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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양고인돌 http://igoin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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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대부 행동몽교관 충주지공 효적비
재건립 경유(経由)와 제언(提言)*
서기 1946년 정월 대보름쯤에 저의 할아버지(기출37세손)께서 형제분(금출,금철37세손)들과 사촌형제분들(동오,인영,준철,재철,점철37세손)과 자녀들(만년,석년,봉원,동원38세손)과 몇 달 동안 수차례 상의하여 증조할아버지 효적비를 건립하셨습니다. 그 후 자손들이나 지역 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이 효행을 기리며 추모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로 발전해가면서 보성녹차 다원이 관광지로 부상하여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극심한 교통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성읍과 회천면간의 도로를 2002년경에 확장하게 되어, 후손들은 눈물을 머금고 효적비를 임시로 다른 곳에 옮겨 모셨습니다. 젊은 후손들은 공무나 산업전선에서 생활에 분주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효적비 재건립을 미루어 두고 있을 때, 선조님의 기일이 되면 고향에 계신 저의 어머니(백이순), 숙부모님(석년38세손,배갑순), 당숙님들(용채,학채,용원38세손)께서 증조할아버지 효적비 재건립을 후손들에게 재촉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후손들이 늦게나마 어르신들의 효적비 재건립의 뜻을 받들어 재건립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증손들(규열,두환,순근,보근39세손)과 고손(광습40세손)이 효적비를 재건립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아, 2011년 3월 26일에 광주에 계시는 경래, 현근(38세손)당숙과 규열, 두환, 순근(39세손)등 다섯 사람이 모여 증조할아버지 효적비를 재건립하기로 합의하고, 재건립 추진위원회와 재건립 추진지도위원회를 두기로 했는데, 두 위원회 임원은 상호 연락 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비문 후면에 증조할아버지 사형제 자손들과 그 부부 이름을 새기기로 하고, 모든 경비는 자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재건립 장소는 경래 당숙께서 자손들이나 통행인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기 소유의 밭(보성읍 옥평리 737번지)으로 하자고 제의하였고, 모두 그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기존 비문은 한자로 쓰여져 있어서 한문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읽어 효행을 알 길이 없어 고손(광습 40세손)이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에게 한글 번역을 의뢰하기로 하였습니다. 또, 재건립 중에 발생한 기타 사항은 두 위원회의 임원들에게 일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증조할아버지 효적비는 재건립되어 2011년 추석절에 제막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옛 성인들은 효를 알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 하였고, 효는 사람의 만 가지 행위의 근본이라 했습니다.‘나’한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선조들이 이 땅에 오셨고 가셨습니다. 또‘나’로 하여금 많은 후손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나’한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이 존재는 몸에 필요한 양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조상님들이 전수해주신 문화양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금보다 더 잘 살게 되고, 자식도 키워 놓은 후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지 하고 자주 다짐들을 합니다. 이런 조건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날 낳아주신 부모님은 나를 기다려 주시지 않고 저 먼 시간의 뒤안길로 벌써 가셔 버립니다. 후회한들 다시 부모님은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란, 우리 증조할아버님처럼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자기가 처한 그 때 그 상황에서 있는 몸까지 드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란 것을, 내일 모레면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76세)서야 철이 들어 어리석은 불효자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후회한들 뒤늦게 들은 이야기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손부(백이순)에게 허벅지 칼자국 흉터를 보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곪지도 않고 며칠 지나서 쉽게 치료되었다고 하셨답니다. 그 흉터는 어린애의 손바닥만 했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생각할 때 하늘이 축복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고종 임금께서는 즉위 31년째 되는 1894년에 증조할아버지 효행을 지방 관리들의 상소를 통해 듣고 당대 천하제일의 효자인‘휴재’선생의 효행에 빗대어 칭송하고 교지를 하사 하시고, 모든 백성들은 우리 증조할아버지 효행을 생활에 금과옥조로 삼아 살아가도록 교훈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기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자는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비문에 새겨져있는 모든 자손들과 또, 앞으로 올 자손들은 이 비문을 읽고 감명을 받아 효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면서 이 불효자 규열은 감히 증조할아버지 효적비 재건립의 경유와 제언을 썼습니다.
2011년 4월 7일
- 39세손 규열이 삼가 쓰고,
규열의 벗인 소설가 청주인 한승원이 감수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14893A4DD06386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