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 (23)
할머니의 기억
박 할머니는 47년생으로 만성신장염을 앓고 계셨다. 여러 상급병원을 들러 본원에 온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식사를 잘 못하여 종종 링거수액을 맞으셨다. 오후 3시경 갑자기 호흡곤란이 생기며 혈압이 떨어지고 의식까지 혼미해져 보호자에게 급히 연락하였다. 상급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하니, 큰 병원에서도 신장이 너무 망가져 혈액투석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며 그냥 이 병원에서 끝까지 치료받길 원하였다.
“그러면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은데 온 가족이 마지막으로 면회라도 한번 하십시오.”
보호자가 저녁에 오겠다고 하여 기다렸다. 저녁 7시 경이 되니 간호사가 방문을 열며 보호자가 엄청 많이 왔다고 말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희 병원을 믿고 환자를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환자의 장남이 “몇 년 전에 아버지도 이 병원에 모셨지요. 어머니 상태가 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환자의 콩팥 기능이 한계에 도달하여 이제 심장, 폐까지 기능이 저하되어 호흡곤란, 혈압저하, 심폐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보호자들을 찬찬히 관찰해 보니 중년이 된 아들 두 분과 40대 중반의 딸, 그리고 할머니가 귀여워했을 초등·중학생 손주가 서너 명 보였다.
“전번에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 종합병원에서 항생제를 쓰고 하니 돌아오시던데 이번에도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보호자들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희 병원에서 가능한 방법은 다 해보겠지만 워낙 콩팥 기능이 고갈되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전번에 항생제가 잘 듣지 않아 고신대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쓰니 효과가 있었다던데 필요하면 다시 약을 타오겠습니다.”
“네, 그 약을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아드님이 큰 병원에서 좋은 약 타오시는 바람에 지금까지 잘 버틴 것 같습니다.”
비대면 면회실은 지하 1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침상의 소리가 덜컹거리며 육중하게 들려왔다. 직원 한 사람은 환자가 누운 침상을 앞에서 끌고 다른 직원은 한손으로 침상을 밀며 다른 손으로는 산소탱크를 끌고 왔다. 유리창으로 칸막이를 한 면회실 양측에 마이크와 스피커가 있었다. 할머니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보호자들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였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환자는 눈을 잠시 돌려 아들 쪽으로 돌려보았다. 보호자들이 환자의 고개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개를 돌렸지만 환자의 눈길은 그대로 허공을 보고 있다. 자녀들이 말을 하면 그 소리를 듣고 가끔씩 눈을 돌리는 것이다.
아들 : 어머니, 힘내세요. 빨리 나아서 집으로 갑시다.
딸 : 엄마, 빨리 나아 집으로 가셔야죠.
손녀 : 할머니 소영이에요. 할머니 힘내시고 빨리 나아 저희들과 집으로 가요.
손녀 : 할머니 선영이에요. 할머니 힘내세요.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다음번엔 아영이와 함께 또 올게요.
보호자들을 보내고 귀가하여 자고 있는데 밤에 문자가 왔다.
박 할머니 밤 10시 20분에 사망하시어 보호자들이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박 할머니를 보니 나의 친할머니가 생각났고 할머니의 장례가 기억났다.
나의 부모님은 할머니를 모시고 진주 남강 강변의 작은 농촌마을에 살았다. 다섯 살 즈음의 기억인데도 그 기억이 강렬하여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보인다. 나의 할머니는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장지는 할아버지가 묻혀있는 강 건너편 언덕이었다.
그런데 며칠간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 상여가 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강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어른들이 의논 끝에 모든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우리 마을이 생긴 이래 사상 최대의 도강(渡江) 작전이 벌어졌다. 상여를 큰 거룻배 안에 싣고 상주인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차곡차곡 태웠다. 동네 청년들과 어른들이 모두 모여서 밧줄로 배를 상류로 끌고 갔다. 마을 촌장님이 뱃머리에 서서 깃발을 흔들며 구령을 외치니 노 젓는 사람들이 모두 따라서 외쳤다.
“어이싸, 어이싸, 어이싸, 어이싸.”
상류에서 배를 강심으로 출발시켰다. 큰 배는 물결에 떠밀려 순식간에 하류로 떠내려갔다. 잘못하면 수십 명이 떼죽음을 당할 형편이었다. 청년들과 어른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다. 촌장님이 뱃전에서 깃발을 흔들며 구령을 외쳤다.
“어이싸, 어이싸, 어이싸, 어이싸.”
상여를 실은 배는 떠내려가면서도 차츰차츰 건너편으로 저어가 결국 건너편 하류에 겨우 도달했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배가 세차게 떠내려가던 모습, 동네 어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와 필사적으로 노를 젓던 모습, 촌장님의 구령에 따라 모두 큰소리로 ‘어이싸, 어이싸’하고 외치던 모습, 물살이 뱃전을 치던 모습, 청년들의 땀방울이 흩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른들이 다시 배를 끌고 상류로 올라와 나루터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누운 상여가 육지에 올라서자 여자들은 다시 “어이구~어이구~” 곡을 하기 시작하며 장례행렬을 따라갔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는 마을을 떠났지만 멀리 가지 않고 강 건너 산언덕에 할아버지와 함께 누워계신다고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은 장례나 결혼이 있으면 모두 나와서 도우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했다. 조부모님, 부모, 형제, 이웃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마음이 찡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