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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주교구와 현대사회
〔대목구 설정과 교회재건〕전주교구는 해방을 맞아 역사적 과제인 한국역사교육과 한글보급운동에 나섰다. 역사가인 전주교구장 주재용 신부는 역사 강의를 요청하는 본당을 다니며 신도, 일반인, 교사(敎師), 면(面) 건국위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자 청중들이 몰려왔다. 전동본당 청년회에서는 본당 소유인 전주 해성초등학교 강당에서 초․ 중등학교, 도청 학무과 직원을 대상으로 한국역사와 한글 강습회를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다.《뜻글과 쓰임》이라는 한글 교재를 만들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고,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에서《한글 첫걸음》을 펴내자 청년회에서 직접 서울에서 날라다가 공급하였다. 1946년 1월 7일 대구교구장 일본인 하야사카 주교가 사망하고 그 후임에 전주교구장 주재용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1월 22일 전주교구 출신인 김현배 신부가 서리에 임명되고, 1947년 7월 7일 제 3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교구의 재정난으로 1939년부터 중단되었던 신학생양성이 1945년부터 재개되었다. 1947년 전주에 비석거리 본당(중앙본당 전신)이 신설되고, 전주본당은 전동본당으로 명칭을 바꿨다. 전동본당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 해성국민학교를 폐교하고, 여중학교 설립 기금을 모아 교구에 전달하였다. 교구당국은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1946년 8월 1일 성심여학원을 설립하고 이를 발전시켜, 1948년 7월29일 성심여자중학교 설립 인가받고9월 26일 개교하였다. 1952년 4월 13일 성심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4월 30일 개교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전주본당에 성심유치원이 설립되었다.1949년 5월 1일「전주성모병원」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1951년 나바위본당에 진료소를 설립하였다가 1971년 폐쇄되었다.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 신심인 순교자현양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순교한 후 폐족되어 노복들과 친지들이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서 1km 가량 떨어진 김제군 용지면 제남리 바우백이에 가매장하였다. 1914년 그 땅 소유주의 요청으로 유항검 가족 묘를 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전주본당 보두네 신부와 회장단은 사순절 때 파묘하여 4월 19일 오늘의 치명자 산 정상에 안장하였다. 1949년 7월 17일 전동성당 자모회가 주축이 되어 14척 높이의 십자가를 세웠다. 그 보다 앞서 되재본당은 1939년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호성지에 묻혀있는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 대리석 십자가 비를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다. 1949년 9월에는 평신도의 신앙 재무장과 평신도사도직의 조직적 활동을 활성화하기 하기 위해 18개 본당의 대의원들이 모여「가톨릭연맹」을 조직하고 평신도 역할과 사명을 다짐하였다. 군산본당에서는 가톨릭연맹, 청년회, 성모성심회 등이 신자배가운동을 벌려 영세예비자 180명을 인도하였다.《경향잡지》1950년 2월호「사설」에서 한국교회사상초유의 일이라고 극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8월 4일 교구장 김현배, 이약슬, 김영구, 김재덕, 김종택 신부와 이대권 부제등 6명이 전주 교도소에 갇혔고, 성직자들은 신부들을 보호해 줄 믿을 만한 산골 교우촌으로 피신하였다. 교도소에 갇혀있던 교구장등 6명은 9월 27일 사지(死地)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 전주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던 광주교구 신학생 전기수(全基洙, 그레고리오, 나주본당)와 고광규(高光奎 ,베드로, 목포 산정동본당)는 26일 정치보위부에 끌려가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전주교구에서는 1950년 7월~1952년 4월 사이에 70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들은 현대순교자 215명 명단에 들었다. 성당과 공소가 전화(戰火)되거나 파괴되었다. 수류성당은 인민군에 의해, 고산 석장리 공소는 빨치산에 의해 전소되고, 되재성당과 고산 차독백이 공소와 순창 오룡촌 공소는 아군에 의해 전소되었다. 또한 전동성당은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차량정비소․ 보급창고로 사용하여 성당 외벽만 남고 내부는 거의 파괴되었다.. 전주교구는 1954~59년까지전쟁으로 소실되거나 파괴된 성당을 재건하였다.
1957년 1월 21일 전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1월 26일 김현배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김현배 주교는 1957년 5월 21일 중앙성당에서 서품식을 갖고 그 성당을「주교좌 본당」으로 정하였다. 김 주교의 첫째 사목 목표는 1군(郡) 1본당 설립이었다. 1954년 전주교구의 본당은 전동․ 남원․ 나바위․ 삼례․ 김제․ 안대동(함열)․이리․ 금산․ 군산․ 부안․ 진안․ 태인․ 전주 대동 등 13개였다. 1889년부터 시작한 수류본당은 성당 소실로 김제본당 관할 공소가 되고, 장수 수분리본당 역시 신부의 공석으로 남원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55년 장계본당이 신설되고, 정읍본당이 복원되고, 1956년 임실본당과 대야본당 등 2개가 신설되어 17개 본당이 되었다. 1957년에는 무주본당 신설, 1958년 고산본당 복원, 1959년 여산본당 신설 등으로 20개가 되었다. 1960년 3월에는 황등, 순창, 고창에 본당을 신설하여 ‘1군 1본당’ 계획을 성취하여 24개 본당을 갖게되었다.
1950~1960년대는 신축 붐이 일어났다. 각 본당으로 구호물자가 나오자 신도들은 어차피 자신들 힘으로 성당을 지을 것이므로 구호물자 일부를 매각하여 성당 건립에 사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1955년 삼례, 이리, 김제, 군산 둔율동 등 4개, 1956년 진안, 1957년 중앙, 금산, 정읍, 무주 등 4개, 1958년 고산, 남원, 여산, 장계 등 4개, 1959년 임실, 함열, 수류, 신태인 등 4개, 1960년 황등, 부안, 순창 등 3개 도합 20개의 성당들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전주교구청이 1960년 6월 21일 신축되었다. 그러나 한공렬 주교가 1966년 2월 25일 서울교구 소속 인보성체수도회를 전주교구가 인수하면서 주교관 건물을 수녀원에 넘겨주고, 1970년 3월 1일 가톨릭 센타를 증축하여 10월 30일 완공해서 입주하였다. 1975년 11월 1일에는 가톨릭 센타와 연계하여 교구청을 신축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외국 선교회․ 수도회․ 사도직 단체, 각종 신심단체들의 한국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5년 5월 5일「레지오 마리에」가 도입되고, 1960년 1월 19일 재속프란치스코회가 도입되고, 1969년 1월 꾸르실료운동이 도입되었다. 1962년 6월 10일「가톨릭노동청년회」가 설립되고, 1964년 10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설립되었다. 1961년에는「국제농촌지역사회개발협조처. CIRD」가 진출하여 전주성모병원과 고창, 함열, 김제, 삼례 등에 있는 나환우촌을 순회하며 진료 활동을 하였다. 1959년 12월에는「전교협조회.S․A․M」가 진출하여 전주교구 소속신부가 되어 교구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분야의 사목을 도왔다. 1950․ 60년대 한국교회의 특성은 교회운영과 모든 사업이 외국의 원조에 철저히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전주교구는 외국의 원조를 받아 병원을 설립하였으니 운영난으로 폐쇄되었는데 진안 성모의원이 1959년 3월 20일 개원하였다가 1977년 폐쇄되고, 장계 성모병원은 1959년 12월 15일 개원하였다가 1990년 말 폐쇄되었고, 전주성모병원은 1981년 7월 31일 폐쇄되었다. 그리고 가톨릭여학생관이 1965년 3월 설립되었다가 1983년 2월 28일 폐관하였다. 1960년 2월 19일 숲정이 순교 터에 성심여자 중․고등학교와 남매격인 해성중학교가 설립되고, 해성고등학교는 1962년 12월 31일 인가를 받아 1963년 3월 9일 개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교구의 쇄신과 발전〕1960년 4월 30일 김현배 주교가 서거하고, 1961년 2월 13일 제 4대교구장에 한공렬(韓珙烈, 베드로)주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1962년 3월 10일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립되어 전주교구도 정식 주교구가 되었다. 1962년 10월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려 교회개혁을 시작하였다. 1964년 7월 15일 한국교회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라틴어로 바쳐오던 미사와 전례를 한국말로 바칠 뿐 아니라 교회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교회운영의 민주화가 시작되어 평신도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구와 본당 사목과 재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교구는 사목기구가 성직자 중심의 조직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참여를 강력하게 권장하였다. 1966년 8월 전국에서 최초로 “본당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10월 6일 「사도회」로 개칭하였다. 1986년 1월 12일 사도회를 1983년 반포된 새로운 교회법에 따라「사목협의회」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1971년 7월 14일 한공렬 주교는 대주교로 승격됨과 동시에 제 6대 광주 대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3년 2월 10일 김재덕 신부를 주교로 임명함과 동시에 제 5대교구장으로 발령하였다. 이때 교세는 31개 본당, 교우수 51,808명으로 교구설정 당시보다 3배로 성장하여 있었다.
전주교구의 1970년대는 평신도 활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과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바탕으로 하여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여 평신도들이 교회 운영과 사목에 관여하였다. 또한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투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1차적인 근거가 된 교리는《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었다. 전주교구는 교구장을 구심점으로 모든 사제단이 일치하여 교회의 예언자직 사명에 모든 힘을 기울여 반독재․ 민주화․ 사회정의 구현운동에 앞장섰다. 1976년 문정현 신부가 3․1절 명동기도회 사건으로 8월 1일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1978년 12월 31일 삭방되었다가 1979년 7월 26일 재수감되었다. 1978년 7월 6일에는 경찰이 박종상 신부를 구타하고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9년 9월 11일 박정희 정권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를 구속하기로 결정하는 사태에 까지 갔다가 철회하였다. 1980년 5. 18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5월 23일 교구 정평위원회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광주시미의 학살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보내고, 모든 도민에게 광주학살만행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폭로하였다. 전주교구는 1970년대 상관, 숲정이, 용안, 장수, 원평, 효자동, 오룡동, 금마 등 7개 본당이 신설하여 39개 본당에 이르렀다.
〔교구의 성장과 변모〕1980년 4월 1일 김재덕 주교가 사임하고, 1982년 6월 24일 박정일 주교가 제 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을 맞으며 1984년 5월 6일 103위 시성식을 갖게 되었는데 전주교구는 7위 성인의 시성식을 앞두고 1983년 5월 천호성지에서 12분 순교자 유해발굴 작업을 가졌다. 이 때 유해의 행방을 모르던 정문호(바르톨르메오)․ 한재권(요셉) 두 순교성인의 유해를 찾았다. 박정일 주교는 교황청 견진성사성의 허락을 받아 1984년 5월에 시성된 일곱 분 복자들 즉,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이명서․ 조화서․ 조윤호․ 정원지등 일곱 분을 교구 수호자로, 9월 26일을 수호자축일로 정하고 1983년 9월 7일 선포하였다. 박정일 주교는 200주년을 맞으며 한국최초의 자치교구인 전주교구가 한국교회의 맏형답게 세계교회에 이바지하는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1957년 비오 12세 교황이 발표한「피데이 도눔」(Fidei donum)의 정신을 계승한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에 따라 사제가 부족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키로 하고, 1984년 11월 3명의 사제를 페루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1980년 1월 5일 이수현 신부가 독인 마인츠 한인교회에 교포사목을 떠났다. 교구설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다. 이어서 1983년 8월 24일 필립핀 한인천주교회에 교포사목을 파견하였다.
1980년대는 순교자 현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4년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에 이어 1987년은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으며 순교자 교구답게 순교정신현양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87년 8월 30일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아 순교정신의 생활화를 위한 교육장으로 천호성지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또한 전주교구 순교신앙의 꽃인 부부동정 순교자 유 요한․ 이 루갈다와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 개발을 7월부터 준비하고, 1988년 3월 5일 기공식을 가졌다.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구의 숙원인 한국초대교회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87년 12월 4일 시복 준비위원회를 결성, 1988년 1월 9일 모임에서 시복추진 대상자를 1차적으로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부부동정순교자 유 요한과 이 루갈다 등 5명을 선발하였다. 시복 시성위원회는「5인 순교자 시복시성청원서」를 작성하고, 1989년 2월 13일 박정일 주교는 마산교구장으로 전임되기 전인 2월 10일 청원서를 교황청에 발송, 1989년 4월 2일 교항청 시성장관으로부터 시복 시성 청원을 해도 좋다는「5인순교자 시복시성 청원에 대한 교황청 회신」이 왔다. 1980년대 전주교구는 전주․ 익산․ 군산․ 남원․ 김제․ 정읍 등 5개 시(市)를 중심으로 본당 신설을 중점 사업으로 하여 18개 본당이 설정되었다. 전주교구는 재단 부동산을 정리하여 신설본당 부지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0년대는 교회의 신앙유산들이 사적(史蹟)․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1981.9.28), 나바위 성당 사적 318호(1987.7.25), 숲정이 천주교 순교성지 지방기념물 제71호(1984. 9.20), 치명자산 천주교 고묘(古墓) 지방기념물 제69호(1984.9.20) 등이다. 정의구현 활동은 중단이 없었다. 의식화운동의 장(場)인 전동성당이 1988년 10월 10일에, 오룡동성당은 1989년 1월 5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문규현신부는 1989년 7월 25일 방북하여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다가 체포되어8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의구현과 자선활동은 사회복지를 향한 두 발(足)이다. 전주교구의 사회복지 기관중 구라사업 기관으로 함열 상지원이 1950년 3월 25일에, 고창 동혜원이 1952년에, 김제 신암 농원이 1961년 12월 31일에, 익산 농장이 1974년 4월 4일에 설립되었다. 나환우를 돕는 의료기관으로는 익산 성모병원이 1972년 6월 1일에 설립되었다. 장애인 복지시설로는 1984년 7월 20일 무지개 가족이, 1985년 4월 16일 작은 자매의 집이 설립되었다. 노인복지시설로는 1979년 7월 26일 성언 복지원이, 1988년 9울 15일에는 영보 은혜의 집이, 1991년에는 인보 노인종합복지곤이, 1996년에는 성모 노인 돌봄 집이, 1996년 11월 2일에는 야고바의 집이, 1997년 9월 1일에는 성 요셉 동산 양노원이 설립되었다. 노동 복지관으로는 1983년 1월 1일 성요셉 익산 노동자의 집이, 1986년 4월에는 성 요셉 군산 노동자의 집이 설립되었다. 사회복지후원회로는 1986년 6월 사라의 다리가 설립되었다.
1988년 12월 28일 박정일 주교는 마산교구장으로 전보 발령되어 1989년 2월 13일 교구를 떠났다 그리고 1990년 2월 20일 이병호 신부가 제 7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전주교구는 1990년대부터 교구의 내실을 기하는데 힘썼다. 전주교구 사제단은 1990년 7월 사제총회에서 교구 운영 전반에 걸쳐 평신들의 전문적이고 폭넓은 자문을 수렴하고, 교구 제반 행정을 공개하여 민주적으로 교구 행정을 운영키로 결의하였다. 1994년에는 교구내 각 본당 사무 전산화 통일 방안을 마련키 위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1995년에는 교구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직제를 개편하였다. 1995년 7월에는 직원 인사법규를 제정공포 하였다. 또한 신설 본당 보조규정을 정하고, 1996년부터 실시하여 각 본당에서 ‘본당 설립 기금’을 분담하였다. 1997년 교구설정 60주년을 마무리하며 교리교육과 성서교육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교육하여 교구민의 자질 향상시키고, 선교활동의 전위대로 일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97년 12월 1일 「전주 가톨릭 신학원」을 설립하였다. 전주교구는 1964년《천주교 호남발전사》을 간행하였으나 이 책을 보충할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하였는데 교구설정 60주년을 맞아 1998년 7월 30일《전주교구사》Ⅰ권(1,318쪽),《전주교구사》Ⅱ권(1,757쪽)의 방대한 교구사를 간행하였다. 이병호 주교는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의식에서 1997년 8월 18일 교구 내에 일종의 개척교회인「선교본당」제도를 도입하여 익산 팔봉, 오수,만경, 줄포 등에 선교본당을 신설하였다. 한국교회는 2000년 대희년에 이어 2001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행사가 계속되었다. 2001년 9월에 조직된「시복시성추진대상자선정위원」는 2002년 1월 15일 기왕의 전주교구 시복시성추진 대상자 5명 이외 신유박해 6명, 기해박해 13명 등 19명을 추가 선정하여 모두 24명을 추진키로 하였다. 전주교구는 동전주지구, 서전주지구, 남전주지구, 북전주지구, 군산지구, 익산남지구, 익산북지구, 김제․ 정읍․ 고창 ․부안 지구, 임순남 무진장(임실․ 순창․ 남원․ 무주․ 진안․ 장수)지구, 특수 지구 등 10개 지구로 되어 있고, 34개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와 24개의 수도단체가 할동하고 있으며, 교구 주보(週報)는《숲정이》이며, 공소용《주님의 날》과 어린이용《 어린양》을, 그리고 2003년에는 계간지로《 쌍백합》을 발간하고 있다. 현재 본당은 84개, 교우수 161,194명 사제 166명, 공소 108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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