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서울문학제-문학심포지엄] 발표원고 문학작품 속의 서울 --詩를 중심으로 김 송 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시 속의 서울 혹은 서울 속의 시 우리 문학 작품의 소재나 주제를 일별해보면 서울을 매체로 한 작품들이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처해 있는 생활공간에서 자신을 회상하거나 반추하는 경향이 자신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지만, 특히 우리 시인들이 현재의 실생활(real life)에서 탐색하는 작품의 상황이나 구상은 보편적인 사유(思惟)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작품에 투영시키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바로 서울이라는 거대한 현장에서 형성되는 입지조건으로서 생존의 문제까지도 연관성이 있는 통식적인 생활실상에서부터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적 등 애환이 침잠된 지적인 보고를 탐구하는 일까지 우리 시인들은 서울에 대한 의미나 가치의 부여를 작품으로 현현하고 있다. 대체로 서울에 관한 시를 살펴보면 그 지리적 형성 여건과 역사의식에서 많은 시인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우리 한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국가의 경영과 국민의 국가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입지에서 우리의 운명과 동시성을 가지는 특성때문일 것이다. 우리 서울은 정도 6백여 년이 지났다.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개국공신 정도전은 ‘기름지고 풍성한 경기땅 천리 / 안팎으로 둘러친 산하 / 철옹성 같은 성벽 // 그 형세와 맞서는 / 덜 미치는 도덕의 교화여 / 천년을 가리라 다시 만년을 가리라(沃饒甸千里 表裏山河百 二德敎兼得形勢 歷年可卜千紀)라고 읊어서 서울을 찬양한 바 있다.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우리는 김상헌의 시조처럼 시대적인 비극도 포괄적으로 수용된 작품을 대하게 되는데 잘 아는바와 같이 김상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이로 인해 심양으로 끌려가서 3년 동안 고초를 걲고 돌아왔는데 끌려가면서 조국 조선에 대한 시국의 비참한 심경이 서울의 삼각산(지금 북한산)과 한강수를 통해 잘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의 서울은 조선 태조가 풍수도참설에 근거해서 한양을 5백년 도읍지로 삼았는데 우리 국토의 척추인 백두대간의 정기를 모아 한북정맥으로 북한산에 뭉쳐져서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이 생기를 막기 위해서 좌청룡 우백호의 수호신인 인왕산과 낙산이 있고 관악산, 남산이 서울 명당의 땅에 생기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 흐르는 청계천과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강이 상스러운 최상의 입지를 제공한다고 지리학자나 풍수가들은 입을 모은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과 동족상쟁으로 서울은 피바다가 되고 국내적으로 혼란이 끊이지 않는 수난의 시대도 있었다. 이처럼 박종화 선생은 다음 작품 「서울」중에서 1950년 6. 25를 겪고 난 후, 상처 입은 서울이 파괴되고 휴전이 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제 새롭게 출발한다는 각오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비교적 현대사에서 조망할 수 있는 서울에 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서울, 종로 네거리 천년 이 겨레가 살아 즐기던 곳 배움집에, 東床塵에, 육주비전이 즐비한 곳 이 나라 족속의 의젓한 범절을 높이 자랑하던 곳 어느 날 갈가마귀가 떼지어 구슬피 울고 폭풍우 쏟아지는 그 불길한 밤이 지나간 뒤에 이 터에는 강도 같은 붉은 오랑캐의 진흙 발길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당시(1952. 8. 15)의 서울을 소재로 한 비극적인 작품에서 그는 ‘태극기가 집집마다 펄펄 날린다 / 태양은 다시 찬란하게 동방에 떴다’고 결구를 장식함으로써 서울의 애환은 더욱 가시화하고 있다. 고층으로 오르내리는 그물을 뜨는 손짓과 손짓들.... 앞뒤 물의 낯들....엇갈린 선과 선들..... 愁然히 그리워, 눈물이 그리워, 슬픔이 그리워, 그늘이 그리워.... 제 콧날 우의 하얀 제 별도 못 떠받아 서울은 나부껴, 하얗게 가루처럼 나부껴.... --박재릉의 「서울」중에서 대우빌딩 쳐다보며 70년 전 이곳에서 남대문 남산 바라본 그대 생각한다 --양왕용의「서울역」중에서 그렇다. 박재릉 시인은 ‘고층’이라는 현실적인 발달을 약간의 부정적인 비판의식이 가미된 듯하지만, ‘그리워’라는 동사가 겹쳐지는 것으로 보아 ‘삼각이나 북악만큼 든든한 마음끼리’의 서울 생활에 대한 활력이 넘치고 있다. 양왕용도 ‘서울역’에서 바라보는 ‘대우빌딩’이나 ‘남산’에서 ‘그대를 생각’하는 것은 ‘70년전 이곳’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그가 언젠가 밝혔듯이 정지용 시인을 그리워하는 양상이다. 석유냄새 토하며 쓰러질 서울 하야식 외진 남산 기슭의 진달래야 찬 북녘 바람은 알겠지 소금장사 쌀장사 갈 곳 없는 여기 서울을 떠나야 하리 서울을 떠나야지 박봉우 시인은「서울 下野式」중에서 1960년대 초반에 겪었던 4. 19와 5. 16등의 사회적 우룰한 참상을 피력하고 있다. 자유를 그리는 시적 화자가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 난군 앞에’서 절망하면서 ‘서울을 떠나’려 하고 있다. 이는 현실의식과 비판의식이 동시에 발현되고 있다. 2. 한강과 다리 그리고 섬 서울을 관류하는 한강은 강원도 삼척에서 발원하는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만나서 서울을 관통하고 서해로 빠져나간다. 예부터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있는 한강은 삼국시대에는 아리수(阿利水), 고려시대에는 열수(列水)라고 불리다가 조선조 태조의 한양천도이래로 한수(漢水) 혹은 한강(漢江)으로 명명되었다. 한강에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를 비롯하여 천호대교, 올림픽대교, 잠실대교, 영동대교, 성수대교에서부터 성산대교, 행주대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리가 놓여져서 교통의 원활한 소통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여의도와 더불어 난지도, 밤섬, 뚝섬, 선유도 등의 섬이 있어서 한강의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이 한강에도 역사적 애환이 서려있다. 김윤성 시인이 1950년 6월 28일 한강을 건너 막연하게 피난길을 걸으며 읊은 「漢江有情」에서는 ‘강을 건너 어둡던 / 서울을 벗어나니 / 이렇게 해가 밝아 보이나 보다 / 바람은 선하고 / 볕은 알맞도록 따스하다’라고 그 정경을 묘사한 것을 보면 급박한 피난길에서도 한강 이남의 풍경을 절실하게 적시하고 있다. 그렇다 들리느냐 정선아라리 굽이돌아 가슴에 젖고 한강수타령 장구춤에 흥겹구나 만선의 돛폭 올리며 징징징 울리는 그날의 뱃노래 다시 부르며 한강은 새색시 같은 어머니가 되어 푸른 치마폭 넘실 감싸준다 흘러가라 역사에 얼룩진 땟자국이여 나라의 어지러운 비바람이여 겨레의 앙금과 핏물이여 그리고 오직 사랑의 이름으로만 자유의 이름으로만 평화의 이름으로만 통일을 싣고 오라 깃발 드높이 통일을 싣고 오라. 한강에 대한 시 이야기를 하면 이근배 시인의 장편 서사시집『한강』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 작품「한강은 솟아 오른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의 얼룩’과 ‘겨레의 앙금’과 ‘평화’와 ‘통일’의 갈망이 전체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이는 한강이 역사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겪은 수난들이 ‘새색시 같은 어머니’로 변해서 갈등을 화해하는 희망을 제공하고 있다. 친구여 보이는가 우리 잠 속에 지금도 출렁이는 유년의 강 광나루 뚝섬 미루나무길 봉은사 가는 한낮의 나룻배 도라지꽃, 보랏빛 도라지꽃 무더기로 The아지면 마포 앞강의 저녁 어스름 우리들 어린 날 기억의 계단에 무성영화처럼 돌아가고 있는 천연색 사진들 사진 속에 찍힌 진보라빛 유년의 발자국들 보았는가 그 시절 강은 길고 보드라운 잔물결로 내 곤한 잠 속에 숨어 들어와 어린 날개 연꽃처럼 적시며 칠석날 연등놀이 인도교 밑을 흘러간다 수만 장 깨어져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수만 개의 불을 띄워 어디론가 끝없이 흘러갔다 우리들 잠 속을 흘러갔다. --홍윤숙의 「한강」전문 무겁고 긴 열차가 동호대교를 건널 때 종이처럼 가볍다 어제는 육교가 무너져 여섯 명의 인부가 깔렸는데 열차는 한 줄의 잘 다듬어진 문장 한두 어휘로 요약된 이데올로기 동호대교를 건널 때 더욱 선명하다 --문덕수의 「동호대교에서」중에서 난지도 너는 이 시대의 가나안이라 휘날리는 먼지와 악취의 소음에도 잠들지 말고 꼭꼭 눈뜨고 있거라 --정연덕의 「난지도」중에서 이렇게 교량과 섬이 공존하는 한강에는 홍윤숙 시인과 같이 광나루, 뚝섬, 봉은사, 마포 등 주변 지명과 함께 칠석날 인도교 밑의 연등놀이가 흘러간 강물이 유년에 대한 아쉬움과 한스러움이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어떤 주지적인 인식이 배제되어 서정성이 짙은 정감의 언어가 우리들의 감동을 흡입하고 있다. 또한 이영걸 시인도 작품「한강」에서 ‘한강은 우리의 의식처럼 / 영원한 현재이다 / 과거에서 미래로 / 이어지는 은근한 / 흐름이다. 저 아래’라고 노래고 있으며 제해만 시인도 「漢江邊小吟」에서 ‘강가에 오면 길들을 만나고 / 강가에 오면 영혼들을 만나고 / 빛다운 빛, 바람다운 바람도 만난다’라는 한강을 예사롭지 않게 음미하고 있다. 한편 문덕수 시인은 동호대교를 건너가는 ‘열차’에서 ‘종이처럼 가’벼움을 수용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발달된 문명세계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이 아침 한 순간의 평화’라는 주제를 정리하면서 서울의 발전상을 은연중에 적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열차는 / 한줄의 잘 다듬어진 문장 / 한두 어휘로 요약된 이데올로기’라든가 ‘덜거덩 덜거덩 덜거덩 / 저것이 어찌 신음하는 / 죽음의 음정이냐’ 또는 ‘굴러가는 염주알이다 / 한 순간의 피아도 건반이다’라는 이미지는 내면의식의 승화로 서울이라는 소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다시 정연덕 시인도 ‘난지도’를 수난의 섬으로 적시하면서 ‘휘날리는 먼지와 악취의 소음’과 ‘남루한 의복’으로 서울시민들이 기피하는 지역이지만,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라는 한 시인의 기원이 담겨져 있으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서울에 산소를 공급하면서 시민들의 휴식처인 대공원용지로 자리 잡았다. 3. 궁궐과 문의 역사적 옛 정취 서울의 역사는 궁궐과 성곽과 대문에서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요체를 찾을 수 있는 첩경이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송도의 수창궁에서 즉위한지 2년 후에 경복궁을 조영(造營)하여 준공한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궁궐의 대소 전각을 헐어버리고 우리 민족의 기운을 꺾기 위해서 조선총독부를 신축하고 36년간 식민통치의 역사를 남겼다. 그 외에 덕수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있으며 창경궁은 일제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덕수궁에서 옮겨올 때 임금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궁궐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짓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나무를 심어서 창경원으로 궁 이름도 바꾸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그들의 술책이었다. 이 한나절은 나 또한 그대 곁에 연꽃으로 뜨는 시간 경복궁 경회루 연못가에는 돌로 굳어 꿈을 꾸는 내가 있다 내가 있다. --유안진의 「경복궁 경회루」중에서 덕수궁 전각을 보며 한 잔의 음료수를 마신다 그라스 너머 걸어가는 오월의 등꽃 수 세기 전 나를 보듯 흘러간 숲에 눕는다. --김용언의 「덕수궁에서」중에서 서울에서 현존하는 4개의 궁궐과 경희궁지가 있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애환을 간직한 궁궐의 비사(秘史)를 회상하면서 작품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들을 많이 읽을 수 있다. 유안진 시인이 ‘내가 있다’라거나 김용언 시인이 ‘나를 보듯’이라는 어조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현재의 ‘나’와의 상관성을 적시하고 있어서 감응이 살아나고 있는 듯하다. 한편 서울에는 4대문이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흔희들 동서남북의 문을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이라 하여 맹자의 효(孝)에 대한 실천규범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하여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도리의 오상(五常)에 의해서 종로에 보신각을 조영하고 그 균형을 유지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곱개 단장이래도 해보고 싶은 연지빛 노을이 묵은 기둥에 푸른 석벽에 암암 어리어 남대문 거리는 누더기 저자를 이루었다 --이설주의 「남대문」중에서 이렇게 서울의 궁궐과 대문 그리고 사적에 관한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이 작품을 남겼다. 박종화(이하 존칭 생략)의 「숭례문」, 이광수의 「창의문」, 김용호의 「동대문」, 이 석의 「대한문」, 천상병의 「서대문에서」, 김종원의 「광화문행」등이 있으며 서적을 노래한 것은 이동주의 「파고다 공원」, 김광섭의 「서대문 형무소」, 김수복의 「세검정에서」, 주원규의 「다시 절두산에서」, 이청화의 「4. 19탐 앞에서」, 문효치의 「몽촌토성」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수표교 돌로 엮은 난간에 기대서니 물은 흘러 예대로 水東流하건만 얼어 물살이 거품쳐 흐름이 없고 흐리어 든 달 얼굴 빛나지 못하다 깊고 살 세던 옛 강물이 어디로 가고 지금엔 여윈 개울물 혼자 남아 목메어 우는가 --김동환의 「수표교에 서서」중에서 이처럼 고금을 통해서 서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시인들이 누구나 소재로 취택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조감하거나 그 경관을 노래하면서 그 정취에 젖는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 있다. 4. 서울의 산과 거리의 표정 다시 서울에는 관악산과 목멱산(남산), 도봉산, 북한산, 불암산, 인왕산 등의 산들이 동서남북에 산재해 있다.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남산은 인왕산과 북악산, 낙산 등과 함께 서울 분지를 에워싼 방벽으로 옛서울 성벽이 이 남산을 중심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이라고 하는데 서울 북쪽의 최고봉인 백운대와 백제 온조왕이 그의 형과 함께 올라 도읍을 남한산성에 정했다는 인수봉, 무학대사가 서울을 도읍터로 정했다는 만경대(국망봉) 세 봉우리를 일러서 삼각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산들에서는 전설도 풍부해서 많은 시인들이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천년을 밀어 올리고 / 천년을 깎아 내린 / 하늘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김월한의 「백운대에 올라」중에서)’, ‘생활에 피로한 얼굴을 / 오늘도 코스모스 꽃 속에 묻고 // 저기 관악산의 가을을 쳐다본다(장수철의「관악산」중에서)’ 등의 작품에서 서울의 정취를 감응할 수 있다. 가지는 가지끼리 풀잎은 풀잎끼리 모두 한데 소곤거리는 북한산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아도 만상은 끝없는 정념으로 타고 작별의 말 하지 않아도 슬프도록 손 흔들며 떠나는 가을 북한산. --이옥희의 「북한산에서」중에서 걷지 않아도 길은 이어진다. 떠나간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흔들리는 풀꽃은 내일이면 하얗게 쓰러질 것이고 내일이면 모든 흰 풀꽃 같은 사람들이 산으로 가 살 것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길이 망우리로 이어져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걸어온 만큼 짧아진 길을 버려도 하루해는 영원한 길을 버리지 않는다. 깨끗하라. 깨끗하라, 오늘 하루 망우리 산기슭엔 누구를 위한 돌을 쪼으는지. 아름다운 이름을 새기는 정소리가 가득하구나. 고향으로 가는 장님으로 가는 망우리 길. --권달웅의 「망우리길」전문 그 뒤 40년 명동이 이렇게 변했는가 한때 불우한 인테리 맞아준 거리 내가 벨레느를 들고 다닌 다방은 흔적 없고 鳳來는 기억에서 멀어지고 그 골목 살라지고 寅煥도 그밖의 많은 이름들 기억의 사람 --박태진의 「명동무상」중에서 서울에는 거리가 복잡하다. 망우리고개를 비롯해서 무악재, 아차산길, 미아리고개, 만리동고개 등 길이 있는가하면 명동, 광화문, 강남의 번화가 등에서도 시는 창작되고 있다. 권달웅 시인의 ‘망우리길’과 박태진 시인의 ‘명동무상’ 등은 서울의 길을 적절하게 현현하고 있는데 ‘망우리길’은 ‘고향’이나 ‘장님’으로 형상화해서 사후에 찾아가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명동’은 변해버린 40년 세월의 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밖에도 이혜선 시인이 ‘달리는 말발굽 / 고구려 강가에서 흙바람 날리며 / 온달 장군 팽팽한 활시위를 떠나는 소리(「아차산」중에서)’라든지 곽문환 시인이 ‘이제 짚세기 신고 풍악 울리며 / 활화산이 되어 / 거센 물결이 되어 / 달려갈 무악재 고개 넘어 통일로 / 역사의 흔적을 새기고 있다(「무악재」중에서)’ 또는 김종원 시인이 ‘이른 아침 / 광화문을 지나다 / 문득 만나게 되는 / 어린 날의 풍금(「광화문행」중에서)’들 서울의 산이나 고개, 거리를 표현한 시인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강남 고속 터미널로 가자면 어디서 타나요? 아가씬 저 쪽을 가르쳐 주고는 느닷없이 상긋 웃는다. 경남 진주의 설창수 원로시인이 서울 왔다가 내려가는 행차 중 사당역에서 아가씨에게 강남고속터미널로 가는 길을 물었던 작품 「사당역 어귀」의 첫 부분이다. 서울의 길에서는 이러한 정감도 시에서 느낄 수 있는데 ‘처녀의 / 무심한 눈웃음에 젖으면 / 백발의 맘 숲에서 노란 붐이 깬다’라는 낭만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유근조 시인은 ‘선배와 함께 술에 취해 찾아간 / 개포동 288번 버스 종점 부근의 / 어느 숲속 소문난 집인가는 / 철늦어 이미 철수해 버렸고 / 마침 대모산 기슭을 내려오던 어둠은 / 한눈에 보아도 / 학비를 버느라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 아르바이트로 힘겹게 보낸 대학생의 고단한 등허리처럼 / 등이 하얗더라(「개포동의 어둠」중에서)’라거나 또한 졸시 「연희동 편지」전문에서 ‘내가 처음 서울 가서 둥지로 정한 / 서대문구 연희동 산82번지 / 출근을 하고 술을 마시고 시를 쓰다 보면 / 나는 항상 나는 새가 되고 싶었다 / 시민아파트 낡은 골방에 묻혀 / 담배만 빨아대던 절망의 산실 / 아, 그러나 / 구름 위에 떠도는 또다른 나 / 영혼의 샘은 바로 여기였노니 / 허상에 묶이고 / 허탈에 질식하고 / 허망에 침몰하던 산번지 / 푸근한 거기에서 / 나는 문득 날개를 펼 수 있었다 / 황강까지 훨훨 날아 올 수 있었다.’는 어조와 같이 삶의 애환이 짙게 배어있는 서울의 노래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5. ‘시를 사랑하는 서울’의 현장 서울은 문학작품들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삶의 애환이 짙게 서려 있기도 하지만, 도약하는 서울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서울의 발전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이다. 역사적으로 흥망성쇠가 있어서 시련과 치욕도 많았으나 우리의 서울은 이제 세계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우뚝 서있다. 지난 1994년, 서울 정도 6백년을 맞이해서 서울시에서 다양한 행사들을 전개하였는데 우리 문인협회에서도 ‘한민족 문학인 서울대회’를 개최하여 서울시가 내세운 ‘다시 보는 서울’, ‘새로 나는 서울’, ‘신명나는 서울’, ‘열려있는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저를 다시 조명하는 심포지엄과 기념문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문협 회원 약 3백여 명이 참여해서 (1)서울 속의 우리 동네 (2) 내 기억속의 서울 (3) 서울 바깥에서 생각하는 서울 (4) 내 작품속의 서울 (5) 내가 바라는 서울을 주제로 5권의 문집을 간행하고 정도 6백년을 기리는 사업도 진행했었다. 당시 황 명 문협 이사장은 ‘오늘의 서울은 옛 한양과는 다릅니다. 겨레의 젖줄, 한강을 축으로 남과 북이 서로 어우러져 그야말로 균형 있게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우리의 수도 서울은 손색이 없습니다. 여기에 획기적인 역사성을 드높이기 위해 ’한민족 문학인 서울대회’를 개최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한강’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모집하고 여기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 문협 입회의 자격과 월간문학 당선자와 동일한 자격을 부여하는 사업도 병행하여 등단 지망생들에게 호응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밤이 이슥하면 찹쌀떳 과 메밀묵 파는 사람들의 애절한 외침과 통금이 되면 야경꾼의 짝작이 소리도 골목을 지나가고 있어서 이러한 낭만적인 생활의 단편이 들려 오는듯한 작품들도 많이 발표되기도 했다. 내가 처음 서울 왔을 때 늦은 밤, 골목에서 ‘찹쌀떡 사려---’ ‘찹쌀떡이나 메밀묵---’ 구성진 메아리 들을 수 있었다 야참 메밀묵 한 접시 다 먹기도 전에 통금 싸이렌 길게 울리면 서울의 밤은 깊은 잠으로 묻혔다 내가 서울 살면서 야경꾼 짝짝이 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칠흑 밤마다 고향 논길에 뿌려지는 별빛들만 가슴 가득 줍고 있었다 내가 서울 살이에 익숙하지 못해 ‘어머니---’ 곁으로 밤이면 남행열차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어쩌다가 꿈으로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온 서울의 밤, 나는 아직도 잠들지 못한 채 영혼을 달래고 있었다. 언젠가 쓰여졌던 졸작「서울의 밤」에서 읽을 수 있듯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서울의 생활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서울을 소재한 작품은 필자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축으로 하여 직장생활을 한 인연으로 대학로에 관한 작품을 연작으로 14편을 발표한 일이 있다. 언젠가는 서울시에서 서울의 거리와 명소에 게시할 시를 청탁해서 요소요소에 적절한 작품을 게시하고 시민들에게 생활 정서를 환기하는 작업도 실시하여 우리 시인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은 사실이 서울시의 업적으로 남는다. 여기에 게시된 졸시 시 두 편을 첨부한다. 하늘공원 억새풀 흔들던 바람줄기 기적의 매립지에서 시원하다 지난 날 아픔을 묻어둔 채 새 하늘엔 꽃구름 둥실 떠 있고 평화공원 꽃창포 물들인 새 희망의 분수는 미래를 향해 나와 함께 비상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여기 난지도 노을공원에서 손짓하는 저녁놀은 그대 자태와 함께 고웁다 쉬어가라 쉬어가라 시민들 발검음 멈춘 희망의 숲에는 손잡은 한 가족의 아늑한 온기가 흐르는데 월드컵 경기장 안에서 지구촌 승리의 함성이 들리고 그날의 성화는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월드컵공원 산책」전문 서울이 깊은 숨을 쉰다 물이 생명이듯 도심을 맑게 적시는 사랑의 물소리 모전교에서 고산자교까지 각시붕어 민물검정망둑이를 안고 달빛 속에 유유하다 하루를 끝낸 발걸음들이 서로를 위안하듯 손잡은 밀어들로 촉촉한데 비오리 한 쌍 달빛 흠뻑 머금은 채 깊은 휘파람 한 자락 사랑의 노래로 서울을 호흡한다. --「청계천의 달」전문 또한 몇 년전에는 지하철(1~9호선까지) 윈도우에도 시가 게시되어 이용하는 승객들이 잠시나마 시적 정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여기에 게시된 작품들을 모아 시집도 발간하였으며 또 몇 년전부터는 서울 메트로가 후원하여 ‘시가 흐르는 서울’이라는 제목으로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시낭송회도 열고 있어서 통행하는 시민과 낭송 시인들이 함께 공감하는 장이 되고 있다. 한편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작년 10월에 한강 선유도 공원에서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와 대산문화재단과 공동 주관으로 ‘길위의 시인들-2010 한강문학축전’을 개최하고 공동시집『내 안으로 흐르는 아리수』를 발간하여 배포하고 시낭회도 가져서 선유도를 방문한 시민들에게 박수를 받은 바 있고 올해도 축전을 속개하여 한강과 문학작품과의 연계로 많은 문학단체와 문인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 바가 있다. 살다가 더러는 신선들의 춤추는 모습을 깜박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신선이 노닐다가 비상한 그 자리 우아한 그림자만 남았는가 고운 자태 살포시 흔들리며 사라지는 물새를 닮았는가 황혼녘 공원 벤치에는 연인들의 밀어가 신선을 불러오고 강물은 다시 사랑을 부른다 살다가 어떤 때는 춤추는 신선을 그리워하며 그를 닮고 싶어 한다 어디론가 신선도 사라지고 연인도 떠나 버린 숲에서 바람 한 줄기로 떠도는 선율이 온몸을 물안개로 감싼다 살아다가가 보면. 작년에 시협 공동시집에 수록되어 낭독한 졸시「물 詩 . 48-한강선유도에서」에서 처럼 서울의 명승지 혹은 유원지 그리고 사적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창작되었으며 많이 읽히고 있다. 성춘복 시인의 ‘지금은 반세기의 함성이 별 박은 / 자갈밭 길에 / 일곱 자락의 하늘로 갈앉았다가 / 시련의 흰 종교가 절름거리며 되돌아왔다 / 빈혈의 땅을 스치는 쉼 없는 바람 / 나비도 들지 않는 공원(「공원 파고다」중에서)’라거나 장유우 시인이 ‘문화의 폐수와 허망한 정치의 거품 / 잘린 허리와 불신의 담벽으로 뼈아프나 / 유실된 시민의 양심으로 퍼담아서 / 지치듯 푸르런 우리의 한강으로 부르라 서울의 찬가를(「숱한 눈물과 아픔을 가둔 채 도도히 흐르는 너 한강에게」)’ 중의 끝부분처럼 과거 역사속에서 살아있는 서울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작품도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서울 속의 시는 이러하듯이 한강과 한강을 통과하는 교량 그리고 그림처럼 펼쳐진 섬들, 역사의 상징인 궁궐, 대문들, 성곽의 옛 정취, 그리고 서울의 산과 거리, 동네의 표정들이 시로써 서울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문인들은 작품으로 서울을 승화하여 통일 대한민국의 성취와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더욱 많은 애정으로 작품을 창작해야 할 것이다. (2011.11.1.서울문학제-신축 예술인센터 강당) ------------- *참고문헌 - 이근배. 장편 대서사시집『한강』1985. 고려원 - 김종원. 시집『광화문행』1988. 제3기획 - 설창수. 시집『나의 꿈, 나의 조국』1992. 동백문화 - 한국문인협회.『내 작품속의 서울』1994. 문협 출판부 - 제해만.『서울의 시, 시의 서울』1994. 외길사 - 김송배.『김송배 시전집』2003. 청송시원 - 한국시인협회.『내 안으로 흐르는 아리수』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