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래님에게 드리는 글.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철학에 관한 고찰입니다.
우리 조상님들께서 긴 세월을 이어오면서 도달하려 했던 목표가 道도와 德덕의 완성에 있었습니다.
조선 517년 동안의 사단칠정논쟁이나 예송논쟁 등을 통해서 사람이 사는 기본 틀을 도와 덕에 부합하게 하고 그 절차를 예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 삶의 거와동작을 일정한 규범에 맞도록 하는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입니다.
역사상 태양 같은 충의와 추상같은 절개를 드러낸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가장 강렬하신 분으로 사육신중에 한분이신 성삼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질타한다. 차라리 굶어죽지 뭐할라꼬 수양산 고사리를 캐 먹느냐! 고 힐난하고 그 기개로 목이 잘려 죽을지언정 도와 덕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수양대군에게 머리를 수구릴 수 없다. 하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성리학자의 삶을 생각해 볼 때, 그 시절 그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 조상님들의 활쏘기에 대한 생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는 좀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쏘던 활에 대한 근본 바탕이 되는 철학을 고려하지 않고, 드러난 외형(지엽)에 속한 궁체를 가지고 따따부따 따지게 되니 해답이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해서 각자의 주장이 난무하여 비정비팔 발디딤이 수천가지나 되고, 흘려잡기 줌손모양이 수천가지나 되어서 누가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게 지금 활터의 모습입니다.
책 「조선의 궁술」을 보면 정답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고찰이 없다보니 정답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현재 활쏘는 사람들의 드러난 병폐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책 「조선의 궁술」에 비정비팔과 흘려잡기에 대한 정의가 고스란히 있습니다. 그러나 활쏘는 사람들이 우리조상님들께서 쏘시던 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쏘지 못하므로 인하여, 정답을 보고도 정답인줄 모르는 까막눈이 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책 조선의 궁술을 읽는 키워드는 “궁체의 종별 11개 항목을 정확히 다 지키고 난 이후에 발시를 하면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맹렬히 떨어지고 화살은 줌 뒤로 떠서 들어와 맞는다.”입니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자신의 궁체가 발시 후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떨어지지도 않으면서 책 조선의 궁술을 다 아는 듯이 설치며 선생노릇을 하고 다녀서 결국은 사기친 꼴이 되고 만 것이 현재 국궁판 입니다. 내가 쏜 활이 발시후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맹렬히 떨어질 때 디딘 발디딤이 “비정비팔”이고, 줌손이 하삼지를 흘려서 그듯쳐 잡은 “흘려잡기 줌손”이 되는 것입니다. 한산의 주장이 아니라 책 「조선의 궁술」에 그리 써놓았다는 것을 부연설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실학자 풍석 서유구선생의 임원경제지 중 유예지에 나오는 사결 극력견전 대목을 볼 것 같으면, “줌통이 부러질 듯(撇별), 시위가 끊어질 듯(絶절)로 쏘면 활장 윗고자가 (우궁의 경우) 오른 신발로 내리 꽂히고, 아랫고자가 왼 뒷 겨드랑이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게 치는데 그 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 파란 글은 이해를 돕기 쉽도록 한산이 의역한 부분입니다.
이 대목이 책 「조선의 궁술」에 나오는 “발시후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진다.”는 대목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책 「조선의 궁술」이 별절사법서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영조 임금님때 활을 잘 쏘아서 당상관까지 승진했던 웅천 이춘기공의 사예결해에 前手撇而後手絶별절이라 말씀하셔서 철전을 쏘아 갑과 장원했던 무과급제자요 조선특급무장이었던 웅천 이춘기공이 우리활은 별절로 쏜다고 명시하고 있고, 금군의 활선생이셨던 청교 장언식공의 정사론에 전거후집으로 절파절현이 되게 쏘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시대를 달리하고 용어를 달리 해서 설명했을 뿐 그 활쏘는 본질은 撇絶별절을 벗어나지 않음을 문헌적 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긴 역사를 통해서 우리조상님들께서 별절로 쏘았다면 별절로 쏘게 된 철학적 배경과 연원을 찾아보고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면 전승을 해야 하는 것이 맞고, 틀렸으면 더 나은 방법을 찾아서 발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온각지문파가 왜 틀렸느냐 하면, 책 「조선의 궁술」이 별절사법서인 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별절로 쏠 줄 모른다는 것이고, 별절이 어떤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 동작을 “땅짚기”라는 병증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별절이 한 쌍으로 짝으로 작용하는데 “별”은 병증으로 거부하면서 그 짝이 되는 “절”은 주구장창 정답이라 하면서 각지손을 맹렬히 뒤로 빼도록 가르치니 앞뒤가 안맞는 행동을 하면서 책 「조선의 궁술」을 자기들 문파가 아니면 아무도 해석할 수 없다는 “교조적”인 주장과 함께 책 「조선의 궁술」을 30%도 구사하지 못하는 궁체를 전통궁체라 주장하며 거의 종교화 수준의 절대적 신념으로 전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 폐해가 심각하다. 는데 있는 것입니다.
별절궁체가 나온 근본적인 철학적 배경은 射以觀德사이관덕에 있습니다. 활을 쏘아 도와 덕을 완수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님들께서 가장 이상적인 활쏘기 전형을 추구했고 합당한 자세가 별절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구한말 무과가 폐지되기 전까지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별절궁체가 전승되고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사이관덕은 예기 46장 사의 정신이고, 이것을 실현하는 방법론으로 옥의 6방정 정신에 따른 대학의 혈구장에 있습니다. 正己정기 正心정심 몸과 마음을 바로해서, 즉 상하.전후.좌우를 반듯하게 해서 활을 쏘는 방법론을 실천한 결과 별절이라는 궁체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것을 책 「조선의 궁술」에서는 몸을 과녁과 정면으로 마주한 신체정면과녁 이마바루서기 사법체계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발시때 까지 배꼽과 미간을 과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쏘지 않는 활쏘기는 전통 정통 국궁이라 칭하면 거짓이 되는 철학적 배경과 문헌적 증거자료가 명확하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한다는 자체가 이미 스스로 국궁을 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그래서 활터에서 쏘는 턱밑살대 게발각지나 온각지가 전통궁술이 될 수가 없는 이치입니다.
별절 궁체에 대한 철학적 배경과 문헌적 전고가 명확한 이상, 전통 정통궁술에서 벗어난 문파들이 자기들의 고집을 꺽고 전통궁술로 돌아오는 일이 正道정도에 부합하고 합당한 일이고, 옛 문헌과 철학적 배경에 따라 복원된 조선철전사법체계 별절궁체를 폄훼하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패역에 불과합니다.
조선철전사법이 별절궁체가 아니었다는 문헌즉 증거자료와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와서 입증을 해야 온각지문파나 턱밑살대 게발각지궁사들이 자기들의 활쏘기가 전통 궁술이라는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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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질문하나 드립니다.
나무아래 추천 0 조회 18 21.04.19 12:32 댓글
제가 생각할때 국궁계에서 그래도 우리 전통사법에 관심이 가장 많고 옛문헌에 충실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단체가 철전사법연구회와 온깍지동문회인것 같습니다.
두 단체가 주장하는 사법의 가장 큰 차이는 줌손의 움직임과 몸통의 움직임이구요..
그래서 먼저 떠오른 질문은, 줌손에 대한 것인데요. 줌손을 수직으로 빠르게 휘둘러야만 꼭 전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조선의 궁술>에 그런 동작을 설명하는 것 같은 구절이 보이는 건 사실이나 그 책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온깍지 쪽에서는 여전히 그리 해석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그 동작이 사예결해나 정사론엔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 자세히 보면 화살이 떠난 뒤의 동작으로 보이는데 무슨 실질적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동작만 아니면 온깍지 쪽과 대화 혹은 협력도 가능할 것 같은데... 국궁계 전체를 위해서라면 그 주장을 너무 강조하여 내세우지 않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지요?
첫댓글 온깍지 문파와 대화 혹은 협력은 절대 불가합니다.
처음 활을 배우고 신사시절 전통궁술이 배우고 싶어서 온각지 활쏘기 학교에 등록신청을 했더니 거부했습니다.
후일에 정진명이 이야기 해서 알았는데, 온각지의 활선생 현곡이 한산보다 나이가 어려서 못받아 줬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실제 이면의 이야기는 한산이 가지는 의문을 온각지 문파에서 해결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란 추측을 합니다.
당장에 온각지 문파에서 비정비팔과 흘려잡기 정의를 못내리고 있고, 한산이 비정비팔과 흘려잡기 정의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기 때문에 대답이 궁색해진 온각지문파에서 자기들끼리 내부회의를 거쳐서 온각지까페를 폐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 저러한 지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온각지문파는 한산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산 또한 조선철전사법체계를 복원했기 때문에 전통궁술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온각지문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할 단계를 넘어서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밝혔듯이 활터의 제 문파가 전통 정통궁술 별절궁체로 되돌아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