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개인전'을 끝내고 나니,
물론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던 결과에 실망도 했지만, 나에게도 뭔가 변화의 바람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최근 1-2 년 사이의 대학원을 다니느라, 교직에 적응하느라, 게다가 전시회까지 치르느라 나름 바쁘고 산만했던 분위기였다면, (대학원 졸업과, 아버님의 죽음 같은 큰 일이 있었는데, 이 앞글에 보완해 놓았다.)
이젠 뭔가 한 풀 가라앉은 삶의 모습으로의 변화가 있었던 듯한데,
위) '연극처럼'. 80호(?) 유화. 1987
아래) '또 하나의 위기'. 100호 유화. 1988
교직도 익숙해진만큼 재미도 여전했고 행복했지만, 그 이전의 무절제했던 생활의 후유증이랄까?
병원에 실려다니는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폭주가 그 제일 큰 원인이었을 테지만)
원래 건강체질이거나 활동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살아왔는데,
1988년 늦가을부터 장에 출혈이 잦아(십이지장 궤양) 급기야 병원에 실려가게 되는데......
위) '상록수와 낙엽수'. A2. 수채. 1988
아래) '어떤 환자'. 60호(?) 유화. 1988
위) '마왕(죽음의 그림자)'. 장판지 위에 유화. 1988
아래) '어느 환자'. 장판지 위에 유화. 1988
평생 병원신세를 져보지 않았던 나에겐 꽤나 심각했고 충격적이어서,
나름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그에 따른 삶의 모습에 대한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고 퇴원한 뒤에는 직접 실행에 옮기기도 했는데(위 그림 들),
내가 근무한 학교가 종교학교(카톨릭)이기도 해서,
그것과도 연관된 몇몇 작품도 나오던 시기였다. (아래)
위) '갈등'. 60호(?) 유화. 1988 (이 그림은 당시 학교에 봉사교직을 하던 한 수사님(지금은 신부님)께 선물로 드렸던 걸로, 당시엔 서강대 사제관에 걸려 있었는데,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래) '사순절'. 100호 유화. 1989
그런데 한 번 터진 내 건강문제는, 일회성이 아닌,
그러니까 병원 입원한 걸 시작으로 그에 따른 후유증과 툭하면 장출혈로 이어져, 나는 수시로 병원에 들락거리게 된다.
위) '허수아비'. A2. 수채.
아래) '거울 보기도 미안해서...'. 100호 유화. 1988
그러다 위에 언급한 한 수사님(내가 친구로 여겼던)이, 1년 봉사근무를 마치고 신부 공부를 하러 바티칸으로 떠났는데(1988년 말),
건강문제도 그렇고 또 한동안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문제로 골똘했던 나는,
내가 왜 이렇게 이 생활(특히 교직)에 행복해 하고 있다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 (원래의)삶은 이게 아닌데...... 하는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되면서는,
고민이 깊어지면서(여태까지는 행복했는데, 한 순간에 행복이 멀어진 느낌이어서),
위) '병든 세월'. A2. 수채. 1989
아래) '자화상'. 20호(?) 유화. 1989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로? 어떻게?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밀어닥친 '인생의 기로'였고, 나는 고민 끝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떠나는 걸로.
'교사'로는 계속 못 살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싫지만은 않았지만, 그래서 만약 그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이젠 정말 (앞으로의 인생은)껍데기로 살아갈 게 분명해서, 뭔가 확실한 실체는 모르지만 '화가로의 삶'을 찾아가기로 했던 것인데,(당시엔, 그렇게 떠나면 어쩌면 한국으로 살아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결혼은? (당시까지만 해도 곧 결혼할 생각이었다. 몇 개월 내로 잠정적인 결혼날짜까지 잡힌 상태이기도 했고.)
글쎄, 좀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당시의 나는 결혼에 대한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그게 그림으로도 남아 있다. 아래)
'내가 결혼을 한다면?' A4 정도, 연필, 1989
(사실 나는, 결혼을 한다면, 한복을 입고 카톨릭식으로(어머니, 누님, 형수들이 신자라) 하려고 했다. 그림처럼.)
내가 만약에 결혼을 했다면 바로 이 시기일 것이다. 그런데 결국 못하고 말았다. 아니, 결혼 않고 떠난 것이다.
내 고민은 깊어갔는데, 편안한 생활(직장생활과 결혼)이냐 '내 멋대로'(?)의 생활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떠나라고 그랬는지, 일이 어째 자꾸만 떠나는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안에서의 이동이라면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외국 어딘가 먼 곳으로) 생각이 미쳐, 스스로도 놀라고 또 겁도 나서, 그런데도 떠나야 할 것 같아 고른다는 게 결국 '스페인'이란 나라로 정하면서(혼자 고민에 빠졌으면서도 일단 일은 저질러놓았는데 '스페인어' 학원부터 다니기 시작했고), 조금씩 조금씩 내 뜻을 주변(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극 소수의 지인들)에 알리기 시작했고(주변에선 난리가 났고), 그것만도 몇 달이 지나갔으며 주변의 우려 속에도 밀어붙여(마음 먹기가 힘들지, 한 번 정해지면 나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 해(1989) 한 해를 그런 식으로 보내다,
심적 갈등이 심해서였는지 또 연말에 병원에 실려가는 악조건 속에서도(아래),
위) '응급실'. 100호 유화. 1989.12
아래) '도시의 허수아비'. 80호 유화. 1989
위) '사진을 찍읍시다!'. 80호(?) 유화. 1989
이 즈음의 그림들에는, 모서리가 사라진 모양새다.
'스페인 행'을 추진한다. 그러니까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나중에 스스로 느끼기에도) '떠돌이 생활'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내 행동에 대해,
'유학을 떠났다고'도 하는데(그건 그들이 그저 이 상황을 판단하면서 갖다 붙인 말),
그 당시의 나에게 '유학'이란 호화스런 단어는 아예 없었고(물론 학교에 적을 두긴 했지만, 그건 현지 체류를 위한 비자를 얻기위한 핑계였을 뿐), 내가 전혀 모르는 그 어떤 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는 절박함 뿐이었다.(그러면서 왜 그렇게 극구 가려고 했던지는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내 주변 사람들은,
내 그림에 대해,
스페인에 간 다음에 색깔도 맑아지고 그림이 변했다(좋아졌다)고 하는데,
사실은(내 의견은) 그렇지가 않다.
어쩌면 첫번째 전시회까지가, 뭔가 어설프고 엉성한 작업과정을 거쳤다면,
그 전시 이후 스페인에 가는 과정부터(특히 이 시기의) 뭔가 좀 새로운 조짐이 보였는데,
모서리가 없어지는 추세였고, 색감이나 그림 전체적인 (인물)형체도 어설프거나 어색함에서 벗어나지 않았나(때를 벗은) 한다.
(그림의 이론적인 얘기는 전문가들과 하는 걸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 멈출까 한다.)
아래) 그 즈음의 직장 미술반실 분위기
사진(위, 아래)의 뒤에 보이는 건물이 '카톨릭 대학'이다. 당시만 해도 이 학교에서 대학 캠퍼스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 가기 직전의 그림들(위, 아래)
위) '기자회견'. 10호(?) 유화. 1990
아래) '백담사에서'. 20호(?) 유화.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