이라 불렀다.
신도방에서 어떻게 부르던, 현재 남아있는 사십 여명의 백마단원들은 독종(毒種)중의 독종이라 불릴 만 했고, 이제 그 독종들을 머리 굴리는데 이골이 난 공야패가 맡게 된 것이다.
“조심해야한다. 네가 곧 백이문이란 것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방이가 곧 돌아 올 것이라 기별이 왔다.”
공야무의 표정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방이가?”
속내와는 다른 위선적인 반가움이 미소와 함께 퍼졌다.
공야방(公冶方)은 공야패의 동생이었다.
무공을 연마하러 무당(武當)의 속가(俗家)제자로 들어 간 동생이었다.
아버지 공야무 역시 무인출신이라 그런 동생을 내심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한 공야패의 야비한 머릿속이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담린은 제갈혜에 대한 걱정으로 내심 초조했지만, 남궁소천의 얼굴만 보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날벼락을 맞은 지 한 시진이나 지났건만, 그의 볼에 남은 손바닥 자국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국수집에 들렀던 두 청년은 바로 담린과 남궁소천이었다.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소천인데다, 남궁가문의 장자(長子)인 그가 이렇게 뺨을 맞아 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소천은 아직도 그 버릇없는 여자를 떠올리며, 다음에 걸리면 크게 혼을 내주겠다고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작정 객잔에서 기다린다고, 그가 나타날까?”
담린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할 수 없지 않은가? 무작정 찾으러 돌아다닐 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그가 태호로 오라고 했으니 알아서 찾아올 것이네.”
“흠, 그래도….”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네. 이런 일일수록 침착해야 해.”
담린은 소천의 저러한 면이 명문의 핏줄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갑의 나이임에도 소천은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침착했고, 세 배는 더 현명했다.
“일단 기다리면서, 혜아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도록 노력해보세.”
전 같았으면, 열등감에 괜한 반발심(反撥心)이 들었겠지만, 어젯밤 대화로 남궁소천에 대한 감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물론 소천이 단지 제갈혜와 친구사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 크게 작용했지만, 어쨌든 전보다 한결 편한 마음으로 소천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 아까 소개받은 영춘객잔이 저기 보이네.”
소천의 말에 담린이 그곳을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객잔 주위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무슨 구경이라도 난 것 같았다.
“싸움이라도 난걸까?”
담린의 말에 소천이 발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어서 가보세.”
둘이 영춘객잔 앞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제는 객잔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서진 내부와, 넋을 놓고 주방 앞에 퍼질러진 숙수로 보이는 중년인, 구석에 앉아 담배만 뻐끔거리는 늙은이, 부서진 탁자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꼬마 점소이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무림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라도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담린과 소천이야 따른 객잔을 찾으면 되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끌고 객잔 앞으로 달려왔다. 수레에는 몇 개의 술통과,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퉁퉁 부은 남자가 실려 있었다.
수레를 끌고 온 사내를 보자, 울고 있던 점소이 꼬마 녀석이 십 년 전에 죽은 부모가 다시 돌아 온 것 같은 얼굴로 달려 나왔다.
“사부님!”
돌아서 가려던 담린과 소천은 사부님이란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어린 점소이와 저 남자사이가 사제지간(師弟之間)이라니?
자연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사내는 우이였고, 꼬마는 아평이었다
담린과 소천은 우이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눈앞의 이 사내가 자신들의 대선배이자, 소향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 사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반면 우이는 객잔에서 신입대원과 백호단과의 싸움이 났을 때 그들을 얼핏 보았지만, 지금 구경꾼들 속에 묻힌 그들을 알아볼 상황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우이가 다급히 물었고 아평이 울면서 그간 사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울지 말고 차근차근 말해 보거라.”
“흑흑, 어떤 할아버지와, 흑흑, 흑오파 사람들이랑, 그런데, 크흑, 예쁜 누나한테 흑오가, 흑흑….”
한참을 짜며 말한 아평의 말을 요약하자면, 어떤 노인과 아름다운 여인이 객잔에 왔는데, 곧 이어 들어온 흑오파 사람들과 싸움이 났고, 노인이 흑오파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다는 말이었다.
노인과 예쁜 누나란 말에 담린과 남궁소천의 귀가 번쩍 뜨였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담백과 제갈혜가 틀림없어 보였던 것이다.
객잔을 둘러보니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엉망이 되어 있었고,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가 음울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럼 시체는 다 어디에 있느냐?”
“신도방에서 나와 가져갔어요.”
“신도방?”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백이문과 함께 태호의 가장 큰 방파라고 했던가? 우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이번에 죽은 사람들 중에 신도방 무사도 끼어있었다고 했어요.”
“근데, 주인어르신은? 그리고 아연은? 복대는?”
“신도방에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형님이랑, 연이를 데려가 버렸네.”
어느 틈에 나온 달오가 말했다.
“네? 아연은 왜요?”
우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흑, 원래 저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연이 누나가 제 대신에 끌려갔어요. 흑흑!”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시체를 챙겨 가면서 목격자로 영춘과 아평을 데려가려 했고, 아연이 아평 대신 나섰던 것이 틀림없었다.
“복대형은, 신도방 무사들에게 맞아서 뒷방에 누워있어요. 주인나리랑 아연누나 대신 가겠다고 나서다가 두드려 맞았어요. 흑흑.”
“많이 다치진 않았네. 가벼운 타박상(打撲傷)정도네. 약을 발라 뒀으니 며칠 쉬면 괜찮을 걸세. 그래도 대단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줌을 지려대던 놈이, 제가 대신 가겠다며 악을 쓰며 달려드는데.”
‘대견한 놈.’
며칠 사이에 복대도 많이 변했다.
객잔 안에서 이 노인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죄가 없으니, 곧 풀어줄 것이네.”
물론 그것이 당연한 이치(理致)겠지만, 문제는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무림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에 있었다.
우이가 객잔에 온 이후, 몇 차례 일어난 소동에도 언제나 차분함을 잃지 않는 이 노인이었다. 이번 역시 아연이 붙잡혀 간 상황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이에서 오는 연륜(年輪)의 차이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이 노인에 비해 우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 노인이 우이가 끌고 온 수레에 실린,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보기기 조차 힘든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내는 바로 종대였다.
우이는 두들겨 맞다가 결국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정신을 잃은 그를, 너무 심하게 손을 썼다는 미안함에 그냥 두고 올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말씀드리죠. 일단 제 방에 좀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어쩌다 이 꼴이 됐누? 걸레가 다 됐네 그려.”
이 노인이 혀를 차며 수레를 끌었다.
우이가 아평에게 물었다.
“신도방이 어디에 있지?”
아평은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구경꾼 사이에 있던 두 사내, 담린과 남궁소천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