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사랑의 미로(迷路) 1 천화원(天和院). 이곳은 대화성의 방문객들을 위한 객원이었다. 천화원의 규모는 웬만한 장원을 능가할 정도로 컸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대화성을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대화성은 중원무림의 태두로 사실상 맹주(盟主)의 역할을 한 지 오래였다. 무림은 하루도 피 바람 잘 날이 없는 세계다. 따라서 중원각처에서는 수많은 크고 작은 분쟁(紛爭)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만일 그 분쟁을 당사자끼리 해결하려고 한다면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대화성에서는 무림의 분쟁을 중재하는 역을 맡게 되었다. 결국 하루에도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갖가지 이유로 인해 대화성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자파(自派)와 타파(他派)의 분쟁을 조정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대화성의 문을 두드렸으며 어떤 사람은 억울한 일에 대해 처리해 달라고 대화성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자들은 대화성의 실질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인 사건과 청탁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화성은 이런 방문객들을 위해 천화원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천화원 입구. 유비옥은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해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소풍 나온 것처럼 여유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앞에는 10명 남짓한 서기(書記)들이 방문객들의 방문 목적들을 일일이 받아 적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내객들은 50여 명이었다. 다른 때보다 적은 이유는 며칠 전 폭설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유비옥은 내객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흠칫했다. 한 청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데…….' 청년은 일신에 청의를 입고 있었다. 별반 특이할 것이 없는 용모였으나 어쩐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유비옥은 미간을 좁혔다. 그때 청년이 그를 돌아보았다. "……!"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 오고 갔다. 청년은 급히 고개를 숙이더니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비옥은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청년을 다시 찾으려 했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사이 유비옥의 차례가 다가왔다. "소생은 하북의 팽가(彭家)에서 왔소이다. 이곳의 봉공(奉公)으로 있는 본문의 문주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서기는 힐끗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그는 필묵을 놓고 즉시 일어섰다. 그로 미루어 팽가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은 막도장(莫刀莊)에서 왔소이다. 막도장은 하남(河南) 쾌도방(快刀幇)과 근접해 있소이다. 그런데 보름 전 그들이 본문의 제자를 살해했소. 그 일에 대해 중재를 요청하러 왔소이다." 이번에는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서기는 그저 말없이 내용을 받아 적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팽가와 막도문과는 그 위세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유비옥의 차례가 왔다. "어떤 일로 오셨소?" 짧은 수염을 기른 서기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비옥은 짧게 대꾸했다. "우문좌하 성주를 만나러 왔소." 2 불당(佛堂). 만수향(萬壽香)이 말없이 타고 있는 불당 안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부처의 자비로움인 양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한없이 한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땡그랑…… 땡그랑……. 바람이 처마를 스칠 때마다 풍경(風磬)이 맑은 소리를 냈다. 똑, 똑, 똑, 또그르르르……. 풍경에 맞추듯이 목탁 소리가 명료하게 울려 퍼졌다. 휘이잉…….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다시 풍경이 흔들리며 맑은 음향을 냈다. 불당은 대화성 안에 있었는데 야산을 면한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득 언덕으로 올라오는 교영(嬌影)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은 곧장 불당으로 향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아니,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절세미인이었다. 다만 흠이라면 안색이 지나치게 차갑다는 것뿐이었다. 단리옥상이었다. "……." 그녀는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지 고운 아미를 잔뜩 찡그린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불당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풀이 죽어 있었다. 오동나무로 바닥을 깐 불당은 꽤 넓었다. 벽에는 십팔나한(十八羅漢: 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악마의 파괴자, 존자라고도 불린다.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불교도의 수호성인이다.)의 탱화가 그려져 있었고, 불당 정면에는 결가부좌를 튼 아미타불(주: 무한한 빛이라는 뜻보다는 일반적인 불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에게는 서방극락, 즉 정토에 사는 아미타불이 간구의 대상이 된다.)을 모셔 놓은 단이 있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 탓일까? 아미타불의 얼굴 근처에는 은은한 후광이 어리고 있었다. 단의 좌우에는 향이 끊이질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단 아래 한 여인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허약해 보이는 중년여인이었다. 여인의 파리한 입술이 열렸다. "불경명종(不輕命終) 치무수불(値無數佛) 설시경고(說是經苦) 득무량복(得無量福) 점구공덕(漸具功德) 질성불도(疾成佛道) 피시불경(彼時不輕) 즉아신시(則我身是) 시사부중(時四部衆) 착법지자(着法之者) 문불경언(聞不輕言) 여당작불(汝當作佛) 이시인연(以是因緣) 치무수불(値無數佛) 차회보살(此會菩薩) 오백지중(五百之衆) 병급사부(幷及四部) 청신사녀(淸信士 女) 금어아전(今於我前) 청법자시(廳法者是)……." (법화경 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의 한 구절이다. 부처에게 불경한 보살 하나가 무수한 부처를 만나 차츰 불도를 이룬다는 뜻이다. 정녕 과거를 뉘우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喝!) 단리옥상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은 불경을 읊고 있는 중년여인의 뒷모습을 괴로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박한 백의를 걸치고 있는 중년여인의 머리는 짧았다.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게 세어 있었다. "……." 단리옥상은 그녀의 뒤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중년여인은 비로소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중년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월의 흐름은 속일 수가 없는 법일까? 본래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음직하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나이는 40을 조금 넘긴 듯했는데 단리옥상과 무척이나 닮은 인상이었다. 단리옥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머니, 옥상이 왔어요." 중년여인은 바로 그녀는 모친인 우문수연이었다. "……." 우문수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무심한 시선을 한 번 던졌을 뿐이었다. 단리옥상은 우문수연의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는지 별로 서운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문수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모녀는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불당을 완전히 빠져 나갈 때까지 불공을 드렸다. 마침내 저녁 어스름이 불당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제야 우문수연은 불공을 끝내고 단리옥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이냐? 좀처럼 오질 않던 네가 이곳에 다 오다니……." 단리옥상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오지 않으면 누가 오나요? 오라버니는 조부님의 명을 받고 어디론가 떠나셨고, 아버님께선…… 항상 바쁘신걸요." "……." 우문수연은 잠시 단리옥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오늘은 어쩐지 네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 단리옥상은 대답 대신 불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문득 불상 위로 한 사내의 얼굴이 겹쳐지는 환상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우문수연의 질문에 단리옥상은 흠칫했다. 그녀의 얼굴이 언뜻 붉어졌다. 그녀는 불상 위에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옥상아……, 혹시 좋아하는 사내라도 생겼느냐?" 우문수연은 말에 단리옥상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어머니의 눈은 정확했다. 평소에 오만하기만한 딸의 눈빛만 보고 그녀의 심중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었다. "어머님…… 저는……." 단리옥상은 마침내 입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은 않은 얘기였지만 자신을 낳은 어머니라면 모든 것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그녀가 불당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쉰 후 입을 열었다. "어머니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우문수연은 자애스런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오냐, 네 어미가 아니더냐? 어서 말해 보거라." 단리옥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는 한 사람을 알게 됐어요. 한데 그 사람은…… 소녀가 스스로 찾아간 사람이에요." "……?" 우문수연은 뜻밖이라는 듯 단리옥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흠! 넌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남자를 무시해 오지 않았느냐? 그런 네가 자청해서 사내를 찾아갔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냐? 무척이나 궁금하구나." 단리옥상의 얼굴은 다시 붉게 물들었다. "그 분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결심한 듯 말했다. "그 분의 이름은 유비옥이에요. 어머니도 아시는 유철심이란 분의 아들이에요." "……!" 단리옥상의 말이 끝나는 순간 우문수연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유철심…… 유철심……." 오로지 유철심이란 이름 석자만을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단리옥상은 갑자기 그녀의 무릎에 엎드렸다. 그녀의 음성은 안타까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 분은 지금…… 이곳에 와 있어요. 조부님을 뵙겠다고 청하셨어요……." 3 신하(臣下)의 도리는 어떤 것일까? 사록(史錄)을 들춰 보면 신하의 도리에 대한 한 일면을 볼 수 있게 된다. 형가(刑苛)에 대한 고사(古事)가 그것이다. 형가는 연(燕) 나라에 적을 둔 당대 최고의 자객이었다. 그에게 어느 날 살명이 내려졌다. 진왕(秦王)을 암살하라는 것이었다. 형가는 그 명령을 받고 곧장 진나라로 향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진왕의 면전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형가의 암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록에 의하면 신하의 도리와 관련이 있었다. 진왕의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형가를 저지한 때문인 것이다. 그 고사는 오늘날까지도 신하의 도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신하된 도리! 감히 주군을 노리는 자가 있다면 신하된 도리로 그 자를 마땅히 죽여야 한다. 설사 그의 목적이 불분명할지라도 주군을 노린다고 의심되어지면 전 신경을 기울여 감시해야 할 것이다.' 나후성(羅侯星)은 내심 그렇게 뇌까리며 눈 앞의 청년을 노려보았다. 청년은 백삼(白衫)을 입고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나이는 20을 전후해 보였다. 그는 허리춤에 한 자루의 고검(古劍)를 차고 있었는데, 수십 명의 대화성 무사들이 둘러싼 가운데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나후성은 생각했다. '놈은 성주님을 노리고 이곳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놈이 이곳에서 활개치고 다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마음을 굳히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멈춰라!" 지금 수십 명의 무사가 에워싸고 있는 곳은 한 전각의 넓은 광장이었다. 나후성의 외침에 무사들은 일제히 두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나후성은 백삼청년을 향해 걸어갔다. 청년, 즉 유비옥은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상대할 자가 나타났군.' 유비옥은 무정검을 거두었다. 그의 발치 깨에는 여러 자루의 부러진 도검이 나뒹굴고 있었다. 방금 전 그는 전각으로 들어가려다 무사들에게 저지 당했고, 그들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벌인 것이었다. 나후성은 유비옥의 1장 앞에서 멈추며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유비옥이라고 했던가? 네놈이 바로 요즘 꽤 위명을 날린다는 철검무정(鐵劍無情)이냐? 건방진 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소동을 부리는 것이냐?" 유비옥은 담담히 말했다. "대화성인 줄은 알고 있소." 나후성은 발연대로했다. "알면서도 감히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이냐? 네놈은 목이 열 개라도 된단 말이냐?" 유비옥은 냉소했다. "글쎄, 혹 아시오? 정말로 열 개가 될지?" 나후성은 기가 막혔다. "크흐흣!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감히 본성에 와서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놈이 다 있다니. 아무래도 네놈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모양이구나." 나후성의 몸에서 서서히 살기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유비옥! 네놈이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유비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잘 모르겠소. 성주를 만나려 하는 것이 어째서 죽을 죄가 되는지 말이오. 대화성이 무림의 맹지 역을 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소만 성주가 신이 아닌 이상 어찌하여 만날 수 없단 말이오?" 나후성은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성주님은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그 분은…… 신이시기 때문이다." 유비옥은 흠칫했다. 자신 있게 신이라 말하는 나후성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 명의 무사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화성주 우문좌하를 정말로 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비옥은 가슴이 섬뜩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인간은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을 신으로 만들어 놓다니……. 과연 얼마나 대단한 위인이기에…….' 그는 입술을 지긋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더욱 더 우문좌하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당신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난 다르오. 난 인간 우문좌하를 만나러 왔소." 그는 우문좌하가 신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그러자 나후성을 비롯한 무사들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감히 성주님의 존명을 함부로 말하다니……." 유비옥은 냉소쳤다. "미친 건 당신들이오. 대화성은 누구를 위한 개인적인 조직이 아니오. 중원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 무림인이 피땀 흘려 일으켜 세운 단체요.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성주를 신이라 칭하며 무림 위에 군림하려 든단 말이오? 성주를 만나야겠소. 그에게 똑똑히 물어봐야겠소. 과연 어느 것이 무림의 평화를 위하는 길인지를 말이오." "……." 유비옥의 말은 열기를 띠고 있었다. 나후성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성주님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소란을 일으키며 본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냐?" "하하하하……!" 유비옥은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웃음을 뚝 그친 후 차갑게 말했다. "내가 성주를 만나려는 것은 당금 무림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요. 그가 진정으로 무림의 안위를 근심하고 있다면 당연히 날 만나야 하오. 그런데 이렇게 시간만 끌고 있으니 난 그의 심중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그래서 직접 만나고자 하는 것이오." "……." 나후성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비옥의 말은 이론적으로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대화성, 그것도 성주의 처소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경고를 무시하고 밀고 나오는 유비옥을 그는 가만 둘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듣기 싫다! 네놈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이유를 말하지 않는 바에야 불순분자로 볼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 쩡! 나후성은 카랑카랑하게 외치며 검을 뽑았다. 유비옥은 그의 검을 보고 빈정거렸다. "훌륭한 검이구려." 실상 나후성의 검은 일대 명검은 아니었으나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백련정강을 천 번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그는 항상 자신의 검을 자랑하고 다녔다. 유비옥이 한눈에 알아보고 칭찬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 말보다는 실력으로 네 뜻을 보여다오." 그는 유비옥의 앞으로 걸어가 검을 중단으로 뻗었다. "……." 무사들은 그들 주위를 빙 둘러싼 채 관전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그들의 흥미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1명은 무림에 혜성처럼 등장한 검귀(劍鬼) 철검무정이었고, 다른 1명은 대화성의 호천령주(護天令主)란 직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서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수의 싸움에서는 단 한 올의 허점만 드러나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진다. 패배란 죽음을 의미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자세를 보고 대뜸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나후성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으음, 젊은 나이에 검귀란 위명을 날린 것이 허명이 아니었구나. 완벽한 자세다. 과연 철검무정이로구나!' '대화성에 절정고수들이 운집해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일개 령주의 검학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감탄했다. 그들의 검에서는 서서히 찌르는 듯한 검기가 흘러 나왔다. 그야말로 일촉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유비옥의 귀로 누군가의 가느다란 전음(傳音)이 들려 왔다. (당신은 참으로 어리석군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뭐가 있나요? 어서 자리를 피하세요!) 그것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유비옥은 전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그 순간 다시 전음이 다급하게 들려 왔다. (당신이 소란을 피운다고 조부님이 직접 나서게 될 것이란 생각은 오산이에요. 조부님은 저들에게 신이에요. 저들은 절대로 조부님을 모독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대화성의 힘을 결코 우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 혼자서 대화성 전체를 상대할 생각인가요? 어서 피하세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비옥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전음을 보내 여인은 단리옥상이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절대로 호의를 베풀 여인이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증오를 품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녀의 전음은 구구절절이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옥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안색을 차갑게 굳히고 나후성을 노려보았다. 다시 단리옥상의 다급한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당신은 모친의 죽음에 관해 알고 싶지 않은가요? 어째서 당신의 부친이 검을 꺾고 은퇴해야 됐는지에 대해서도 말이에요.) '……!' 유비옥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는 유철심이 어머니를 죽인 일을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어머니를 죽여야 했던 이유라고? 그걸 알려 준다고?' 유비옥은 동요를 느꼈다. 그때였다. 나후성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유비옥에게서 허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고수의 싸움에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는 낳는 것이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랏!" 슈팟! 나후성은 검을 날렸다. "……!" 유비옥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예리하게 허리를 파고드는 검기를 느낀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러나 경황 중에 취한 반응이라 나후성의 공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윽!"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허벅지에서 선혈이 튀었다. 나후성의 검날이 스쳐간 것이다. 그 순간 단리옥상의 전음이 다급히 울렸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오른 쪽이에요. 저…… 전 나설 수 없으니…… 제발!) 유비옥은 신형을 날렸다. 이제 그는 나후성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의미도 못 느꼈다. 모친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온통 뇌리를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휘익! 그는 화살처럼 날아갔다. 나후성은 그가 갑자기 달아날 줄은 몰랐는지라 발을 굴렀다. "비겁한 놈! 어딜 달아나느냐? 이곳은 대화성이다! 네가 갈 곳이 있을 줄 아느냐……?" 그는 즉시 유비옥을 쫓아 신형을 날렸다. 그는 유비옥을 잡을 자신이 있었다. 대화성에서 10년 이상을 살았으므로 지리를 환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옥은 5개의 전각과 2개의 대전을 지나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를 바짝 쫓아 달리던 나후성은 문득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이런 놈이 하필이면……." 나후성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유비옥은 야산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후성은 그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산은 그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이었던 것이다. 야산 안에는 쇄심당(碎心堂)이란 현판이 붙은 불당이 있었고, 그곳은 성주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인 것이다. 쇄심당은 우문수연의 기거하는 곳이었다. 또한 대화성의 몇 안 되는 금역이기도 했다. 나후성은 분한 듯 중얼거렸다. "할 수 없지. 이곳을 포위하고 놈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는 뒤늦게 쫓아온 수하들을 야산 주변에 배치했다. |
첫댓글 즐독 ㄳ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