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 비운의 혁명가, 노동운동가, 독립운동가
1. 들어가는 말
남로당의 핵심인물 중 최후까지 남한에 남아 활동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 최고급 간부인 박헌영, 이승엽등은 46년 월북후 북한이 최고재판소에 의해 간첩으로 몰아 처형되었고, 남한에 남았던 사람들 역시 전향의 의사를 비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남았던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김삼룡,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이주하, 정태식이다. 1929년의 원산총파업이나, 1939년의 평양 고무공장 총파업을 비롯하여 줄곳 노동운동을 해 왔고, 지하투쟁의 풍부한 경험을 갖고 김삼룡을 보좌한 이주하, 기본계급출신으로 일찍부터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탁월한 조직자이자 영도자였던 남로당 최후의 지도자 김삼룡, 그리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라 불리워지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이들의 생애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들 중 이현상에 대해선 빨치산 수기들이 세상에 공개되고, 이현상 평전이 실천문학사에서 발행되어 어느정도 그 윤곽이 드러났지만, 김삼룡과, 이주하에 대한 연구작업은 전무한 실정이다.
김삼룡은 1950년 6월 28일 남산에서 총살당하기까지 40평생 동안 사진 한장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지하생활을 해 왔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거의 없었다. 해방이후 쏟아진 해방일보등의 좌익신문이나 잡지들도 유독 김삼룡이 집필한 글은 없었다.
2. 출생과 성장, 그리고 1930년대 전후의 시대 상황
김삼룡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충북 충주군(지금은 중원군) 엄정면 용산리에서 6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김삼룡이 태어난지 몇 년 후 그간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편모슬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집안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라고는 논 한마지기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고, 그나마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소작이라도 했었는데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당시만 해도 천시받던 국밥집을 했다. 이런 어려운 형편으로 맏형인 김쌍룡은 학교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채 남의 땅을 빌려 충주의 명물, 황색연초를 경작하면서 가정의 대를 이어 나갔다. 맏형의 이런 헌신적인 덕택에 둘째인 복룡부터는 용산리 공립보통학교(엄정초등학교의 전신)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김삼룡이 보통학교를 입학한 것은 1922년 13세 때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이 나이 정도에 학교에 다녔으니 그리 늦은 편이 아니었다. 그의 학교생활은 키는 작고 땅땅하였지만 공부는 매울 잘하여 항상1,2등을 독차지 하였고, 두뇌가 아주 명석하고 한 곳에 집착력이 강하고 우직할 정도로 뚝심이 있었다고 한다. 김삼룡은 보통학교 1학년 때 민족주주의자인 이형제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하여 사회에 대한 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소작인의 아들임을 깨달았고 양반 상놈으로 나누어진 신분사회의 문제를 느끼면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3. 졸업후 서울로의 상경, 그리고 1930년대 전후의 시대 상황
김삼룡은 1928년 2월, 19살의 나이로 엄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민족주의자였던 이형제선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진보적인 지식인 이준열이 세운 고학생들의 자활단체인 칼토페(고학당)에 입교를 한다.
이 당시는 코민테른이 1928년 7월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고 12월의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촉구하는 ‘12월의 테제’라는 부르는 결정서를 발표하는데 이 내용의 핵심은 조선공산당의 고질적인 파벌상을 비판하고 4차에 걸친 실패의 원인을 지식인 유휴분자들이 주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을 조직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한 혁명당을 재건할 것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수많은 학생 출신들이 공장으로 향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에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된 것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 직후였다. 이듬해인 1918년 1월 소련 서부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을 지도자로 한 소련공산당 한인지부가 조직되었고 6월에는 소련의 동부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를 지도자로 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다.
이 두 조직은 활동 영역이 달랐다. 모스크바와 가까운 이르쿠츠크 파는 소련에 귀화한 조선인들로 이뤄져 소련 내의 반혁명 백군과의 전투에 참가한 반면, 조선에 가까운 동부 쪽의 하바로프스크 파는 조선인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비귀화인들로서 대일 무력투쟁에 나선다.
1919년 8월, 이동휘의 하바로프스크 파는 중국 상해로 본거지를 옮겨 2년 후인 1921년 1월 고려공산당을 결성한다. 고려공산당은 민족계 인사들도 포함한 연합당으로,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렀다. 그러자 김철훈의 이르쿠츠크 파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네 달 후인 5월에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결성한다. 이를 세칭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라 불렀다. 조선의 공산당은 시작부터 두 개로 갈리진 셈이었다.
소련은 레닌이 직접 나서서 이 두 개의 고려공산당에 대하여 각각 적지 않은 자금을 제공하였고, 양대 세력은 서로의 우열을 다투면서 소련에 밀착하려 하는데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분열하게 되고 두 개의 고려공산당 사이의 싸움은 점점 심각해졌다. 분열상을 보다 못한 레닌은 조선인의 두 개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이 모두 힘을 합쳐 반일 해방투쟁에 통일전선을 형성하도록 권고하기에 이른다. 이 방침에 따라 코민테른은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대회 때 조선의 좌우파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 통일전선을 권한다. 그러나 통일전선은 실패하고, 11월에는 두 개 고려공산당을 통합할 것을 권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결국 소련과 코민테른은 양대 조직을 모두 해체하고 새로운 공산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한다.
소련은 1922년 12월 1924년 3월에 조선을 전담하는 고려국과 조직국을 설치하고 조선 내 통일된 새로운 공산당 건설을 지원했다. 1923년 6월 경 경성에서 고려국 국내부를 확보한 코민테른은 조선 내의 각종 좌익단체를 정비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산당 건설을 추진한다.
1925년 4월, 경성에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공청)가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26세 이상, 공청은 25세 이하가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화요파, 북풍파, 서울청년회, 조선노동당 등의 사상단체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서 화요파가 주동이 되어 조직하였다고 해서 일명 화요파당이라고도 한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는 고려국 국내부 비서이며 이르쿠츠크 파 출신인 김재봉이었고 공청비서는 역시 이르쿠츠크 파 상해공청 비서였던 박헌영이었다.
코민테른은 이 당을 조신지부로 승인하였다. 이때부터 국내 공산주의 운동은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 아래 들어간다. 김재봉과 박헌영은 조직 확대와 공청원의 모스크바 파견 훈련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러나 결성 7개월밖에 안 된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 당원 하나가 술에 취해 자신이 공산당원이라 떠벌이다가 체포되는 어이없는 사건으로 일망타진되고 만다. 이를 세칭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의 구성원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신의주 사건 직후인 1925년 12월, 경성에서 두 번째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청이 조직되었다. 당 책임비서는 강달영, 공청 책임비서는 권오설이었다. 두 사람 모두 화요파로 1차 공산당의 후계였다. 강달영의 정치목표는 좌우연합의 국민당을 조직하여 공산당이 실권을 쥐는 것이었다. 강영달은 천도교 중진들과 만나 통일 전선을 논의하는데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3.1만세운동을 재현하려다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또다시 일망타진된다. 이를 세칭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 한다.
이 무렵, 동경의 일월회 간부들은 국내의 정우회에 가입하여 “조선의 사회운동은 민족운동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 형태는 정치투쟁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정우회선언을 발표,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의 통합을 추진한다. 이 선언을 토대로 1927년 2월 민족주의자 이상재와 사회주의자 홍명희를 정 ․ 부회장으로 하는 신간회가 설립되었다. 신간회는 정우회선언에 찬동한 여러 좌익 계파들이 민족진영과 협동함으로써 이뤄진 것으로, 국내 항일운동사상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편, 제2차 조공의 간부였던 김철수는 1926년 9월부터 당 재건을 기도, 12월에 안광천등과 제흉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해 놓고 자신은 이 조직에 대한 코민테른 승인을 얻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간다. 코민테른 당국은 이 당을 승인하였다. 이 당의 초대 책임비서는 김철수이고 공청 초대 책임비서는 고광수였다. 세칭 ML당의 출발이였다. ML당은 조선공산당 파벌 싸움을 청산한 통일적 당이라고는 하나 주도권 다툼과 경찰 추적 등의 사정으로 책임비서를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1928년 2월에 총검거되고 말았다. 공청도 책임비서를 양명, 하필원, 김철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검거되었다. 이를 세칭 제3차 조선공산당이라 부른다.
같은 시기인 1927년 10월 권태식 등이 만든 비이론파(非理論派) 조선공산당과 이영 등이 만든 신조선공산당이 있었으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조직적 기반이 허약한 데다 계급성과 투쟁성에서 떨어진다는 내외의 비판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치모리배라는 불명예까지 얻는다.
1928년 4월에 ML파 잔여자, 서울계 신파, 및 상해파 등이 연합하여 코민테른 지부로서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 당의 책임비서는 조공 최초로 노동자출신의 차금본이었고 공청 책인ㅁ비서는 고광수였다. 이른바 제4차 조선공산당이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더욱 극심해져 1928년 4월과 6월 사이에 코민테른의 승인도 받지 못한 비이론파 조공과 신조선공산당이 검거되고 7월에는 차금봉의 4차 공산당도 일제히 검거 되었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의 운명은 사실상 끊어졌다.
김삼룡이 다니던 고학당은 처음에 동대문 밖 도살장의 시멘트 바닥에서 시작, 학생들이 장사도 하고 소인극도 공연도 하여 모은 돈으로 건물을 세운 후 많은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한, 자칭 무산계급의 학교였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공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학생과 선생이 함께 빵 공장도 하고 야시장도 열었는데 주로 영신환을 팔아 돈을 모아 생계를 유지했다. 김삼룡을 위시해 유축운, 이원봉, 으능종, 정종근 등 많은 운동가들이 고학당을 통해 배출됐다. 그는 이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흥미를 갖고 연구에 몰두 좌익문헌을 섭렵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좌익서적을 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범죄행위로 여겨지던 때에 배제고등학교 김병선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경찰에 알려져 서대문경찰서에서 치안유지법으로 검거되어 김삼룡은 1930년 11월 1년2개월 선고받고 첫 번째의 징역생활을 하게 된다.
4. 이재유와의 만남
김삼룡은1931년 경성형무소 채석장 사역에서 평생의 동지가 되는 유명한 혁명가인 이재유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이재유는 학생들 사이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재유는 1905년 함경북도 상수군 별돌면 선소리에서 태어나 1924년 보성고보 2학년을 자퇴하고 다시 송도고보 4학년에 편입하였지만 또다시 퇴학처분을 받고 1926년 12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일본대학전문부에 입학하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인 혁명적 노동운동에 뛰어든 사람이다. 그 이후 그는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남부조합에 가입, 이 조직을 지도했다. 1927년 11월에는 이우적, 박낙종, 김천해 등과함께 고려공산당천년회(공청) 일본부의 건설에 참여는 물론 공청원으로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직업적인 혁명가였다. 그는 당시 제4차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930년 11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김삼룡은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짐작컨대 김삼룡은 한 혁명가의 치열한 삶과 투철한 의지에 고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삼룡과 이재유는 서대문형무소 뒤편에 있는 현저동 채석장에서 한여름을 함께 보냈다. 폐병초기인 이제유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강제로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김삼룡이 곁에서 따라다니다시피 하면서 도와주었다. 일본에게는 물 한모금 부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이재유 대신 자신이 간수들에게 부탁해 그를 쉴 수 있도록 했다. 김삼룡이 누구에게든 소탈한 성품으로 대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편으로 만들어 내는 천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이재유는 눈여겨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2월 김삼룡은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옥하여 고향인 엄정면으로 내려갔다.
5. 경성트로이카의 일원으로 활동
먼저 출옥한 김삼룡은 고향인 엄정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한편 농민들을 조직해 사회주의 학습을 시킨다. 두터운 입술과 주름진 얼굴이 소탈한 농부처럼 보이지만 대화 상대방을 한번 끌어들이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김삼룡은 민족주의해방운동의 무풍지대였던 충청도 내륙의 농촌마을을 서서히 항일 분위기로 바꿔 놓는다.
한편 경성형무소에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이재유는 32년 12월 22일 3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자 이듬해 5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기 위해 경성지역 노동운동가와 학생들을 모으면서 곧바로 김삼룡이 조직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간과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충주 엄정으로 연락을 하여 33년 6월 김삼룡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재유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있어 그의 천부적인 조직력이라면 원산총파업사건으로 도피생활을 하다 인천으로 내려와 부두에서 일을 하던 이백만 등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지만 아직 조직이 정비되지 않는등 조직이 결성 돼 있지 않은 인천에서 충분히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 수 있으리란 판단에 따라 인천에서 김삼룡이 이재유는 경성에서 각각 활동하기로 결정한다. 조직형태로는 어느 한 지도자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하부조직은 물론 상부조직까지 모두 세 명 이상이 한개 조가 되어 공동으로 결정하고 공동으로 책임지는 민주적인 방식인 트로이카를 택하게 된다. 트로이카 방식의 조직을 택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로 김삼룡, 이재유가 서울과 인천에 진출한 무렵 서울지방과 인천에는 그의 노선 이외의 운동자들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계통 노선의 운동자들까지 포섭하여 보다 많은 동지를 얻기 위해서이고, 또다른 이유는 만일 경찰에 검거된 경우 조직체가 폭로되는 것을 대비하고, 끝으로 각 성원들의 자발성과 자주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경성트로이카가 조직된다.
1933년 초여름부터 공장과 학교에서 조직작업을 시작한 경성트로이카는 얼마안가 국내 최대 조직으로 성장한다. 현장에서 새로이 조직된 노동자도 있지만, 이미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 있던 사회주의의자들과 운동에 투신하고자 의지를 가지고 있던 이들을 조직했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빨았다.
기본적으로 대중 활동을 토대로 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일제경찰로부터 보안에는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유는 하부 트로이카 구성원들까지 직접 만나러 다녔고, 이것 때문에 조직 전체가 검거당하게 되었다.
경성트로이카에는 흣날 남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여러 탁월한 인물들이 가담한다. 이재유와 삼두마차를 이룬 이현상은 작고 통통한 체구에 노란 색 나는 두거운 뽈테 안경을 쓰고 있어 얼핏 완고한 선생님처럼 보였으나 의지와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재유보다 한살 어린 나이로, 중앙고교를 다닐 때부터 6.10만세 운동에 가담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적 잇는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다니면서 조선공산당 당원이 되어 양정,경신,휘문,경성여상 등 여러 학교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김삼룡은 1933년 하반기부터 인천부두의 하역노동자 일하면서 부두노동자들의 조직을 책임진다. 그는 하룻밤에 소조 하나를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직 능력이 탁원해 얼마 안 가 인천을 적색노조의 근거지로 만든다. 일제하 경성에서 가장 번성한 공업지대였던 영등포역시 그의 출현으로 빠르게 조직화된다.
김삼룡, 이재유, 이현상, 이순금, 이관술, 등 탁원한 조직가들로 이뤄진 경성트로이카는 늦여름부터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 등 여섯군데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켜 이를 직간접으로 지도하고 동덕여고를 포함한 7개 중등하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일경은 곧장 탄압을 개시해 파업 주동자들과 동맹휴학 주모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연행자는 경성의 또 다른 노동운동 조직인 권영태 그룹과 때마침 터진 강릉의 조직사건까지 겹쳐 근 500백여 명에 이르렀다. 경찰은 최종적으로 170여 명을 경성트로이카 조직원으로 분류해 그 대부분을 구속시키는데 실제 관련자는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핵심지도부인 이순금, 이현상, 김삼룡에 이어 이재유까지 체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경성트로이카는 일단 붕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현상은 7년, 김삼룡은 5년간의 수형살이에 들어간다.
6. 경성콤그룹에서의 활동
경성트로이카 사건의 파장이 미친 여파는 실로 컸다. 그 후 몇 해 동안 국내 공산주의자의 활동은 한동안은 잠잠했다. 김삼룡 역시 장기간 구속되었다가 출소하여 한동안 다시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관계자 중 검거를 피한 이관술은 다시 동지 규합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관술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1929년 일본의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동덕여고에서 역사교사로 근무하면서 일제의 만주출병을 반대하는 반제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1933년 1월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34.4월에 석방된다. 이후 경성트로이카 보석으로 풀려났고, 그 뒤 잡지 적기를 출간하여 반제동맹의 재건을 노리면서, 영등포에서 노동자조직 활동을 벌이던중 1939년 1월 누이동생인 이순금과 함께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삼룡을 이재유를 통하여 이야기는 들었으나 직접 만나기는 처음인 그에게 조직책임를 맡긴다. 이관술이 김삼룡에게 그와 같은 막중한 임무를 맡긴 것은 엠일(ML)계의 주요인물 중 김삼룡만이 기본계급 출신인데다 보안의식이 철저하고, 조직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박갑동씨의 의하면 규율있는 강철같은 조직이 아니고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김삼룡의 지론이었다는 것만 봐도 이관술이 그에게 조직책임을 맡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삼룡은 이관술, 이순금의 제의를 승낙하고 곧바로 상경, 우선 각 공장의 세포조직을 복구하기 위해 대창직물.경성전지.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을 파고 들어갔다. 이때부터 조직가로서의 탁월한 그의 진면목을 나타나기 시작, 그 후 줄곧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자가 되는 발판을 세웠다.
얼마 후에는 경성콤그룹이라는 이름도 갖는다. 경성지역 공산주의자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이전의 명칭인 트로이카나 재건그룹이니 준비그룹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뜻을 가지지 않았다.
경성콤그룹은 사실상 일제강점기 마지막 공산주의자 조직인 동시에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으로서 일제에 꺽이지 않고 버텨온 걸출한 활동가들이 대부분 합류한다. 끝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지 못했으나 경성콤그룹이야 말로 일제하 혁명적 노동운동의 주류를 결집한 정통파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공산당 결성과 달리 노동운동을 근간으로 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이거나 노동운동으로 단련된 지식인들이었다.
한편 1939년 말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던 박헌영을 이 조직의 책임자로 추대하였다. 1925년의 조선공산당 결성 이부터 수차례에 걸친 재건 사업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은 널리 공인된 사실이다. 상해에서 체포된 박헌영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9월에 출옥해 있었으며, 새로 출옥한 권우성, 정재철, 정태식 등을 모두 이 조직에 동원시켰다.
이 조직의 주요 책임자를 보면, 지도자겸 기관지부에 박헌영, 조직부에 김삼룡과 장규경, 기관지 출판부에 이관술과 김순룡, 인민전선부에 김태준, 정태식, 이현상, 노동부에 김삼룡, 가두부에 이남래, 김한성, 이종갑, 학생부에 조재옥, 김순원, 김영로, 일본유학생부에 김덕연, 고우드, 금속노조책 김재병, 김동철, 섬유도조책 김응빈, 위위상, 전기노조책 조중심, 출판노조책 이복기, 이인동, 함남도책 김진, 함북도책 장순명, 마산책 권우성, 대구책 정재철, 부산책 이기호 등이었다.
출신 조직에 따라 분류해 보면, 주력을 이룬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이인동,서중석, 이복기는 상해계, 박헌영,권오직,장순명 등은 화요계였다. 인민전선부의 김태준은 경성제대강사로서 이현상과 깊은 동지 관계에 있었고 가두부의 이남래는 경성 관훈돈 소재 동광서점 점원이었다. 분파와 파벌로 점철된 일제하 조선 공산당운동사에서 이렇듯 계파와 연령을 불문하고 비전향 운동가들을 결합한 조직체는 경성콤그룹이 해방전 국내운동가의 최후의 결산적 집결체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피검되거나 해외로 망명, 투항, 운동을 청산하는 암흑기에 출범한 경성콤그룹은 창씨개명 반대, 징용과 징병 반대, 공출 반대 등을 주장하며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해 반일, 반제 투쟁을 전개한다.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연합해 일제를 축출하겠다는 경성콤그룹에서 김삼룡은 조직부와 노조부의 책임자로 활약한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은 1941년 12월까지 개소된 검거선풍으로 마침내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으로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10월에 이현상이, 12월에 김삼룡이 체포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이관술이 조직의 복원을 위하여 인민전선부를 맡고 있는 김태준을 만나기 위하여 원동의 집으로 갔다가 잠복중인 형사들이 의하여 검거된다. 서대문사건으로 시작한 경성콤그룹은 백명이 넘게 연행되어 구속된다. 6월까지 박진홍, 김재선, 여권현, 김태준, 이뵹희, 이현우, 이장남 등 중간 지도자들이 차례로 검거됨으로써 조직은 급속 마비 상태로 들어간다. 경성콤그룹의 주력이 무너져버린 상황임에도 김재병, 김한성 여운철 등은 조직을 규합해 기관지를 재발행 한다. 그러나 이들마져 1941년 8월 제목을 『선전』으로 바꾼 기관지를 발행해 배포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단 한차례에 배포에 그친 채 9월에 이주상 ,여운철, 김재범, 조희영,등이 모두 구속되고 만다. 1941년 12월까지 계속된 검거선풍으로 마침내 경성콤그룹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한편 이재유도 경성트로이카사건으로 1936년 12, 25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그로인한 후유증으로 해방을 10달정도 앞둔 1944년 10월 26일 청주감호소에서 4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7. 경성콤그룹의 의의
실제로 일본이 몰고 온 자본주의의 문명은 사천 년 한국 역사를 불과 이십여 년 만에 완전히 뒤바꿔 놓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전국 오지를 연결하는 수많은 도로와 기차와 공장들, 전기와 전화, 서양식 화려한 건물들과 대량생산되어 싸고 좋은 상품들, 연극과 영화, 스포츠 같은 신문화까지. 개화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조선의 고루한 양반들은 상상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일운동과 이후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수많은 양심적인 선각자들 마져 친일로 돌아서게 만든 거대한 이 변화와 발전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인으로부터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들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본을 숭배하고 일본의 번영과 침략전쟁을 조선의 영광인 양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항일운동을 소수 극단주의자들의 철없는 행동으로 매도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회주의운동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체제의 가혹한 착취. 강제 징집과 정신대 차출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다수 민중은 스스로 일제에 복종했고, 한때 이름을 날리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그렇게 스스로 자신이 이력을 더렵혀 갔다. 혹 저항운동을 계속한다 해도 위험한 조선땅을 떠나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무기력한 조직 분규만을 벌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 암흑의 시대에 국외가 아니라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움직인 적국전인 세력은 경성콤그룹이었다. 1939년부터 시작하여 1941년말에 끝난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총결산으로 그 주모자는 박헌영,김삼룡,이관술,이현상등이었다.(경성트로이카 안재성 지음)
8. 사회주의운동의 퇴조기
간신히 검거를 모면한 사람들은 수배 상태로 잠적하여 활동을 중지하였다. 박헌영은 김성삼이란 가명으로 전라도 광주의 백운동의 연와공장 직공으로 취직해 은닉에 들어갔다. 김삼룡을 잃을 이순금도 박헌영을 따라 외부소식을 전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하지만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이로써 일제시대 국내의 마지막 사회주의 조직은 붕괴되었다. 경성콤그룹이 완전히 와해된 1941년도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수년은 국내운동뿐 아니라 국외 항일운동도 퇴조기를 맞게 된다.
동북부 국경 지대에 출몰하며 일본군을 괴롭혀 온 김일성 부대마저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소련으로 달아난 상황이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은 이십대 후반부터 소규모 유격대를 이끌고 동북부 국경 일대를 출몰하며 일본군을 무찔러 잡지『삼천리』에 20대 청년 장군으로 소개되기까지 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공세에 밀려 소련에 건너간 후에는 소련군 말단 장교가 되어 수십명의 사병을 훈련시키며 세월을 보내는 초라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만주지역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날리던 또 다른 인물은 무정 장군 역시 일본군에 쫓겨 중국 내륙 깊숙한 연안까지 패퇴해 있었다. 연안은 중국공산당의 임시 수도로. 무정 장군은 그곳에서 조선인으로는 구성된 의용대를 창설했으나 한번도 전투를 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게 된다.
일제의 패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사회주의자들의 일치된 선업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손발은 모두 잘린 채 감옥에 갇히거나 숨어 지내는 사회주의자들이 바랄 수 있었던 오직 하나의 희망은 연합국 측이 일제에 패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9. 해방과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 결성
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김삼룡은 4년여의 옥살이 끝에 석방이 되어 박헌영의 마중을 받으며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하였다. 그런데 김삼룡과 박헌영, 이관술 등 경성 콤그룹 지도자들이 서울로 모이는 사이. 서울에는
이미 8.15해방의 당일 밤 장안빌딩에서 이영, 정백 등의 구 서울계와 조동우, 이승엽, 조두원 등의 구 화요계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 결성을 논하고 16일아침에 이를 발표하였으며, 같은 날 밤에 최익한 이우협 하필원 등의 일본유학생 출신인 구 ML파는 다른장소에서 회합을갖고 또 하나의 조선공사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양자는 거의 모두가 조선공산주의운동사상에서 일지기 탈락하여 청산파적 입장에 있었거나, 혹은 타락하여 전향성명울 내고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공산주의와 절연한 생활을 영위하여 왔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좌절파 내지 해당파로서 곧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공산당으로 통합하였다. 이것을 세칭 장안파조선공산당이라 한다.
장안파를 이끈 홍남표는 1988년생, 정백과 이영은 1889년생, 조동우는 1892년생으로 사회주의운동의 원로 격이었으나 실제 활동은 보잘것없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들이 한 일은 조선공산당이라는 형식적인 당을 재건하는 일이었다는 비판을 면피 못하였다. 그들의 재건한 공산당은 코민테른에서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대중적 바탕이 없어 ‘안방에서 만든 공산당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이재유는 이미 1933년 경성트로이카를 구성할 때부터 이영과 정백 등을 명시해 사회주의 정치꾼 이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 적이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대개 전향성명을 낸 좌절파 내지 해당파들로서 이영은 일찌기 전선을 이탈하여 향리북청에서 유휴하였고, 정백역시 전선을 이탈하여 나중에는 서울에서 광산브로커 노릇을 하였다. 최익한 역시 탈락하여 서울 동대문밖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고, 이승엽은 전향성명을 내고 인천에서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다.
이에 비하여 박헌영을 옹립하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는 박헌영을 비롯하여 김삼룡, 이관술, 이현상, 이주하, 김병선,이순금, 권오목, 김태준 등 모두가 비전향의 지조를 사수한 이른바 순결파들이다. 그 가운데에서 박헌영, 이주하는 국내에서, 김태준은 중국에서 8.15해방까지 은신하였고, 김병선과 김삼룡은 그때까지 구속되어 있었으며, 이관술과, 이현상, 권오목, 이순금은 비밀서클 투쟁을 끝까지 지키다가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환경은 각각 달랐으나, 비전향을 고수하였다는 면에서는 모두 같았다.
그리하여 졸속히 당결성을 선포한 탈락파와 이보다 늦게 당재건준비위를 발족시킨 순결파 사이에는 누가 정통파인지가의 문제를 놓고 당연히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한편 김삼룡과 박헌영은 광주로부터 트럭을 타고 45년8월18일 서울에 도착하여 종로구 명륜동의 김해균의 집에 거쳐를 잡자, 곧이어 이관술, 김형선, 이순금, 이주하, 이현상, 정태식, 등 경성콤그룹의 핵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김해균의 집에 모인 이들은 장안파가 결성한 조선공산당을 무시해버리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때부터 경성콤그룹을 재건파, 혹은 중앙위원회로 불린다. 공식적으로 당수를 선출하지는 않았으나 재건파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대된 사람은 당연히 박헌영이었다.
8월20일, 다시 모인 재건파는 정식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의 발족을 선언하고 박헌영이 초안한 8월 테제를 채택한다.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한 달 후이나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활동이 시작된다.
좌익내부에서는 경성콤그룹 출신들에 대한 지지도가 압도적이었다. 하부구조가 없는 장안파가 재건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직격탄을 맞은 장안파는 분열되었다. 9월 8일 서울 계동에서 장안파와 재건파 핵심들이 모두 모인 열성자 대회는 박헌영의 노선을 채택하였고 장안파에 동조했던 이승엽, 최원택, 조동호 등도 재건파로 넘어왔다. 열성자 대회의 승리로 경성콤그룹 출신들은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쥐고 종선공산당 중앙위원으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1945년 9월 19일 정식 출범한 공산당의 공식적인 명칭은 통일재건 조선공산당 이었다. 중앙위원은 이미 9월 11일 인선되어 있었는데 이 날 28명의 명단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총비서 박헌영 아래 김일성과 이주하가 뒤를 잇고 박창빈, 이승엽, 강진,최용건,홍남표,김삼룡,이현상,이주상,이순금,무정,서중석,이인동,조복례,권오직,박광희,김점권, 허성택, 김용범,홍덕유, 주자복, 문갑송, 강문석, 최창익, 김근, 오기섭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졌다.
김삼룡은 당 서열 9위의 중앙위원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조직국의 부책임자겸 서울시당 위워장을 맡아 조직의 명수로서의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는 우선 8월 17일 행림서원에서의 간부모임에서 결정한 대로 서울을 5개지구(영등포구당, 용인구당, 중앙구당, 중앙구당, 동대문구당, 철도구당)로 나눠 각 지역에 책임자를 선정 자신을 총책임자로 하여 철저한 보안속에 전평 등 외곽조직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중조직을 만들어 나간 김삼룡은 특이하게도 활동이 자유로 왔던 해방공간 속에서 조차 대중앞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대중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공산당을 대표해서 축사를 했다. 이강국의 소개로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그는 간결하고도 박력 넘치는 연설을 했다. 그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3.1운동 후의 조선의 해방운동은 공산당의 지도 밑에 전 근로대중, 민족주의자, 인텔리겐차에 의하여 된 것이다. 이 사실은 3.1운동이후 원산, 부산총파업, 인천의 반일운동, 또 해외에 있어 직접 무기를 갖고 싸운 화북동맹. 간도에 있어서의 김일성장군 지도하의 투쟁, 또 만주의 농민투쟁 등으로 보아 증명할 수 있다. 즉 일본제국주의에 반항한 가장 용간한 투쟁은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족통일에 있어 ‘덮어 놓고 뭉쳐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과거 40년동안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옹호자이며 협력자이고 조선독립운동을 가장 억압하던 친일파로, 해방 전부터 민족통일을 가장 방해해온 것이다. 이들을 통일안에 넣는다는 것은 진실한 통일이 아니다.(중략)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것은 군정에 있다고 말하고 여러 가지 책동을 하고 있으나 38도선 이북의 소련군은 2차대전에서 가장 큰 희생자였고 금번 일본과의 전쟁에 있어서 일본군과 싸운 군대이고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조선에서 완전히 소탕하고 조선해방을 위하여 싸운 군대이며, 38도선 이남의 미군도 역시 조선해방을 위하여 협조하는 군대임으로 우리는 이러한 군정이 결코 독립방해자가 아니고 그의 협력자로서 우리는 그들과 협력하여 독립을 위해 싸워 나가야 한다.
그는 이 연설에서 이승만 일파의 무조건 통일론에 대한 반박을 했고 미군정과의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0. 3당 합당과 남조선노동당의 탄생
조선공산당의 자유스런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은 정판사 사건을 빌미로 이관술을 비롯하여 핵심간부들에게 대해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박헌영은 46년 9원 5일 한 평 반 남짓한 영구차에 시체로 가장하여 극적으로 월북했다.(박갑동의 박헌영) 그 후 두 달 후인 11월 23일, 그해 7월부터 제기된 여운형의 인민당과 백남운의 남조선 신민당과의 3당 합당이 수많은 논란끝에 서울 종로구 시천교회당에서 이루어져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해서 단일정당으로 형성된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은 여전히 조선공산당이었고 이 조식의 실질적 주도권은 박헌영과 김삼룡이 쥐게 되었다.
또한 일국일당 원칙에 다라 중앙위원회가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옮겨지자 서울에는 서울지도부라는 조직이 설치되고 김삼룡은 최고책임자로 주로 조직부분의 각 부를 담당했고, 이주하는 군사부의 책임을 맡았고, 박헌영의 비서였던 정태식은 기관지외 이론진을 맡았다. 이들 3명의 이미지는 각각 달랐다. 김삼룡은 뚝심있게 생겼으며, 이주하는 이지적이었고, 정태식은 예리한 비수와 같았다.
박헌영이 김삼룡을 최고책임자로 선정한 이유는 첫째, 당성이 강했고, 둘째, 경찰에 신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셋째, 지도력이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이주하는 지하투쟁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하고 김삼룡은 못지않게 당성이 강한 점에서였다. 마지막으로 정태식은 이론과 실천에 밝아 보좌역으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김삼룡이 기거하던 종로 6가 5통 5반의 비밀아지트에서 연락책을 통하여 그날그날의 시정잡사까지 정확히 보고 받고 협의한 후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북한정권이 수립된 이후 49년 6월 30일 남.북노동당은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된다.
11. 김삼룡의 체포와 최후
1950년은 조선노동당에 있어 치명적인 해가 된다. 1949년 초부터 각부 당부가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50년 3월에 들어서는 조선노동당 서울지도부 남한총책인 김삼룡과 군사부책 이주하가 경찰에 체포됨으로서 남로당은 창당 3년만에 와해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당시 경찰이 김삼룡 이주하를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쫓아다녔지만 정착 두사람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49년 9월 16일 김삼룡의 심복이며 서울시당 제1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양한모가 경찰에 검거 된 후 전향의사를 밝힘으로서 남로당은 크나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향한 뒤 서울 시경 사찰과 경위로 있던 위 양한모가 김삼룡의 거처를 알아 낸 것은 김삼룡의 비서인 김병육부부를 검거한 후 김병육의 부인의 진술에 따른 것으로, 종로구 예지동의 아지트를 50년 3월 26일 습격하였으나 김삼룡은 이를 알고 도망친 후였고 50년 3월 27일 이미 체포되어 전향한 김삼룡의 비밀비서 안열달의 진술에 따라 북아현동 아지트에 있던 김삼룡을 검거하였다.
체포 직후 남로당 소탕 작전의 일등공신이자 한 때 동지였던 양한모(가명 홍민표)와 마주앉은 김삼룡은 "나는 자네가 전향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오늘의 나를 예감했었네"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재판장에서 김삼룡은 "나는 아무 할 말도 없소.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처형해 주시오"라는 최후 진술을 남겼다.
체포된 김삼룡은 1950년 5월 17일 이주하, 정태식과 함께 특별군사재판을 받게 되었고, 이 재판에서 김삼룡, 이주하는 사형을 정태식은 20년형을 언도 받았다.
이 재판이 있은지 얼마 후, 즉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 오후 3시 남산에서 김삼룡 이주하는 김창룡과 2명의 헌병에 의하여 총살당했다. 그때 그는 40세였다.
한편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이관술도 1950년 7월 상순 남하하던 국군에 의하여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에서 총살된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정권은 남로당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 남한에 남아 남로당을 지도한 남로당의 두뇌 정태식이 숙청되고, 이주하가 복권되지 않는 반면, 김삼룡과 이현상은 '항일투쟁'을 인정받아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12. 결론
자신을 보호할 총칼조차 없이 조직과 파업이라는 무기만으로 일제와 싸운, 남은 것이라고는 고문과 질병밖에 없음에도 항상 즐거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동료를 지키기 위해 고문틀에 올라 피를 한 바가지씩 쏟아내면서도 유치장에서 만나면 서로를 끌어안고 웃어주던 사람들, 1920년대 중반 이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 매국노로 돌아선 대다수의 우익 보수주의자들을 대신해 일제에 저항한 유일한 항일운동이었다 할 것이다.
해방 후, 남로당 활동에 묻혀 일제치하에서 전개된 노동운동과 항일투쟁마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김삼룡과 이주하, 이현상, 남로당 활동과는 별개로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보다 더 정직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하겠다.
참고문헌
현대일보 : 1746년 5월~ 8월
동아일보 : 1946년 5월~11월
남로당연구 자료집 제2권, 김남식,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1974
이정 박헌영 일대기 6~9권 임경석, 역사비평사 2004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5권 김준엽,김창순, 아세아문제연구소, 1967~1976
경서트로이카, 안재성, 사회평론, 2004
한국근대노동사와 노동운동, 김경일, 문학과 지성사.2004
이관술 1902~1950 안재성, 사회평론
이재유
출처 : 독서는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길
글쓴이 : 중수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