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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선교신학 세미나
담당교수: 임 학 균 님
제출일: 2023. 11. 28
학교: 강서대학교 신학대학원
발표: 임 학 균
한국선교신학회 편, “제5부 복음주의 선교신학”,「선교학 개론」, 대한기독교서회, 2017, pp.307-58. |
제1장 복음주의 선교신학/ 이후천
1. 복음주의의 개념
2.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
3.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신학적 특성과 유형
제2장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황순환
1.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
2.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 나타난 선교신학
1) 서구선교에서 6대륙선교로(1910년 에든버러대회-1947 휘트비대회)
2)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1952년 빌링엔대회-1958년 가나대회)
3) ‘하나님의 선교’의 주제들(1963년 멕시코대회-1989년 산안토니오대회)
4) 세계를 위한 선교를 향해(1996년 살바도르대회-2005년 아테네대회)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제3장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신학/ 김은수
1.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선교신학
2.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선교신학
3. 선교신학적 과제
제4장 동방 정교회의 선교신학/ 임희모
1. 동방 정교회의 선교
1) 선교의 목적
2) 선교의 방법
2. 선교신학의 특징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2) 교회 중심의 선교
3) 성례전의 선교
4) 종말론적 선교
5) 토착화 선교
6) 확대되는 선교개념: 에큐메니칼 선교
7) 선교신학의 쟁점들
3. 동방정교회의 선교신학과 한국교회의 선교신학
제1장 복음주의 선교신학
이 후 천
1. 복음주의의 개념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복음주의의 신앙과 선교신학의 경향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주의에 대한 접근이 선행되어야 한다.
복음주의란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확하지가 않다. 1520년에 독일의 루터가 Evangelicals라는 용어를, 1531년에 영국의 토마스 모아가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es)을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종교개혁의 연장선 상에서 “복음에 속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1730년대의 영국에서는 대중적인 기독교(개신교) 운동으로 사용되었다. 서두에 말했듯이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시초는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종교개혁, 청교도, 경건주의 등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복음주의에 대한 ‘여섯 가지의 지배적인 확신’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으로 성서가 가지는 최고의 권위
2) 성육신하신 하나님과 주님으로서, 그리고 죄인의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
3) 성령의 주권
4)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5)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전체의 삶에서 복음 전도의 우선권
6) 영적 양육, 친교, 성장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2.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접근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복음주의 신학은 에큐메니칼의 등장으로 그에 대한 해석과 이질감에 의하여 생겨났기에 에큐메니칼을 판단하면 복음주의 신학의 기원을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에 대한 다양한 시각 때문에 복음주의 선교신학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뿌리에 대해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데이비드 보쉬는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자들의 논쟁은 18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길성은 초기 근본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응으로 탄생되었다. 버나드 램은 현대 복음주의의 기원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찾는다. ‘그리고 성자를(filioque)’을 개신교가 물려받았는데 이것이 복음주의의 유전으로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고드프리는 마르틴 루터를 복음주의의 원조로 보았고,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의 원조를 종교개혁, 청교도, 경건주의에서 찾았다. 이렇듯 복음주의 신학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한편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에큐메니칼에 대응하여 형성된 개념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기원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형기는 복음주의 세계대회들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응하여 열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대회들이 에큐메니칼 세계대회의 일정과 같은 해거나 비슷한 해에 열렸다.(p.313) 문제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대응했다 하더라도 그 시점이 언제인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열었던 그 시기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해석의 문제를 계기로 전격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3.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신학적 특성과 유형
글래서에 의하면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확립하게 된 것은 로잔대회(1974)라고 보았다. 오늘날 확립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삶의 기준으로서 성서에 대한 밀접한 관련성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강조
3) 개인적 신앙의 결단(회심)을 강조
4) 선교현장에서 사회참여 혹은 타종교와의 대화보다도 교회 설립과 복음화에 대한 강조
5) 에큐메니칼 선교신학과는 대별된 것으로 자신을 이해(특히 로잔대회 이후: 1947년 7월)
6) 세계선교에 대한 강한 집착과 소위 ‘미전도종족’에 대한 복음화에 대한 열의
7) 선교, 크리스천들의 영적인 일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의 강조
그런데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국가별, 교파별로 다양한 유형을 가지고 있어서 다르게 전개되기에 논란은 꾸준할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의 위기로 연결될 수 있다.
제2장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황 순 환
1. 에큐메니칼 운동과 선교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란 어원이 헬라어 ‘오이쿠메네(οἰκουμένη, 거주하는 땅, 로마제국)’에서 왔고, 한글로는 ‘교회일치’로 번역되었는데 이 세 용어들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된다. 비셔트 후프트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의 의미로 발전되었다. 첫째, 그레꼬-로망 세계와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뜻으로서 ‘사람이 거주하는 온 세상’ 혹은 ‘로마제국 전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둘째, 초기 몇 세기 동안의 교회생활 속에서 점차적으로 생성된 것으로서 교회 전체와 관련되거나 ‘보편적인 교회론의 유효성’을 갖는데 사용되었다. 셋째, 현대의 발전된 개념으로서 교회의 전세계적인 선교적 확장과 관련되거나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교회들 또는 여러 교파들에 속한 기독교인들 간의 관계와 하나 됨과 관련될 때,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 됨에 대한 자각과 그 희망을 표현하는 내용, 혹은 태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신학이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였다. 교회가 에큐메니칼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극을 준 것이 선교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선교의 확장에서 지리적, 수적인 성장의 세기였다. 그런 점에서 교회사학자 라투렛은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불렀다. 이처럼 선교로 인해 교회가 확장되면서 에큐메니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이 시기에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세계 도처에 가장 많은 식민지가 형성되었다. 또 하나는, 17세기의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부흥운동에 의해 19세기의 기독교 선교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즈음 선교사들은 교파별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선교단체들 간의 중복 또는 경쟁으로 인한 선교적 자원 낭비가 가중됨으로써 에큐메니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드디어 첫 세계대회가 열린 에딘버러대회(1910)에서는 ‘국제선교협의회’ ‘생활과 협력’ ‘신앙과 직제’가 태동되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탄생지가 되었다.
2.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 나타난 선교신학
에딘버러회의 이후 국제선교협의회(1921)가 태동되어 오늘까지 세계선교대회가 열리면서 선교문제들을 논의하고 있는데, 에큐메니칼 선교대회에 나타난 선교신학적 주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서구선교에서 6대륙선교로(1910년 에든버러대회-1947 휘트비대회)
에딘버러 대회(1910)는 서구선교회의 대회라고 할 수 있다. 159개 선교단체 1,555명의 대표 중 17명만이 신생교회 출신이었다. 특히 앵글로색슨 계통이 절대적이었다.
예루살렘 대회(1925)는 제3세계를 대표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사리를 한 인도 사람, 비단 가운을 입은 중국 사람, 터번을 두른 튀르키예 사람 등 지구 곳곳에서 참석하였다. 이들은 신생교회 대표 231명 중 70명이었다. 이 시기에 ‘오래된(혹은 서구) 교회와 신생교회’로 부르게 되었다.
인도 탐바람대회(1938)에서는 공식대표자 471명 중 과반수 이상이 제3세계 출신이었고, 영성도 77명이 참석하였다. 개최장소가 아시아였고, 참석자 역시 신생교회 대표가 과반 이상으로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휘트비대회(1947)는 전 세계를 선교현장으로 보면서 자연히 서구·비서구의 구분도 사라졌다. 대회의 공식 주제도 ‘순종 속의 동역자’였다.
한편 대회주제를 살펴보면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을 짐작할 수가 있다. 에딘버러대회(1910)의 주제는 ‘이 세계 안의 세계복음화’였다. 예루살렘대회의(1928)에서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이 시기에 러시아혁명, 제1차 세계대전 등이 발발하였다. 탐바람대회(1938)는 절망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독교 교회는 커다란 희망임을 선포하였고, 교회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교회가 선교의 중심임을 전면에 부각하였다. 휘트비대회(1947)의 주제는 ‘순종 속의 동역자’였다. 전세계를 선교의 현장으로 보고 선교의 임무를 위해 기존교회와 신생교회가 서로 순종함으로 협력자가 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선교단체들의 선교시대는 가고 한 주님 아래서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는 주님이 하시고 선교사들은 모두 주님께 순종하는 심부름꾼이라는 개념이 정리되었다.
2)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1952년 빌링엔대회-1958년 가나대회)
제2차대전이 끝나고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1952년에 모인 독일 빌링엔대회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게 하였다. 세계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독립하였는데 이 나라들 중에는 서구선교사들의 입국을 제한하고 추방하는 나라가 많았다, 특히 가장 큰 선교지였던 중국의 공산정권은 서구선교사들을 추방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대회를 통해 서구선교사들에 의한 이때까지의 ‘승리주의’나 ‘정복적인 태도’가 아닌 섬김과 봉사의 태도로 그리고 십자군의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가능함을 깨닫게 하였다.
빌링엔대회의 공식 보고서 제목도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로 정하였다. 이 대회에서 주의할 또 하나의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칼 하르텐슈타인에 의해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선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1957년에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IMC총회가 열렸다. 이는 최초의 아프리카 대회이자 신생독립국가에서 열렸다는 의미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항거하는 한편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가나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기독교 세계선교는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선교다”라는 점이다.
3) ‘하나님의 선교’의 주제들(1963년 멕시코대회-1989년 산안토니오대회)
1963년의 멕시코대회는 국제선교협의회(IMC)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1961년 뉴델리 대회에서 통합되어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로 개편된 후 처음 열린 대회였는데, 주제는 ‘하나님의 선교와 우리의 과제’였다. 실천할 과제를 네 가지로 나누어 토론하였는데 내용은 “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증거, ② 세속적인 세계에 있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증거, ③ 그들의 이웃에 있는 신앙공동체의 증거, ④ 민족적이고 신앙 고백적 한계를 넘어서는 교회의 증거”였다. 즉 “선교의 전선은 모든 세계이며, 보냄과 받음의 교회, 오래됨과 신생교회 사이의 온정주의 관계, 해외선교와 국내선교 등은 이미 구분이 필요 없으며 선교는 하나의 공동과제로 인식하여 서로의 협력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1973년 방콕대회의 주제는 ‘오늘의 구원’이었다. 여기에서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생물학, 사회학, 그리고 정치적 삶은 물론이고, 영적, 인격적인 삶이 수반되므로 개인과 사회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콕대회는 다음과 같이 구원을 정의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셨고 그 안에 우리가 참여하는 구원은 분열된 이 세계 속에서 통전적 삶을 우리에게 나타낸다. 우리는 구원을 삶의 갱신과 신성의 충만함 속에서 참 인간성의 해방으로서 이해한다.(골 2:9)” 이 시기의 세계인 1960-70년대의 세계는 격변기였다. 강력한 사회정의와 인간성 회복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 현재 이 땅에 구현하여 종말론적 시각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구원관은 정체성, 인간화, 해방으로 요약되면서 전통적인 영적인 측면이 무시되거나 약화되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1980년의 멜버른 대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불의와 고통에 처한 세계에 간절히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가 주제였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이 주제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주목하여 채택되었다.
1975년의 나이로비대회는 전체교회에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선교는 온전한 복음을 온 인류와 전 세계에 증언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방콕대회에서 형성된 구원관의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의 흔적을 보였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를 지나치게 현재적 종말론으로 해석한 것을 반성하여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도 함께 바라보는 복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1989년의 산안토니오대회의 주제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선교’는 멜버른 대회의 후속으로 이해되었다. 통전적 시각에서 산안토니오대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선교’로 이해하였다.
4) 세계를 위한 선교를 향해(1996년 살바도르대회-2005년 아테네대회)
1996년 살바도르대회의 주제는 “하나의 소망으로 부름 받음: 다양한 문화 속에 있는 복음”이었다. 1991년 캔버라대회의 응답으로 선택되었다. 캔버라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가 21세기의 문전에 서 있는 기독교 증언 방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수한 문화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복음에 대립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해석과 형성과제를 논의하였다. 이처럼 문화는 21세기 선교의 주요과제가 되었다. 세계선교를 위한 주요과제는 문화순응이다. 이를 에큐메니칼은 ‘토착화’, 복음주의에서는 ‘상황화’, 로마가톨릭에서는 ‘문화화’라고 한다. 그러나 용어는 다를지라도 의미는 동일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형태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체성의 심각한 훼손인 ‘혼합주의’이며 캔버라 이후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
2005년의 아테네대회는 21세기에 처음으로 열린 대회였다. 특히 동방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린 대회라는 특징을 갖는다. 주제는 ‘오소서! 성령이여, 치유하시고 화해케 하소서’였다. 성령의 역할이 강조외었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가장 필요한 선교과제로 화해와 치유가 부각되었다. 교회는 이를 위한 공동체라는 의식이 강조되었다.
3.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에큐메니칼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선교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토착화 선교로써 문화가 강조된다. 둘째, 통전적 선교로써 영적인 복음 외에 기독교사회복지가 강조된다. 셋째, 대화의 선교로서 다른 신앙인을 무조건 개종시키는 태도보다는 대화를 통한 선교를 강조한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대화와 개종의 수단이나 담소가 아닌 신앙고백이 있는 진정한 대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제3장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신학
김 은 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에 대한 개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을 선교의 대상이거나 ‘사탄의 자식들’, ‘이단들’, 혹은 ‘분파주의자들’로 보았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들’로 부르게 되었다.
1.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선교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그리고 도나티스트들과의 논쟁에서 그의 신학을 잘 나타내었는데 몇 가지의 주제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스트에 대한 비판은 구원의 개인화를 가져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원죄와 예정론으로 정리된다. 철저한 회개가 따라야 했으며 그 결과 정교한 고해성사가 개발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론은 자연스럽게 교회론으로 흡수되었다. 구원의 개인화는 구원의 교회화로 이어졌다. 교회는 고해한 사람의 죄와 허물 여부를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논거의 기준은 키프리안의 명제 “extra ecclesiam nulla saius”(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에 그 뿌리를 둔다. 따라서 가톨릭의 선교 이해는 선교사들이 가능한 빨리 개종자들을 세례반으로 데려가는 것이며, 일단 세례를 받으면 교회교육을 받고 고해성사와 규칙 등을 통해서 점차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국가와 교회의 공생관계는 국가 선교로 이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 의하면 인류는 두 부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회인 ‘하나님의 도성’이 있고, 또 하나는 사람의 표준에 따라 사는 ‘지상의 도시’다. 지상의 도시는 하나님의 도성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하여 교회와 국가의 타협과 공생을 열어 놓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저항은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이고 국가에 대한 반대 역시 교회에 대한 반대가 되었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의 공생관계는 선교 전쟁을 만들어 냈다. 국가가 경계선 밖에서 외부의 적을 죽이거나 구타하는 것을 옳다고 보았다. 이를 빛과 어둠이 싸우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결국 식민지 확장 전쟁에 적용되었다.
이러한 가톨릭의 선교 흐름에 저항이 있었는데 그것이 수도원 운동이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다. 이들은 노동은 물론 청빈한 삶과 모범적인 삶으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문화와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1622년 6월 22일에 로마 교황청은 ‘포교성성(布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을 설립하였다. 포교성성은 선교를 신앙의 확장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요셉 쉬미들린으로 대표되는 뮌스터학파에 의해 일부 반영되어 발전하였다. 이들의 선교이해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선포, 둘째는 내적회심, 셋째는 교회조직으로 하나의 민족이 온전한 교회에 이르는 것이다. 루뱅학파를 대표하는 피에르 샤를은 ‘교회가 없는 곳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보았다. 요약하면 이때까지의 가톨릭 신학의 선교신학은 교회를 설립하여 신앙과 성례전을 통해 선한 의지를 모든 영혼에게 전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신적인 형식이며, 단지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위해서 기도와 사랑으로 헌신하는 것이 선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2.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선교신학
가톨릭 선교신학은 제2바티칸 공의회가 분수령이 되어 이후 갑작스럽게 변화했다. 다음 세 가지의 중요한 문서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공의회는 선교와 관련하여 ‘선교칙령(Ad Gentes, 약자 AG)’을 비롯한 중요한 문헌들을 채택하였다. 선교론이 교회론에 근거했던 전통에서 벗어나 교회론이 선교학적으로 정립되게 하였고, 선교의 목표를 교회가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백성과 공동체를 복음화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표현하여 문쉬터학파와 루뱅학파 모드를 포괄하려고 했다. 그러나 칙령이 너무 조급하게 만들어져서 신학적으로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둘째, AG를 보충하는 중요문서인 ‘현대세계의 복음화(Evangelii Nuntiandi, 약자: EN)’은 1974년 제4차 대주교회의의 결과로 나타났다. 개인과 교회의 복음화는 물론 개발, 자유, 정의, 평화를 위한 사회참여가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이는 해방신학이 제기하는 주요 논점들을 EN이 대폭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EN은 폭넓은 공감대에서 만들어졌고, 지리적 의미의 선교개념을 포기하고 선교상황을 고려한 신학의 다원화와 종교들과의 대화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복음화는 선교의 핵심임에도 선교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빼고 대신 사용함으로 인하여 개념의 혼란을 가져왔고, 선교의 발전적 사고를 스스로 제한하였다.
셋째, 1990년에 선교에 대한 교황의 새로운 교서인 ‘구속자 선교(Redemptoris Missio, 약자 RM)’이 발표되었다. 전체교회의 선교적 의무를 강조하였는데, 모든 대륙의 비기독교, 다른 문화, 개발 원조,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 등 다양한 문제들까지 선교적 과제로 삼았다.
AG가 복음화와 교회가 주제였다면, EG는 각 지역에서 신학의 다양화는 물론 다른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장려했고. RM은 세계의 모든 곳 육대륙 선교사상과 교회 밖의 구원까지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신학논리는 모순이 생긴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해 놓고 그럼에도 교회 밖에서도 선교해야 한다는 이론은 논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다.
3. 선교신학적 과제
가톨릭은 선교신학에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으나 아직도 해결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나누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본 것은 큰 발전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가톨릭은 교회의 성격을 철저히 선교적으로 이해하였다. 제1차 비타칸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황중심적인 교회에서 탈피하여 순례하는 교회로서 본질상 선교적임을 분명히 하여 교회론을 선교학적으로 정립하였다.
수 세기 동안 오로지 로마교회를 닮아 보편교회의 복사판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보편교회는 지역교회들 속에 존재하게 되었고 지역교회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선교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밖의 구원을 인정하고 타종교에도 구원의 은혜가 있으며 타종교인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타종인이 기독교가 아닌 불교인이나 힌두교인들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세계 정의와 평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메델린대회(1968)는 해방신학의 발전에 큰 발전을 주었고, 해방신학은 그 회의의 결과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경제, 사회, 그리고 정치적 분석을 포함한 의식화 과정이 곧 신앙의 성숙화를 의미할 수는 없다.
과거 식민주의와 깊이 연관되었던 선교(mission)라는 용어 대신 복음화(evangelism)를 사용하는데, 같은 내용을 굳이 용어를 바꾼다고 과거의 과오가 덮어지는가? 잘못된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선교’라는 그 용어를 다시 사용해야 한다.
가톨릭은 선교적 사명과 관련하여 평신도의 역할을 인식하였다. “참된 평신도가 성직자들과 나란히 존재하고 사역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참으로 확립된 것이 아니며, 완전히 사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표적도 아니다.”(AG21) 그러나 사제를 중보자, 혹은 일종의 다른 그리스도로서 공동체 위에 세우고 용서와 축복의 권한을 부여한 반면, 평신도는 여전히 성직의 보조에서 여러 결정에서 제외되어 있다.
제4장 동방 정교회의 선교신학
임 희 모
동방정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발생한 원시교회 및 초대교회와 역사적으로 단절 없이 계승 발전된 교회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선교신학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에 대하여 자기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선교일반, 선교신학의 특징들과 쟁점들, 한국교회와의 대면을 기술한다.
1. 동방 정교회의 선교
1) 선교의 목적
동방정교회 선교신학의 처음과 끝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드러나는 선교도 그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선교는 직접적으로는 (특히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가시화 된다.
2) 선교의 방법
정교회는 여러 가지 선교방법을 사용한다. 본질적으로는 교회론적 성례전적 방법이다. 교회는 은혜의 수단이고 성례전은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구분되지 않는다.
교회를 세우는 선교에서 몇 가지의 방법인 논의되고 있다. 토착언어와 문자, 원주민 성직자를 양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육신화 시키는 성육신적 방법, 국가의 특권이나 도움에 의존하는 정치적 방법, 정교회 신자들이 비(非)정교회 신자들의 지역에서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정교회 현존방법) 등이 있다.
2) 선교의 동기
정교회가 선교에서 행해야 하는 선교는 그 동기에 있어서 대체로 네 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아가페)하신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선교에 임한다.
둘째, 선교의 명령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 즉 “너희들은 나가라(Go ye)”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1959년부터 ‘포레프텐데스(Porefthendes, Go ye)’라는 선교잡지를 발간하였고, 1961년에는 ‘포레스텐데스’라는 정교회 선교센터가 설립되었다.
셋째, 사랑의 동기이다. 전통적으로 정교회는 원주민들과 그들의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한다고 말한다.
넷째, 내적 필연성이다. 고린도전서 9:16의 바울처럼 신실한 사람은 내적으로 이러한 선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선교신학의 특징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정교회 선교신학의 핵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 ‘친교’하듯이 피조물과 친교하기 원하신다. 그 친교와 영광을 인류와 세상으로 향할 때 선교가 된다. 성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성육신하신 모습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행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신적 담지자로서 세상에 파송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선교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선교에서 성령의 사역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행위와 구분될 수 없다. 둘째, 생명 시여자로서 성령은 교회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우주적 의미를 갖는다. 성령은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시고 완성하신다. 셋째, 성령은 교회의 성례전적 의미를 완전케 하신다. 선교는 세상과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양식적 삶으로 인도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하는 것이다.
2) 교회 중심의 선교
정교회에서 선교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한다. 선교를 본질적 과제로 삼는 교회는 성례전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이것은 국경을 넘어 선교사를 파송한다기보다는 삶의 질을 강조하는 것이다.
3) 성례전의 선교
성례전적 예배에서 증언과 선교가 일어난다. 정교회에서 성찬은 선교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신자들은 계속적인 성례전을 통해 변화된 사회적 삶을 살 때 선교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선교는 ‘예전 안에서의 예전’과 ‘예전 이후의 예전’ 모두를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문제가 있다. 세상이 성례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선교는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된다.
4) 종말론적 선교
정교회에서 선교는 종말론적이다. 부활 이해와 성찬 예전 이해에서 드러난다. 부활은 그 자체가 종말론적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세울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 도래는 선포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사회적 문제, 자유, 해방, 가난, 정의, 평화, 창조보전 등의 선교적 과제는 종말론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종말론적 선교방법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 선포는 교회 내적이고 정적이다. 선교는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역동성을 강화해야 한다.
5) 토착화 선교
정교회는 역사적으로 성육신적 토착화 선교를 시행하였다. 민족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구체적인 목적이라고 할 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 몇 있다.
첫째, 그 지역 언어, 둘째, 종족 평등주의를 강조, 셋째, 현지 문화에 맞는 토착교회를 세운다. 넷째, 상황화 선교를 강조한다.
6) 확대되는 선교개념: 에큐메니칼 선교
동방정교회는 WCC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선교이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동방정교회는 에큐메니칼을 통해 서방교회로부터 몇 가지를 수용하였다. 첫째, 성경과 복음의 강조, 신학의 선교적 성격 등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였다. 둘째, 정교회의 국경 안에서만 아니라 전 지구적 영역에서 서방교회와 더불어 증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자신들의 전통과 사상을 간직하되 서방교회의 것으로 자신들의 것을 갱신하고 도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교회 안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7) 선교신학의 쟁점들
동방정교회의 신학은 거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그 쟁점들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첫째, 선교와 일치의 관계문제이다. 교회일치는 정교회의 본질이다.
둘째, ‘개종이냐, 선교냐?’의 이해문제이다. 서방교회의 선교를 개종으로 이해하여 비판적이다. 과거 십자군 운동 때 침략을 받아 강제개종을 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셋째, 교리와 실천 간의 문제이다. 교리를 중심으로 교회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의 상호보완이 필요하다.
넷째, 정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정교회는 국가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과거 복음주의 선교가 공산권에서 많은 제한을 받았는데 그 이면에는 정교회의 영향력도 있었다.
3. 동방정교회의 선교신학과 한국교회의 선교신학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사분오열된 분단 상황일 것이다. 정교회가 주는 한국교회와의 대화 중 가장 중요한 도움은 바로 이것 ‘일치’일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의 열정 모형을 정교회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와 일치’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조화일 것이다.
토의
1.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핵심 괴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그 간격이 얼마나 좁혀졌을까? 나는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보유하고 있는가?
2.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선교상황은 어떤 상황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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