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68권, 중종 25년 6월 10일 무진 1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대간이 김극핍 등이 유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다
대간이 차자를 올리기를,
"소인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요 소인을 다스리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소인의 마음에도 소인이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간악한 정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비록 군자를 은밀히 시기하거나 공론을 거짓 두려워하는 체는 할망정, 음흉하고 간사한 꾀는 혹 다 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간악한 정상이 밝게 드러나서 모든 사람이 다 보고 손가락질하게 되면, 제 역시 공론에 용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아서 자립할 곳을 꾀하느라 은밀히 형세를 엿보면서 벌침 같은 독과 시호(豺虎) 같은 포학으로 못할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니, 두렵지 않습니까.
성인이 소인을 다스리는 데 있어 반드시 먼 변방으로 내쫓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소인의 심정은 본디 화란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군자를 미워할 때는 매우 끈질긴 참소가 있고 명주(明主)를 꺼릴 때는 현란(眩亂)시키는 꾀가 있어, 위태로운 화를 온갖 방법으로 만들어서 기필코 흉독을 부리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멀리 추방하여 그와 더불어 중국(中國)에서 함께 살지 않은 것이니 진실로 소인은 멀리해야 할 것이요 가까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김극핍·김극개·김헌윤은 한 집안의 삼간(三奸)으로, 귀역(鬼蜮)이나 사서(蛇鼠) 같은 정상이 이미 다 드러나 성상께서 환히 아시는 터인데도 이런 흉측하고 간사한 무리를 곡호하시고 공론을 굳이 거절하십니다. 그리하여 죽을 죄인은 귀양으로 그치고 귀양갈 죄인은 파직으로 그쳐서 상하의 경중을 공의(公議)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물정(物情)이 조금 퍼지려다가 다시 우울해지고 공도(公道)가 밝아지려다가 다시 두려워집니다. 그러니 사직(社稷)의 안위와 생민의 휴척(休戚) 과 군자·소인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과 천명(天命)·인심(人心)의 이배하고 부합되는 것이 모두 이 즈음에 달렸는데,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하는 성상의 뜻이 도리어 훗날의 무궁한 화를 이루어서, 조정에서부터 화가 시작되어 종사(宗社)에까지 미칠까 삼가 염려됩니다. 국론(國論)이 이와 같고 군정(群情)이 이와 같은데, 제가 어찌 뻔뻔스레 서울에 있으면서 거듭 사림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움츠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빨리 헌윤을 먼 곳에 귀양보내고 극핍과 극개도 외방에 귀양보내서 여망을 위로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