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 | 威 | 沙 | 漠 | 馳 | 譽 | 丹 | 靑 |
베풀 선 떨칠 선 | 위엄 위 | 모래 사 | 아득할 막 | 달릴 치 | 칭찬할 예 | 붉을 단 | 푸를 청 |
위엄(威嚴)은 멀리 사막(沙漠)에까지 떨쳤다. 이는 앞서 언급한 명장(名將)인 진(秦)나라의 백기(白起)와 왕전(王翦), 조(趙)나라의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의 명성(名聲)이 멀리 사막 너머의 흉노(匈奴)에까지 알려져 위세(威勢)를 떨쳤다는 뜻이다. | 그림을 그려 명예(名譽)를 전파하였다. 이는 명장(名將)들의 공훈(功勳)을 기리기 위하여, 화공(畵工)으로 하여금 그들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전각(殿閣)에 걸어서 그들의 명예(名譽)를 드날리고, 그들의 업적(業績)을 후세에 전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
※ 단청(丹靑) : 건물의 벽, 기둥, 천장 따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그림이나 무늬를 그린 것을 말한다.
※ 여기서 사막(沙漠)은 고비사막(Gobi Desert)을 말한다.
☞ 고비사막은 몽골과 중국에 걸쳐 있는 몽골고원 중부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막이며, 고비(Говь)는 몽골어로 '거친 땅'이라는 뜻이다.
☞ 몽골고원(Mongolian Plateau)은 몽골과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원으로 고비사막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외몽고(外蒙古)와 남쪽의 내몽고(內蒙古)로 나누어진다.
※ 흉노(匈奴)
흉노(匈奴)는 몽골고원고 동투르키스탄 일대를 지배하여 번영했던 유목 기마 민족으로,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국의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성(甘肅省), 신장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匈奴)가 최초로 등장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기록으로, 흉노(匈奴)는 한(韓)나라ㆍ조(趙)나라ㆍ위(魏)나라ㆍ연(燕)나라ㆍ제(齊)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6국의 참패로 끝났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여러 나라들은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각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훗날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되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몽염(蒙恬) 장군을 보내 융적(戎狄), 즉 흉노(匈奴)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을 점령하고 흉노(匈奴)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사망한 직후 진(秦)나라는 큰 혼란에 빠져 초한전쟁(楚漢戦争)을 치르게 되었고, 진(秦)나라의 쇠퇴를 기회로 삼아 흉노(匈奴)는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초한전쟁(楚漢戦争)에서 승리한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 흉노(匈奴)를 정벌하려 했으나,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劉邦)은 흉노(匈奴)의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으며, 이후 흉노(匈奴)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한(漢)나라와 흉노(匈奴)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劉邦)은 '흉노(匈奴)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당시 한(漢)나라와 흉노(匈奴)가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① 한(漢)나라의 공주를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키며, ② 한(漢)나라는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치고, ③ 한(漢)나라와 흉노(匈奴)는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고, ④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경계로 하여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로 선우(單于)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흉노(匈奴)를 이끄는 황제(皇帝)의 호칭이다.
한(漢)나라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는 흉노(匈奴)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하고 황하 서쪽 지역에 처음으로 진출해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 네곳에 하서사군(河西四群)을 설치했으며, 나아가 서역(西域)을 정벌하였다.
한(漢)나라의 군대가 서역(西域)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匈奴)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漢)나라와 흉노(匈奴)의 전쟁으로 한(漢)나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흉노(匈奴)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匈奴)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흉노(匈奴)는 선우(單于) 자리를 놓고 수십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어 내전이 일어나는 등 더욱 약화되었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匈奴)의 선우(單于) 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匈奴)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九 | 州 | 禹 | 跡 | 百 | 郡 | 秦 | 幷 |
아홉 구 | 고을 주 | 성씨 우 | 발자취 적 | 일백 백 | 고을 군 | 나라 진 | 아우를 병 |
구주(九州)는 우(禹)의 발자취이다. 이는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이 기(冀), 연(兗), 청(靑), 서(徐), 양(揚), 형(荊), 예(豫), 양(梁), 옹(雍) 등의 구주(九州)를 분별(分別)하였음을 말한다. | 일백의 고을은 진(秦)나라가 병합(倂合)하였다. 이는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천하(天下)를 봉군(封郡)하는 법(法)을 폐(廢)하고 일백의 군(郡)을 두었음을 말한다. |
※ 우(禹)
우(禹)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인 하(夏)나라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인물로, 제우(帝禹) 또는 하우씨(夏禹氏)라 이르기도 하는데, 홍수를 다스려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우(禹)의 탄생에 관한 많은 전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순(舜) 임금이 곤(鯀)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하자, 곤(鯀)은 둑을 쌓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식양(息壤)이라는 요술 흙을 한 줌 훔쳤는데, 이에 노한 상제(上帝)가 그를 처형했다.
3년 후에 그동안 썩지 않았던 그의 몸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우(禹)라는 것이다.
우(禹)는 용(龍)의 도움으로 몇 년 간 열심히 일한 끝에 바다로 물길을 내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공으로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국호를 하(夏)라 정하고, 중국 전역을 9주(州)로 나누어 공부(貢賦)를 정했다.
☞ 순(舜)
순(舜)은 중국 신화 속의 군주의 이름으로, 오제(五帝)의 의 마지막 군주이며, 요(堯)와 함께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이다.
☞ 곤(鯀)
곤(鯀)은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역사서인 사기(史記)에 따르면 곤(鯀)의 아버지는 오제(五帝)의 한 명인 전욱(顓頊)이고 자식으로는 하(夏)나라의 우(禹)가 있으며, 아버지가 군주였지만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신하의 몸이었다고 하며,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편찬한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의하면 전욱(顓頊)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 상제(上帝) :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말한다.
☞ 공부(貢賦) : 옛날에 나라에 바치던 세금과 물건을 이르던 말이다.
※ 구주(九州)
구주(九州)는 고대 중국의 고서에 기록된 하(夏)나라, 상(商)나라 즉 은(殷)나라, 주(周)나라 시대의 행정 구역으로, 이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지리적 구분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중국 전역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며 천하나 세계 전체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고서 | 구주(九州) | 참고 | |
서경(書經)의 하서(夏書), 우공(禹貢) | 예주(豫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 하(夏)나라의 행정구역 | |
이아(爾雅)의 석지(釋地) | 예주(豫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옹주(雍州), 유주(幽州), 영주(營州) | 상(商)나라 즉 은(殷)나라의 행정구역 | |
주례(周禮)의 직방(職方) | 예주(豫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옹주(雍州), 유주(幽州), 병주(并州) | 주(周)나라의 행정구역 | |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유시람(有始覽) | 예주(豫州),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옹주(雍州), 유주(幽州) | 서경(書經),이아(爾雅),주례(周禮)를 토대로 해석한 것 |
☞ 참고로 서경(書經)에서의 십이주(十二州)는 우(禹)가 다스릴 당시 중국 전역을 예주(豫州)와 이를 중심으로 하여 둘러싼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의 구주(九州)로 나눈 것에 유주(幽州), 병주(并州), 영주(營州)의 3개를 더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 진시황제(秦始皇帝)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진(秦)나라의 제31대 왕으로, 성은 영(贏), 이름은 정(政)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나, 그가 죽은 지 4년 만에 진(秦)나라는 멸망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장양왕(莊襄王)과 조희(趙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양왕(莊襄王)이 조(趙)나라에 볼모로 와 있을 당시 조(趙)나라의 거상인 여불위(呂不韋)가 자신의 애첩인 조희(趙姬)를 장양왕(莊襄王)에게 바쳤고, 장양왕(莊襄王)은 조희(趙姬)를 아내로 삼았다.
조희(趙姬)는 조(趙)나라 출신으로, 본래 거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으나, 여불위(呂不韋)가 장양왕(莊襄王)에 바쳤고, 장양왕(莊襄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자초부인(子楚夫人)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제태후(帝太后)이다.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역사서인 사기(史記)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따르면 여불위(呂不韋)가 조희(趙姬)를 장양왕(莊襄王)에게 바칠 당시 이미 조희(趙姬)는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조희(趙姬)가 자신의 아들을 임신한 것을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진시황(秦始皇)은 장양왕(莊襄王)의 아들이다'라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으며,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역사가 배인(裴骃)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주석을 단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영자초(嬴子楚)와 조희(趙姬)가 혼인한지 12개월 뒤에 영정(贏政)을 낳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여불위(呂不韋)는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 영자초(嬴子楚)는 장양왕(莊襄王)을 말한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줄곧 조(趙)나라에서 자라다가 증조부인 소양왕(昭襄王)이 사망하자, 조부인 효문왕(孝文王)이 즉위를 하게 되었고, 이에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이 처자와 여불위(呂不韋)를 데리고 진(秦)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조부인 효문왕(孝文王) 1년간의 증조부인 소양왕(昭襄王)의 장례를 마치고 정식으로 즉위한 지 겨우 3일만에 세상을 뜨게 되어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였고, 3년 뒤에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이 죽자 진시황제(秦始皇帝)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秦)나라의 제31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3살의 어린 나이였던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친정(親政)을 할 수 없었고, 이에 장양왕(莊襄王)의 후원자인 여불위(呂不韋)와 어머니 조희(趙姬)가 섭정(攝政)을 하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진(秦)나라의 왕이 된지 9년이 되었을 때, 장신후(長信侯) 노애(嫪毐)가 자신의 사병과 융적(戎翟) 부족들 그리고 왕의 옥새와 조태후의 인장을 도용해서 진(秦)나라의 관군까지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했다.
그러나 상국(相國)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이 반격해 함양(咸陽)에서 전투를 벌여 진시황제(秦始皇帝)의 군대가 승리하고 노애(嫪毐)와 반란군들은 도망치다 붙잡혀 처형당한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노애(嫪毐)가 어머니인 조태후(趙太后) 조희(趙姬)와 불륜해서 낳은 두 아들도 처형했으며, 노애(嫪毐)의 측근 4,000여명을 변방 오지인 방릉(房陵)으로 추방시킨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어머니인 조태후(趙太后) 조희(趙姬)와 여불위(呂不韋)가 노애(嫪毐)의 반란에 연루된 혐의가 발견되자 본격적으로 숙청을 시작했다.
어머니인 조태후(趙太后) 조희(趙姬)는 옹(雍)에 1년간 유배시켰으며, 여불위(呂不韋)는 면직을 시켰는데 2년 뒤 여불위(呂不韋)가 사망하자 조용히 묻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을 확인하여 추방하거나 면직시키는 처벌을 내렸다.
진(秦)나라의 통일 과정은 이미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즉위하기 이전인 장양왕(莊襄王)때 시작되었는데, 장양왕(莊襄王)은 즉위한 해에 여불위(呂不韋)를 시켜 동주(東周)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 몽오(蒙骜)에게 한(韓)나라 공격을 지시하여 한(韓)나라의 성고(成皐)와 형양(滎陽)지역을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몽오(蒙骜)를 시켜 조(趙)나라를 공격해 태원(太原) 지역을 함락하고, 그 다음해에는 몽오(蒙骜)가 위(魏)나라의 고도(高都)와 급(汲)을 함락하고 조(趙)나라의 유차(楡次)ㆍ신성(新城)ㆍ낭맹(狼孟)을 공격하여 37개 성을 함락하였으며, 이후 왕흘(王齕)이 상당(上黨) 지역을 공격하여 태원군(太原郡)을 설치하지만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를 중심으로 5개 국가가 연합해 반격하자 황하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장양왕(莊襄王)의 뒤를 이은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천하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제일 먼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한(韓)나라부터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후 조(趙)나라ㆍ위(魏)나라ㆍ초(楚)나라ㆍ연(燕)나라ㆍ제(齊)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40세의 나이에 천하를 통일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국왕(國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는데, 고심끝에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불로장생(不老長生)ㆍ불로불사(不老不死)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켜 수양제(隋煬帝)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완성하였으며,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제도와 군현제(郡縣制)를 닦음으로써 이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진(秦)나라 이후의 역대 국가들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실시한 제도화된 관료 행정구조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으나, 사실상 후대 국가들의 통치기반이 되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시황제의 말년은 측근들의 증대하는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데, 실제로 진시황제(秦始皇帝)에 대한 암살기도가 3번이나 있었으며, 거대한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는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서의 생활을 영위했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는데, 마지막 순행 도중에 죽었고, 산을 깍아서 우주의 상징적인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거대한 능에 묻혔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능은 197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발굴 초기에 죽은 황제를 보위하기 위한 군대라고 추정되는 실물크기의 토우(土偶)가 6,000점 이상 발견되었다. 강력한 지배자였던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사라진 후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의 지지자들간에 항쟁이 발생하였으며, 결국 진(秦)나라는 붕괴되고 황족들은 제거 되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진(秦)나라를 계승한 한(漢)나라에서 나온 것인데, 한(漢)나라는 유교(儒敎)를 숭상했으므로 법가(法家)를 중시한 진(秦)나라를 비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아마 그 시대의 조작으로 추정되며, 더욱이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지나치게 잔인했다거나 인격파탄자였다고 비방하는 이야기 등은 법가(法家) 사상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각색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전통적인 역사서에서는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교양이 없고 미신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했다. 077. 九州禹跡(구주우적) 百郡秦幷(백군진병
嶽 | 宗 | 恒 | 岱 | 禪 | 主 | 云 | 亭 |
큰 산 악 | 마루 종 | 항상 항 | 뫼 대 | 터닦을 선 | 임금 주 | 이를 운 | 정자 정 |
오악(五嶽) 중 으뜸은 항상 대산(岱山)이다. 여기서 대산(岱山)은 태산(泰山)의 별칭으로, 이는 오악(五嶽) 중 가장 뛰어난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封)을 하였음을 말한다. | 선(禪)은 주로 운운산(云云山)과 정정산(亭亭山)에서 지냈다. 여기서 운운산(云云山)과 정정산(亭亭山)은 태산(泰山) 아래에 있는 작은 산으로, 이는 이곳에서 땅에 제사를 지내는 선(禪)을 하였음을 말한다. | ||||||
봉선(封禪)은 제왕이 하늘과 땅에 왕의 즉위를 고하고, 천하의 태평함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
※ 오악(五嶽)
중국 고대의 제왕들은 오악(五嶽)을 여러 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 믿어 봉선(封禪)과 제사 등의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태산(泰山) | 동악(東嶽) | 태산(泰山)은 중국 산둥성(山東省) 타이안(泰安) 북쪽에 있는 산으로 대산(岱山)이라고도 한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등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정식으로 하늘에 알리는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한 장소이다. | |||||
화산(華山) | 서악(西嶽) | 화산(華山)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의 중간인 화인(华阴)에 있는 산이다. 공자(孔子)가 요순(堯舜) 때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모아 지은 책인 상서(尙書)에 화산(華山)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황제(黃帝), 요(堯), 순(舜)이 화산(華山)을 다녀간 기록이 있으며, 진시황제(秦始皇帝), 한무제(漢武帝), 무측천(武則天), 당선종(唐玄宗) 등 10여명의 황제들이 화산(華山)을 방문하여 대규모의 제를 올렸다. | |||||
형산(衡山) | 남악(南嶽) | 형산(衡山)은 중국 후난성(湖南省) 헝산현(衡山縣)에 있는 산이다. 형산(衡山)은 중국 남부의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 남선(南禪), 천태종(天台宗), 조동종(曹洞宗), 선종남악(禪宗南嶽) 청원양계(青原兩系)의 발원지이자, 도교(道敎)의 성지(聖地)이다. | |||||
항산(恒山) | 북악(北嶽) | 항산(恒山)은 중국 하북성(河北省) 곡양현(曲陽縣) 서북쪽과 산시성(陝西省) 훈위안현(渾源縣) 남쪽 접경지에 있는 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순(舜)이 항산(恒山)을 방문했을 때 그 위엄과 가파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 |||||
숭산(嵩山) | 중악(中嶽) | 숭산(嵩山)의 옛 이름은 외방(外方), 숭고(嵩高), 숭고(崇高)라고 하며, 허난성(河南省)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숭산(嵩山)은 도교(道教)의 성지(聖地)이자 소림사(小林寺)가 위치한 불교(佛教)의 성지(聖地)이며, 중국 신유교(新儒教)의 탄생지이다. |
청(淸)나라 후기의 사상가이자 학자인 위원(魏源)은 오악(五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을 하였다.
恆山如行 | 항산(恒山)은 걷는 것 같고 | |
泰山如坐 | 태산(泰山)은 앉아있는 것 같고 | |
華山如立 | 화산(華山)은 서있는 것 같고 | |
嵩山如臥 | 숭산(嵩山)은 누워있는 것 같고 | |
惟有南嶽獨如飛 | 다만 남악(南嶽)만이 오직 날아다니는 것 같다. |
※ 봉선(封禪)
봉선(封禪)이란 고대 중국의 제왕이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았음을 표명하기 위해 거행한 제사로, 태산(泰山)의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봉(封)과 태산(泰山)의 아래 기슭에서 땅에 제사 지내는 선(禪)을 합쳐 이르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나와있는 봉선(封禪)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선(封禪)을 한 제후(帝侯) | 봉선(封禪)을 한 장소 | |
무회씨(無懷氏)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복희씨(伏羲氏)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신농(神農)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염제(炎帝) | 태산(泰山)과 정정산(亭亭山) | |
황제(黃帝) | 태산(泰山)과 정정산(亭亭山) | |
전욱(顓頊)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제곡(帝嚳)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요(堯)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우(虞)나라 순(舜)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하(夏)나라 우(禹) | 태산(泰山)과 회계산(會稽山) | |
상(商)나라 즉 은(殷)나라 탕(湯) | 태산(泰山)과 운운산(云云山) | |
주(周)나라 성왕(成王) | 태산(泰山)과 두수산(杜首山) |
雁 | 門 | 紫 | 塞 | 鷄 | 田 | 赤 | 城 |
기러기 안 | 문 문 | 자주 빛 자 | 변방 새 | 닭 계 | 밭 전 | 붉을 적 | 재 성 |
안문(雁門)과 자새(紫塞). 기러기가 지나가는 높고 험한 안문(雁門)에는 자새(紫塞)가 있다. 자새(紫塞)는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축조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말하는데, 그 흙빛이 자색이므로 자새(紫塞)라 불렀다. | 계전(鷄田)과 적성(赤城). 계전(鷄田)은 웅주(熊州)에 있는 고을이고, 적성(赤城)은 기주(冀州)에 있는 고을이다. 계전(鷄田)과 적성(赤城)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의 변방에 있는 곳으로 안문관(雁門關)과 더불어 북방의 중요한 요새(要塞)이다. |
※ 안문관(雁門關 ; 옌먼관)
안문관(雁門關)은 중국 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 다이현(代县)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
진 안문산(雁門山)에 있으며, 서경관(西徑關 ; 시징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문관(雁門關)이 있는 안문산(雁門山)은 동서의 봉우리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문과 같고 그곳을 건너가는 기러기의 모습이 유명하여 안문(雁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문관(雁門關)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송(宋)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북방 이민족의 남하에 대한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는데, 안문관(雁門關)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싸움은 1,700여회에 이른다고 한다.
안문관(雁門關)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중요한 관문으로 영무관(寧武關), 편관(偏關)과 함께 외삼관(外三關)으로 불리며, 함곡관(函谷關), 선하관(仙霞關), 검문관(劍門關)과 함께 중국의 4대 관문으로 불린다.
안문관(雁門關) | 안문관(雁門關)은 북위(北魏) 때에는 동쪽과 서쪽에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 ||
당(唐)나라 때에는 서쪽의 관문이 안문관(雁門關)으로 불리게 되었다. | |||
원(元)나라에 이르러 안문관(雁門關)은 폐지되었다. | |||
명(明)나라 때에 와서 길안(吉安 ; 지안)의 제후 육중형(陸仲亨)에 의해 복구되었는데, 약간 동쪽의 위치로 옮겨졌다. |
※ 만리장성(萬里長城)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줄여서 장성(長城)이라고 흔히 부르는데, 흉노(匈奴) 등의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시황제(秦始皇帝)가 기존의 성곽을 잇고 부족한 부분은 새롭게 축조하여 만든 성곽으로,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개축 및 신축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현존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옥문관(玉門關) 가욕관(嘉峪關) 산해관(山海關) |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기원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에서 시작되었다. | ||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초(楚)나라, 위(魏)나라, 연(燕)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국가들이 국경에 북방의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았으며, 한(韓)나라와 제(齊)나라 등은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지는 않았으나 초(楚)나라를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다. | |||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중국을 통일한 후 중국 안에 있던 장성을 파괴하고, 북쪽에 만들어졌던 여러 성들을 보수하고,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장성을 연결하였으며, 흉노(匈奴)의 침입을 대비해 장성을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다. | |||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흉노(匈奴)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무이(武威 ; 우웨이)와 주천(酒泉 ; 주취안)에 장성을 연장시켜 쌓는 등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玉門關)까지 확장시켰다. | |||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때 북주(北周)와 북제(北齊)가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하였다. 특히,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화북을 통일한 북위(北魏)는 북방의 유연(柔然)을 방어하기 위해 원래 장성의 위치보다 남쪽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기초가 되었다. | |||
수(隋)나라의 양제(煬帝)가 장성을 보수하고 오르도스(Ordos ;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중남부에 있는 고원 지역)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 |||
거란(契丹)의 요(遼)나라와 여진(女眞)의 금(金)나라는 다른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싱안링산맥(大興安嶺 ; Greater Khingan Range or Da Hinggan Range) 등지에 새롭게 장성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 |||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명(明)나라가 세워진 뒤 원(元)나라의 재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고 신축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되었는데, 명(明)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지금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동쪽에 산해관(山海關)을 설치하였다. | |||
명(明)나라의 정통제(正統帝)가 북경(北京 ; 베이징)인근의 동단을 중심으로 2중으로 장성을 쌓았다. | |||
명(明)나라의 가정제(嘉靖帝)는 몽골(Mongolia ; 蒙古)의 침입이 가속화되자 대대적으로 장성을 더욱 견고하게 개축하였다. | |||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개축되어 16세기 말에 비로소 지금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모두 완성되었다. |
昆 | 池 | 碣 | 石 | 鉅 | 野 | 洞 | 庭 |
맏 곤 | 연못 지 | 비석 갈 | 돌 석 | 클 거 | 들 야 | 골 동 | 뜰 정 |
곤지(昆池)와 갈석(竭石). 곤지(昆池)는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남서부에 있는 못이며, 갈석(竭石)은 하북성(河北省) 부평(富平)에 있는 산이다. | 거야(鋸野)와 동정(洞庭). 거야(鋸野)는 태산(泰山)의 동편에 있는 늪지대이며, 동전(洞庭)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중국 제1의 호수(湖水)이다. |
※ 곤지(昆池)
곤지(昆池)는 전지(滇池 ; 뎬츠)의 옛 이름으로 중국 운남성(雲南省 ; 윈난성)에 있는 중국에서 여섯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곤명호(昆明湖), 곤명지(昆明池), 전남택(滇南澤)으로도 불렸다.
이곳은 중국 고대 왕조가 천축국(天竺國)이라고 부른 인도(印度)로 가는 통로이자 중요한 무역로였다.
곤지(昆池) 주변은 운남(雲南)에서 초기에 개발된 곳 중 하나로, 전국시대(戰國時期) 초(楚)나라 위왕(威王) 때의 장군(將軍) 장교(莊蹻)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전(滇)나라를 세웠다.
※ 갈석(竭石)
갈석(竭石)은 갈석산(竭石山)을 말하며, 하북성(河北省 ; 허베이성) 부평현(富平縣)에 있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국가인 하(夏)나라의 창시자인 우(禹)도 치수(治水)를 위해 갈석산(竭石山)에 들렸으며,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태산(泰山)에 갔다가 갈석산(竭石山)에 들렸으며,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신하들을 보내 갈석산(竭石山) 입구에 자신의 공로와 업적을 기리는 비문을 새기게 했다.
※ 거야(鋸野)
거야(鋸野)는 고대 중국의 유명한 늪지대로, 대야(大野) 또는 거택(巨澤)이라고도 한다.
※ 동전(洞庭)
동전(洞庭)은 동정호(洞庭湖 ; 둥팅호)를 말하는데, 호남성(湖南省 ; 후난성)에 있는 중국에서 2번째로 큰 담수호이다.
동정호(洞庭湖)는 원래 중국 최대의 담수호였으나, 상수(湘水)ㆍ자수(資水)ㆍ원수(沅水)ㆍ예수(澧水) 등 4개의 하천에서 흘러드는 퇴적물과 장강(長江 ; 창장) 즉 양자강(揚子江 ; 양쯔장)의 진흙 및 모래의 유입으로 수역이 점차 축소되었고, 이제는 포양호(鄱阳湖)에 이어 제2의 담수호로 바뀌었다.
동정호(洞庭湖)는 단오절(端午節)이 시작된 곳으로, 단오절(端午節)은 굴원(屈原)을 기리기 위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굴원(屈原)의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회왕(懷王) 때의 신하이다.
당시 진(秦)나라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초(楚)나라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고, 이에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으나, 회왕(懷王)은 다른 신하들의 말에 넘어가 진(秦)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으며, 굴원(屈原)은 모함을 받아 귀향을 가게 되었다. 굴원(屈原)은 귀향을 가서 이소(離騷)라는 시를 지었으며, 멱라강(汨羅江)에 돌덩이를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때가 기원전 278년 음력 5월 5일로 지금의 단오절(端午節)이다.
참고로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라는 시는 총 374구(句), 2,477자(字)로 구성되어 있는 장편 서정시이며, 멱라강(汨羅江)은 호남성(湖南省 ; 후난성) 상수(湘水)의 지류로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들어간다.
단오절의 주요 풍속으로 용선(龍船) 경기가 있으며, 대표음식은 쭝쯔(粽子)이다. 굴원(屈原)이 자살했을 때 그 지역의 백성들이 굴원(屈原)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배를 몰고 왔고, 동정호(洞庭湖)까지 뒤쫓아 갔지만 굴원(屈原)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으며, 그 후 매년 5월 5일에 용선(龍船)을 저어 그것을 기념하게 되었다. 용선(龍船)은 용주(龍舟)라고도 한다.
그리고 굴원(屈原)의 시체가 훼손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물고기들에게 밥알을 던졌었는데, 이후 사람들은 굴원(屈原)에 대해 애도의 표시로 제사를 지내고 강에 배를 띄워 대나무통에 찹쌀을 넣어 강에 던졌는데, 여기에서 유래가 된것이 쭝쯔(粽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