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숙 시집 『그린란드 보고서』해설
평론 : 최형심
흔히 시인을 천 길 벼랑 위에 서있는 자에 비유한다. 시인이 막다른 세계에 자기를 가둔 자라면 그가 생산해내는 시는 막다른 곳에서 몸부림친 절규의 기록이 될 것이다.
황경숙의 첫 시집『그린란드 보고서』에는 유난히 갇혀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첫 번째 태양이 떠나고/ 호박(琥珀)속에 갇힌 벌레(「서있는 동굴」)’라든가 ‘부피도 두께도 없는/ 테두리에 갇힌 그림 속 풍경(「보이지 않는 제목」)’, 혹은 ‘어둠을 키운 암실은 굳게 닫혀있는데/ 흔들의자는 그 자리에 어둑어둑 누워 있다(「허밍」)’고 한 것이 그렇다. 이는 시적 화자가 시집 곳곳에서 자기를 가둔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위태로운 자아를 드러내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시집 『그린란드 보고서』에서는 갈망과 결핍에서 비롯된 파토스적 욕망이 빚어놓은 삶의 모순을 치열하게 응시하고 있는 작품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러한 시인의 자세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시가 바로 「화려한 멍에」다.
화려한 멍에
들을 귀가 없는 나는 날개에 아르고스 눈을 달았다 백 개의 눈 속으로 수천의 빛이 갇힌다 한 방향으로만 보고 들어야 하는 세상의 눈에 활짝 펴지 못한 날개를 잊는 연습을 한다 철조망 구멍사이로 햇발이 녹아내리는 오후 옆 철조망의 투계는 온몸이 병기다 걸핏하면 날카로운 깃털을 세워 바람을 위협하는 짧은 날개를 활짝 펼쳐서 철조망을 뚫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좁은 철창 안 홰에 오르지도 못하고 펼쳐지지 않는 날개 사이사이 움푹 꺼진 백 개의 눈동자 좁은 중력 사이의 긴장이 시멘트 바닥을 쓸고 있다 바닥을 끄는 깃은 닳아지고 뭉뚝해져 미로의 궁을 탈출하기 위한 욕망마저도 시들어버린 지 오래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눈알을 밟으며 허공으로 부르는 울음소리, 날기 위한 욕망의 크기는 스스로에게 감옥이 되는,
- 「화려한 멍에」 전문
‘욕망’이 ‘감옥’이다. 열망한다는 것, 그것은 더 뜨겁게 타오를수록 더욱 잔인하게 육체를 조여 오는 통증의 다른 말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실존적 허기에 자기를 가둔 자와 그 마음에 품은 이상 사이의 불화가 처절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려는 것들은 무언가 결핍된 존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펼쳐지지 않는 날개 사이에 백 개의 눈동자’를 가졌으나 날 수 없는 자, 시 속 ‘철조망에 갇힌 투계’는 다름 아닌 시인 자신이자 답답한 현실에서 몸부림치는 우리의 모습이다. ‘온몸이 병기’가 되는 극단적인 저항을 통해서도 끝내 해소할 수 없었던 고통 그리고 좌절. ‘철조망의 투계’는 체제 혹은 세계에 의해 꿈과 욕망을 속박당한 개인에 대한 환유이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이 시 속 투계의 몸부림은 창작의 고통으로 범위를 좁혀서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시인에게도 시업(詩業)은 늘 ‘화려한 멍에’가 되는 법. 세상의 제도와 관습에 갇힌 시적 화자는 그 관습의 밖,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빛에 도달하고 싶다. 삶의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간절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다는 것, 삶이 유발하는 바로 그 허기에 몰입한 흔적은 늘 격렬한 법이다. ‘깃은 닳아지고 뭉뚝해져’버린 채 철조망 밖 은하수가 흐르는 아득한 외계를 꿈꾸는 투계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다. 결국 시인에게 시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퍼득이다 날개사이에 품었던 천 개의 눈알을 중력에 놓치고 ‘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눈알을 밟으며 허공으로 부르는 울음소리’인 것이다
스마일마스크증후군
모서리 닳은 사진 속의 그가 웃는 것은
풍경 밖의 한 사람을 위해
쓴물 삼키듯 긴 시간을 견디는 일
나도 가끔 그 겨울 속으로 들어가 언 강을 맨발로 걸어요 엄지검지 손가락으로 새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발바닥 문신을 지우기 위해.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울고 그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웃어요 쓸개즙 스며든 귓속에 푸른 멍이 들었어요 저기 멀리 꼬리 긴 파랑새, 데칼코마니처럼 피어오르는 둥그런 궤적이 왜 이리 아플까요
밖으로 나와 봐요 생각의 속살을 어루만지지는 않겠어요 웃는 당신에게 왜 가면을 쓰고 사느냐고 묻지도 않겠어요 훔쳐서라도 눈부신 날개를 달아주고 가끔 새장의 빗장을 슬며시 열어주겠어요 아, 오지 않을 그때쯤은 말(言)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알게 될 테죠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어요 개살구 개복숭아 혹은 개양귀비처럼, 금 간 거울 속 그 웃음이 몇 겹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있어요
이제 해바라기처럼
각주처럼 매일 웃지는 못할 것 같아요
- 「스마일마스크증후군」 전문
「스마일마스크증후군」에서 시적 화자는 웃는 얼굴 속에 갇힌 타인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 시 역시 웃는 얼굴 속에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면에서 철창 속에 갇힌 투계를 다룬 「화려한 멍에」와 일맥상통한다.
첫 연에서 시적 화자는 ‘모서리가 닳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다. 화자는 사진 속 웃고 있는 누군가를 스마일마스크증후군에 걸린 자라고 규정하고 ‘밖으로 나와’ 보라고 이야기한다. 나에 대한 불안, 고통, 절망과 체념의 목소리가 사물화 된 타자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는 ‘새’ ‘날개’ ‘데칼코마니’ ‘겨울’ 등 시집『그린란드 보고서』전체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그중 ‘데칼코마니’는 반으로 접어서 대칭적 무늬를 만드는 방법으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로 그대로 옮겨지게 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시적 화자가 자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투영하는 방식은 이 ‘데칼코마니’의 기법과 상당히 닮아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데칼코마니처럼 피어오르는 둥그런 궤적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려한 멍에」에서 ‘철창’으로 상징되는 세계가 그랬던 것처럼 「스마일마스크증후군」에서는 ‘웃는’ 얼굴이 감옥이 된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자신의 본모습을 웃는 얼굴 속에 가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웃은 얼굴이라는 감옥에 갇힌 ‘개살구, 개복숭아’, ‘개양귀비’에 불과하다. 시적 화자는 바로 그 ‘개살구, 개복숭아’, ‘개양귀비’들에게 ‘훔쳐서라도 눈부신 날개를 달아주고’ ‘새장의 빗장을 슬며시 열어주고 싶’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웃음의 가면을 쓴 타인을 향해 ‘금 간 거울 속의 웃음이 몇 겹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고 있어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안한 실존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황경숙의 시는 자폐적이지 않고 세계와 자신을 향해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린란드 보고서
입술이 떨어져 발등에 툭,
태양이 끝나는 곳 얼어붙은 땅에서
숨겨둔 자식의 이름
스노우 스노우
말하는 동물의 언어 뜨겁지 못해 차가운 피
굳게 닫혔던 응고된 말들을 꺼내려고
불안한 발음으로 당신을 부른다
날카로운 따뜻함으로 웃음을 베면
흰빛으로 가득했던 심연은 흐르고 흘러
눈을 가리는 흑야
당신에게서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 고백은 단지 미래의 크레바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때 본 별은 지워진 얼굴처럼 흘러내린다
아주 높고 깊은 곳까지
돌이킬 수 없는 기대 할 수 없는 반전의 반전
하얀 묵시록의 절대공간
당신의 모든 것은 날씨에 맡겨야 하리*
당신 심장이 세상 끝으로 투둑,
* 그린란드 속담
-「그린란드 보고서」 전문
그린란드는 ‘태양이 끝나는 곳 얼어붙은 땅’이다. 「그린란드 보고서」에 이르면 시인의 시적 관심범위는 지구의 변방까지 이르게 된다. 시의 외적 범위가 ‘철창’에서 ‘그린란드’로 비약적으로 확장되었지만 ‘하얀 묵시록의 절대공간’인 ‘그린란드’는 물리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관념적이다. 시인은 그린란드에 이르러 ‘눈을 가리는 흑야’를 만난다. 극지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힌 신세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얼어붙은 흑야란 능히 한 세계를 가둘 수 있는 거대한 감옥이다. 바로 그곳, ‘흑야’에 파묻힌 ‘얼어붙은’ ‘묵시록의 절대공간’에 이르러 시인은 ‘미래의 크레바스’를 말하고 있다. 크레바스란 이 시에서 화자가 그를 가둔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사이의 빈 공간이다. 즉, 그 빈 구멍은 그를 가둔 ‘흑야’의 파멸지점인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극지에 이르러서야 크레바스라는 고통스런 현실에 균열을 내는 지점, 그 극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위태로운 출구를 발견한 것이다. 현실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세계와 온전히 화해할 수 없는 삶의 거대한 허기에서 빚어진 황경숙의 시들은 불안한 실존을 온몸으로 마주한 기록이다. 그의 시는 종국에는 멀고 험한 극지까지 자신을 내몰 정도로 끊임없이 밖으로 향하는 몸부림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므로 황경숙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자아를 감금하는 빈방의 이미지는 자폐적인 성향을 띄지 않는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안으로 곪은 내적 상처를 외부로 발산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 점이 황경숙의 시편들이 목마름에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때로는 그것이 자신을 극한까지 내몰게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