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panasati sutta(出入息念經)
Mindfulness of Breathing 호흡(들숨날숨)에 대한 사띠
[15]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 가면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 가면 사념처를 성취한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계발하고 닦아 가면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들을 성취한다.
칠각지를 계발하고 닦아 가면 순수 지혜(true knowledge, vijja)와 해탈을 성취한다.”
우리는 경전 속에서 사념처 수행을 찾을 수 있고
사념처는 평온하고 지혜로운 명상 상태인 선정 수행을 통해 성취되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어떤 수행이론에서 ‘선정(명상 단계)을 경험하면서
사념처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른 견해이다.
붓다는 한 가지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그것은 ‘사마타’ 또는 ‘평온함’ 또는 ‘사마디’라고 부를 수 있는
“평온-지혜 명상”(tranquil ‘wisdom meditation)이다.
[16]
그리고 어떻게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계발하고 닦아야, 큰 결실과 이익이 있겠는가?
[17]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는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전면(in front of him)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숲이나 나무 아래 또는 빈 오두막에 간다’는 문구는 수행의 장애가 거의 없는 조용한 장소에 간다는 것이다.
적당한 장소는 거리의 소음, 사람, 동물과 떨어져 있어 크고 끊임없는 음악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다.
붓다가 살던 시절에 대부분 사람들은 땅바닥 위에 앉아 명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의자나 소파에 앉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부좌를 하고 상체를 곧바로 세워 앉는다”의 구절처럼
바닥에 앉는다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일 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바닥에 앉아서 하고 싶을 때 방석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불편하고 고통스런 감각을 가지고 앉는 것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바닥에 앉는다고 마법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마법은 될 수 있는 한 편안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만약 바닥에 앉는 것이 매우 고통스런 경험이 된다면 의자나 등받이 없는 앉음대 위에 앉아도 좋다.
그러나 명상자가 의자에 앉을 경우 매우 유의할 점이 있다.
의자에 기대지 말고 앉아야 하는 것이다.
기대는 것은 졸음이 오기 쉽고 그것은 명상에 좋지 앉다!
‘상체를 곧바로 세운다’는 경직되거나 불편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을 똑바로 잘 세워 앉는 것을 말한다.
똑바로 등을 잘 세우는 것은 척추 뼈가 위 아래로 쌓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야 등에서 에너지가 위 아래로 방해 없이 잘 흐를 수 있다.
기대는 것은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막고 졸음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제발 어떤 것에 등을 기대지 말기 바란다.
처음 수행을 할 때 등을 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도 하고 근육들이 반항하고 불평하는 것 같다.
그러나,인내심과 참을성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사용하지 않아 온 근육들이 점차 적응되고 강해질 것이다.
또 앉기 수행을 할 때 어쨌든지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꿈틀거리지 말고 손을 문지르거나 긁으려고 움직이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앉기 수행이 끝날 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말기 바란다.
움직임은 수행의 연속성을 깨고 수행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어떤 명상 지도자들은 ‘사띠’를 하고 있다면 움직여도 좋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배우는 이들이 진정으로 사띠한다면 마음과 싫어하는 감정을 지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을 이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움직여야 할 이유는 없다.
사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lovingly-accept)을 말한다.
조절하거나 저항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띠하는 것은 열려있고 지금 이 순간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다.
면밀히 조사하는 중에 명상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사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는 움직이려는 욕망에 굴복하여 그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을 시작하고서 나서 수행의 미혹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고요하게 머무르고평온하게 유지해야한다.
붓다의 모습처럼 고요하게 앉아있는 것이 최선이다.
명상 중에 허용할만한 움직임은 오직 등이 굽거나 구부정하게 되기 시작할 때
너무 자주가 아닌 조건에서 등을 똑바로 하는 것이다.
“전면에 사띠를 확립한다.”라는 말은 모든 세속적인 일과 감각적 쾌락에 휩쓸림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부드럽게 눈을 감고, 미혹시키는 소리, 냄새, 맛, 감각,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단순하게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명상의 대상으로 주의를 돌린다.
“확고한 사띠를 가지고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는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 수행 방법을 말하고 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은 들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고(being aware)
날숨을 쉬고 있을 때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알아차림(awareness)을 열어놓고 가능한 호흡을 확고하게 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머리에서 긴장을 푸는 것이다.
(이것은 잠시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18]
“길게 들이쉴 때 ‘길게 들이 쉰다’고 이해하고(understand, pajaanaati)
길게 내쉴 때, ‘길게 내쉰다’고 이해한다.
짧게 들이쉴 때 ‘짧게 들 이쉰다’고 이해하고
짧게 내쉴 때 ‘짧게 내 쉰다’고 이해한다.”
“이해한다”라는 굵게 강조한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직 호흡에만 강한 주시를 가지고
집중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지금 이 순간에 호흡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단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전부이다!
호흡이 길 때 오직 알고 있, 호흡이 짧을 때 오직 알고 있다.
결코 호흡을 조절하지 말고 대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을 오직 이해하고 있는 것(understanding)이다.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면 ‘잘못된 집중’으로 머리에 두통을 키울 것이다.명상의 대상을 꽉 붙잡고 마음을 강제로‘집중’하거나 수행의 미혹들을 쫓아내려고 할 때마다
매우 경직되고 고통스런 긴장이 머리에서 자랄 것이다.
또 미혹시키는 생각과 느낌을 거부하면서 앉기 수행을 조절하려 하거나
명상의 대상으로 빨리 되돌아가려고 서두를 때 머리에 긴장과 경직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집중’수행방법 뿐만 아니라 ‘순간집중’ 수행에서도 일어난다.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감각의 한 가운데에 주의를 두고 감각의 진정한 본성을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다른 것을 일어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이들에게 강한 고통을 키우게 하고 오히려 이것은 수행의 미혹이 되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명상은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고통이 사라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그런 긴장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이러한 경직되고 완강한 마음은 사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많은 용기와 참을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직된 마음을 키우고 혐오가 저절로 생기게 된다.
그런 경직된 마음은 무상(아니짜), 고(둑카), 무아(아나따)를 알아차릴 수 없다.
결국 명상하지 않을 때조차 이러한 억누름은 사람의 성격을 경직되게 하고 그래서 정말 문제를 만든다.
그런 마음은 비평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성향이 있고 경직된 인성을 계발하게 된다.
다른 형태의 명상을 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자비관 안거수행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별로 좋은 행동과 말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이 명상법이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인가요?”라고 묻는다.
만약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왜 나의 생각을 조화롭게 해 줄만한 또 다른 형태의 명상 수행법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쨌거나 이런 혐오는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가르쳐 온 “집중”을 수행해서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붓다가 가르친 방법은 결코 어떤 것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붓다의 방법은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마다 먼저 고통의 감각에 마음이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감각에 대한 어떤 생각도 놓아버리고 마음을 연다.
그 감각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어떤 정신적 저항이나 혐오 없이 그 감각을 그 자체로 놔둔다.
이것을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마라. 이 고통이 있어도 괜찮다.”
그 다음에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짐을 느끼고...
그리고 나서 명상의 대상 즉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감각이나 고통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각은 더 커지고 강렬해진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느낀다.
‘감각에 대한 이러한 생각’
‘내적인 언어화’
‘감각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고통스런 감각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이것은 그 감각에 휩쓸리게 되어 조절하려는 것이다.
감각과 투쟁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인 담마(Dhamma)와 싸우는 것이다.
투쟁하고 조절하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마음이 경직될 때마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감각을 개인적으로 여기는 것도 담마와 투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것은 고통을 악화시키고 그 결과 더 심하게 다친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지금 이 순간을 자애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아-동일시’나 ‘생각 또는 내적인 언어화’가 없어야 하고 “나는 그렇다”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사마디),
평정(upekkha),
선명한 알아차림(삼빠잔냐 full awareness)과
사띠(mindfulness)를 얻는 방법이다.
붓다는 명상중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할 세 가지 행위를 가르쳤다. 그것은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라.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라.”이다.
이 단순한 설명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한다.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기”란 앉아서 명상할 때 원하는 현상이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마음을 활짝 열고 현재 무엇이 일어나든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게 놔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좋은 줄임말은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로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러워져라.”를 나타낸다.
무엇이 일어나든지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말고 부드럽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되어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라.
이것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기”이다.
“지금 함께 있는 것을 사랑하기”란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집착을 보고 놓아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한 체험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고통과 슬픔을 보고 자애롭게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을 놓아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집착을 놓아버리고 집착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온 몸(whole body)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sikkhati)
‘온 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경전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명상자가 들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날숨에서 호흡이 시작하고 끝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이때 호흡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거나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과도한 집중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행해지고 있는 호흡을 단지 아는 것이다.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져서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지 않으면서 호흡이 어떻게 행해지고 있는지 항상 알고 있다.
오직 호흡과 알아차림이 자연스런 과정 속에 있게 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몸의 작용(신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숨을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 간단한 구절은 명상 지침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의식이 일어날 때마다 머리에서 긴장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그 긴장을 들숨과 날숨을 쉬는 동안 놓아버리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나서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평온해짐을 느낀다.
마음이 호흡으로부터 달아난 것을 아는 매 순간마다 미혹과 긴장을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푼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되고, 고요해지고 맑아짐을 느낀다.
다음으로 마음을 호흡으로 부드럽게 되돌린다.
호흡을 들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호흡을 내쉴 때, 머리와 마음에 있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 오직 그 생각을 놓아버려라.
생각 속에서 중립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생각하지 말아라.
그 생각을 오직 부드럽게 놓아버릴 뿐이다.
수행의 미혹이 어떤 감각이라면 먼저 마음을 열고 그 감각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린다.
그리고 명상자의 주의를 호흡으로 돌리기 전에 마음이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한다.
이렇게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게 하고 머리에서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미묘한 ‘자아-동일시’를 실제로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아-동일시는 일어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긴장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태어남(rebirth)을 일으키는 무지(ignorance)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을 열심히 따르는 도중에는 마음에 ‘표시’나 ‘니미따(nimitta)’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즉 ‘집중명상’을 수행할 때 마음에 생기는 빛이나 마음이 만든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평온해진다.
강한 집중으로 억지로 명상의 대상에 마음을 머무르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집중은 머리에서 긴장과 고통을 생기게 한다.
지금 말하는 명상지침으로 모든 현상의 진실한 본성인
무상(아니짜), 고(둑카, 불만족), 무아(아나따)를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들이쉬는 숨을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relaxation)을 알아차린다.
또한 내쉬는 숨과 동시에 머리와 마음의 긴장이 풀려 있음을 알아차린다.
처음에는 들숨이나 날숨을 놓쳐도 괜찮다.
불필요한 압박을 스스로에게 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수행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쉬운 수행이다.
마음을 계발시키는 단순한 방법이다.
그래서 때때로 들숨이나 날숨을 놓친다면 단지 놓아버리고
다음에 쉬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린다.단순하고 쉽지 않은가?
처음에는 호흡이 매우 빠르고 알아차리기 어렵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계속 수행을 해나가면 명상은 더 쉬워지고 들숨이나 날숨을 자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수행은 점진적인 훈련이다.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압박을 가할 필요는 없다.
명상 속에서 단지 이완되어 있어라.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호흡이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하게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명상자가 호흡에 너무 많이 ‘집중’할 때 일어나고 머리에서 긴장이 충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호흡이 다시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면 ‘집중’에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충분히 평온하지 못한 것이다.
선정(명상의 단계)들은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밀어붙여 강제로 하거나 고정된 마음으로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붓다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의 명상을 가르쳤다.
[19]
‘기쁨(joy)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 이와 같이 그는 수행한다.
이것은 첫 번째 두 선정(명상 단계)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이 단계에 대한 설명은 경전에 여러 번 반복해서 정형화되어 나타난다.[12]
Footnotes(각주)
[12] 예를 들어, 77번째 경인 마하싸꾸루다이 숫따 (Mahasakuludayi Sutta)와 111번째 경전인 아누빠다 숫따(Anupada Sutta)를 보라. 이 두 경전은 맛지마 니까야에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초선과 2선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sensual pleasure)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명상을 시작할 때 먼저 눈을 감는다.
이것은 보는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소리가 마음을 미혹할 때 내가 그 소리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생각하지 말고
소리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하라.
소리가 흘러가도록 놔두어라.
소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라.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껴라.
다시 명상의 대상인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
숨을 들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리고 넓어지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껴라.
숨을 내쉬면서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마음이 열리고 평화로워지며 고요해지는 것을 느껴라.
미혹이 일어나기 전까지 호흡과 함께 머무르며 긴장을 풀고 마음을 이완시켜라.
마음을 호흡에서 달아나게 하는 냄새, 맛, 육체적 감각, 생각, 감각적 쾌락은 이렇게 대처해라.
감각 기관을 통해 생긴 미혹이 흘러가게 놓아버리고 미혹에 대한 정신적 집착을 이완시킨다.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게 한다.
그리고 다시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때때로 감각적 쾌락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말아라.
감각적 쾌락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놓아버려야 함을 기억하라.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고 호흡으로 돌아오라.
‘···불건전(unwholesome)한 상태들에서 벗어났다 ···’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나 일어나는 느낌들을 생각하게 되면 마음은
그 느낌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렇게 느낌에 대해 생각하고 느낌을 조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느낌을 더 크고 강하게 해서 더 큰 고통이 일어나게 한다.
이 정신-물질 과정은 집착에 기인한 5蘊(다섯 무더기)으로 구성된다.
色蘊(육체적인 몸, 물질),
受蘊(정신적/육체적인 느낌),
想蘊(인식, 인지, 산냐),
行蘊(의도, 생각, 자유의지, 상카라),
識薀(의식)이다.
5蘊을 보게 된다면 느낌과 생각이 다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관찰하게 된다.
불행히도 우리는 느낌이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키워왔기 때문에 느낌을 더 크고 강해지게 만든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붓다의 명상법을 수행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오랜 습관을 이해하고 단지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신체적이거나 감정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둘러싼 긴장된 정신적 집착을 놓아버려라.
이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
마음이 넓어짐을 느껴라.
그리고 나서 고요해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
그 다음에 호흡으로 주의를 돌려라.
이럴 때 느낌의 진정한 본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저절로 일어나고 무상하며 변화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고 분노와 슬픔, 공포, 좌절, 의심 등의 느낌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들은 일어났으면 하는 욕망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그 느낌들은 지속될 수 있는 만큼만 머무른다.
이런 느낌을 조절하고 밀어붙여 싸우려 할수록 느낌은 훨씬 더 커지고 격렬해지며 오래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느낌을 조절하고 싶을 때마다 그 감각이나 감정을 개인적인 것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얼마나 고통을 주고 어디에서 왔고, 지금 왜 나를 괴롭히고 있는지 생각한다.
그래서 ‘아! 나는 그 느낌이 싫고 사라지기를 바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느낌에 대한 생각은 그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거부할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의 ‘담마’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고통이나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진리는 바로 그곳에 있다.
어떤 저항, 조절하려는 노력, 생각을 떨치려는 욕망, 느낌에 대한 투쟁은 단지 더 많은 괴로움을 일어나게 한다.
어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을 열고 조절하려는 욕망을 놓아버린다.
느낌이 존재하는 사실을 자애롭게 받아들이고 느낌이 거기에 존재하도록 관용하는 것이다.
저항하거나 밀어붙이지 마라. 부드러워져라.
이것의 줄임말인 DROPS(Don't Resist Or Push. Soften)은
평정(upekkha)의 계발로 이끄는
받아들임(accepting mind)과
열린 마음(open mind)을 가지게 하는 열쇠이다.
아무리 작은 저항과 긴장일지라도 거기에는 집착하려는 자아-동일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른 아침 당신이 일하러 왔을 때 한 친구가 당신에게 다가와 욕을 한다면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날까?
당신은 보통 사람들처럼 화가 나고 싸우고 싶어 그 사람에게 되받아 욕을 할 것이다.
친구가 가버렸을 때 당신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했고 말했는가?
당신의 친구는 무엇을 말했으며 무엇을 말했어야 했는가?
당신은 ‘그렇게 느끼고 말하는 것이 옳고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노의 느낌은 강하고 그 분노에 집착하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잠시 후 다른 일상 활동 속에서 당신의 주의가 흩뜨려진다.
그러나 당신의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욕을 한 그 친구에 대해 불평을 토로할 좋은 기회라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불평과 분노를 토로하고 그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날 하루 당신이 집착한 그 느낌과 생각들이 이따금씩 일어난다.
사실 이런 생각은 녹음테이프에 녹음된 것과 같다.
정확하게 같은 언어와 같은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그 날 하루가 끝나가고 주의가 많이 흩트려져서 당신에게 그런 느낌이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당신은 앉아서 명상할 시간을 갖고 마음을 정화한다.
그러나 명상 중에 무엇이 일어나겠는가?
그것은 바로 분노와 연상되는 생각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느낌과 생각 속에 휩쓸리는 것을 놓아버리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생각들이 느낌을 커지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마음이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상관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연해져라. ‘그대로 놔두어라’
마음을 열고 그런 생각을 둘러싼 정신적 긴장의 매듭을 놓아버려라.
그 느낌에 대한 혐오를 놓아버려라.
마음이 커지고 이완됨을 느껴라.
이제 머리에 생긴 긴장을 풀어라.
마음이 고요해짐을 느껴라.
매우 분명하지 않는가.
이제 호흡으로 부드럽게 돌아가라.
들이쉬는 숨에서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고 항상 마음이 열려있고 커지고 평온해짐을 느껴라.
그런 후에 분노가 다시 일어난다면, 같은 일을 반복해라.
그 생각에 휩쓸리지 말고, 생각 그 자체로 놔두어라.
마음을 열려 있게 하고 정신적인 붙잡음을 이완시켜라.
머리에서 생긴 긴장을 풀어라.
부드럽게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려라.
마음이 분노의 느낌에 아무리 여러 번 되돌아가도 상관하지 말라.
매번 같은 식으로 다루어라.
그 느낌 그 자체로 놔둘 때 그 느낌을 자아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
그래야 느낌에 대한 자아-동일시가 없다.
이것이 느낌에 대한 진정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느낌은 전에 그런 상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무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이 일어날 때 평온과 평화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스럽고 사실적인 괴로움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느낌에 휩쓸리거나 생각하지 않고 느낌 그 자체로 있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정신적 긴장을 풀어 사라지게 할 때 무아의 본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무상, 고, 무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을 체험한다.
계속 마음을 이완시키고 모든 미혹을 놓아버림에 따라 집착은 더 적어지고 약해진다.
마침내 집착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정도가 된다.
이렇게 되면 해방과 기쁨이 마음속에 채워진다.
이러한 집착의 놓아버림은 불건전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명상자가 놓아버리게 될 때 기쁨이 일어나고 상당한 시간동안 그 기쁨이 지속된다.
그 결과 마음은 매우 평온해지고 평화롭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매우 쉽게 머무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해서 행한다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고요해지고 차분해진다.
그때 평정(upekkha)과 조화가 마음에 계발되기 시작한다.
‘···비구는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갖추고
초연함(seclusion)에서 생겨난 기쁨(piti)과 행복(sukha)을 가진 초선(명상단계)에 들어가서 머문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초선이라 말하는 명상 단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 초선 상태에서도 아주 약하지만 배회하는 생각(wandering thought)이 여전히 존재한다.
마음이 호흡에서 벗어났을 때에 명상자의 마음이 이완되어 있다면 배회하는 생각을 매우 빨리 알 수 있다.
오직 놓아버린다.
호흡에 돌아오기 전에 긴장을 푼다.
어떤 명상지도자는 이것을 근접삼매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이 아닌 “집중명상”이라는 견지에서 보고 있다.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vicara)은
사유(thinking mind)와 배회하는 생각(산만한 생각)에 대한 설명이다.
어떤 번역은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을
각각 사유(thinking)와 조사(Examining or Pondering)로 옮긴다.
다른 선정 단계에서도 머무는 사유(directed thoughts)가 있을 수 있다.
머무는 사유와 산만한 생각에는 차이점이 있다.
산만한 생각은 과거에 일어난 것, 미래 또는 보고 싶어 하는 공상과 관련한 생각이다
머무는 사유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이 바로 지금 매우 행복하다.
마음이 매우 고요하다.
몸은 바로 지금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다”처럼 관찰하는 사유들이다.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일으킨 생각(위따까)은 마음이 미혹될 때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주의를 되돌리는 마음이다.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은 다시 주의가 벗어남 없이 호흡에 머무는 마음이다.
마음이 명상의 대상에 점점 더 오래 머무르게 될 때, 해방과 기쁨이 매우 강해질 것이다.
기쁨은 몸과 마음에 모두 행복한 느낌이기 때문에 저절로 마음속에서 미소를 느낄 것이다.
그때 몸과 마음은 매우 가벼워져서 거의 붕 뜨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즐겁고 좋은 경험일 것이다.
어떤 명상지도자들은 기쁨이 일어날 때 “집착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제자들은 어떻게든 집착하지 않도록 기쁨에 대해 염려하고 밀쳐 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중립적이거나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마음이 호흡에 머무르며 열려있고 마음이 이완되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음이 어떤 느낌에 끌어당겨졌다면 느낌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놓아버리고 머리에서 긴장을 풀어라.
그리고 마음이 열려있고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서 호흡으로 돌아가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휩쓸리면 애착과 갈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서 집착이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존재하게 허용한다면 집착하지 않고 명상의 대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쁨이 사라진 후에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고 편안하게 된다.
편안하고 평온한 이런 느낌을 초연함에서 생겨난 행복(happiness)이라 부른다.
명상자가 이런 명상 단계에서 처음에는 십분 또는 십오분 앉을 수 있고 수행함에 따라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초선(명상 단계)이다.
이것은 마음이 미혹되지 않고 감각적 쾌락,
불건전한 습관, 마음 상태를 얼마동안 계속해서 놓아버릴 때 일어난다.
수행자가 이와 같은 고요한 상태를 경험할 때 명상하는 이유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미혹이 거의 없는 행복한 상태이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그런 경험 후에 수행자는 열의를 갖게 되고 앉아서 수행할 때마다 그런 상태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고요한 마음 상태를 가지려는 욕망은 그 상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많은 노력을 쏟는다.
불행히도 마음은 더욱더 불안하고 동요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특별한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욕망 때문이다.
그것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 더 몰아붙이고 강제로 고요하고 평온해지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원하는 방식으로 일어났으면 하는 집착 때문에 고요한 명상 단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런 욕망 때문에 현재 그 순간에 치우치게 한다.
그리고 다음에 오는 순간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현재 순간이 원하는 것과 맞지 않으면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은 그것이 일어날 만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오직 강한 욕망을 이완하고 놓아버려라.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따라 그것들이 되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버리고, 고요하게 있어라.
초선(명상의 단계)을 경험한 후 다음 앉기 수행에서 상당히 활동적인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사띠는 예리하고 마음이 벗어났을 때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열려있게 하고 호흡으로 주의를 돌린다.
고요해짐과 들숨에 대해 열려있음, 고요해짐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이완됨 ···
오래지 않아 마음은 다시 안정되고 기쁨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기쁨이 사라질 때 다시 편안한 행복과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을 경험할 것이다.
이때에도 집착에 기인한 오온(다섯 무더기)을 여전히 경험한다.
여전히 들을 수 있고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기가 몸에 앉았을 경우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모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미혹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놓아버린다.
머리와 마음에서의 생긴 긴장을 풀고 나서 부드럽게 호흡으로 되돌아온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함에 따라
마침내 더 이상 방황하는 사유(wandering thoughts)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기쁨이 좀 더 강해지고 오래 지속된다.
기쁨이 사라지면 편안함과 행복이 더 강해지고 고요한 마음이 호흡 속에서 더 깊어진다.
이 상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다시 일으킨 생각(위따까,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 vicara)을 가라앉힘으로 비구는
위따까와 위짜라가 없고
확신(self-confidence)이 있으며
고요한 마음 상태에(singleness of mind)있고
마음의 고요(stillness of mind)에서 생겨난
기쁨(삐띠, piti)과 행복(수카, sukha)을 가진 2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따까와 위짜라의 가라앉힘은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명상의 대상에 아주 잘 머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과거나 미래에 대한 산만한 생각이 없다.
그러나 여전히 관찰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명상은 고요하고 열린 관찰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모든 감각의 문이 활동하기 때문에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여전히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소리가 일어나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어디에 처해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경전에서 말하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은 스스로 명상이 잘 행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때 얻는 확신에서 유래한다.
자기-확신은 앉기 명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난다.
고요한 마음은(singleness of mind) 마음이 매우 고요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는 상태이다.
호흡에 기꺼이 머무르고, 들숨과 날숨 속에서 열려있고 이완된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초선과 2선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이 계속 향상되고 고요함과 열린 마음을 유지함에 따라, 마침내 기쁨이 너무 거친 느낌이 된다.
그래서 기쁨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럴 때 한 명상자가 스승에게 다음처럼 희극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제자: 제 명상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스승: 왜 그렇게 말하지?
제자: 더 이상 ‘기쁨(삐띠, joy)’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그것이 나쁘다는 것인가?
제자: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기쁨(삐띠)’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스승: 이전보다 편안하고, 더 고요한가? 마음에 강한 균형감을 느끼는가? 큰 안락함을 느끼는가?
제자: 예, 그 모두를 느낍니다. 그러나, 더 이상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다.
스승: 좋다. 계속 그렇게 해라.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기쁨(삐띠, joy)이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이완되어 있어라.
기쁨(삐띠, joy)이 저절로 사라지고, 강한 조화와 고요함이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이따금 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앉기 명상 중에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을 만진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그런 것에 미혹되지 않는다.
경전에서 ‘명상자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을 가진다’고 할 때 이것을 말한다.
다음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또한 기쁨(삐띠, joy)이 사라짐으로 비구는 평정(upekkha)에 머문다.
사띠(mindful)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y aware)이 있고 아직 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그는 평온과 사띠를 가지고 행복에 머문다.’라고 성자들이 설한 것처럼 그는 3선에 들어가서 머문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3선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음은 매우 맑게 깨어있고 조화 속에 있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명상의 대상에 편안하고 쉽게 머무르고 있다.
(사띠하며) 깨어있고 마음속에
''''''''''''''''''''''''''''''''''''''''''''''''''''''''''''''''''''평정(upekkha)을 가지는 것은 평소와는 다른 경험이다.
그리고 이 명상 상태는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높고 최고의 느낌이다.
더욱이 강한 평정(upekkha)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매우 이완되고 편안하다.
얼마나 멋진 상태인가!
이것이 성자들이 이 상태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머리에서 경직이 이완되어 있는 것 외에
몸의 긴장이 풀려있고 감각적 느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정신적 경직은 몸에 긴장을 일으킨다.
하지만 지금 마음이 매우 편안하기 때문에 몸에서 감각되는 긴장도 사라진다.
이 상태일 때 몸은 매우 부드럽고 편안해서 느낌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를 만진다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것은 사띠와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음은 주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고 일어나는 것에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들숨과 날숨에서 행복을 경험한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정된 집중 명상’을 가르치는 어느 명상지도자는 이 선정상태일 때
몸이나 모든 감각기관에서 더 이상 어떤 현상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명상자가 어떤 사람이 그들을 막대기로 때리거나 그들의 손과 발의 위치를 바꾼다 해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그것은 마음이 매우 깊이 명상의 대상에 몰입되어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전을 읽어보거나, “사마디(평온-지혜) 명상”을 수행할 때 분명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마음의 작용(심행, mental formation)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tranquilizing)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하고
‘마음의 작용(심행)을 평온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그는 이와 같이 수행한다.”
마음이 계속 고요해지고 넓어지고 이완됨에 따라, 저절로 더 깊은 상태로 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몸과 마음에서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 되어 마음에서 이례적인 평정(upekkha)과 조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경전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 행복과 괴로움을 버림으로
마음이 매우 조용하고 고요할 때 수행자는 깊은 평온(tranquility)과 평정(upekkha)을 경험한다.
그러나 여전히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몸에서의 감각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 현상들에 결코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이 명상 단계(선정)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평온한 마음은 청정하고 빛나고 나무랄 데 없으며
불완전함을 제거했고 유연하고 알맞으며
안정되어 있고 동요하지 않음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진지한 명상자가 이 단계에 이를 때 기대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마음은 대단히 맑고 빛나고 깨어있다.
마음은 수행의 미혹이 막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도 알 수 있다.
그때 그것을 놓아버리고 열려 있다.
마음이 넓어지고 고요해지고 호흡에 되돌아온다.
‘행복과 괴로움의 버림’이란 말은 행복과 괴로움이 때때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마음은 조화 속에 있어서 미혹에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행복과 괴로움이 일어날 때 잘 알아차리고 평정(upekkha)과
사띠가 매우 강해서 그것에 관심 갖지 않게 된다.
‘그 이전의 기쁨과 슬픔이 사라짐과 함께’의 의미는 마음이 낮은 감정 상태인
좋아함과 싫어함을 놓아버린 것을 말한다.
이 보다 낮은 모든 선정 단계에서부터 감정적인 마음 상태를 놓아버리게 된다.
먼저 명상을 배우기 시작할 때, 마음을 종종 움직여온 매우 낮은 거친 상태들을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법을 알고 난 후 수행의 미혹이 일어남 없이 오랫동안 앉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과 다른 선정요소들을 경험한다.
마음이 더 깊은 상태가 될 때 일으킨 생각(위따까)과 지속적인 고찰(위짜라)이 사라진다.
기쁨은 잠시 동안 더 강해진다.
그리고 점차 기쁨은 너무 거친 요소가 되어 마음은 기쁨에 너무 많이 동요되지 않는다.
마음은 자연적으로 명상의 대상에 더 깊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쁨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이때 마음에 평정(upekkha),
행복(happiness),
사띠(mindfulness),
선명한 알아차림(full awareness)이 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매우 행복한 상태이다.
그러나 결국 행복은 너무 거친 느낌이어서
마음은 호흡에 더 깊이 나아가고 동시에 열려 있고 넓어지고 이완하는 것을 계속한다.
이때 호흡과 마음의 이완(relaxing of mind)은 동시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행복은 사라지고 마음에 남아있는 것은
강한 평정(upekkha),
강한 사띠(exceptional mindfulness),
마음의 고요(composure of mind)이다.
이것이 수행자가 마음의 작용(심행)을 경험하고 평온하게 하는 방식이다.
크리슈나무르띠는 진정한 명상상태를 이렇게 말했다.
“명상하는 마음은 고요하다.
그것은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침묵이 아니다.
고요한 저녁의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이 가지는 이미지나 언어와 지각이 완전히 멈출 때의 침묵이다.
이렇게 명상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마음이다.
이 종교는 교회, 사원, 염송으로 접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
“그는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마음은 매우 고요하고 가장 작은 미혹들도 모두 알 수 있고 곧바로 쉽게 놓아버릴 수 있다.
먼저 마음의 긴장을 놓아버린다.이제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들숨에서 열려 있고 넓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날숨에서 느슨하고 쭉 펴져 있고 이완되어 있다.
“그는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gladden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이 명상상태에 이를 때 더 미묘하고 고양된 기쁨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깨달음의 한 가지 요소인 기쁨(Pharana Piti)으로 기술된다.
마음은 매우 평화로운 행복에 있고 전과 완전히 다른 편안함에 있다.
이것은 마음이 행복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gladdening)이라 부른다.
그때 마음은 대단히 고양되어 있고 매우 맑으며 사띠가 전보다 더 예리해져 있다.
평정(upekkha)은 더욱더 조화되고 고요한 상태이다.
“그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stilling)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때 미혹이 거의 없고 마음은 더욱 미묘하고 고요해진다.
미혹들이 일어날 때, 재빨리 알고 놓아버린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호흡으로 되돌아간다.
호흡과 평온한 마음은 더 자연스럽고 쉽게 고요해진다.이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일어난다.
“그는 ‘마음을 해탈(liberating)케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의 해탈은 수행자가 호흡에 ‘기쁨으로 가득 찬 흥미’를 가지고 호흡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이 동요하거나 호흡에서 벗어날 때 알아차리고 미혹에 대한 동일시 없이 놓아버린다.
그리고 호흡으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이완한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때 재빨리 이것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놓아버린다.
이 상태에서 ‘나태와 무감각’ ‘들뜸과 불안’은 수행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일어난 장애는 선정에서 나오게 하고 다른 미혹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음의 해탈’이란 말은 어떤 방식이든지 집착하지 않고 낮은 선정들의 단계와
모든 선정 요소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다.
[21]
“그는 ‘무상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무상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호흡과 마음의 고요와 확장에 대한 명상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마음은 매우 깊어진다.
그리고 마음이 더 넓어지고 커지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마음의 고요와 광대함이 함께 나아간다.
헤아릴 수 없는 고요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마음이다.
이 상태를 실제로 말하자면 중심이 없고 바깥 모서리가 없다.
계속 커지고 확장된다.
경계가 없고 공간과 마음이 무한한 것을 보기 시작한다.
맛지마 니까야 111 경전, 아누빠다 숫따 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다시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하고 모든 적의(patigha, resistance)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으로 공간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비구는 공무변처(base of infinite space)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공무변처의 상태
-공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unification of mind)-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물질(색온)에 대한 인식을 초월한다’의 의미는 수행자가 그때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 알아차림에서 마음이 몸으로 쉽게 이끌리지 않는다.
이 선정 상태에서는 마음 그 자체와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아차린다.
‘모든 감각적 적의의 사라짐과 인식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음’은 비록 몸에서 고통이 일어날 때에도
고통을 알아차리지만 그 감각에 개입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몸이 커지고, 변화하고 확장되는 것을 느끼지만 호흡과 이완된 마음(relaxing of the mind)에서 벗어나 미혹되지 않는다.명상자의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확장된다.
그러나 명상자의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받아들인다.
무상을 보고 어떻게 마음이 변화하고 확장되는지 본다.
수행자는 이러한 현상이 조절하지 않은 무아적인 과정의 일부분임을 깨닫는다.
수행자가 들숨과 날숨에서 마음을 열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마침내 의식(consciousness)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계속해서 다가오고 멀어지고 중단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의식(consciousness)이 모든 감각기관에서 존재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계속한다.
이것이 아누빠다 숫따 경전에서 이렇게 기술된다.
‘다시 공무변처(the base of infinite space)를 완전히 초월함으로써
의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
비구는 식무변처(the realm of infinite conscious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식무변처의 상태
-식무변처라는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무한 의식 상태에 있을 때 여전히 무감각이나 둔감한 마음, 들뜸 같은 어떤 수행의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수행의 장애는 수행에 쏟는 에너지가 완전히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에너지가 너무 없다면 둔감함(dullness)을 경험한다.
(이때 명상자에게 졸음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한편 수행자가 너무 열심히 노력하고 과도한 에너지를 수행에 쏟는다면 들뜸(restlessness)이 일어날 것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의 장애가 마음에 존재할 때 선정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이 상태에 있을 때 변화가 매우 빠르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매우 성가신 것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불만족이 의식상태와 함께 일어나는지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무상, 고를 직접 본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한 사건들은 스스로 일어난다.
그 결과 수행자는 이러한 정신-물질 현상 속에서 무아의 본성을 본다.
이것이 무상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얻어질 수 없고 개인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통해 얻는다.
다시 아나빠나사띠 경전으로 돌아가자.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사라짐(탐욕의 여읨)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수행자가 들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날숨에서 놓아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계속 수행함에 따라
이제 마음은 전에는 서슴없이 보아왔던 모든 의식을 놓아버린다.
그때 마음은 무소유처(the realm of ‘nothingness)에 들어간다.
이것은 마음이 볼 외부 현상계의 것들이 없는 상태이다.
‘마음 외부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있는 마음이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식무변처(infinite consciousness)를 완전히 초월하며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리고 ‘무소유처의 상태 -무소유처의 산냐(인식)와 마음의 하나됨-에는
여전히 집착에 의해 영향 받는 오온(다섯 무더기),
즉 물질(색온), 느낌(수온), 인식(상온, 산냐), 의지작용(행온, 상카라)그리고, 마음(식온, 의식)을 가진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이 상태는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다.
비록 보아야 할 외부의 마음과 정신적 요소들(metal factors)이 없더라도 여전히 지켜보고 관찰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수행자는 여전히 집착에 기인한 오온을 가진다.
그리고 너무 느슨해있거나 힘이 넘치게 될 때마다 여전히 수행의 장애들이 불쑥 나타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칠각지(깨달음을 도와주는 일곱 가지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
칠각지가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기력(torpor)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현상(법)에 대한 고찰, 정진, 기쁨’의 요소들을 각성시킴으로써 마음을 균형 잡아야 한다.
들뜸이 일어난다면 깨달음을 도와주는 ‘사띠, 편안(경안), 사마디, 평정(upekkha)’의 요소를 각성시켜야 한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이때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교묘해진다.명상상태를 미혹하는 미묘한 과정들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사띠가 매우 강하고 이러한 속임수들을 매우 쉽게 볼 수 있다.
그는 ‘소멸(cessation)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소멸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마음이 들숨과 날숨에서 계속 더욱 고요해진다.\
이때 마음은 작아지기 시작하고, 수축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마음은 매우 미묘하고 고요하게 된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다시 무소유처(the base of nothingness)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비상비비상처(base of neither-perception nor non-perception)에 구족하여 머문다.’
마음은 매우 미세해지고 거의 움직임이 없다.
때때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또한 마음의 인식(perception 산냐)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이렇게 매우 미세한 마음 상태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현존하고 있는 것을 아직 인식하고 있을 때
수행자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넓히는 수행을 계속한다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수행자는 호흡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느낌들이 일어난다.
이때 수행자는 오랫동안 앉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전히 적정상태(total tranquilizing)에 있고 모든 에너지가 이완되어 있다.
또한 청정무구한 상태에 있고 더 오래 앉을수록 더 좋은 상태다.
수행자는 서너 시간 또는 다섯 시간동안 앉기 시작한다.
안거수행 기간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행하는 집에서도 수행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몸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느낌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을 열려 있고 넓어지고 고요하게 하는 수행을 계속함에 따라
매우 미세하고 세밀하게 되어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결국에는 ‘니로다사마빳띠(Nirodha Samapatti)’ 라고 불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를 경험한다.
“그는 ‘놓아버림(relinquishment)을 주시하면서 들이쉬리라’며 수행하고
‘놓아버림을 주시하면서 내쉬리라’며 수행한다.”
이 명상상태는 출세간적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순간과 매우 가까운 것이다.
출세간적 열반은 순관과 역관의 십이연기(빠띠짜사무빠다)를 모두 보게 될 때 경험한다.
이것은 인식(산냐)과 느낌이 다시 돌아오고 다시 알아차리게 된 후 일어난다.
궁극적인 무지(final ignorance)를 봄에 따라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
탐욕을 여의게 되고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이것이 모든 연기 고리를 직접 봄으로써 출세간적인 열반상태를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깨어남의 가르침’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누빠다 숫따 경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시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구는
‘인식과 느낌의 소멸 상태’(상수멸, cessation of perception and feeling)에 구족하여 머문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
상수멸의 상태에 있을 때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아주 어두운 밤에, 모든 빛이 꺼진 것과 같다.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그 순간에 손을 얼굴 앞에 놓더라도 알 수 없다.
이 상태는 인식(산냐)과 느낌이 전혀 없는 것과 유사한 상태다.
이 상태로 오랜 시간 앉아 있을지 모른다.
인식(산냐)과 느낌이 되돌아오고, 그의 사띠가 충분히 예리해졌다면,
그들은 사성제의 두 번째, 괴로움의 원인(즉, 연기의 원인과 결과 관계)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그것들 모두를 보고 난 후 수행자는 사성제의 세 번째 괴로움의 소멸(즉 어떻게 이러한 연기 고리들이
그치게 되고하나의 놓아버림이 다른 것의 놓아버림으로 직접 이르게 하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에게 저절로 보여 지게 된다.
수행자가 연기를 배웠던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은 기억되거나 학습한 앎이 아닌 지혜이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고 봄으로써 그의 번뇌는 멸진되었다.’는 사성제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를 본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성제를 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의 원인을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사성제의 세 번째)을 본다면 수행자는 자연히 사성제의 네 번째를 보게 된다.
다른 세 가지 사성제를 보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수행해야만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네 번째 사성제이다.
그래서 연기를 직접 본다는 말은 수행자가 모든 사성제(고귀한 진리)를 보고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놓아버림을 주시하는 방법이다.
[22]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를 이렇게 계발하고 닦아 가면 큰 결실과 이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