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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 회화 100선 Ⅱ [전통계승화와 추상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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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yh45
2013. 11. 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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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 회화 100선 Ⅱ
[제3부 전통의 계승화 변화, 제 4부 추상미술의 전개 1960, 70년대]
□ 제3부: 전통의 계승화 변화 (수묵채색화)
19세기 중엽까지 특수계층에 국한되어 향유되던 전통적인 수묵채색화는 개화기와 20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서화에 있어서 종래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태도와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들여 변화하려는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분된 구도를 띄게 된 것이다.
1918년 창립된 서화협회는 미술교육, 휘호회, 전람회, 작품 매매 등과 같은 전문적인 활동을 표방한 한국근대미술의 최초 미술인단체로서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지속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서화협회는 전시 이외에도 <서화협회보>의 발간과 1923년 서화학원 개설을 통해 후진 양성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인식 전환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서화협회에 참여하고 여기에서 배웠던 많은 이들은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화단을 이끌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는 동양화부와 서양화부가 중심이었는데 수묵채색화는 이러한 공모전에 의해 본래의 전통적 예술관이 변화하게 되었다. 주제에 있어서는 기존의 실경산수화, 사군자, 서예 이외에 인물화, 풍속화, 역사화와 같은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였지만 점차 사군자와 서예의 중요도가 약화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색의 탈피와 모더니즘의 수용은 수묵채색화가들에게 제일 중요한 과제였다. 수묵채색화가들은 입체파(Cubism),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서양의 현대미술을 융합하였다.
또한 1960년대 이후 전위미술의 등장으로 인해 수묵채색화단은 반전통적인 조형이념과 기존의 보수적인 체제에 도전하려는 의지에서 추상미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상범 <아침(추경산수)>. 1954. 이응노 <향원정> 1959. 변관식<외금강 상선암 추색> 1959,
김기창<아악의 리듬> 1967. 천경자<길례언니>1973, <청춘의 문> 1968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이당(以堂), 다른 이름은 양은(良殷)이다. 1892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御眞畵家)를 지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제미전(帝美展)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에 입각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도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림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무엇보다 인물에 있었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 이래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線描)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산수풍경, 문인화(文人畵)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간성(看星)》《향로》《군리도(群鯉圖)》《춘향초상》《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기명절지(器皿折枝)와 화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70년에 회고전, 1971년에 팔순전(八旬展)을 가졌다
김은호 < 간성 A Woman reading for fortune of the day >, 1927.
매우 일본적인 화풍과 색채가 진한 작품인 동시에 동양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다. 담배를 피며 점을 보고 있는 여성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만 여성의 몸가짐은 매우 단아하여 아이러니했다. 전체적인 색조나 새가 있는 새장을 묘사한 것은 전형적인 일본 화풍이다.
김은호 < 논개 영정 > , 151 cm x 78.5 cm, 비단에 수묵채색, 1955
청전 이상범 [靑田 李象範 : 1897-1972]
이 시대의 대표적인 수묵채색화가인 이상범(1897-1972)은 한국의 전원을 그렸는데, 조선시대의 산수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켰다.
호는 청전(靑田).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몰락한 선비 승원(承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활고 때문에 1915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학비를 받지 않았던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에 입학, 1917년 수료한 뒤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노수현과 함께 2인전을 개최하는 것으로 중단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29년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이어서 추천 작가와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 재직시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 후 1933년에 자택에 설립하였던 청전화숙(靑田畫塾)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4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이에 참여하여 추천 작가·심사 위원·고문 등을 역임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부터 1961년의 정년퇴직 시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서화미술원과 경묵당 수학 시절인 초기에 안중식의 화풍을 따라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개인 소장의 「산수도」(1919년)와 제3회 및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모연도(暮煙圖)」(1924년)·「초동도(初冬圖)」(1926년)를 들 수 있다.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는 것은 1945년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격조 높게 다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동아일보사 소장의 「설로도(雪路圖)」(1957년), 개인 소장의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다. 그는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더불어 한국 산야와 전원의 독특한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풍의 화법으로 구현시킨 근대 한국화의 대표적 산수화가이다.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 세계를 개척,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대표작품으로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雪路圖)》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 등이 있다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3·1문화상, 1965년 서울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상범 < 추경산수(秋景山水) - 아침(朝) >, 1954, 종이 수묵담채, 69.3cm X 274cm,
청전 이상범은 그의 호에서 따온 '청전양식(靑田樣式)'이라 불리는 한국적 산수화의 전형을 창조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
[왜 名畵인가] [14] 이상범의 '아침' - 가을바람이 분다… 이 소박한 화폭에
아주 많은 막힘이 속을 긁어대던 몇 날이 지나고 이 그림 앞에 섰습니다. 가지런해졌습니다.
이 그림을 당신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추경산수'라는 부제가 붙은 '아침'이라는 작품은 개울이 있으나 개울의 절반은 잘라내고, 그 위 가을 잔바람 속에 잔감정을 숨겨놓은 명작입니다. 이 그림 앞에 있으면 금방이라도 가을이 심장에 닿아 흙빛이 될 것만 같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은 강원도나 충청도 어디쯤일 거라 넘겨짚습니다. 제가 자란 곳은 순한 풍경보다는 억센 풍경이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충청도 제천의 산골 마을, 뒷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강원도였습니다. 지게를 진 사내와, 점심을 차려 머리에 이고 사내를 따르는 아내. 두 남녀의 모습은 어린 시절 흔히 보는 아침 모습이었습니다. 밭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른 아침 아침밥을 지어 먹고 밭으로 나가 해가 져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점심에 먹을 음식을 광주리에 담아 일터로 향했던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만 하는데도 금세 산골 일상의 고단함이 와 닿습니다.
이상범(李象範·1897~1972)은 화폭을 다 채워 그리지 않습니다. 여운을 주듯 왼쪽 끝자락과 오른쪽 끝자락을 재단합니다. 재단을 하면서 담지 않은 풍경에 예의를 갖추듯 수줍게 감추고 여밉니다.
그의 그림은 굉장한 횡폭을 과시하지만 그 횡폭 위에 소박(素朴)을 차리는 특징을 보입니다. 소박의 선(禪)입니다. 아마도 그런 서정의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 그림을 같이 보고 싶었습니다. 가을에 만나지 못했음도 이 버석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함께 듣고 싶지 못함도 마음을 마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만나지 못한다면 언제 한번 저 풍경 속에서나 마주치지요.
[출처] : 이병률 시인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청전 이상범 < 설촌 >
이상범 < 유경 >, 77 cm x 344 cm, 종이에 수묵담채, 1960
이상범 <초동 初冬, Early winter >, 1926.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 153 cm × 185 cm
이 그림 역시 어느 집이나 하나쯤 걸려 있었을 그런 한국 풍경화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듯한 녹색의 터치로 봄기운을 나타냈다
고암 이응노[顧庵(竹史) : 1904-1989] - 1983년 프랑스로 귀화
이응노(李應魯)는 1904년 충남 홍성(洪城)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세 때 서울로 올라와 서화계의 거장으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는 김규진에게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고, 이듬해인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선전에서 묵죽화로 여러 번 입선했으며, 이로 인해 대나무를 잘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호 ‘죽사(竹史)’는 이때 해강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1930년대 들어 미술계에 야수파와 표현주의 등 유럽의 화풍이 실험되고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자 이응노는 전통 회화 안에 새 기운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심했다. 그는 화가로서 자리도 잡았고 나이도 이미 서른을 넘겼지만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남화(南畵)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에게 사사했다. 또한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풍경화가 주를 이뤘다.
이응노는 1945년 3월 귀국했다. 곧이어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고, 그는 1946년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48년부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의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되고 5년 뒤에 6.25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혼란에 빠졌고, 그 와중에 그의 아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거리풍경-양색시》(1946), 《피난》(1950), 《재건 현장》(1954), 《영차 영차》(1955), 《난무》(1956) 등의 작품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호소력 강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응노는 1958년 그의 나이 55세 때 세계 미술계에 나아가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경쟁하기로 다짐하며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로 바로 가 1년간 활동하다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이미 대상의 사실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반추상적 표현을 선보였던 그는 파리로 이주한 뒤에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추상 미술의 영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먹이나 물감 이외에 천이나 한지 등의 재료들을 캔버스에 붙여 만든 콜라주나 태피스트리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작업에 도입하면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파리 화단의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던 전위적 성향의 폴 파케티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었다.
1962년 폴 파케티 화랑의 첫 개인전에서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 완전추상 작품을 발표해 호평을 얻었고,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1964년 파리 세르뉘시 미술관 내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유럽인들에게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쳤다. 1965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는 1967년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 강제 소환되어 옥고를 치르고, 1969년 사면되었다. 이후 파리로 돌아간 이응노는 1970년대에 서예가 갖고 있는 조형의 기본을 현대화한 문자추상을 선보였다. 그리고 1977년 또 다른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활동 및 입국이 금지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생동하는 움직임을 문자와 인간 형상, 다양한 화법을 통해 표현해오던 이응노는 작고하기 10년 전부터는 오로지 사람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인간 군상’ 작업으로 이어졌다. 익명의 군중이 서로 어울리고 뒤엉켜 춤을 추는 듯한 풍경을 통해 그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어울림, 서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갈망했다.
이는 유난히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과 남북 분단, 정치적 혼란기의 여러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얻은 예술관, 시대의 의식과 호흡하는 예술에 대한 고뇌와 탐구를 함축한 조형적 결과물이었다.
이응노는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89년, 그가 사람을 그린 지 10년이 되던 해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되었다.
이응노는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다는 희망에 이 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정부의 입국금지 명령에 의해 끝내 희망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전시 첫 날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쓰러졌다. 그는 이튿날 8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리에서 활동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누워 있는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잠들었다. 2000년에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했으며, 2005년 이곳이 폐관하자 대전광역시가 이응노미술관의 수장품을 인수하여 대전광역시 이응노미술관을 2007년 5월에 개관했다.
주요 작품에는 《청죽》(1931), 《홍성 월산하》(1944), 《돌잔치》(1945), 《피난》(1950), 《대숲》(1951), 《우후(雨後)》(1953), 《난무》(1956), 《문자추상》(1964), 《무제》(1968), 《구성》(1973), 《군상》(1986) 등이 있다.
이응노 < 향원정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24 cm x 172 cm.
이응노는 동양화의 전통적인 필묵이 갖는 현대적 감각을 발견해서 전통성과 현대성을 함께 아우르는 독창적인 창작 세계를 구축한 작품활동을 펼친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응노 <구성 >_비닐에 채색_111 cm ×118cm_1971
운보 김기창 [雲甫 (雲圃) 金基昶 : 1913.2.18 ~ 2001.1.23.]
김기창(金基昶)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장티푸스를 앓고 그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다. 1930년 17세 때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수업을 받았다.
그림을 배운 지 6개월 만인 1931년 5월 《판상도무(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을 했다. 그 후 1936년까지 매년 선전에서 입선을 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4회 연속 특선을 기록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김기창이 그림에 입문한 1930년부터 1944년까지의 초기 학습시기와 성장기의 화풍은 스승인 김은호의 영향으로 일본화풍의 사실성에 충실한 채색화가 주류를 이뤘다.
또한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절제된 구성 속에 색채의 조화를 꾀했다. 《동자》(1930년대), 《가을》(1934), 《소와 소년》(1935), 《고담(옛이야기)》(1937)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선전에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김기창은 1943년 운니동 집에서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을 만났다. 박래현은 일본 도쿄에서 미술을 공부한 재원으로, 당시 선전에서 특선을 하여 시상식에 온 길에 화단의 선배인 김기창을 찾은 것이다.
김기창은 1945년 광복을 맞아 아호 ‘운포 雲圃’에서 ‘포(圃)’자의 사각형 틀을 없애고 ‘운보 雲甫’로 바꿨다. 이는 구속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1946년 김기창은 박래현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더불어 그의 화풍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의 채색 위주의 사실 묘사에서 벗어나 수묵담채화의 반추상적 경향을 선보였다.
《복덕방》(1953), 《엿장수》(1953), 《구멍가게》(1953)와 같은 연작은 그가 아내인 박래현과 함께 입체파적인 해체성향을 시도한 작품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산 피난 시절에는 《예수의 일생》 연작 30점을 그렸다. 이 연작은 예수를 우리나라 사람의 얼굴에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0년대에는 의도적인 우연의 형상을 통해 비정형의 추상세계를 지향하며 색채에서도 강렬함을 보여주었다. 《태양을 먹은 새》(1968)는 이러한 추상표현 시기의 대표작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독창적 화풍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가 탄생한 시기이다.
1976년 아내인 박래현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진 그는 한동안 붓을 들지 못하다가 이를 극복하고 자
기만의 고유한 양식을 완성했다.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연작, 그리고 1980년대의 ‘청록산수’ 연작은 그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새로운 표현 작품으로 현대적인 한국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김기창의 ‘바보산수’, ‘바보화조’는 회화의 순수성과 꾸밈없는 인간 본성을 표현한 것으로, 여기에서의 바보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말한다.
그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 파격적인 배치, 형태와 공간의 왜곡 등을 통해 형상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일탈의 세계를 새롭게 열어 보였다. 또한 서구의 현대적인 양식이 아닌 우리 고유의 전통화인 민화를 바탕으로 하여 해학과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1980년대 바보화풍은 청록산수로 변화를 갖는데, 산수화의 현대적 화풍으로 청록색의 짙은 농담이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청명한 기운이 더해져 독특한 수묵담채의 기법을 보여주었다. 청록산수는 김기창 특유의 자유스러움과 생명력 넘치는 힘이 잘 표현되어 대중적으로도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후기 다량으로 그려진 청록산수는 빠른 제작과 반복된 소재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김기창은 1990년대 초반 단색조 추상양식의 ‘점과 선’ 연작을 선보였다. 이 연작은 대형 화선지에 점과 선이 가득 찬 대담한 구성의 수묵 추상화로 서양의 액션페인팅과 유사하여 그의 독자적 화풍으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김기창은 1981년 6월부터 3개월 동안 세계 화필기행을 하고 돌아와 각 나라의 풍속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 신문에 연재했다. 그리고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충북 청원군에 ‘운보의 집’을 지었다. 1984년 ‘운보의 집’이 완공된 이후 김기창은 그곳에 은거하며 자연과 더불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다듬었다. 또한 장애인 복지 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김기창은 우리가 일상으로 보는 만 원 권 지폐에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을 그렸으며, 1993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에는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는 2001년 1월 23일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1934), 《복덕방》(1953),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아악의 리듬》(1967),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새벽 종소리》(1975), 《바보화조》(1976),
《청산도》(1976), 《오수(午睡)》(1976), 《달밤》(1978), 《바보산수》(1987),
《시집가는 날》(1988) 등이 있다
김기창 < 아악의 리듬 >,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cm X 98cm,
청각장애인인 운보는 소리를 들을수는 없겠지만, 색체와 선의 울림으로 진동을 만들고 소리를 시각화한 것이다
김기창 < 군작(群雀) >, 1959 종이에 수묵채색, 142 x 319 cm. 개인소장
[왜 名畵인가] [8] 김기창 <군작> - 이 엉겨붙어, 너희는 왜 싸우고 있느냐
나는 새를 싫어한다. 무서워서 가까이 않는다. 작은 참새도 손으로 만지지 못하고 참새구이는 당연히 못 먹는다. 낙엽이 우수수 밟히는 아파트의 공원길을 걷다가 까악 까치 소리가 들리면 정신이 사나워진다. 가을의 정취가 확 날아가 어서 집에 가야지. 서두르는 내 앞에 더 곤란한 적들이 나타나, 비둘기들이 비스킷을 쪼고 있다.
요즘 비둘기들은 간덩이가 부어 사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새똥을 피해 빙 돌아가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잠을 통 못 이루며 지난가을부터 계절을 심하게 앓아왔다. 전시회라도 볼까? 조각하는 젊은 친구, 조윤주를 불러냈다.
한국 근현대 회화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엄청난 작품들. 김기창의 '군작도' 앞에 오래 머물렀다. 천 마리쯤 되려나. 겹쳐진 작은 새들의 이미지가 어쩐지 불길했다. 제작 연도는 1959년. 육이오를 겪은 가난한 나라. 서로 잡아먹을 듯, 엉겨붙은 작은 생명들은 밥그릇을 다투는 한국인들이었다.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동포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 데모대를 막아선 전경들이었다. 전시회장에 몰린 관람객들, 내전 중인 시리아, 2013년에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치고받는 대한민국의 정치판이 겹쳐서 어른거린다.
조금 색이 진하고 옅을 뿐. 비슷하게 생긴 참새끼리 같은 하늘 밑에서, 니들 언제까지 싸울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툼이 계속되리라는 생각에 더 무서워진 그림. 덕수궁 하늘을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만이 홀로 아름다웠다. 출처] : 최영미 시인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김기창 < 가을 >, 1934, 170.5 cm x 110 cm, 비단에 먹,채색,진채
새참이 든 바구니를 이고 등에는 졸고 있는 아이를 업은 소녀와 낫을 들고 따라가는 아이가 묘사된 채색 그림이다. 일제에 의해 수탈당한 가난한 농촌의 현실이 손에 잡힐 듯하다. 아이들이 맨발로 들판을 걸어 다니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가을>을 나이가 어린 아이들도 힘든 농사일, 가사일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농촌의 어려운 생활상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김기창 < 보리타작 >,_84 cm x 267 cm, 종이에 수묵채색_1956
[왜 명화인가?] [19] 김기창 '보리타작'- 강렬한 線의 탄력… 생동하는 한 폭의 파노라마
흰 저고리, 치마,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여인네들이 분주하게 타작을 하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두어들이는 농부들의 뿌듯한 감개가 더없이 리얼하게 전달된다. 이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한 시대의 풍속이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되살아나면서 애틋한 상념에 잠기게 한다.
구도는 가운데 보리를 훑고 있는 세 여인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면서 이를 에워싸는 사람들이 주변을 장식한다. 짙은 먹과 넓은 먹이 적절하게 구사되면서 강한 필선의 요약이 자칫 산만해질 수 있는 상황을 더욱 탄탄하게 조여주는 특징을 보인다. 같은 장면을 사실적인 묘법으로 구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타작마당의 역동감 넘치는 장면 전개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선에 의한 구성의 탄력과 소박하면서도 강인한 표현의 욕구가 아니었다면 한갓 삽화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의 뛰어난 조형의식을 만나게 된다.
김기창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물을 입체적인 방법으로 구현해내는 실험을 펼쳐보였다. 동양화(한국화)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대담한 형식실험을 시도해 준 것이었다. 일본화의 영향이 잔재했었던 당시, 운보의 방법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오던 사실적인 풍속도가 이 새로운 방법에 의해 재창조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실험적 의지는 만년까지 이어졌다.
심산 노수현 [ 心汕 盧壽鉉 : 1899 ~ 1978.9.6. ]
호는 심산(心汕). 황해도 곡산(谷山) 출신. 재석(載錫)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3·1 운동 때 민족 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인 할아버지 헌용(憲容) 밑에서 자랐다.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중퇴한다. 그리고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畫科)에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의 지도 아래 전통 화법을 수학하였다. 1918년에 정규 과정을 졸업하였다.
1921년부터 서화협회 전람회에 정회원으로 해마다 출품하였다.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여 입선·특선을 거듭하였다. 1945년 이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 위원 및 고문,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1923년 서화미술회 동문인 이용우(李用雨)·이상범(李象範)·변관식(卞寬植) 등 의욕적인 젊은 한국 화가들과 그룹 활동으로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대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면서 형식적 전통주의 답습 또는 맹종에 반기를 들었다.
사생과 현실 시각에 입각한 그들의 사실적인 수묵화(水墨畫) 풍경들은 전통 회화의 시대적 변혁을 도모하면서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동양화부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것들은 종래의 관념적 산수화법의 극복이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전까지의 단순한 향토적 풍경 혹은 현실적 자연경(自然景) 표현에서 차차 자신의 방법적 양식을 정립시켜 갔다.
그것은 바위와 암산의 골격 및 표상을 통하여 이상화된 마음속의 산수경 구현과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질감을 수반한 필법의 고격한 독자성이었다. 만년에는 밝고 강한 색점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기법상의 변화를 보였다. 대표작으로 「산촌(山村)」(1956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계산정취(谿山情趣)」(1957년, 호암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노수현 < 성하 > 63 cm x 128 cm, 종이에 수묵담채, 1956
노수현 < 유곡 > , 215 cm x 163 cm, 종이에 수묵담채, 1956
우향 박래현 [ 雨鄕 朴崍賢 : 1920 ~ 1976.1.2.]
호 우향(雨鄕). 평남 진남포(鎭南浦) 출생. 1944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1940년부터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8·15광복 후는 남편 김기창(金基昶)과 12차례 부부전(夫婦展)을 가졌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기창과 같이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실험(造形實驗)을 전개하였다.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받고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위원을 역임한 뒤, 서울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1969년 뉴욕 플래트 그래픽 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연구하여 동양화의 실험적 의욕을 판화란 매체로 실현시켰으며, 1974년 귀국 판화전을 계기로 새로운 시도를 전개할 무렵, 1976년 정초에 타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다분히 일본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광복 후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채(設彩)와 면 분할에 의한 화면구성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였다.
1950년대에는 극히 일상적인 시정풍경에서 모티프를 찾았으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대상을 극복한 순수추상의 세계로 나감으로써 명쾌한 정신성을 추구하였다. 채색의 장식적 톤은 종합적으로 현대 서양의 입체파가 도달한 조형방법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작품으로 《노점(露店)》 《이른 아침》 《화장(化粧)》 등이 있다.
박래현 < 노점 >, 1956, 267cm x 210 cm, 화선지에 먹, 채색.
박래현이 남편 김기창과 6.25 당시 친정인 군산에서 시장에 나온 여인들을 그린 작품으로 1956년대
한민국미술전람회 대통령상수상작.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구 모더니즘의 표현양식을 추구하였다
천경자 [千鏡子 : 1924 ~ ]
1946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수많은 전시는 물론 지구를 몇 바퀴나 돌면서 쓴 해외여행기와 수필, 자서전 등 글로도 필명을 날렸던 여류화백.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 화백은 전남여고를 거쳐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광주여고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수차례의 전시회를 가졌다.
1965년 5월 문예상, 1971년 서울시 문화상, 1975년 3.1문화상, 1979 예술원상, 1983 은관문화훈장,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2년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천경자의 작품세계는 1942년부터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1969년까지를 전기, 그리고 1970년 서초동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를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에는 주로 현실의 삶과 일상에서 느낀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죽음 등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는 외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시기로 볼 수 있다. 후기는 특히 꽃과 여인을 소재로 환상을 표현하거나 해외 여행에서 느낀 이국적 정취를 통해 원시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千鏡子·89)의 그림도 전시장 벽에 걸렸다. 자아도취에 빠진 몽환적 여성을 그린 '청춘의 문'(1968년)을 비롯해 '목화밭에서'(1954년) , '길례언니'(1973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6년)다.
천경자 (89) <길례언니>, 1973, 종이에 채색,33.4cm X 29cm, 종이에 채색,개인 솓장
[왜 名畵인가] [3] 천경자의 '길례언니'- 이 여인의 직업은 소록도 간호사
제목에 얽힌 사연을 모르면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천경자의 '길례언니'를 나는 그냥 힐끗 지나칠 뻔했다. 참, 화려하구나. 붉은 꽃으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노란 옷을 입은 여인. 그녀를 둘러싼 대담한 원색에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운 이름이 붙었다. 길례언니.
초상화의 주인공은 소록도 나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화가의 선배라니. 그림이 다시 보였다. 그것들은 환상의 꽃, 역설의 꽃이었다.
나병 환자를 돌보는 여인의 머리에 그처럼 아름다운 꽃을 얹어준 화가. 예술의 힘을 보여준 거룩한 정신 아닌가. 보통학교 시절의 교정에서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길례언니는 이후 천경자(89)의 인물화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이 되었다.
길례언니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나도 안다. 중풍으로 반신이 마비된 아버지, 뇌수술을 하고 온몸에 줄을 꽂은 어머니를 돌보던 간병인들은 한두 명의 고약한 경우를 제외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 텐데. 환자의 대소변을 치우고, 내 아비의 입에 죽을 떠 넣어준 요양보호사님들에게 꽃을 달아주지는 못할지언정, 고맙습니다, 말하고 싶다.
천경자 화백은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내가 감탄한 화가의 말. "한 많은 여인이 머리에 꽃을 얹는다." "아름다울수록 고독이 맺히고, 그 고독을 음미한다." 친구 천경자를 노래한 박경리의 시처럼 그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는 고약한 예술가였나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천경자 <청춘의 문>. 1968,
영화 청춘의 문에 등장하는 여배부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 마치 꿈 속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국적인 여인이 환상적인 색채의 의상을 입고 고개를 하늘로 향한 채 지그시 감고 있는 여주인공이 어꺼한 "환상" 에 젖어있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미를 갖춘여인의 묘사는 역설적으로로 자신의 초라한 일상적 현실을 표현하는 반어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천경자 < 굴비를 든 남자 >, 1965, 종이 채색, 150 cm X 17.5 cm
천경자 화백은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유명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녀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 전시를 통해 왜 그녀가 ‘음유시인’, ‘만인의 연인’이라 일컬어 지는 지를 알게 되었다. 이 그림은 작가 자신의 이혼이라는 아픈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굴비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사내를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뒷 배경의 무지개 풍선과 함께 묘사하여 이것이 그녀가 바라는 꿈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천경자 <목화밭에서> 1954,
천경자의 1954년작 ‘목화밭에서’. 세로 114cm, 가로 89㎝.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2006년 3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천경자- 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으로 1960년대 꿈과 환상의 세계로 요약되는 독자적 화풍이 정립되기 이전 제작된 작품으로 어느가족의 나들이를 묘사하고 있다,
원시적이면서도 화려한 색채,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 빈틈없는 구도,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 자신의 이야기를 푸어내는 문학적 요소등 천경자 화풍의 근원을 엿볼수 있는 작픔으로 2006년 6월 경매시작 가격으로 9억원이라는 높은 가격이 책정되기도 했다.
이 작품을 본 순간 정말 아름답다라는 느낌과 함께 나의 기분도 넉넉해지면서 포근함을 느꼈다.풍요롭게 흐드러진 목화밭 안에서 빨간 선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 폭 안겨 있는 아기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 쪽 팔을 머리에 괴고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평온한 오후를 즐기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그녀가 상상하는 행복하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왜 명화인가?] [20] 천경자 '목화밭에서'
1973년 현대화랑 전시에서 처음 만난 '길례언니'의 환상적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천경자 선생님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 슬프지만 길고 아련한 여운이 느껴지는 작품마다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화려하고도 고독한 인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천경자 선생님은 나에게 '화가 천경자'라기보다 '여자 천경자'로 느껴진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당면한 삶과 사랑 속에서 관심과 주제를 찾았기 때문이다. 미술이 한 사람의 기억과 맞물리고 그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면, 나는 이것만으로도 그 작품의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
덕수궁에 전시되고 있는 천경자 선생님의 '목화밭에서'는 선생님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전임강사 시절 그린 그림으로 대한미협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목화꽃 만발한 풀밭에 가족이 모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붉은 옷을 입은 긴 머리 여인은 화가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그린 것이다. 아이 아버지는 목화밭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듯하고, 아기 엄마는 행복한 눈빛으로 남자를 보고 있다. 바구니에는 소담한 목화가 담겨 있고, 뚜렷한 선과 색채가 평화로운 풍경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운명에 맞섰던 강한 여성 천경자가 꿈꿨던 건 결국 이렇게 소박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멀리 둥실 떠있는 뭉게구름에서 상념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꼭 20년 전 호암갤러리에서 선생님의 전시회를 열어 드린 인연으로 함께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내가 나이 70이라고 마음도 늙은 줄 알지? 지금 당신 마음과 똑같아. 더 애틋하면 애틋했지" 하시며,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정겹게 말씀하시던 게 생각난다. 내가 지금 선생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말씀이 마음에 더 깊이 와 닿는다.
또한 천경자 선생님이 화가라기보다 그리운 한 여성으로 떠오르는 것은 지난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평소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천경자 선생님과 여고 시절을 함께 보내셨던 어머니는 "경자는 공부 시간에도 그저 쓱쓱 그리면 그럴듯한 그림이 되곤 했지" 하시면서 천경자 선생님을 추억하셨다. 이제 한 분은 유명을 달리하셨다. 또 다른 한 분은 타국의 낯선 하늘 아래서 어떤 생각을 하시면서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 계실까. 아스라한 그리움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길례언니'는 천경자의 1973년도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던 화가의 선배 언니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천경자 <나의 슬픈 전설 22페이지 > 1977,
이작품 슬픈전설의 22페이지 없이는 천경자를 떠롤리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퀭한 두눈, 긴목과 푸어헤친 생머리,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곷과 여인과 뱀이 굿판을 벌이는데 작움은 그녀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스물두살의 경험을 우울하게 화상하는 작품 속에서 고통의 상징아자 수호신이었던 뱀을 화관으로 쓰고 있다.
비스듬히 꽂은 분홍빛 장미한송이는 옷의 푸른빛 때문인지 더욱 애잔해 보이고, 먼 곳을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은 질곡의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서늘한 느낌으로 자기의 인새의 주요한 사건들을 회상하면서 그렸을 이작품에서는 인생을 체념하고 초월하려는 태도마져 엿보인다.
뱀에 대한 화가의 경험은 특히 남달랐는데 서울에서 개인선을 마치고 광주로 내려가던 중 꽃뱀 두마리가 찔레꽃 밑으로 지나는 환영을 보았다고 하며 또한 뱀띠 남자와의 고톹스러운 사랑으로 인해 뱀을 그리며 생활고와 혈육의 죽음, 순조롭지 않는 결혼과 연애의 시련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았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종이에 채색, 130*162, 1976년작
1974년 18년간 재직하던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문득 아프리카로 떠난다 남태평양과 유럽, 남아메리카가지 여행에서 므낀 선명한 색감과 원시적 인상을 자신의 작품세계에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검은대륙 아프리카의 풍광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리라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그곳의 풍물과 서민들의 삶을 스케치한 천경자 선생은 그 대륙의 이미지에 자신의 49세 인생을 중첩시킨 대작을 1년에 걸친 긴 작업끝에 완성했다.
1976년 국전에 출품한 이 작품은 아프리카 기행의 완결편이라고 할 만큼 구도가 다양하고 첩첩이 발라 올린 채색이 투명하다. 작가의 고독이 코끼리 등에 탕, 고개숙인 마녀로 묻어나는 작품이다. 제목이 주는 뉘앙스처럼 전설 같은 한 여인의 살아온 반생이 정과 한으로 배어 있어 더욱 찡한 느낌을 준다.
킬리만자로, 바우바우(잎도꽃도 안피는 나무), 사자, 기란, 코끼리, 맷돼지, 칠면조, 갈대, 그리고 꽃과 여인이 공존하는 '아프리카의 인상 전체를 농축시킨' 새로운 감각의 역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화가 천경자가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려는 창조의 정열이 응어리로 뭉쳐 있어 작품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청강 김영기 [晴江 金永基 : 1911.11.30 ~ 2003.5.1.]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청강(晴江)이다. 1911년 11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국의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다. 1932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36년 중국 베이징[北京] 보인대학교(輔仁大學校)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거듭 입선한 뒤,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이듬해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창립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홍익대학교·경희대학교·고려대학교·세종대학교·중앙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 백양회(白陽會) 회장(1960), 전각협회 회장(1974), 대한미술원 창립 초대회장(1977), 한국미술협회 운영위원장(1994)·고문(1995) 등을 지냈다.
1968년 동양미술연구소를 열고, 1970년대 '동양화'라는 용어가 적당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처음으로 '한국화'로 바꾸어 쓰자고 주장하였다.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 현대한국회화전(1957), 샌프란시스코 동서미술전(1958), 한국미술협회 동남아시아순회전(1961)을 비롯해 20여 회에 걸쳐 국내외 초대전에 출품하였고, 백두산여행기념작품전(1991), 캐나다 토론토 작품전(1994), 로스앤젤레스 개인전(2000) 등 다수의 작품전과 개인전을 열었다.
문인화적인 필치와 현대적 표현을 추구하는 한편, 대륙 풍의 화조화를 즐겨 그렸고, 나이가 들어서는 남해 다도해의 풍광을 소재로한 청록조의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현대 한국화의 거목으로, 저서에는 《조선미술사》(1948), 《신라문화와 경주고적》(1953), 《동양미술사》(1970), 《동양미술론》(1980), 《중국대륙 예술기행》 등이 있고, 《마르코 폴로 대(大)여행기》를 번역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월하의 행진〉〈계림의 가을〉〈백두산 천지〉〈장백산 폭포〉등이 있고, 자랑스런 서울시민상(1994), 은관문화훈장(1997)을 받았다
김영기 < 향가일취 >, 170 cm x 90 cm, 화선지에 수묵담채, 1946
소정 변관식 [小亭 卞寬植 : 1899-1976 ]
황해도 옹진 출신. 호는 소정(小亭). 한의사 정연(晶淵)과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晋)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둘째 아들이다.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1917년 외할어버지인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書?美術院)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이 본격화되었다.
1923년 서화미술원 출신의 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 등과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다.
1925년 김은호(金殷鎬)와 함께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1929년까지 신남화풍(新南?風)을 접하면서 화풍의 폭넓은 발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에는 서화협회(書?協會)의 간사일을 맡아보았다. 1937년부터는 서울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實景)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 관여하고 심사 위원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 탓으로 1957년 이를 떠나 여생의 대부분을 재야 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며 보냈다
갈필(渴筆)의 적묵법과 파선법 위에 갈색으로 응결시켜 짙고 거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은 대체로 3기로 나누어 변천하였다.
1917년에서 1936년까지의 초기는 주로 서화미술원이나 일본 유학 등을 통하여 그림 수업을 받으며 자신의 화풍 형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던 전습기였다.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과 서구적 기법이 가미된 일본의 신남화풍이 근간을 이루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이미 거친 화면 처리와 시선의 다각적인 전개 등으로 그의 독자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37년 서울을 떠나 전국을 여행하면서 실경 사생(實景寫生)을 통하여 자신의 화풍을 다졌던 중기는, 그가 광복 이후 참여하였던 국전을 떠나기 직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누각정경도(樓閣情景圖)」(1939년)와 「산수춘경도(山水春景圖)」(1944년), 「해금강삼선암추색도(海金剛三仙巖秋色圖)」(1955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향토색 짙은 실경을 소재로 적묵법과 파선법이 밀도 있게 다루어졌다.
1957년부터 그가 타계하기까지의 후기는, 적묵법과 파선법과 더불어 분방한 호초점(胡椒點)을 즐겨 다루었던 원숙기이다. 특히 구도에 있어서 황금 분할식 공간을 시도하기도 하고, 정물의 일부분을 대담하게 부각시키는 등 다양함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농가도」(1957년), 동아일보사 소장의 「무창춘색도(武昌春色圖)」, 「외금강삼선암도(外金剛三仙巖圖)」(1970년) 등이 있다.
변관식 < 외금강 상선암 추색 >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50cm X 117cm
1930년대부터 금강산을 여행하며 많은 그림을 남긴 변관식의 한국적 산수화의 대표작이다.변관식은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동양화에 박진감과 입체파 풍의 구조적인 해석을 선보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한국적이면서도 해학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다.
변관식 < 내금강 보덕굴 >, 264 cm x 121 cm,종이에 수묵담채, 1960
변관식 < 내금강 진주담 >, 263 cm x 121 cm, 종이에 수묵담채, 1960
[왜 名畵인가] [16] 변관식의 '내금강진주담'- 치열한 寫生… 생생한 금강산
계곡을 타고 내리는 물이 몇 번 굽이를 거쳐 못으로 흘러든다.
화면은 상하로 3등분되는 구도를 보이는데, 앞쪽의 못과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가 이루는 근경, 바위와 수목으로 이루어지는 중경, 그리고 그 너머로 돌올하게 솟아오른 원산의 전개다.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굴곡 있는 변화로 계곡의 깊이와 돌출하는 산세의 웅장함이 더해진다. 위로 솟구치는 산세와 급히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서로 교차하면서 화면은 더욱 긴장감이 넘치는 경관을 만들어 놓는다. 속진을 벗어난 금강 선경의 맑은 정기가 선뜻 다가온다. 화면 가운데쯤 넓은 바위 위에 두루마기 입은 세 노인네가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시조라도 읊고 있는 모습이다.
금강산은 조선시대부터 많이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근대로 이어졌다.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은 30년대부터 금강산을 답사하면서 진주담, 보덕굴, 삼선암, 구룡포, 단발령 등 금강의 여러 명소를 실사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 전통이 퇴락할 무렵 소정은 금강산 사생을 통해 우리 산수의 독특한 정취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광복 후 갈 수 없는 금강산은 그의 오랜 사생 여행을 통해 입력된 기억으로 재현되었고, 진경산수의 맥을 되살렸다. 청전(이상범)이 펑퍼짐한 야산을 무대로 한 넉넉한 한국 산수의 한 전형을 만들었다면, 소정은 변화가 풍부한 산곡의 풍경을 힘찬 필력과 웅장한 구도로 구현해내었다.
극동 삼국을 통틀어 근대기 수묵산수의 이만한 걸작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금강의 선경과 더불어 그 속에 약동하는 소정의 치열한 사생 정신 앞에 잠시 넋을 잃는다.
[출처] : 오광수 한솔뮤지엄 관장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변관식 < 농촌의 만추 >, 116 cm x 264 cm,종이에 수묵담채,1957
변관식 < 단발령 >,5 cm 5x 100 cm, 종이에 수묵담채, 1974.
[왜 名畵인가] [12] 변관식의 '단발령' ㅔ "朴양, 5000원만… " 그에겐 술과 산천과 그림뿐
반도화랑에 근무했던 1960년대, 그림 배운다는 핑계로 일요일마다 돈암동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1899~1976) 선생 댁에 갔다. 선생은 가르쳐주지는 않으시고 자기 그림에 먹점만 찍고 계셨다. 안 그래도 시커먼 그림을 더욱 꺼멓게 만드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경상남도 진주 태생이라는 사모님의 음식 솜씨에 감탄하며 주린 배를 채우고, 몇 년 동안 사군자만 그려보다가 끝났다.
1970년에 인사동에 현대화랑을 열었다. 다른 작가 그림은 더러 팔리는데 시꺼먼 색이 많은 소정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선생은 저녁에 자주 화랑에 오셨다. 어떤 날은 사모님 몰래 나오시느라 신발도 없이 맨발로 시발택시를 타고 오셨다. "박양, 5000원만…." 그 5000원은 왕복 택시비와 소주 값이었다.
"큰 화실에서 대작을 하는 게 소원"이라고 늘 말씀하셔서 1974년에 20여 점을 놓고 개인전을 열어 드렸다. 이때 이 그림 '단발령(斷髮嶺)' 등 주옥같은 작품이 몇 점 나왔다. 전시도 성황을 이루어 사시던 한옥을 팔고, 2층집을 구하셨다. 그러나 이후 2년간 대작을 한 점도 못 그리시고, 큰 병풍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돌아가셨다.
'단발령'은 해학적이고 현대적인 작품이다. 구름 대신 흰 공간을 속도감 있게 펼쳐놓아, 금강산 1만2000봉이 더욱 힘 있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화면 아래쪽 오솔길, 두루마기를 입은 남정네 일곱 명이 팔을 휘젓고 바쁘게 가는 모습이 TV를 보듯 입체감을 준다. 산수화에서 달려가는 인물을 그린 건 아마 소정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자신을 표현했으리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산수화가 겸재의 '금강산도'라면, 근현대의 으뜸가는 산수화는 소정의 금강산 연작이라 생각한다.
제자 김학수 화백의 말대로 "술과 산천과 그림 외엔 아무것에도 마음 두지 않았던" 소정. 선생님만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소주만 안 드셨으면 오래 사셨을 텐데…. 많이 못 팔아드려 아쉽고, 죄송하다. 눈물이 난다.
[출처] : 박명자·갤러리현대 회장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안상철 < 잔설 >, 210 cm x 153 cm, 종이에 수묵, 1958
[왜 名畵인가] [21] 안상철 '잔설'- 집집이 지붕 위엔 사연이 소복
그땐 그랬다. 하늘로 치솟은 고층 건물도, 거리를 쌩쌩 달리는 차도 적었던 시절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거리의 소음도 잦아들면 사람들은 집안에 모여 겨울을 나는 이야기들로 온정을 나누었다. 이 그림 속, 크고 작은 구멍이나 둥글거나 네모난 굴뚝은 집집이 사연을 전하는 듯 정겹기 그지없다. 옹기종기 맞붙어 있는 기와지붕 사이로 소복이 내려앉은 하얀 눈의 모습은 1950~1960년대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지내 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풍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연정(然靜) 안상철(安相喆·1927~1993)의 '잔설'은 지금은 과거의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는 기존의 전통 화법을 과감히 뛰어넘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화가 역시 전통 화단에 새 바람을 일으킨 기린아로 주목받았음은 물론이다. 화선지, 먹, 붓을 사용해 수묵화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가 하늘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부감 시점을 활용한 파격적인 구도와 현대적인 원근법, 분명 구상적인 풍경을 다루고 있음에도 수평과 수직, 점과 선을 이용해 추상적인 리듬감까지 느끼게 하는 이 그림에 평단과 관중은 모두 찬사를 보냈다. '잔설'은 1958년 국전에서 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국전에서 대통령상까지 거머쥔 안상철은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즘에 기반을 둔 작풍을 버렸다. 1960년대부터는 수묵화에 돌과 같은 오브제를 도입하거나 심지어 고목에 모터를 달아 움직임을 주는 키네틱아트 등도 시도했다. 그는 스스로의 혁신을 꿈꾸고 실천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1팀장]
장우성 < 성모자상 >, 210 cm x 140 cm,_종이에 수묵_1954
허건 < 목포교외 >, 1942,
목포를 가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목포는 이런 곳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 작품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묘사가 매우 디테일 한 것은 아니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 갈 무렵 한적한 시골 어느 곳을 가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에 그것을 그대로 나타낸 듯한 색감에서 여행 중 바라 보고 있는 이 풍경이 목포 어느 곳이지 않을 까 하는 느낌을 준 것이다. 서양화의 두꺼운 터치 대신 동양화 기법에서 사용되는 얇은 터치를 사용한 점이 익숙함의 반면에 새로움과 설렘을 느끼게 했다.
허건 < 삼송도 >, 131 cm x 103 cm, 화선지에 수묵담채, 1974
박노수 [藍丁 朴魯壽 : 1927년 (충청남도 연기) - 2013년 2월 25일]
박노수(朴魯壽는 대한민국의 동양화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남정(藍丁)’이다. 충청남도 연기 출생이다.
195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부터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상명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지냈고,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1962년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3년부터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하여 제2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 제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대한미술협회전에서도 국무총리상과 공보실장상을 받았다. 묵림회(墨林會), 청토회(靑土會)의 회원이기도 하다. 2013년 2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그는 전통적인 동양수묵, 부채(賦彩)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시켜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확립하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광활한 대기(大氣)를 달리는 시각(視覺)의 초극(超克) 같은 것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작품으로 〈비마(飛馬)〉, 〈수하(樹下)〉, 〈선소운(仙簫韻)〉 등이 있다.
남정(藍丁) 박노수(朴魯壽: 1927-)는 1940년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문하에서 사사 했으며,해방후 서울대학교 미대에서 본격적인 작품공부를 시작하였다.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953-55년에 걸쳐 국무총리상, 특선,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그는 초기에 추상화된 인물 표현과 대담한 구도와 독특한 준법을 보여주면서 산수화로 독자적 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고고하고 기개 높은 준발과 분방한 필세가 특징적이며, 대각구도를 바탕으로한 청색조의 색채와 빠른 선조가 높은 화격을 구축했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선, 투명성을 지닌 채색, 자유로운 형태를 띤 주관적인 추상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남정(藍丁) 박노수가 미술가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면, 그는 청전에게 사사하였으나 그의 양식을 배우지 않고 예술의 자세를 배웠으며 동서고금의 명품과 접하여 자기의 방향과 독자적인 개성 개발에 힘썼던 것이다.
수학시절의 남정(藍丁)의 작품에서 이미 상투적인 남화경지를 벗어나 무엇인가 의지적이고 패기에 찬 공간을 건설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1958년 5월 박노수 미술전은 남정(藍丁)의 화력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나는 그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그의 인간형은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이었고 감각적이라기보다는 관조적이었다. 그는 시험이나 사건에 뛰어들어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바라다보며 생각하는 형의 인간이었다.』
그것은 지적 영철에 가득 차있는 그의 작품이 그것을 대변하고 용의주도한 그의 조형수법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번 미술전에서 느낀 몇 가지 인상을 열거해 보았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공허 공간의 문제이다.
공간을 충실공간과 공허 공간으로 나누고 충실공간이 물체 자체의 양이나 질을 추궁한다는 것이다. 공허 공간이 물체 자체가 아니라 그 물체가 존재하고 있는 외곽공간의 파장을 설정함으로써 물체의 질서를 규정하면서 아울러 조형적 효과를 노린다는 것도 이제 새삼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허 공간의 추궁을 시도하는 한국화가로서는 박노 수(朴魯壽)가 으뜸간다는 말이다 .박(朴)화백의 작품에서 느끼는 제1특징이 바로 이러한 공허 공간의 미술을 설정한데 있고 그것은 그의 화면이 주록적(周綠的)이라는 말로써 대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의 남정(藍丁)은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전시회를 통해 그의 성장 변모의 발자취를 남기었는데 대체로 북화적인 형태의 준열함과 남화적인 색채의 감각적인 정서를 절충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근작에 와서는 그 화폭은 대담한 구성과 다채의 조화로써 격조 높은 조형공간을 실현하고 있다. 따라서 남정(藍丁)의 작품은 눈으로 보아서 마음으로 느끼는 작용을 통해 인간의 가장 심부로 향하는 정신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인생으로 말하면 소장이지만 예술로 말하자면 무르익어 가는 남정(藍丁)의 작품세계에서는 기술이나 세월을 넘어선 정신적 가치만이 소중하다. 왜냐하면 격조 높은 예술은 인간성이 자아내는 무형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박노수 < 류하(柳下) >, 1960년대 중반. 128 cm x 324cm,_한지에 채색_1960
박노수 < 류하(柳下) >, 1970년대 중반.
성재휴 < 송림촌 >, 66 cm x 129 cm,종이에 수묵채색_1975
□ 제4부: 추상미술의 전개(1960-70년대)
1960년대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미술계에서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 중견, 원로작가들이 개인전을 본격적으로 개최하게 되었으며 미술대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1970년 무렵에는 국전의 서양화 부문에서 출품되는 작품의 경향이 비구상, 추상 계통의 세력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민간에 의해 기획된 전시 역시 추상미술의 전개에 박차를 가하였다. 국전의 권위에 반기를 들고 국전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미술의 정립을 위하여 1967,8년 '현대작가 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을 시작으로 하여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사 주최), 1972년 ‘앙데팡당’전 등과 같은 전시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전시들에 힘입어 1970년대 들어서서 추상미술은 실험미술과 함께 화단의 새로운 돌파구로 간주되었고 주도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추상미술은 미술가들의 독자적인 개념과 자유로운 표현을 기반으로 허요 미술가들의 의식과 사상을 기법과 표현의 흔적, 재료의 물질감과 조화시켜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양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유영국<무제> 1967. 장욱진<부엌과 방> 1973.<가로수> 1978, 최영림<경사날> 1975
한 묵<푸른 나선> 1975
수화 김환기 [樹話 金煥基 : 1913.2.27 ~ 1974.7.25.]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고, 이어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나 ‘백만회’(1936)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에는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추상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론도》(1938) 같은 작품을 보면 음악적인 주제와 어울리는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음악적 서정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그룹전을 열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의 멋에 깊이 심취하여 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파리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그의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파리에서의 제작 기간 동안 그 농도를 더했다. 그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을 선보였고, 이는 후에 고국산천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뉴욕에 정착한 1963년 무렵에 미국 화단의 주도적 경향은 색면회화였지만, 한편으로는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실험적 미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뉴욕 시기 작품은 크게 형상이 남아 있는 1970년 이전과 점과 선만의 완전한 추상으로 화면 전체가 변하는 1970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한 1974년까지는 그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서양미술을 풍부하게 경험했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시대의 문인화가였다. 비록 자연의 외형은 사라졌으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1년과 1972년의 그의 작품에서는 점화의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활형의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1973년에는 활형과 직선들이 교차되거나 어우러져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무한으로 열린 공간의 확장을 상징하고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풍류와 정취를 지닌 인정 많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온몸으로 예술을 살다가 이렇게 61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곁은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지켰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다.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산》(1958), 《달과 산》(1960),
《18-VII-65 밤의 소리》(1965),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Echo 22-1》(1973), 《09-05-74》(1974) 등이 있다
김환기'아침의 메아리' 1965
김환기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Oil on canvas, 232cm X 172cm,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환기(1913-1974)는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이다.그는 일본, 프랑스, 미국 등에서 작가활동을 펼치며 서양미술을 누구보다 풍부하게 경험하였지만 우리의 것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 전통적인 소재를 작품에 사용해서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김환기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1)은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구절에서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주적 공간, 섬세한 색점의 음영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인연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개최되는 여러 전시를 통해 김환기의 작품을 좀 더 깊게 접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왜 名畵인가] [10]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의 詩 외우며… 캔버스에 찍은 그리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金煥基·1913~1974)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에 열린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자 뉴욕시대 점화(點畵)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환기미술관에서 개최한 기념전 1부의 제목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인 것만 봐도 이 그림의 위상과 상징성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화가는 두고 온 고국의 산천과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하루 종일 되뇌며 점을 찍었다고 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환기 블루'라 불리곤 하는 푸른빛이 어딘지 모르게 온화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화가가 고국의 산천과 벗들을 목 놓아 그리워하면서 점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환기의 푸른색 추상화에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한다면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바로 앞 구절이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임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화면 가득 부드럽게 퍼진 점들은 만날 수 없는 너를 그리며 다음 세상에서라도 만나자는 간절함을 담았고, 그 형태는 설명 없이도 눈으로 교감하는 말없음표(…)를 닮았다. 인연설과 윤회설에 익숙한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보면서 애틋한 그리움에 빠진다.
그 닿을 수 없음은 절망이 아니라 순수에 가까워서 우리의 마음을 맑고 높게 이끈다. 나는 환기의 블루를 '그리움의 블루'라 부르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기를 그리워한다
[출처] : 김현숙·미술사학자(덕성여대 교수)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김환기 <Universe. 5-Ⅵ-71. #200. 100 cm x 100 cm, Oil on canvas, 1971
김환기 < Untitled 12 - V - 70 # 235> 1970, , Oil on canvas, 235cm X 167cm,
유영국 [劉永國 : 1916 ~ 2002.11.11]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일본 도쿄문화학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1968), 국전 서양화 비구상부 심사위원장(1970), 국전 운영위원(1976) 등을 역임하였고,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37∼1942년 일본 자유미술회우전(自由美術會友展)에 출품하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1967년 제9회 도쿄비엔날레에 출품하였다. 1978년 파리 살롱드메 초대전에 출품하였고 1979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영국 초대전〉을 가졌으며, 1983년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도 출품하였다.
그밖에 〈유영국 회고전〉(1985), 〈세계현대미술제〉(1988), 〈갤러리 현대 초대전〉(1995), 〈한국추상회화의 정신전〉(1996)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1930년대 도쿄 유학시절부터 추상작업을 시작한 이래 한국 모더니즘의 제1세대 작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그의 작품은 산, 길, 나무 등의 자연적 소재를 추상화면의 구성요소로 바꿈으로써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진 시적 아름다움과 경쾌한 음악적 울림을 자아낸다.
1960년대 말부터 '산'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는데, 자연을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선·면·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 탐구하였다. 그 중 《산》(1970)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빨강, 파랑의 색면이 형태와 선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해·산·바다·들판 등을 상징하여 작가의 자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준다.
최근의 화풍은 서사시적 장대함에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이나, 강렬한 색채와 엄격한 구성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울림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 자유미술전 최고상(1938), 대한민국 예술원상(1976),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2) 등을 수상하였다.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유영국(1916-2002)이다. 그는 강렬한 색과 기하학적인 구성으로 서사적 장대함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화가이다
유영국 < 무제 > 1967, Oil on canvas, 130cm X 130cm,
유영국 < 산(지형) > 130 cm x 190 cm , Oil on canvas,1959
유영국의 무제(1967)
유영국 < 산 >, 130 cm x 130 cm, Oil on canvas,1967
이응노
이응노 < 수 >, 1972, 한지에 수묵담채 콜라쥬, 274Cm X 32cm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옥중에서도 기호화된 문자를 조형적으로 구성하는 작업
방식을 시도하였다
이응노 < 구성 >, 128 cm x 66 cm, 캔버스에 종이. 1962
남관 [南寬 : 1911년 ~ 1990년]
본관은 영양(英陽). 경상북도 청송 출생. 14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935년 동경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하고, 이어서 2년간의 연구 과정을 수료하였다.
수료 후에 광복 직후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이 시기 동경의 문부성미술전(文部省美術展)·동광회전(東光會展)·국화회전(國畵會展) 등에 출품하였던 작품은 서정적 색감과 표현적 자율성의 인물화와 풍경화였다.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해서는 1947년이쾌대(李快大)·이인성(李仁星)·이규상(李揆祥)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49년까지 연례 회원 작품전을 가지며 두드러진 역량을 내보였다. 국내에서의 첫 개인전을 가지기도 하여 1949년 제1회 국전(國展)에서 일약 서양화부 추천 작가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중 1952년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에서 보게 되었던 제1회 일본국제미술전[도쿄비엔날레]과 파리의 살롱 드 메 동경전은 그 뒤의 남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4년의 프랑스행을 결행한 것은 그때의 충격적 자극 때문이었다. 그에 앞서 서울에서 개최된 도불 기념전 작품은 동경에서의 신선한 충격을 반영한 추상적인 화면이 과반수였다.
파리에 가서는 추상적 표현의 심상주의 형태를 심화시키면서 독특한 작업을 구현시켰다. 그 내면적 순수 형상은 6·25의 비극적 상황 체험에서 비롯된 정신적 표현 의지의 상징성과 시간·공간 및 역사의 어떤 표상을 내재시킨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1958년부터는 파리의 살롱 드 메에 초대되었고, 1961년의 출품작 「동양의 풍경」은 프랑스 정부가 사들여 파리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1962년 작품 「허물어진 제단(祭壇)」은 파리시가 구입하여 현재 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에서의 그러한 예술적 성공은 1966년남프랑스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으로 명제된 대작이 1등상에 오르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앞에 언급한 작품들은 모두 동양적 심성의 내면적 시각과 정신적 표현성의 은밀하고 매혹적인 색상 분위기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 세계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읽을 수 없는 문자성 혹은 동양적 문자성의 화면 창조 또는 콜라즈 형상으로 추구되어 갔다. 나아가서 석기시대 유물 또는 고분 출토의 청동 유물을 연상시키는 조형 형상과 사람의 해골에 연관된 「마스크」 연작이 이어졌다. 그 표현적 상념은 신비롭고 찬란한 표현미로 거듭 확대되었다.
1968년에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역사의 흔적」(1963년)·「센 강변」(1968년), 삼성미술관에 「대화·절규」등이 소장되어 있다.
197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미술 부문)과 1981년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1990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이 추서되었다
남관 < 정 >, Oil on canvas, 162 cm x 130 cm, 1968
남관 < 태고상 > 1964, Oil on canvas, 279 cm x 184 cm
남관 < 폐왕의 환상 >, 1979, 페널에 한지,유채, 180x177cm
권옥연 [무의자 權玉淵 : 1923.7.4 ~ 2011.12.16]
1923년 7월 4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41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60년 프랑스 파리아카데미(디.훼)를 졸업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지냈고, 1963년 파리에서 그룹전, 1965년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하는 등 국제전에도 여러 번 출품하였다.
1978년 금곡박물관 관장직을 맡았고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서양화)이 되었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가르쳤고, 199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비상임이사로 임명되었다. 2011년 별세하였다.
1950년대 파리 유학을 통해 앵포르멜 등 유럽 미술의 최신 경향을 직접 체험하고 개성적인 추상양식을 구축하였다. 유학 전에는 고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양식화되고 평면적인 이미지로 풍경과 인물작업을 하였으나,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살롱도톤, 레알리테 누벨 등 당시 파리의 주요 전시회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차츰 문학성 강한 기존의 사실주의 양식을 버리고 추상실험에 열중하였다.
특히 갑골문자 연구를 통해 기호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비정형의 형태와 두터운 마티에르, 청회색으로 억제된 색채 등을 특징으로 하는 회화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1960년대에는 민속공예품과 신라토기에 심취하여 토기나 청동기가 주는 질박한 느낌을 한국의 토속적인 이미지에 담았다.
동양적인 체질의 환상과 신비를 서구적 감각으로 요약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세련된 오리지널리티가 신선하며 대문이나 벽, 고도기(古陶器) 혹은 역사가 새겨진 대지(大地)를 연상케 하는 중후함을 가졌다고 평가된다.
보관문화훈장, 예술원상(1986), 제35회 3·1문화상(1994), 98 공로예술인상(1998) 등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양지(陽地)》,《벽(壁)》 《메아리》 《꿈》 《우화 B》(1963) 등이 있다.
권옥연 < 절규 >,80.3 cm x 116.8 cm, Oil on canvas,1957
윤중식 [尹仲植 : 1914년 ~ 2012년]
평양 출신.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일본의 국화회전과 동경유학생으로 구성된 재동경미술협회의 전시회(동미전)에 참여하였다.
해방후 제2회 국전에서 특선하였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홍익대학교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제국미술학교 본과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인 1931년부터 수 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입선하였고, 제국미술하교 재학 당시에는 일본의 중진 서양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가 주도하던 국화회(國畵會) 전시회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에 결성된 재동경미술협회전에 두 차례 출품하였다.
해방후에는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에는 홍익대학교 교수에 부임하여 1977년까지 재직하였다.
학습기 이후 일본 서양화단의 영향으로 야수파 경향이 강하여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이 특징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며 조형적인 순화과정을 보였다.
소재로는 비둘기와 같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된 예들과 저녁놀, 농촌풍경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윤중식 < 풍경 >, 1968, Oil on canvas, 145.5 cm x 97 cm,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저녁놀 그리고 포플러나무 그러데 역시 70년대 프랑스풍이 남아 있다 색채의 나열이 조화롭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현실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이상적 동경도 섞여있다. 현실과 이상이 혼돈을 일으킨다. 착시현상을 주면서 70년대 사람들에게 묘한 흥분과 쾌감을 준다. 그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다.
[왜 名畵인가] [15] 윤중식 '풍경' - 野性이 깨어나는 찰나
"아이야 서둘러라, 저어기 해 넘어간다. 어여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지."
농익은 화염처럼, 번지듯 저녁노을 대지 위에 내려앉으니, 행인의 발걸음은 분주해지고 뒤따르는 아이는 허리가 휜다. 가까이 덩달아 물든 늦가을녘 앙상한 나무들은 저마다 키를 뽐내며 곧추서 있는데, 시선은 수직 하늘로부터 층층 수평으로 내려앉는다. 뭉글대는 구름 아래 보일락 말락 산이 누워 있고, 들판을 질러 횡을 이룬 나무들이 어느덧 무명에 휩싸이고 있는 가운데, 색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유의 아우라를 뿜어댄다.
평양 태생인 윤중식(尹仲植·1913~2012)은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이다. 그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빛의 신비로움을 좇으면서 목가적 풍경을 주로 그렸다.
저녁이다! 저녁은 색채가 짙어지는 시간. 그리하여 저녁은 색채가 응축되는 시간. 아아, 저녁은 마침내 색채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황홀하다. 색채의 초야 나르시시즘. 그러다가 사위어 칠흑에로 환원되는 것인가…. 노을빛 멜로디 멀리서부터 잔잔히 들려와 가을 향수를 간지럽힌다.
그 변용의 찰나, 만상에 깃든 온갖 색채의 자기 몰입을 포착한 눈은 범상치 않다. 이건 발견이다. 새로운 발산을 위한 수렴! 그러기에 고대 근동인들은 저녁을 하루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여겼던 것일까.
그 사이 고요는 그윽해지고, 만물은 새날의 검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풍경을 관조하는 이, 금세 새 여백이 그리워진다. 슬그머니 새 아침이 기다려진다.
[출처] : 차동엽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무지개 원리' 저자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장욱진(1917-1990)
장욱진은 동화책의 그림과 같은 느낌이지만 세련되며 조형적 구성의 치밀한 화풍을 보여주는 화가이다. 그는 시골의 삶의 이야기와 동심적인 자연애의 그림 등 시골환경을 주제로 자유로우면서도 해학적인 그림을 탄생시켰다.
장욱진<부엌과 방> 1973
장욱진 < 가로수 >, 1978, Oil on canvas,, 30 cm X 40 cm,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소장
[왜 名畵인가] 장욱진의 '가로수'- 이 속에 있었네, 열한 살의 '나'
포플러 가로수길을 한 가족이 일렬로 걷는다. 턱수염 남편과 쪽머리 아내, 어린아이, 강아지와 소. 두 그루 나무 위엔 새 둥지 대신 정자와 집이 올라앉아 있다. 그 위로 저녁 해가 빨갛다. 애쓰지 않아도 이야기가 읽힌다.
한여름 저녁, 더위를 피해 산책에 나선 가족일 테다. 보이지 않는 나무 뒤편으론 물길이 흐르지 않을까. 남편의 무뚝뚝한 걸음을 따라가며 아내는 조곤조곤 말을 걸겠지. 따분한 아이는 갈등할 테고. 계속 따라 갈까. 눈치 봐서 슬쩍 새버릴까. 한바탕 싸움질을 벌인 강아지와 소는 뚱한 얼굴로 아이 뒤를 따라간다.
나무 위 집에선 '누군가' 이 행렬을 내려다본다. 그 누군가를 보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눕혔다. 열한 살 시절의 동화가 보인다.
내 동화 속에는 소 대신 '오리알'이라 불리는 늙은 백마가 있다. 매일 오후, 녀석은 벽돌공장 수레를 끌고 학교 앞 포플러 가로수길을 지나간다. 나는 학교가 파하면 나무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말 수레에 훌쩍 올라탄다.
마부 할아버지는 무임 승객을 타박하지 않는다. 어차피 빈 수레고, 벽돌 공장은 우리 집 근처에 있으며, 내가 뉘 집 딸내미인지 알고 있으므로. 책가방을 머리에 깔고 드러누우면 얼굴 위에서 수많은 것이 움직인다. 파란 하늘, 구름, 짤랑짤랑 흔들리는 포플러 이파리, 앵앵대며 나는 파리 떼, 휙휙 허공을 가르며 파리를 쫓는 오리알의 꼬리. 그해 늦가을 어느 날, 포플러 길에는 젊고 통통한 갈색 말이 등장했다.
할아버지는 오리알이 죽었다고 전해주었다. 죽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하느님한테 기도해봐야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말 수레 무임승차를 졸업한 날이었다. 내 인생에서 동화가 끝난 날이었다.
나는 고개를 바로 세웠다. 행복한 풍경에서 쓸쓸한 기억을 읽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다.원, 참.
[출처]: 정유정 소설가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이성자 [ 李聖子 : 1918년 6월 3일 (진주) - 2009년 3월 8일 ]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가 유화, 목판화 비롯, 70년대 이후의 도자기 등 모든 조형작품에 동양적 향취와 이미지를 담은 방대한 규모로 꾸준히 제작, 한국적 사상과 시정을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 속에 합류시키는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는 물론 세계전역에 걸쳐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온 원로이다. 이성자에게는 항시 두 명의 예술가가 공존하였다.
어린 시절의 숲을 되찾기 위하여 나무판 을 조각하는 판화가가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감성을 가지고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색을 쓰는 화가가 있다.
파리 시립 미술관장이었던 J.라세뉴는『이성자씨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하여 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양의 예술가로『동녘의 대사 (ambassadrice de l'aube)』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세계적인 프랑스의 대문학가이신 미쉘?뷔또르씨(氏)는 이성자 여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녀는 프랑스의 문화와 인정(人情) 세태(世態)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깊숙한 시골의 야생의 들꽃들을 비롯한 프랑스의 자연에 대해서도 가장 정통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인이다.』라는 뜻의 말을 했거니와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시인은 역으로 『이성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얼마를 살건 간에 자기 조국 한국의 전통의 정신적인 장점과 그 끈기와 또 처녀적인 순수성을 언제나 잘 아울러 간직하고 있는 신화(神話)적인 화가다』라고 평하고 있다.
최영림 [崔榮林 : 1916 ~ 1985]
본관은 전주(全州). 평양에서 부유한 한약국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유화로 첫 입선한 뒤 1943년까지 수차 입선을 거듭하여 화단에 진출하였다.
1938년에 동경(東京)에 가서 한때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판화가 무나가타(棟方志功)에게 개인적으로 목판화 기법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평양에서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공산치하에서 표현의 자유를 구속받다가 6·25전쟁 때 남한으로 탈출, 1955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에 참가하여 추천작가·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1957년 창작미술협회 창립, 1967년 구상전(具象展) 창립에 참여하였다. 1960년부터는 대학에도 출강, 1981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작품에서는 남하 직후의 고뇌어린 인물상으로부터 추상·반추상의 상징적 구성작업인 ‘흑색시대’(1950년대 후반)를 거쳐 황토색 주조에 흙모래까지 도입한 토속적인 화면 질감에 우리의 민담(民譚)·전설과 「심청전」·「장화홍련전」등의 이야기를 민족적 애정으로 연작한 ‘설화시대’로 이어졌다.
화면에 등장하는 여인과 어린이들의 해학적인 변용과 자유로운 형상 등은 특이한 창조적 내면이다. 1973년에 국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최영림 < 경사날 >, 1975, Oil on canvas, 75 cm x 170cm,
최영림 < 호랑이 이야기 >, 130 cm x 161 cm, 캔버스에 유채, 토분, 1968
변종하 [ 卞鍾夏 : 1926.7.28 ~ 2000.7.29 ]
1926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시적인 정서의 한국적인 이미지 결합을 추구해온 화가로 평가된다. 8·15광복 직전 만주에 있는 신경미술원에서 공부하였고 8·15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4~7회 수상하였다. 특히 1955년에는 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홍익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재료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러시아 화가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며, 프랑스 미술비평가이며 시인인 르네 드뤼앵(René Druin)을 만나 작품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후 런던의 쿠퍼 화랑, 파리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작품으로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 《돈 키호테》 시리즈가 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고 《어떤 탄생》이라는 주제로 민화·야생초·십장생 등과 새를 소재로 한 작품을 시리즈로 발표하였다. 요철 위에 마포를 씌우고 색을 칠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으며,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감자꽃과 태초의 새》 등이 있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2000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변종하 < 들꽃 >, 부조에 유채 117 cm X 73 cm, 1975
박항섭처럼 기하학적이고 역시 프랑스의 영향이 보인다. 당시의 모더니즘을 접한 결과인 것 같다. 구조주의 인류학 그런 정황이 느껴진다. 들꽃이라는 제목이 그림 중에 이렇게 모던하고 획기적인 것은 드물 것 같다. 한국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의 퓨전이라고 할까. 하여간 감각적으로 출중하고 매우 세련되었다
한묵 [韓默 (한백유) : 1914년 3월 6일 ~ ]
« 진정한 우리 시대의 미란 잡힐 듯 말듯 신기루처럼 저 멀리에서 아물거리는 것이 아니라 벅차게 돌아가는 현실의 수레바퀴 속에서 불꽃 튀는 삶의 노래 속에 있다고 본다. » (한묵, 1976, 또 하나의 시 질서를 위하여 중에서)
한묵 화백은 한국 현대미술의 초석을 마련한 작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인물로서, 그가 100세를 맞이하는 것은 한국 미술계와 재불 한인사회에 있어서 큰 경사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재 생존하는 한국 작가로서는 최고 연장자이며, 그가 한국 현대미술에 기여한 바 또한 상당히 크다. 한국 추상미술의 1세대 작가로서 이중섭, 김환기, 유영섭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기에 서구 모더니즘을 적극 받아들여 이를 개척해 나간 한국 기하추상 미술계의 거목이다.
그는 또한 반평생 넘게 타지생활을 하면서도 변치않는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초대 한인회장과 수차례의 재임을 통해 재불 한인사회의 토대를 만들었고, 2세들을 위한 정체성 교육을 위해 한글학교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재불 한인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914년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금강산 부근의 온정리에서 지내다가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전쟁통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이중섭, 박고석 등과 친분을 나누는가 하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전임강사와 조교수로서 교사생활을 한다.
한묵 화백의 도불 이전의 활동은 1957년 유영국, 이규상, 박고석 등의 작가들과 주축이 되어 결성한 모던아트협회 활동으로 대변할 수 있겠는데, 이는 아카데미즘이 만연한 국전에 반기를 든 재야작가 단체 중의 하나로 그 당시의 미술의 경향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국 미술평론가협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는데 신문과 잡지 등에 수 많은 글들을 기고하는 이론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한다.
1961년 도불한 한묵 화백은 이미 파리에 정착한 남관, 문신 등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펼친다. 그의 회화의 추상적 경향은 몇 차례의 변화를 거치는데, 특히 1970년대 초부터의 판화공방 Atelier17에서의 다양한 판화기법의 습득은 그에게 역동적인 기하추상적 구성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이로써 80년대 이후에는 형태와 색채의 강렬한 조화가 두드러지는 보다 자유롭고 « 여유로운 공간접근 » (오광수)을 보여준다.
한묵 화백은 회화공간에 있어서의 역동성, « 새로운 미란 새로운 질서 »라는 예술적 신념하에 현실세계의 직시를 통해 시대의 감각과 형태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1969년 인간의 달착륙은 그에게 결정적인 사고전환의 계기가 되는데, 시간성을 개입한 유기적이고 동적인 사차원의 공간을 구현하는데 그의 모든 예술혼을 쏟아붓게 된다.
한묵 화백을 비롯하여 재불 한인미술계를 대표하는 원로작가들이 함께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반세기를 넘는 한묵 화백의 미술업적을 기리며 재불 한인사회의 건재를 기원하는가 하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들의 뒤를 이을 한국 젊은 작가들에게 예술과 삶에 대한 상징적인 배움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묵 화백은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상 (1972), 제 24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2), 제2회 KBS 해외동포상 (1994), 자랑스런 재불한인상 (2008), 은관문화훈장 (2008), 제 56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2011)을 수여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 시립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파리 국립도서관, 파리 유네스코본부, 홍익대학교 박물관, 아트선재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묵 < 푸른 나선 >, 1975, Oil on canvas, 153 cm x 198cm .
이성자 [李聖子 : 1916 ~ 2009. 3. 8.]
이성자(1918년 ~ 2009년 3월 8일)는 대한민국의 화가이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가 유화, 목판화 비롯, 70년대 이후의 도자기 등 모든 조형작품에 동양적 향취와 이미지를 담은 방대한 규모로 꾸준히 제작, 한국적 사상과 시정을 프랑스 미술계의 흐름 속에 합류시키는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는 물론 세계전역에 걸쳐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혀온 원로이다.
이성자에게는 항시 두 명의 예술가가 공존하였다. 어린 시절의 숲을 되찾기 위하여 나무 판을 조각하는 판화가가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감성을 가지고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색을 쓰는 화가가 있다. 바르 주 투레트에서 사망했다.
파리 시립 미술관장이었던 J.라세뉴는 이성자를 “이성자씨는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하여 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양의 예술가로 평했으며, ‘동녘의 대사 (ambassadrice de l'aub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세계적인 프랑스의 문학가인 미쉘·뷔또르는 이성자를 “프랑스의 문화와 인정(人情) 세태(世態)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깊숙한 시골의 야생의 들꽃들을 비롯한 프랑스의 자연에 대해서도 가장 정통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인이다.”라고 평했으며, 서정주는 역으로 “이성자는 어느 나라에 가서 얼마를 살건 간에 자기 조국 한국의 전통의 정신적인 장점과 그 끈기와 또 처녀적인 순수성을 언제나 잘 아울러 간직하고 있는 신화(神話)적인 화가다”라고 평했다.
이성자 < 내가 아는 어머니 >, 1962, Oil on canvas, 130 cm x 195 cm,
이성자 < 오작교 >. 1965년, 114㎝ X146㎝. 이성자기념사업회 소장
[왜 名畵인가] [17] 이성자의 '오작교' - 빼곡히 찍었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
밤하늘의 별인가. 파랗고 노랗고 불그스레한, 또는 하얀 점들이 80호 화면에 무수히 찍혀 있다. 셀 수가 없다. 은하수 같다. 그렇게 많은 점과 선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찍고 그었는지. 어찌 보면 이성자(李聖子·1918~2009)의 작품 '오작교'에 빽빽이 찍힌 점은 별이 아니라 눈물같이 보인다. 화가의 간절한 염원이 점마다 간직돼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아들 셋을 둔 어머니였던 이성자는 자식들과 원치 않는 이별을 하고는 무일푼 단신이 되어 이국만리 프랑스로 떠나는 처절한 선택을 한다. 그녀 나이 서른넷. 살기 위해 몸부림쳤고 그러다가 예술을 만났다. 그중 추상미술에 매료됐다. 고국의 아름다운 기억들, 문양들, 어머니, 그리고 아! 아이들….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며 화폭에 담았다. "내가 한 번 붓질을 하면 아이들이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을 것이다. 내가 좋은 붓질을 하면 애들이 건강하리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했다. 밤낮으로 그림을 안 하면 애들이 어찌 될까 불안하고, 애들이 보고 싶어 괴로웠다." 후일 들려준 애끓는 토로다. 15년 만에 잠시 귀국했다. 일곱 살 막내가 대학생 청년으로 자라 있다니! 모진 세월이었다 .
1965년 9월 1일, 유화 37점, 판화 40점의 이성자 귀국전은 한국 미술계의 기념비적인 전시가 된다. 이 땅에서 열린 한국인 최초의 본격적인 대규모 추상화 개인전이었다. 대중에겐 충격이었고 미술인들은 경탄했다. 시인 조병화는 그때 작품 '오작교'를 보고는 이렇게 읊었다.
"1년에 한 번 만나다 헤어지는 사랑을 위한 하늘의 다리/이것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만 놓이는 동양의 다리다/그리움이여 너와 나의 다리여" [출처] : 사석원 화가 : 왜 명화인가? / 조선일보
김영주 [ 金永周 : (1920- 1995 ]
본관은 광산(光山). 함경남도 원산 출생. 광복 전 일본 동경의 다미헤미요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1946년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현대 미술을 지향하는 한편, 국전(國展)의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등의 미술 평론 활동도 했다. 작품으로는 피카소의 영향이 짙은 상징적 인물상 주제의 현대적 화면 창조를 추구했다.
1957년에는 김병기(金秉騏) 등과 조선일보사가 주관한 현대작가초대전 조직을 주도했다. 그 시기의 작품은 「검은 태양」 연작으로 인간·가족·여신(女神)·화조(火鳥)·골고다의 언덕 등, 현대인의 자아 상실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려고 한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빨강·노랑 등의 강렬한 원색조로 직선적이고 즉흥적인 평필(平筆) 작업의 구조적 추상 회화를 수년간 시도하다가 그 전의 인간 시리즈로 돌아가 내면적 형상을 한층 복합적으로 전개시켰다.
1970년대 이후의 작업에는 선명한 다색(多色) 선들의 즉흥적이고 기호적(記號的)인 표상과 ‘현대 풍경’ 또는 ‘잃었다는 그 숱한 이야기’ 등의 모호한 문구(文句)가 느닷없이 낙서처럼 도입되기도 하였다.
즉, 이 작업들은 일관되게 독자적 화면 창조를 현대적으로 지향했던 김영주의 특이한 표현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비사실적인 인간 형상의 구상적(具象的) 표현과, 전보다 더욱 빠르고 즉흥적인 속도감으로 이루어진 낙서적인 형상을, 찬란한 색상과 새롭게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때 발표된 「신화시대」 연작도 종래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삶과 상황’을 자유로운 회화적 작위(作爲)로 연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화면마다의 표현 감정과 상상을 ‘대화’, ‘그 얼굴’, ‘춤’, ‘그날이 오면’, ‘너와 나’, ‘꿈’ 등의 부제로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년의 그 의중(意中)은 현대 작가들의 형식적 연작이 대개 자기 모방을 나타내듯이 방법적 반복 형태로 이어졌다. 그렇더라도 195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 미술 전개 과정에서의 김영주의 작품 태도와 정신 및 전향적 평론 활동 등의 업적은 매우 뚜렷하다.
김영주(1920-95)는 한국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작가이자 평론가였다. 한국 현대미술이 태동하던 1950년대말 조선일보 주최‘현대작가초대전’과‘한국미술평론가협회’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미술평론의 활성화와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부분 젊은 작가들에 의해 추진되어왔던 현대미술을 기성세대로서 뜨겁게 인식하고 추상미술운동에 헌신하였으며 미술행정가로서 뿐만 아니라 미술비평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김영주는 이론을 겸비한 작가로서 늘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그 시대를 이끄는 선도적 책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그는 전쟁을 거친 1950-60년대 역사적 상황과 인간이 처한 조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상실되어가는 인간상과 현대사회에서 소외되는 인간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 표현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김영주의 작품은 부분적으로 시적이면서 부분적으로 구상적이고 설명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그의 작품은 외부 미술사조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는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다.
김영주 < 인간들의 계절 >
문학진 [文學晉 : 1924년 4월 30일~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1회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이후 1950~60년대에는 전위의식 때문에 입체파 화풍을 바탕으로 한 순수추상을 주로 했다.
그뒤 회화적 공간을 색채 위주의 깊이와 넓이, 분위기로 전환시키는 독창적인 반구상(半具象)으로 정물과 인물을 주로 그렸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언제나 공간을 설정해 캔버스 전체에 어떤 배경을 먼저 깔아두는 편이다.
갈색·흑색을 주로 썼고 검은 선을 즐겨 끌어들여 대체로 어두운 작품세계를 보였던 그는 색을 억제하는 대신 나름대로 마티에르를 다양하게 구사했다. 유채의 독특한 맛을 살리기 위해 쏟아번짐, 흘러내림, 두텁고 얇은 여러 채색법을 고루 써서 다양함을 묶어서 단조롭게 추려나가는 구성미를 추구했다.
결국은 색조의 통일과 조화, 형상의 단순화, 가변적 시각성을 지향하는 조형의 논리를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공식(公式) 기록화 제작에 참여해 〈행주산성대첩도 幸州山城大捷圖〉(1978)를 비롯해 육사(陸士)기념관 벽화(1956), 중앙일보사 벽화(1973), 가톨릭 103위 순교복자 벽화(1982) 등을 제작했다.
대표적인 유화작품으로는 〈마을사람들〉·〈정물과 더불어 있는 소녀〉·〈검은빛 배경의 정물〉 등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에서 퇴임했고 198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문학진의 작품 세계는 구상과 추상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즉, 추상성을 강하게 지니는 동시에 구상성을 띠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색채에서는 회백색조의 무게가 담긴 색채에 노랑이나 파랑을 가미하면서 결정적으로 검은색을 사용하여 마무리하고 있다.
문학진은 죠르쥬 브라크(George Braque)의 입체파에 근원을 둔 양식을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작품 77>은 인물과 정물을 주요 소재로 선택하여 형태를 간략하게 변형하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화면에 재배치함으로써 반추상적 화면을 구성하는 문학진 작품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안정된 구도와 차분한 색감에 의한 정적인 분위기 역시 문학진 작품의 주요 특성으로, <작품 77>은 흑색 배경과 백색 테이블, 그리고 그 경계면에 놓인 회색의 정물들로 화면이 삼분되었다.
고대 토기와 향로 등 전통 기물들이 수평으로 늘어져 배열된 이 그림은 사물의 형상은 잔존하고 있으나 사물이 내포하는 기능성과 역사성은 작품의 콘텍스트로부터 발각되었다. 작품이 추구하는 지점은 추상적 형태와 색의 배치에 따르는 질서와 통합인 것이다.
한편 두개의 면으로 분할된 테이블과 흑색 배경의 미묘한 색감 및 공간 변화는 화면 내에 리드미컬한 율동감을 주고, 우툴두툴하게 도드라져서 원형을 이룬 얼룩들은 기물들의 표면 질감 표현과 어우러져서 장식적 효과를 높였다.
문학진 < 마을사람들 >, 유채 1971
文學晋온 필자와의 대화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立體派가 전개시킨 知的 構成作業, 그 중에서도 브라크의 정신적 形像 思考에서 감화와 영향을 받은 면을 시인한 적이 있다.
그는 또 超 現實派인 키리코(Chirico)의 예술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 졌었다고 한다. 그것은 1950년을 전후로 한 시기. 그러니까 그가 美術學校 상급반이던 무렵부터 國展 등 주요 전람회에서 作品을 발표하기 시작하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8·15 민족 해방과 더불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울大學校에美術 專攻科가 생기자(후에 美術大學으로 발전) 文學晋은 그 1회 입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그를 지도한 어 떤 敎授나 국내의 다른 어떤 畵家에게서도 특별히 깊은 영향 을 받지 않았다.
미술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6·25의 慘變과 戰亂을 경험한 그는 새로운 知的 價値를 추구하면서 그 의 藝術思考를 전위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는 8·15 이후 제 1 世代의 新銳晝家로서 주목을 끌71에 충분한 예민한 感性과 혁신적인 作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서 1953년의 제 3 회 國展에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획득했던 < F建物의 中央>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참신하고 혁신적인 晝面構 成이었다. 그것은 다분히 立體派的인 작업이었다.
그리고 1958년 작품인 <自轉車에 부딪친 運轉手> (圖版 6 )등이 모두 1950년대의 女擧晋 藝術의 실험 기를 말해 주는 작품들이다. 앞에 서 작가 자신이 밝혔듯이 이 시기의 작품들은 立體派와 超現 實派에 대한 이 작가의 적극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1950년대 중엽은 韓國晝壇에서 유럽의 새로운 戰後美術이 소개되면서 일부 젊은 世代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 흔히 抽 象으로 지칭되는 전위적인 미술 운동이 고개를 들던 시기였다. 知的 感性面에서 文學晋은 그 추세에 공명하던 젊은 新銳 였다.
그러나 그는 떠들썩하게 그 前衛隊列에 가담하여 熱氣 를 토하고 示威를 보인 적은 없었다. 非思考的이고. 말이 없 고. 내성적인 그는 오로지 자신의 思考와 作業에만 성실하고 탐구적인 고독한 內攻型의 作家였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文學晋은 1950년대의 實驗期를 자 신의 체질과 성숙한 자신의 美意織으로 극복하기 시작한다.
브라크의 정신적인 表現世界를 소화한 듯한 일련의 靜物晝와 피카소의 지성적인 造形感覺이 文學晋 자신의 것으로 빚어져 나오는 일련의 女人像에서 우리는 文學晋 藝術의 정리된 기반 과 개성적인 內面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작업은 1970년대 에 와서도 큰 변화 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다만 주제의 구성 적인 전개와 色彩驅使 면에서 정신적 또는 감각적 深化가 나 타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