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xttgl5Qoog0
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쉐미니 / 여덟 번째 | 레 9:1-11:47 | 겔 36:16-38 | 막 9:2-13 |
<단락 1> 1. 레 9:1 여덟째 날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성경에서 숫자 7은 ‘완전한 숫자’ 이며, 숫자 8 (히 : 쉐미니)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쉐미니’는 ‘쉐멘’에서 파생되어진 단어로 ‘기름지다, 풍성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숫자 8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시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닛산월 1일부터 7일까지는 제사장 취임식이 있었으며, 닛산월 8일에 여호와의 쉐키나 영광이 임하게 되며, 하나님의 불이 번제단에 내려오게 됩니다.
1) 레 9:4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가져오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6. 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모세가 말한 ‘오늘’은 여덟째 되어지는 날이며, 이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 나타날 것인지,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임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기적 또는 기도 응답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적을 통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삶의 목적과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샬라임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광에서 더욱 더 큰 영광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엄청난 큰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라고 생각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대면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다시 죄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을 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의 정결과 영의 정결을 동시에 말하며, 육과 영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영의 정결만을 중시하고 육의 정결을 등한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1) 레 9:23 ...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 앞에서 하나님의 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감격과 기쁨이 있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불 (히 : 애쉬)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언약의 불, 심판의 불, 제단의 불입니다. 여호와의 불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소리를 지르며, 엎드리게 됩니다. ‘소리를 지르며’ (히 : 라난) 뜻은 ‘노래하다, 찬양하다, 기뻐 외치다’ 입니다. ‘엎드리다’ (히 : 나팔) 뜻은 ‘쓰러지다, 넘어지다’입니다. 즉, 여호와의 불을 경험한 이들의 현상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과 눈물을 흘리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사로잡히게 됩니다. 여호와의 불은 구약과 신약 동일하게 역사하는 불이며, 천년왕국시대에는 모든 육체 (모든 세대)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2)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든 것이 완성되어지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예배를 통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론만이 분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나답과 아비후는 각자의 향로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다가 죽게 됩니다. 즉, 나답과 아비후에게 주어진 직무가 아니었는데, 그 영역을 넘보게 된 것입니다 (딤후 2:20-21). 이러한 일은 성경에서 반복됩니다. 다윗은 통합왕국을 세우고 나서 제일 먼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시온산으로 가져 오길 원하였습니다. 언약궤는 레위인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간 보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서는 제사장이 필요하였습니다. 민수기 4장에 언약궤는 가장 거룩한 것이기에, 사람의 손으로 직접 대지 말고 고랏 자손들이 (레위인) 막대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옮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시온산에 하루라도 빨리 언약궤를 두고자 했던 다윗의 조급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그르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6장 9절에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하는 사건을 통해 여호와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는 것 (히 : 야레 : 경외)은 인간적인 두려움보다는 깊은 존경과 마음으로 상대를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분의 사랑과 능력에 압도되어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불이 아닌 다른 불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다른 (히 : 자라)의 뜻은 ‘이상하다, 별거하고 있다, 음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올려드린 불은 이상하고 친밀함이 없는 음란의 불이었습니다. 즉,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닌, 그들의 편리함을 따라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지만, 자기 생각, 자기 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자기 만족과 열정으로 그치는 예배가 되서는 안되며, 온전히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교적 행위의 모습은 있지만, 예배 가운데 내가 주인 된 생각, 감정, 뜻, 미움, 시기, 질투, 교만 등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를 점검하지 않는 예배자의 영은 소멸되어집니다. 즉,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자는 거룩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44절에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상달’의 히브리어가 ‘아보르’이며, ‘건너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기 위해서는 중간에 막혀 있는 것들을 예슈아의 이름으로 돌파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방향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혼란과 무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과 생각과 감정이 깨어지고 돌파하는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풀어져야 하며, 육체의 생각에 의해 살아가는 자가 아닌 영의 생각을 좇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과 사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들은 훗날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새 예루샬라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사단을 선택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며,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이 기도의 내용이 우리 가운데 강력하게 자라나고 역사하길 원하셨습니다.
3) 마 6:9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슈아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에 대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 (히 : 샤마임)은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욥기 22장 12절에 ‘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새 예루샬라임에 거하시고 계십니다 (신 26:15, 계 21:2).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로 팽배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조차,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을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 (히 : 카도쉬)은 세상과 구별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 세상 어떠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를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걱정과 근심의 99.9%는 무엇 때문에 나옵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해지면서 많아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불평 불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게 되어졌을 때,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하게 되어졌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1) 겔 36: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세상 가운데 더럽혀지게 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하게 살아가며, 세상 이들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과 섞여서 살아갈 때에 우리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참고로 거룩은 세상과 섞이게 되어졌을 때, 거룩한 속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세상과 구별되어진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성품, 그 분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자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열매인, 서로를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서로 종 노릇하며 (갈 5:13), 서로가 짐을 지며 (갈 6: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며 (엡 5:21),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골 3:13),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며 (살전 5:11),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벧전 4:9). 이것이 교회 공동체에서 훈련되었다면, 세상에 나아가 동일한 방법으로 영혼들을 살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36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첫 번째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영적전쟁하기 위한 여호와의 군대들을 므깃도 (이스라엘 산)으로 모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들은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해야 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합니다. 그러나 굳은 마음을 소유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의 규례 (히 : 베훅코타이)를 지켜 준행 (히 : 할라크 : 걷다, 행하다)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겔 36:27). 그래서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결정하고, 예슈아와 함께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