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암竹岩
내 고향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 운정산 자락에는 너부시 엎드린 운동장만한 죽바위(죽암)가 있다. 죽바위는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으며 그 크기에 감탄을 자아내게하는 자태만큼이나 전해오는 전설도 많다.
구전되고 있는 죽바위의 전설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은 죽을 담는 편편하고 큰 그릇과 닮았다고해서 죽죽(粥)자를 쓰서 죽암粥岩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가 잘 생긴 죽바위를 보고 마을 사람에게 “이 바위를 무슨 바위라고 합니까”하고 물어니
“죽암(죽바위)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웅장하고 이렇게도 잘 생겼으니 그 정기를 받아 장차 이 고장에 큰 장수가 태아날 것인데 장수가 어찌 죽을 먹고 힘을 쓰겠느냐”고 하더니 홀연히 사라젔다.
스님은 며칠 후 대나무 몇 그루를 구해와 심어주며 장차 대나무처럼 곧고 바위처럼 강직한 장수가 태어날 테니 앞으로는 죽죽粥자 대신 대죽竹자를 쓰서 죽암竹岩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 후로 죽암(죽바위)이라고 부른다.
크다란 등판 드르내고 너부시 없드린 해태같은 죽바위의 서쪽에서 바라보면 깎아지른 벼랑끝이 거인의 얼굴 모양과 닮았다. 어떤 사람은 얼굴 바위 같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은 장수가 태어날 바위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설에 나오는 스님이 심었다는 대나무는 지금도 푸르름을 자랑하며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나 스님이 예언한 장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죽바위는 그때 그대로 이고 바위 앞의 대나무도 곧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런 위대한 장수가 태어나리라 고대해 본다.
마을 이름에 얽힌 죽바위 이야기도 있다.
죽바위가 있는 마을의 행정명은 녹명리인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구만동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주변의 60세 이상 어른들은 행정명인 녹명리 보다 구만동이 더 익숙하게 들린다. 죽바위가 있는 운정산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상에 서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 선조 때인 1592년 때 왜군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물밀 듯이 밀려와 부산포를 짓 밝고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밀양과 청도지역으로 거침없이 진군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왜군을 피해 죽바위가 있는 운정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에는 숲이 무성하여 눈에 띄지않게 숨을 수도 있지만 사방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 적의 진군을 살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운정산 정상에 숨어든 사람들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성을 쌓고 싸움을 대비했다. 그런데 다행이도 왜적은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 때 목숨을 구한 수 많은 주민들이 죽바위의 운동장만한 등판에 올라 기쁨을 나누고 각 자의 마을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여 죽바위가 있는 마을 이름을 구만동救萬洞 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구만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여 구만동九萬洞이라고 했다.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구만명이라고 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 때 쌓은 구만산성은 세월따라 허물어지고 온전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지만 곳곳에 성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너붓이 없드린 해태같은 죽바위 벼량 끝에 외로히 서있는 푸른 노송 한 그루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수백년은 살았는 것 같다. 흙 한줌 물 한방울없는 높다란 바위틈에 뿌리내려 비바람 눈보라에 시달리면서도 수백년을 버티어온 강인한 생명력에 죽바위를 찾는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70여년전 까지만해도 두 그루가 어깨맞대고 정겹게 살았다는데 어느날 한 그루가 고사하고 한 그루 많이 남아 외로움을 곱씹고있다. 2021년도에는 돌풍에 한 팔이 뿌려지는 고동을 격고 영양제 주사를 맞기도 했다. 보호수로 지정받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이 죽바위 노송을 보호할수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
죽바위는 한때는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거대한 죽바위의 운동장만한 등판이 있고 옆에는 운동장만한 상주도씨 교리공파 죽암묘원이 있어 학생들이 뛰 놀기 좋은 곳이라 인근 초중학교의 봄가을 단골 소풍지였다.
또한 죽바위 앞으로 옥산천이 유유한 굽이쳐 흐르고 있어 냇가에는 마을 단위회초나 친구들과 계모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인근 읍면의 중 장년들 가슴엔 아련한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녹명리(구만동)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죽바위가 놀이터였고 잊지 못할 추억속 곳곳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지고 홀로 오독카니 남아 하염없이 앞 들판만 내려다보며 외로움을 곱십고 있다.
다행이 최근에는 사진가들의 입소문으로 출사지로 떠올라 죽바위와 노송을 렌즈에 담기위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죽바위의 높고 넓은 등판에 올라서면 사방의 하늘을 가리는 것이 없어 은하수와 별의 괴적을 담을 수 있어 늦은 밤에도 별사진을 촬영하기위해 찾는 사진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유적의 가치가 충분한 관광자원을 방지하고 있다는 것이 심히 안타깝기만 하다. 큰길과 바로 접해있는 운정산 자락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은데도 죽바위를 안내하는 변변한 표지판도 없다.
죽바위를 놀이터로 동심을 키워온 한 사람으로서 관광지로 조성하고도 남을 만한 자원이 방치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다.
부디 거대한 죽바위가 제대로 대접받아 지난 날의 명성을 다시 찾을 날이 하루 빨리 오길 손곱아 본다.
녹명鹿鳴
내고향은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다
성주도씨 교리공파 씨족들이 대대로 이어오면 혈육의 정 나누며 살아온 씨족 집성촌이다. 녹명은 씨족 집성촌에 걸맞은 마을 이름이다.
녹명鹿鳴에는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사슴은 먹이를 발견하면 먼저 목놓아 운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배고픈 동료 사슴들을 불러 먹이를 나눠 먹기위해 내는 울음소리를 녹명鹿鳴이라 한다.
수많은 동물 중에서 사슴만이 먹이를 발견하면 함께 먹자고 동료를 부르기 위해 우는것이다.
여느 짐승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혼자 먹고 남는 것은 숨기기 급급한데, 사슴은 오히려 울음소리를 높여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궁중에서 사용하는 악기 녹명鹿鳴은 임금이 가장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쓰는 악기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악기를 연주할 때는 녹명鹿鳴의 의미를 담아서 서로 나누고 도와서 함께 잘 살자라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녹명鹿鳴의 유학적 교훈은 사슴무리가 들판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풍경을
임금이 어진 신하들과 함께 어울리는 태평성대의 대동 사회에 비유한 것이다.
녹명鹿鳴에는 홀로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소리로 넘쳐난다.
새도 울고 닭도 울며, 심지어 하늘도 울고 바람도 운다.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이별에 울고, 감격에 운다.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울음소리중에 사슴의 울음소리 녹명(鹿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겠는가.
내 고향 녹명리鹿鳴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마을답게 네것 내것 없이 서로돕고 나누며 오손도손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세상사에는 가슴멍멍하게 하는 사건들이 있었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사랑 했는데 그 형제끼리는 왜 역사속에서 서로 죽고 죽이며 싸워야만 했는지...
권력과 돈 앞에서는 왜 형제가 아닌지 가족이 아닌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자신의 동생 둘을 잔혹하게 죽였다.
오늘날 유산상속 분쟁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한정된 재화나 권력을 독차지 할 수 있는 비극적 사실을 수시로 본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너를 잡아 먹어야 하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 너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현실들을 본다.
이 어찌 사람이 사슴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눠 먹지 못하고 혼자 먹으면 개나 돼지와 다를게 없다.
함께 먹어야겠지요. 그걸 우리는 자리이타自利利他 라고 한다.
자리이타 는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나의 이로움으로 삼는 것이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부터 우리 모두 사슴의 울음 소리 녹명鹿鳴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신지…
* 저의 사진은 기존에 사용하던 것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늦게 제출하여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