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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
눅 10:38-42 / 524장
➊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 앞에 빨리 나갑시다 우리를 찾는 구주 예수 곧 오라 하시네
➋ 우리를 오라 하시는 말 기쁘게 듣고 순종하세 구주를 믿기 지체말고 속속히 나가세
➌ 주 오늘 여기 계시오니 다 와서 주의 말씀 듣세 듣기도 하며 생각하니 참 진리시로다
후렴 /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뛰며 주를 보겠네 하늘에 계신 주 예수를 영원히 섬기리
예루살렘에서 불과 동쪽 3km의 거리에 위치한 베다니에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3남매가 살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가정으로 평소에도 잘 들리셨고, 수난 주간에도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다가 저녁이면 베다니의 그들의 집에 가셔서 쉬신 집이기도 하다.
특히 언니인 마르다는 헌신적이어서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을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동생 마리아는 자주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듣기를 좋아했다.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장단점을 가지고 비교하며 함부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에서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는 말씀을 하셨는데, 더 좋은 선택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님이 마르다는 책망하듯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이 있다.
눅 22:31-34 /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까부르려 하고 있다. 32) 그러나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내가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깨닫고 돌이킨 후에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어라.’ 33)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저는 이미 감옥에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34) 이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베드로야, 내 말을 명심해 두어라. 지금부터 내일 아침 닭이 울 때까지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 어느 것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을 앞서는 것은 없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듯이 그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생명이 되시는 말씀이며,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1. 책망(?)받은 마르다를 보면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는 예수와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극진한 사랑의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려고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다.
사실 언니의 입장에 선 자기는 바쁜데 도우려 하지 않고 노는 것만 같아 마음이 언짢았던 것 같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에게 놀고만 있지 말고 자신을 돕도록 말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하면서 오히려 마르다를 책망하셨다. 그러나 손님을 초청하고 음식을 잘 대접하려는 것은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음식 대접도 중요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잘 들어주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눅 10:41-42).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더 전해줄 수가 없다. 말씀을 들을 때가 있는가 하면 봉사해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먼저 된 자는 나중된 자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도 해야 한다.
그러나 마르다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로지 음식을 잘 대접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그녀의 마음을 분주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위한 명목으로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더욱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마르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현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적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예배 참석과 종교 활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에 넘치는 헌금들 특히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에 동참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시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불과하게 들릴 것이다.
작년 12월 23일 영락교회에서 150여 명의 갈릴리 성가대가 성탄음악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J.S.Bach)’를 1시간 20분에 걸쳐서 했다. 이를 위해서 부활절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한 대원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몇 시간이나 눈물로 회개하였으며 자신들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보았느냐?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 특히 얼마나 자기를 부인하려고 힘썼느냐?’라고 물었다. 안타깝게 답변을 회피는 했지만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아니 거의 하려는 의도조차 없었다. 지금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활동하고 있다’라는 생각에 젖어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에 대하여서는 상관이 없었다. 예수님이 빠진 소란하기만 잔치에 참여했을 뿐이다.
교회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물질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귀담아들어야 할 책망의 말씀이다.
마 23:23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마 23:27-28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가득 차 있다.
2. 이제부터라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요 4:20-24).
이재철 목사 “코로나 시대 온라인 예배, 제2의 종교개혁”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 전 담임)가 코로나 19로 시작된 ‘온라인예배’ 시대에 대해 “제2의 종교개혁이 도래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CBS 유튜브 채널 ‘잘 믿고 잘 사는 법’에서 “교황을 정점으로 주교와 주임 신부로 이어지는 철저한 계급적 시스템을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성경을 도외시하거나 왜곡했던 그릇된 길에서 ‘출애굽(exodus)’한 것이 첫 번째 종교개혁”이라며 “두 번째 종교개혁은 특정 공간을 절대화해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리라고 하셨던 주님 말씀에 걸림돌이 되어버린 잘못된 길에서 ‘출애굽’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철 목사는 최근 공개된 한 영상에서 “그렇게 절대시하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지만, 정말 우리가 예배를 못 드렸는가”라며 “하나님께서는 특정 공간의 예배를 절대화하던 우리에게 ‘온라인예배’라는 대포를 쏘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약 성경의 보고였지만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함락당해버린 오늘의 터키를 여행해 보면,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인간들과 끊임없이 그것을 허무시는 하나님”이라며 “개신교도 16세기 종교개혁으로 태동한 이래 만인제사장을 주장했지만, 예배당이 신성시됐던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또 “신성한 사람들이 있어 신성한 곳이 아니라, 예배당이라는 장소 자체가 신성해져 버렸다”라며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께 매이는 사람이 되기보다, 그 공간에 예속되어 그 공간의 목사에게 종속되거나 아니면 주일날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배당 밖에는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선데이 크리스천’을 양산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 19가 터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철 목사는 “역사적으로 전 세계적 위기는 새로운 질서와 새 시대의 서막으로 이어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전 세계 교회가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이 교회의 위기도 새로운 질서, 새로운 교회, 미래를 향한 서막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며 “이를 위해 이것이 무슨 기회이고 무엇을 위한 기회이며 무엇을 향한 기회인지 구명해야 한다. 이는 성경적 관찰과 해석이 선행될 때 가능하다”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처음으로 기독교 2천 년 역사상 매 주일 예배드리던 약속된 특정 공간을 벗어나서 예배드리게 됐다”라며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 말씀처럼, 이 산도 저 산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특정 공간에 갇히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신 하나님께, 무엇에도 구속받거나 예속당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시작하는 기회가 도래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 위기의 의미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내다보고 새로운 기회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성전은 더 이상 벽돌이나 나무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이라며 “세상의 삶 속에서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행하면서 성전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로 인해 세상은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고, 그것 자체가 바로 새로운 기회의 서막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에 대한 반응도 여러 가지였다.
권오수 목사: 이재철 목사님은 극단적인 생각을 늘 전제하고 계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배당을 절대화하고 예배당을 짓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자체가 극단적인 생각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본질적인 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어디든 모여 예배를 드리려면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그 공간을 절대화, 신성시하는 것은 몇몇 극단적인 사람들의 행태이지요. 그것을 일반화시켜서 매도하는 듯한 자세는 참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교만한 중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로 저희는 작은 공간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도 어려우면 공간이 넓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려 합니다.
한창진 목사 :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삶을 통한 예배가 중요하다는 말씀은 백번 동감합니다. 다만 온라인예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이냐는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모임을 와해시키는 비성경적 발언이며 기존의 기독교 신앙의 합력을 깨는 이야기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수많은 폐단을 통분히 여기는 사람이지만 이런 식의 변화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화평 도구가 되시길 축복하고 기원합니다.
우리가 모두 추구해야 할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산제사는 … ?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 ?
사도 바울 : 롬 12:1-21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실 일을 생각할 때 이것이 무리한 요구이겠습니까? 2) 여러분은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딴사람이 되십시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법이 실제로 얼마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여러분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3)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4)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에도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모두가 한데 모일 때 하나의 완전한 몸을 이룹니다. 5) 우리 각 사람이 서로 다른 지체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각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씩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 예언하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 있거든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을 하십시오. 7) 만일 남을 섬기는 은사를 받았거든 성의를 다해 남을 섬기고, 남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거든 훌륭하게 가르치십시오. 8) 설교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설교를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셨거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행정 능력을 주어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감독하게 하셨거든 성실하게 그 책임을 다하십시오. 슬픈 자를 위로해야 하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위로하십시오. 9) 여러분은 겉치레로 남을 사랑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10) 형제를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며 마음으로 존경하십시오. 11) 여러분이 맡은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계획하고 계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십시오. 환난 가운데서도 참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13) 하나님의 자녀들이 곤궁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고 만일 그들이 잘 곳이 없거든 집안에 재우십시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누가 여러분을 학대하더라도 저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15) 다른 사람이 행복해할 때 같이 기뻐하고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픔을 나누십시오. 16) 서로 한마음이 되어 즐겁게 일하십시오. 오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과 즐겁게 사귀십시오. 그리고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누가 보더라도 여러분이 정직하다고 인정할 수 있게 행동하십시오. 18)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스스로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원수 갚는 일은 내가 할 일이니 내게 맡기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 오히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신이 해온 일을 생각하고 부끄러워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것입니다. 21) 악이 기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선한 행실로 악을 정복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 마 5:23-24 / 그러므로 만일 네가 성전 제단 앞에 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네게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제물을 제단 앞에 그대로 두고 가서 그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라.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창 4:4-7 / 그때 아벨도 자기가 돌보던 양이 새끼를 낳자 그 가운데에서 첫 번째 것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다. 여호와께서는 아벨을 흐뭇하게 여기시고 그가 바치는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 5) 그러나 가인은 좋게 여기시지 않고 그가 바친 제물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가인은 너무도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하였다. 6)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셨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느냐? 어째서 안색이 변하였느냐? 7) 네가 잘하였다면 어째서 내가 네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어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느냐? 네가 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죄가 네 마음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급기야는 너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
▶ 호세아 선지자가 멸망을 앞둔 사랑하셨던 이스라엘을 향해 안타깝게 외쳤던 말씀이다.
호세아 6:4-5 /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랴?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랴? 너희들의 진심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고, 이른 아침의 이슬처럼 쉬 사라지고 있구나. 5) 그러므로 나는 예언자들을 보내어 너희의 멸망을 알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씀으로 너희를 죽이겠다고 경고하였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듯이 나의 심판이 어김없이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인애를 보시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인애(仁愛)는 안개나 쉬 없어지는 구름 같았을 뿐이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게 인애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없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인애를 베푸셨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회개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명예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잘못된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약자에 대한 핍박뿐이었다.
이렇게 볼 때 호세아 6: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이해가 된다.
마 7:21-23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예레미야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장과 3장에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4장에서는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셨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범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채찍을 내리칠 수밖에 없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제안하셨다.
렘 5:1 /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빨리) 의인을 찾아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廣場)을 둘러보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아라. 너희가 거기서 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공의 -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을 단 한 사람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그 성읍 전체의 죄를 용서하겠다.
‘공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정직한 것이 공의일까? 사람들은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가 더 옳고 그르냐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세운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공의’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를 의미한다.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돼라.’(마 5:48)는 ‘예수님의 말씀+예수님처럼 해야 한다’(빌 2:5-8)라는 것이다.
3.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던 마리아
【 폴 워셔 - 진정한 개종자는 복음을 자신의 이전의 삶에 추가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아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과거의 삶 위에 새로운 삶을 추가하는 것이 아닌 중심 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중심 이동은 가치관의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 영적 체질의 변화이다. 나의 옛사람이 죽어야 하므로 더 이상 과거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주님과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냥 교회만 오고 가면 10년, 100년이 걸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신앙은 이미지 관리나 개선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외적인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이다. 】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는 것이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낮은 자리에 서는 것(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기에 마땅히 섬김을 받아야 하지만 스스로 낮은 자리(십자가)로 내려가신 것이다. 으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지만 스스로 으뜸이 되는 자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셨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섬김의 완성인 십자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다. 예수님처럼 참된 섬김의 삶을 살 수 없다. 진정한 섬김은 결코 내 힘이나 내 노력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진정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
세상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이 잘되기를 축복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마태복음 5:38-48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자.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해야 한다.
사실 나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항거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 나도 당장이라도 때려주고 싶고, 한 대만 때리는 것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아서 두 대, 세 대 더 때려줘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단순히 한 번 참아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런 마음을 털어 버리고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였다. 한순간을 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보복의 감정이나 나쁜 감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마귀는 자꾸 나를 꼬드겨서 보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히 보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나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는 사람에게 항거하지 않고 묵묵히 참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 나도 당장이라도 때려주고 싶고, 한 대만 때리는 것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아서 두 대, 세 대 더 때려줘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한순간을 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에 있는 보복의 감정이나 나쁜 감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게 자꾸만 나를 꼬드겨서 보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문제, 감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온전히 보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마 5:38-48 / 또 모세의 율법에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라고 하였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3) 또 모세의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말이 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이 되겠느냐?(헬라어 원문은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발버둥을 친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2번이나 편히 가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라고 칭찬하셨던 것이다(행 13:22).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신앙을 출발하자.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그래서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했다. 유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이어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빈치는 즉시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에게 잘 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또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핍박하는 자도 있다. 이러한 때에 마음에 미움과 증오의 쓴 뿌리를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나를 핍박하고 고통을 준다고 해서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있고 그를 저주한다면 어떻게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마음에서 미움과 증오를 걷어내고 오로지 사랑만 남겨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 형상이 내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인관계(對人關係)의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 작업을 하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늘 불러보고 싶은 찬양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을 기도 제목으로 삼고 예수님을 닮아가자.
➊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➋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 받은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요일 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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