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치기놀이 ‘엽전치기’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치기시리즈 1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전국 모든 지방에서와 같이 ‘엽전치기’라는 아이들의 놀이가 있었다. ‘돈치기’ 또는 ‘동전치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우리 고향에서는 어께에 걸쳐 메게 꾸린 ‘엽전(葉錢)꾸러미’를 ‘뀐다리’라고 한다.
‘엽전치기’ 놀이는 주로 시골의 청소년(靑少年)들이 넓은 마당에 줄을 그어 놓고 하는 놀이였는데, 두 사람이면 할 수는 있으나, 4~5명이면 가장 이상적(理想的)이다.
엽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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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치기’를 함경도(咸鏡道)에서는 망치기(북청)·망애치기(이원)라고 하고, 평안도와 황해도(黃海道) 지방에서는 망깨 또는 ‘망깨치기’라고도 한다.
이들 명칭은 돈치기에 쓰이는 돌을 ‘망돌(북청)’, ‘망애돌(이원)’ 또는 ‘망깨돌’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긴 명칭으로 보인다.
엽전치기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상원조(上元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땅을 파서 구멍을 만들고 어른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서 돈을 구멍 가운데에 던진다. 그리고 왕대전(王大錢)을 던져서 그 돈을 맞힌다.
엽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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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힌 자는 그 돈을 가지며 이긴 것으로 한다. 잘못 맞히거나 못 맞힌 자는 진 것으로 여긴다. 상원날에 이 놀이가 더욱 성했다. 어린 아이들은 깨진 도기 조각을 사용해서 돈으로 삼고 이것을 던진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엽전치기’는 2~3명에서 7~8명까지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더욱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인원수대로 구멍 앞 3~4미터 지점의 가로 그은 선 위에서 ‘엽전(葉錢)’ 한 개씩을 던지고 구멍에 들어간 사람이 첫 번째가 되고, 구멍에 더 가까운 사람 차례로 다음 순번(順番)들이 정해진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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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된 사람은 여러 사람이 한 개씩 대놓은 ‘엽전’을 다 거두어 한 주먹에 쥐고 구멍에 던져서 들어간 것은 가지고, 다음은 동료(同僚)가 지적하는 돈을 납작한 돌로 맞히는 대로 가진다.
못 맞히면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되, 잘못 맞히면 벌금(罰金)을 내는 수도 있다. 함경도(咸鏡道)에서는 구멍을 파는 대신 돌을 놓고 그 돌에 가장 가깝게 돈을 던진 사람 순으로 순번(順番)이 정해진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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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외동읍(外東邑) 북부지방에서 주로 했던 놀이는 동그라미 안에 태워놓은 다른 사람의 ‘엽전’을 자기 ‘엽전(葉錢)’으로 쳐내어 따먹는 ‘쳐내기’ 방식이었다.
이 놀이의 방식은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각자 ‘엽전(葉錢)’ 한 개씩을 그 속에 넣고(‘엽전’을 댄다고 한다), 그 동그라미에서 2~5m정도 떨어진 곳에 선을 긋는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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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한 후 차례로 그 선에서 자기의 ‘엽전(葉錢)’을 던져 동그라미 속에 대놓은 ‘엽전’을 맞추어 밖으로 튀어 나가면 튀어나간 ‘엽전’을 따먹는다. 던지는 ‘엽전’이 없으면, 동글납작한 손바닥 크기의 돌로도 한다.
한번 던져서 ‘엽전(葉錢)’ 한 개가 나가면 한 개를 갖고, 여러 개가 나가면 여러 개를 갖는다. ‘쳐내기’는 ‘엽전’이 튀어나가건 안 나가건 한번 씩만 하며, 순서대로 다 던지면 1번부터 다시 던진다.
가위 바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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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속의 ‘엽전(葉錢)’이 다 없어질 때까지 ‘쳐내기’를 계속한 다음 모두 없어지면 새로 한 개씩을 대고(동그라미 속에 넣고) 다시 시작하는데, 이때의 순서도 처음 정한 순서대로 한다. 이 놀이를 ‘던지기’라고도 한다.
‘쳐내기’ 방법 다음으로는 ‘구멍 넣기(구녕 옇기)가 유행했었다. ’구멍 넣기‘의 방법은 자기가 서 있는 곳에 가로로 줄을 긋거나 또는 적당한 표시(表示)를 해 놓고, 그곳에서부터 약 3미터 전방(前方)에 1미터정도의 줄을 가로로 그은 다음, 그 줄 앞쪽 약 20cm 정도에 ‘엽전(葉錢)’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구멍을 파놓는다.
구멍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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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를 마친 다음에는 던지는 순서(順序)를 정하는데, 이 순서는 ‘쳐내기’에서와 같이 제각기 ‘엽전(葉錢)’을 던져서 구멍 쪽에 가까이 떨어진 사람이 빠른 순서가 된다.
이렇게 해서 순서가 결정되면 각자 한 개씩의 ‘엽전(葉錢)’을 거두어 첫 번째 사람에게 내고, 첫 번째 사람은 모아진 ‘엽전’을 한 주먹에 쥐고, 전방(前方)의 구멍을 향해 던지는데, 이때 구멍 속에 들어간 ‘엽전’은 공짜로 먹게 되지만, 그어놓은 줄 못 미쳐서 떨어지면 벌금(罰金)을 내도록 한다.
엽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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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구멍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엽전(葉錢)’을 손바닥만 한 돌로 상대방이 지정(指定)하여 주는 것을 맞추어 먹는 방식인데, 이때는 될 수 있는 한 맞추기 어려운 것을 상대가 지적하게 되므로 매우 어려운 놀이가 된다.
이때 만약 지적해 준 ‘엽전(葉錢)’을 맞추지 못하고 다른 ‘엽전’을 마치게 되면 규칙에 따라 벌금(罰金)을 내고, 그 벌금은 그 ‘엽전’의 주인(수비자)이 갖게 된다.
엽 전(관영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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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서부동에서 발굴)
다음의 방법은 ‘엽전(葉錢)’을 벽에 부딪쳐 상대방의 ‘엽전’과 ‘일정한 거리’에 이르면 상대방의 ‘엽전’을 따먹는 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정한 거리’는 대개 한 뼘의 거리로 재기도 하고, 지푸라기나 나무를 잘라 기준을 삼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동그라미 속의 ‘엽전(葉錢)’을 선 밖에서 다른 ‘엽전’으로 던져 맞추면 따먹는 방법이 있다. 역시 동그라미 속에 ‘엽전’ 한 개씩을 댄 다음 순서(順序)대로 한 사람씩 다른 ‘엽전’을 던져 맞추어 따먹는 방법이다.
엽전 치기
동그라미 속의 ‘엽전(葉錢)’이 모두 없어지면 새로 ‘엽전’을 한 개씩 댄 다음,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앞의 방법과 비슷하다.
또 다른 방법은 동그라미 속에 ‘엽전(葉錢)’을 한꺼번에 던져서 들어가는 것만 따먹는 방식도 있다. 동그라미와 선을 긋는 것은 앞서 말한 방식으로 똑같이 하되, 한 사람씩 차례로 선에서 모은 ‘엽전’ 전부를 손에 쥐고 동그라미를 향해 던진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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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다섯 사람이 할 경우 한 사람당 한 개씩 대놓은 ‘엽전(葉錢)’ 다섯 개 모두를 첫 번째 사람이 한꺼번에 던져 한 개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동그라미 밖으로 튀어 나올 경우 한 개만 따먹고, 다음 사람은 나머지 네 개를 던지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까지 모두 던져도 ‘엽전(葉錢)’이 남아 있으면, 다시 1번부터 던지고, ‘엽전’이 모두 없어지면 새로 한 개씩의 엽전을 대놓고 다시 시작한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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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葉錢)’을 한 개씩 차례로 던지는 방법도 있는데, 혼자서 여러 사람이 댄 ‘엽전’ 모두를 한 개씩 차례로 던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간 ‘엽전’을 가지는 방식이다.
이 경우 먼저 던진 ‘엽전’이 나중에 던진 ‘엽전’에 맞아 동그라미 밖으로 튀어 나가면 그것은 따먹지 못하게 된다.
이 놀이에서 한 사람당 한 개씩 차례로 던지는 방법도 있고,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고 선만 2~5m 간격으로 두 개를 그려놓고, 한사람에게 한 개씩 모은 ‘엽전(葉錢)’을 이쪽 선에서 저쪽 선 밖으로 ‘엽전’을 한꺼번에 던져서 ‘엽전’의 앞면이 나오면 따먹는 방법도 있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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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쪽 선에서 저쪽 선으로 한 사람씩 차례로 한 개씩 ‘엽전(葉錢)’을 던져 선을 넘는 ‘엽전’ 중 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따먹는 방법도 있는데, 이때 자기 ‘엽전’이 선을 넘지 못하면 실격(失格)이 된다.
이외에 실내에서 하는 ‘엽전치기’도 있는데, 두 사람이 ‘엽전(葉錢)’ 한 개씩을 대고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엽전’ 옆에 자기 ‘엽전’을 놓고 입으로 ‘훅’하고 힘껏 불어서 상대방(相對方)의 ‘엽전’ 위에 자기 ‘엽전’이 올라가면 상대방 ‘엽전’을 따먹고 못 올라가면 진 사람이 공격한다.
엽전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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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치기’에서 ‘엽전’을 따먹으면 진 사람은 새로 ‘엽전’을 대어야 하는데, 이 때문에 ‘엽전치기’는 놀이 이지만 도박성(賭博性)이 있기 때문에 일부 아이들 사이에서만 행하여졌고, 대다수(大多數)의 아이들은 구경으로 만족하거나 간혹 장난으로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도박성이 점점 심해져 돈 따먹기 자체를 목적으로 ‘홀짝’이라는 방법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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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짝’은 두 손바닥을 오목하게 하여 맞잡은 다음 그 속에 여러 개의 ‘엽전(葉錢)’을 넣고 흔들면서 상대방(相對方)에게 “홀? 짝? 홀? 짝?”하고 묻는다.
상대방이 ‘홀’ 또는 ‘짝’하고 말하면 손바닥을 열어 보이는데, 상대방이 ‘홀’이라고 하였을 때 ‘엽전(葉錢)’의 수가 홀수이면 상대방(相對方)이 따먹는 것이고, 짝수이면 상대방이 약속한 만큼의 ‘엽전’을 내 놓는 것이다. ‘짝’이라고 대답하면 그 반대로 주고받는다.
홀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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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經驗)이 있는 회원님들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엽전치기’ 놀이는 흔해빠진 것이 ‘엽전’이었던 때도 돈을 따먹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어린이들에게 사행심(射倖心)을 길러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엽전치기’ 대신 등장한 것이 ‘병뚜껑 엽전치기’였다.
‘병뚜껑 엽전’을 만들기 위해 준비할 재료(材料)는 병뚜껑 여러 개와 망치 또는 돌멩이만 있으면 된다. 먼저 병뚜껑 가장자리를 빙 둘러 망치나 돌멩이로 두들겨 편 다음 뒤집어서 다시 망치질을 하여 넓게 편다. 놀이방식은 앞에서 소개한 ‘엽전치기’와 동일하다.
병 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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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엽전치기’의 도구(道具)였던 ‘엽전’의 개요와 내력을 알아본다. 여기에서의 ‘엽전’은 지금의 ‘동전(銅錢)’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와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에 통용하던 조선통보나, 상평통보(常平通寶) 등 놋쇠로 만든 옛날의 주화(鑄貨)를 말한다.
엽전(葉錢)은 대체로 둥글고 납작하며, 가운데 네모진 구멍이 있다. 최초의 ‘엽전(葉錢)’은 중국 진나라 때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는 996년 고려(高麗) 성종 때 최초로 건원중보(乾元重寶)를 주조한 이후 상평통보·팔방통보·대동전 등이 만들어졌다. ‘엽전’의 둥근 겉은 하늘을 상징하고, 모난 속은 땅을 상징한다.
건원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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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의 ‘엽’은 한자로 ‘입사귀 엽(葉)’자와 ‘전’은 ‘돈 전(錢)자를 쓴다. 그리고 당시의 주화(鑄貨)를 ‘엽전’이라고 한 것은 예전에 화폐(貨幣)를 만들 때는 먼저 거푸집을 만들고, 쇠를 녹여서 거푸집에 붓고 식힌 후 그 거푸집을 탈형(脫形)하여 다듬어서 제조했었다.
그런데 이때 거푸집을 탈형(脫形)하면, 주화들의 모양이 흡사 나뭇잎(아카시아)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빗대어 그들 주화를 ‘엽전(葉錢)’이라고 불렀다.
엽전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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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을 주조 시 구리용액을 틀에 부은 다음 고형화 된 엽전을 쏟아내면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같이 연결되어 나온다. 그래서 '엽전'이라고 한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엽전’이란 이름은 놋쇠와 구리로 만든 주화(鑄貨)가 고형틀에서 떼어낼 때 나뭇잎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엽전(葉錢)’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엽전(葉錢)’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조선시대 때 주조된 상평통보(常平通寶)였다. 상평통보의 이름 뜻은 「떳떳이 평등하게 널리 통용되는 보배」라는 뜻이다.
상평통보
특히 ‘상평(常平)’이란 말은 ‘상시평준(常時平準)’ 즉, 항상 평균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의 상평통보는 평등(平等)하게 통용되지도 못했고, 평균(平均)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뒤에서 지적하겠지만 조선조 후기 세도정치(勢道政治)와 경복궁(景福宮) 재건에 따른 통화증발로 물가(物價)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아 ‘상평(常平)’은커녕 '똥값'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동국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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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건원중보(乾元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동국중보(東國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 등의 엽전이 있었다. 그리고 고려조에서는 ‘엽전’은 아니지만 은병(銀甁) 또는 활구(闊口)라는 고액 화폐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조선통보(朝鮮通寶), 십전통보(十錢通寶), 상평통보(常平通寶) 등의 엽전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일전(當一錢), 당이전(當二錢), 당오전(當五錢), 당백전(當百錢) 등과 같은 것도 상평통보의 일종이다.
조선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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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화(古典鑄貨) 중 조선시대만 놓고 보면, 이 시대에는 조선통보․시주화․전폐․십전통보․상평통보가 시대 순으로 발행되었다.
이중 상평통보(常平通寶)는 무배자전․단자전․당이전(하부二)․당이전(하부天)․중형전․당일전․당오전․당백전으로 나누고 있는데, 발행시기는 효종 원년인 1650년도부터였다.
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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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전(當一錢)은 1678년부터 ‘당이전’의 크기를 ‘당일전’의 크기로 줄여서 사용하였고, 두 가지다 한 잎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상평통보(常平通寶)의 80%는 ‘당일전’이었다. 그리고 옛적 어린이들의 ‘엽전치기’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엽전’도 거의가 ‘당일전’이었다.
당시의 주화(鑄貨) 종류를 요즘 주화처럼(연도별/재질 등으로) 세분화 한다면 1,500여종에 이르는 방대한 종류에 이른다. ‘엽전’ 중에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조선시대의 상평통보(常平通寶)라 할 수 있다.
당일전
‘엽전’의 종류는 조선시대의 ‘엽전’ 외에 고려(高麗)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와 사용하였던 건원중보(乾元重寶)와 고려의 목종 때부터 주조한 동국중보(東國重寶) 외 7종까지, 그리고 중국에서 유입된 것까지 포함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종류가 있다.
이상의 내용을 일복요연(一目瞭然)하게 도표화하면 아래 표와 같다. 여기에서 다시 부탁을 드린다. 한가하신 회원이 아니면 아래 표는 제발 그냥 뛰어넘으시기 바란다. 분량(分量)이 너무 많아 싫증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엽전 명 |
개요 및 내력 |
건원통보 |
621년 당(唐)나라에서 주조·발행된 개원통보(開元通寶)와 758년에 주조된 건원중보(乾元重寶)가 고려시대에 다량으로 유입되어 996년(성종 15) 이를 모방한 ‘건원통보’를 주조한 것이 한국 엽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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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
중보 |
성종15년(996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乾元重寶(건원중보) 뒷면 東國(동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로 알려져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 2년 (759년)부터 주조된 엽전인데 중국의 건원중보와 구별이 어려워 상, 하부에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동국중보를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주화가 되었다.
이 중에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方孔圓形)의 형태를 갖추었을 뿐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이는 당시 민간에서 만든 일종의 부장품(副葬品)으로 추측되며, 주조전(鑄造錢)인 ‘건원중보’는 관주전(官鑄錢)으로 여겨진다.
뒷면에 ‘東國’자를 넣은 것은 중국 엽전과의 구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이 ‘東國’자는 앞면의 ‘乾元’자 대신으로 앞면에 새겨져 ‘동국중보(東國重寶)’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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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통보 |
한편 목종(穆宗) 연간에는 중국의 ‘개원통보’를 모방한 고려주 ‘개원통보’가 만들어졌으며 이로부터 숙종(肅宗)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 ·삼한중보(三韓中寶) ·삼한통보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 ·해동통보 등 전명(錢名) 별로만 약 8종이 주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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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병 |
1101년 고려 숙종은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 만든 은병을 발행하였다. 은병 1개의 가치는 포목 100필에 해당하는 고액으로 주로 국가간의 교역에 사용되었다.
그 후 은의 조달이 힘들어 지고, 동을 혼합한 위조가 성행하자 1331년 은병의 크기를 크게 축소한 소은병을 발행하였으나 이 역시 위조가 나돌아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1408년 유통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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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보 |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초(國初)에는 포전(布錢)과 저화(楮貨)가 백성들 간에 통용되고 있었으나 1423년(세종 5) 명(明)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에 준하여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였다.
이것을 ‘해서(楷書) 조선통보’라 하며 1625년(인조 3)에 주조한 것을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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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화 |
고려 말기·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발행하였지만 본격적인 유통은 안되었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사섬서를 설치하고 이듬해(1402) 저화 2,000장을 발행하였다.
발행 초기에는 한 장이 쌀 두 말의 값어치를 가졌으나 그 뒤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겨우 쌀 한 되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중종 7년(1512)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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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태환권 |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로 1893년(고종 30년)에 발행된 호조 태환권은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도를 정착하기 위해, 발행한 지폐로 50냥, 20냥, 10냥, 5냥짜리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못하다가 결국엔 단 한 장도 사용되지 못 하고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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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폐 |
1446년(세조 10)에는 전폐(箭幣)라고 하는 살촉 모양의 유엽전(柳葉錢)이라는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길이 약 5.4 cm, 둘레 5.1 cm인 끝 쪽에는 ‘팔방통보(八方通寶)’라는 4자가 새겨져 있었고, 화살촉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만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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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전통보 |
1651년(효종 2)에는 ‘십전통보(十錢通寶)’가 주조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엽전 50문(文)씩을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으며, 이것을 지니고 다니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주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형엽전(大形葉錢)이다.
그러나 이들 조선 전기의 ‘엽전’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통용되던 ‘포전’과 ‘저화’만을 백성들이 중히 여기던 점과, ‘엽전’을 만드는 원료인 구리의 부족으로 ‘엽전’을 다량으로 유통시키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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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숙종·영조 연간에 발행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우리나라 화폐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통된 ‘엽전’으로 그 종류를 세분하면 약 300종에 이른다.
이와 같이 종류가 많아진 이유는 당시 ‘엽전’의 주조가 국가에 의하여 한 곳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고,
각 지방별로 또는 관아(官衙)별로 주조소가 있어 이들 주조소에서 발행하는 ‘엽전’의 질이 저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엽전’ 뒷면에 주조소의 약호를 새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상평통보를 크게 분류하면 ‘상평통보 무배자전(無背字錢)’ ‘상평통보 단자전(單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2자전(當二錢下部二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천자문순전(當二錢下部千字文順錢)’
‘상평통보 중형전(中型錢)’ ‘상평통보 당1전(當一錢)’ ‘상평통보 당5전’ ‘상평통보 당백전(當百錢)’ 등으로 구분된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 1전(大東一錢)’·2전·3전 등이 주조되다가 마침내 신주화(新鑄貨)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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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
은전 |
대동전은 은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로서 상평통보와 같은 가운데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1882년(고종19년) 7월에 발행되어 3가지 액면으로 대동1전, 대동2전, 대동3전이 있으며, 뒷면에는 주전소인 戶曹에서 제조되었다하여 뒷면 가운데 원안에 戶字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앞면의 글자는 對讀형식을 하고 있으며 압인이 아닌 주물형식으로 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평통보를 제조하는 기술과 비교하여 진일보한 기술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뒷면 중앙에 칠보를 덮어서 새로운 화폐형식을 받아 들였다는데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칠보색상은 흑색, 청색, 녹색을 포함하여 5가지 색을 띠고 있다.
대동은전은 발행당시 주변국 일본의 일원은화, 멕시코의 무역화, 중국의 마제은 등 국가간 무역거래의 원활을 위해 은본위 화폐가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조선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대동은전을 발행하였다.
대동전은 발행되자마자 은화의 본질적인 가치가 높고 은과 칠보의 아름다움 그 자체 때문에 부유층의 손에 들어가 사장되어 유통이 활발하지 못하였으며, 대동전의 소재인 중국의 마제은의 가격상승으로 결국 발행된지 9개월만인 1883년(고종20년) 6월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비운을 맞게 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집선호도가 큰 화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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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오전
시주화
(試鑄貨) |
개항을 전후한 1883년경 생산된 상평통보 당오전은 당시의 어려웠던 국내사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 채 태어났다.
외국과의 교섭 및 개화를 위한 관리들의 일본파견, 신식부대 설치 및 운영비 등을 지출하는 것 외에 구식군대의 군졸들은 양곡과 급료를 1년여 동안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정부는 김옥균이 당오전 주조를 절대 반대함을 무릅쓰고 뮐렌도르프에게 당오전 지시를 명하여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행된 당오전은 주물전과 압인전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국의 주전소에서 주조된 상평통보는 대부분이 주물전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압인형태의 다양한 종류의 당오전이 있었는데 소전(素錢)가운데 원형이나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것과 구멍이 뚫리지 않고 원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서 구멍이 뚫리지 않고 윤곽만 가지고 있는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평통보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뮐렌도르프에 의해 독일에서 압인기가 수입된 1884년 을유시주화가 제조되기 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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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시주화
(試鑄貨) |
경성전환국이 설립될 당시의 화폐주조기술은 주물로 상평통보를 제조하는데서 크게 발전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였다.
초보적인 기술에 의존하여 제조하던 화폐 기술은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주전설계서”라는 보고서를 고종에게 제출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는다.
보고서는 제출 되었으나 당시 미국 공사나 중국의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개혁자로 알려진 윤치호도 이를 강력 반대하였으나 고종은 주전설계서에 의한 대로 주전기계를 수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고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883년 경성전환국이 설립되자마자 근대적 화폐제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 미흡으로 주화의 표면이 확연하지 못해서 조각담당, 각인담당 및 전환국관리자로서 총3명의 일본인이 초빙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4년 (고종21년)에 최초로 시주화 2종류가 선보였는데 을유년에 제조되었다하여 을유시주화라 불린다.
한 종류는 1냥 은화로 또 다른 한 종류는 5문 동화로 제조되었다. 근대식 주화를 시험 제조한 이후 2년 뒤인 1886년에 15 종류의 다양한 시주화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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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장
도안
시주화
(試鑄貨) |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883년에 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전환국을 설치한 계기는 첫째, 개항과 더불어 무역을 위해 주변외국에서 사용하는 은본위제도의 화폐유통이 되고 있어 구 화폐체제인 상평통보보다 신식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둘째, 화폐를 제조하면서 수익을 창출하여 정부의 세수(稅收)확대를 시도하였다.셋째, 경성전환국은 1884년(고종21년) 3월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전환국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근대식 조폐기기와 더불어 소전(素錢)과 각인(刻印)도 독일에서 수입되어 근대식 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6년 (고종23년)에 주석에 금과 은을 각각 도금한 금화 5종, 은화 5종 및 청동화 5종 총 15종류의 시주화가 탄생되게 되었다.
금도금화는 20환, 10환, 5환, 2환, 1환이 있으며, 은도금화는 1환, 5냥, 2냥, 1냥, 반냥이 있고 청동화는 20문, 10문, 5문, 2문, 1문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금보유량이 적고 제조비용 부족 등의 이유로 1888년(고종25년)주조를 중단하였다. 이후 이 기기는 인천전환국에서 계속 사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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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근대식
태극장
도안
통용
화폐 |
1886년 최초의 근대식 시주화가 제조된 이후 2년뒤 정식법정화폐로서 모습을 갖춘 1냥, 10문, 5문의 3종류 주화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통용화폐는 제조년도가 1886년(개국495년)이라는 연호로 도안되어 있으며 도안은 전면 중앙상단에 태극무늬장 휘장을 하였으며, 좌우에는 오얏나무 가지 2개를 서로 교차시키고 뒷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도안되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부각시켰다.
당시 발행량은 1환주화가 1300여매 그리고 10문 및 5문도 많은 량을 주조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어 결국 대중 유통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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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본위
제도
신식
화폐 |
1891년 (고종28년) 전환국의 안경수의 건의를 받아들인 고종이 신식화폐조례에 대한 제정을 만들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화폐의 분량이나 성질이 정해진 것이 없어 이를 정한다.② 화폐의 통용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③ 화폐의 본위가 확립되지 않아 이를 정한다.
신식화폐장정에 따라 1892년 화폐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최저 1푼을 황동, 5푼을 적동, 2전5푼을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1냥 이하부터가 보조화폐로 1냥과 5냥은 본위화폐로 명문화하고 발행하였다.
1냥의 경우 국내에서 유통되도록 정한 반면 5냥은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1원 은화와 동일한 가치가 있도록 정한데서 화폐의 주조는 물론 화폐가치 역시 일본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은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청나라와 국내 보수파가 합세한 미국,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서 유통은 되었지만 신식화폐조례는 빛을 보지 못한 채 공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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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
제도
신식
화폐 |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 5월 22일 광무5년에 화폐조례가 제정되어 세계적으로 금본위 화폐제도 정책에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891년 은본위 화폐정책을 받아 들인 후 10년만의 변화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본위 화폐제도에서 금본위 화폐제도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역할은 탁지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이프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금화는 20원, 10원, 5원의 3종류이며, 은화는 반원, 20전, 10전이 있고, 5전 백동전과 청동화에는 1전 및 반전이 있다.
당시의 조례에는 20환, 10환, 5환의 금화 3종류를 본위화폐로 정했으며, 보조화폐로서 반원 은화와 20전 은화, 5전 백동화 및 1전 적동화로 정했다. 하지만 조례에 의한 화폐는 러일전쟁 영향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협정서을 한국과 체결하고 화폐정책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카타는 두돈오푼 백동화의 남발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화폐정책을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로 전환국을 폐쇄시키고 1905년 1월 18일에는 1901년에 제정된 화폐조례를 재정비한 “화폐조례실시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화폐종류를 보완 및 추가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10전 은화와 반전 적동화가 새로 제조되었으며 기존의 주화는 크기가 작아 진 것이 특징이다. 1907년 칙령 제4호로 은과 구리 등으로 제조하는 보조화폐 몇 종류가 크기 및 함유량 등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소재가치가 명목가치 이상으로 상승하여 주변국으로 유출될 경우 용해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이를 방지하고 화폐유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1905년과 1907년에 발행된 주화는 메카타가 한국의 화폐제조권을 사실상 박탈하다시피 한 결과로 전량 일본의 오사카 조폐창에서 제조되어 한국에 유통되었다.
5전 백동화 및 1전 적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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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도안
화폐 |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종전보다 더 강경하게 조선의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강압에 의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일본의 입장이 강해지면서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프랑스와 독일까지도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일본의 오만불손한 행동은 극에 달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전국 각 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는 등 전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1896년 러시아와 친밀한 인사들이 러시아와 사전에 약속하고 아관파천을 실행에 옮겼다.
즉, 혼란한 사회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왕을 보호한다고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을 이동시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애서 입김을 강화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던 인천전환국을 폐쇄하고 용산에 전환국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화폐주도권을 가진 일본의 역할을 무력화 시킨 후 1901년에 반환은화, 백동으로 만들어진 5전 및 동화 1전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를 소재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용산전환국을 폐쇄시킴과 동시에 독수리가 도안된 화폐를 대부분 회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용해시켰다.
힘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일본 국왕의 상징인 용과 러시아의 휘장인 독수리 등으로 바뀌는 등 약소국가의 단면을 보여준 화폐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환, 20환, 10환, 5환 4종류의 화폐가 용산 및 인천 전환국에서 시주화가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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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서양(西洋)에서 통용되던 화폐도 거의가 동전이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던 동전(銅錢)은 무려 종이나 되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전 중 서기 270년에 만들어진 로마제국 당시의 동전은 무려 20억원을 호가(呼價)하고 있다. 한 개에 20억원이나 하는 동전을 소개한다.
20억원 짜리 동전
(대략 AD 270년경에 잠깐 동안 권력을 잡았던 로마제국의 황제
도미아누스(Domitianus)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이 동전은 지구
상에 단 두 개 밖에 남아 있지 않는데, 이 동전 두 개는 가격으로
한 개는 15억원, 또 다른 한 개는 무려 20억원씩 경매에 나왔다)
옛적 ‘엽전치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돈으로 하는 이 놀이를 목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서민가정(庶民家庭)의 아이들이 주로 즐겼다는 것이다.
당시의 경우 서민가정에서는 먹고 죽으려 해도 구할 수 없었던 돈(엽전)이 얼마나 많아서 그들 가정의 아이들이 그 귀한 돈으로 ‘엽전치기’까지 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십전통보
이유는 간단했다. 잘 아시는 대로 천하의 독재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권위를 신장시키기 위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놈들이 불태워버린 경복궁(景福宮)을 재축하면서 막대한 공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이라는 제도를 창설하여 신하들과 부자들로부터 기부금(寄附金)을 강요했었다.
그런데 이로서도 여의치 않자 상평통보(常平通寶)인 ‘당백전’을 무더기로 발행하여 기존의 화폐(당일전, 당이전, 당오전)를 ‘똥값’으로 만들어 버렸다.
경복궁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EE84E50B35A6108)
여기에서 회원여러분에게 양해(諒解)를 구한다. 너무나 형편없는 가치로 추락한 당시의 ‘엽전’가치를 적나라(赤裸裸)하게 표현하기 위해 표준어(標準語)인 ‘똥값’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점,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다.
어쨌든 한마디로 얘기하면, 무계획한 고액통화의 증발(增發)로 엄청난 통화팽창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의 화폐인 기존 ‘엽전’의 가치는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으며, 이 때문에 장정 한사람의 하루 품삯이 당시의 상평통보(常平通寶) 한 짐이 될 정도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되었다.
당이전
![](https://t1.daumcdn.net/cfile/cafe/0123FE4D50B35AED16)
사정이 이렇게 되다보니 서민들의 경우 부잣집에서 품삯으로 받아 온 ‘엽전’이 항아리에 그득할 정도로 흔해 빠졌다. 여기에다 시장의 상인들은 농민들의 물건을 살 때는 물건 값을 ‘당전(當錢)’으로 지불하고, 자신들의 물건을 팔 때는 ‘당전(當錢)’을 받지 않고, 서민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은전(銀錢)’으로만 받았다.
물론 부잣집에서도 서민 장정(壯丁)들의 품삯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당전(當錢)’으로만 지불했다. 때문에 당시의 서민가정에서는 ‘당전(當錢)’을 항아리 그득하게 두고도 굶어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다. ‘당전’이 ‘똥값’이 되어 아무것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오전
당시의 ‘당전(當錢)’이 어느 정도로 ‘똥값’이었는지 그 증거가 되는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서기 1904년 6월 미국(美國) 콜리어스(Collier’s) 신문사의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釜山)에 도착했었다.
‘던’기자는 한반도(韓半島) 남쪽에서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日本軍)을 종군하기 위해 취재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갖고 온 달러를 조선화폐(朝鮮貨幣)로 환전했다.
당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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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당백전)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던’은 일본인 통역(通譯)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미국(美國)의 경우 이 정도의 경비(經費)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 상당하는 달러를 환전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던’은 당시의 우리나라 화폐(貨幣)의 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세(下落勢)였는지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아침에 나간 ‘구리타’가 저녁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葉錢)’ 더미를 보고 ‘딘’은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150달러를 바꾸어 온 ‘엽전(葉錢)’이 거의 한 트럭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당백전
그가 미국에 송고(送稿)한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美貨)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額數)였으며, 1달러를 환전(換錢)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콜리어스, 1904.6.4).
당시의 미화(美貨) 150달러면 장정(壯丁) 150명이 지고 와야 할 무게와 부피였고, 그래서 그 ‘엽전’이 한 트럭이나 되었다는 얘기다.
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한 ‘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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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독립신문에서는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白銅錢)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銀錢)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大韓)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當五錢)’은 거두어들이고, 동전(銅錢)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당시 정부의 통화 팽창정책(膨脹政策)을 질타하는 보도내용이었다.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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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정책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조정 중신들이 한 독재자의 무계획한 통화증발을 막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독일의 경우 2차대전을 일으켜 수천만명을 살상당하게 한 히틀러정부가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무제한으로 발행한 마르크화가 그야말로 똥값이 되어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던 사례를 우리가 먼저 겪어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장난감으로 갖고 노는 '마르크'화 다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마르크화를 발행하여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
했고, 종이조각이나 다름없이 추락해버린 마르크화 지폐뭉치를
아이들이 벽돌쌓기 놀이를 하고 있다. '똥값'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고향 외동읍에서는 ‘땡전’이라는 ‘돈’이 있다. 가진 ‘돈’이 없거나, ‘돈’이 없다는 것을 강조(强調)하기 위하여 “땡전 한 푼 없다”고 할 때의 ‘돈’이 ‘땡전’이다. 그러면 우리 고향에서 흔히 쓰는 말 ‘땡전’은 무슨 돈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이를 표준어로 직역(直譯)하면 ‘푼전’이라는 말이 되는데, “내 주미에너 땡전 한 푼 엄따”, “그거너 땡전어치도 앤 된다”는 용례들이 있다. “내 주머니에는 푼전 한 푼도 없다”, “그것은 푼전 값어치도 안 된다”라는 말이다.
땡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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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직역(直譯)의 의미보다는 ‘땡전’의 어원은 조선조(朝鮮朝) 후기에 무제한으로 만들어 낸 ‘당전(當錢 ;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등)’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유래와 내력(來歷)을 알아본다. 먼저 그 당시 우리나라 화폐(貨幣)의 최소단위는 ‘푼(分)’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푼’은 우리나라에 근대 화폐, 즉 신식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 썼던 조선통보(朝鮮通寶)·상평통보(常平通寶) 등의 단위를 일컫는 ‘엽전 한 닢’을 의미하는 말이다.
10전짜리 엽전
![](https://t1.daumcdn.net/cfile/cafe/011C684850B3651411)
10푼[엽전 한 닢의 무게가 중량단위인 1문(文, 약 1돈)과 비슷해 ‘푼’과 ‘문’이 혼용되었다]은 1전(錢)이며, 10전(錢)은 1량이다.
그리고 ‘푼(分)’은 작은 돈의 단위(單位)나, 하찮은 것을 비유(比喩)할 때 자주 쓰이는데, 거지들이 “한 푼 줍쇼”라고 하는 말도 “적더라도 조금만 도와주십시오”라는 뜻이다.
푼 전
그러면 ‘땡전’이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땡전’은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을 때 막대한 건축경비 조달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제조·통용시킨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당백전’은 실질가치[소재(素材)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한 반면에 그 명목가치(名目價値)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하여 발행 초기에 쌀값을 6배로 폭등(暴騰)케 하는 등 국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疲弊)하게 만들었다.
해동통보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F454750B4221109)
그리고 이렇게 되다보니 기존(旣存)의 ‘당전(當錢 ; 당일전․당이전․당오전)’은 ‘쇠값’도 못하는 ‘똥값’이 되고 말았다. 최근 한국은행에서 5만원권을 발행하면서부터 천원짜리 돈이 돈 취급을 받지 못하는 예와 같은 현상이다.
서민가정(庶民家庭)의 경우 한푼 두푼 모아 항아리에 숨겨둔 ‘당전’이 ‘똥값’이 되고 보니 울화(鬱火)가 치밀어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엽전 돈괘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A7C4E50B3660615)
부잣집에서도 비슷한 처지였다. 세도(勢道)와 착취로 서민들로부터 엄청난 ‘소액당전(少額當錢)’을 긁어모으기는 했는데, 대원군의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모두 쇠붙이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분노(忿怒)하면 그 분한 마음이 말의 발음(發音)을 격하게 만드는데, ‘똥값’이 되어버린 ‘당전’도 ‘땅전’이라는 된소리로 발음하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자 이 말이 ‘땡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해동중보(1103년)
![](https://t1.daumcdn.net/cfile/cafe/183D1E4E50B4225A21)
결론적(結論的)으로 “땡전 한 푼 없다”라는 말은 대원군(大院君) 당시 그토록 가치가 없었던 ‘소액당전(少額當錢)’ 한 푼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당전’은 그 시절 화폐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당일전(當一錢), 당이전(當二錢), 당오전(當五錢)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어쨌든 이처럼 ‘엽전’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보니 당시의 ‘엽전(葉錢)’들은 아이들의 ‘엽전치기’ 도구로 전락(轉落)될 수밖에 없었다.
부잣집 머슴들도 부잣집 광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엽전(葉錢)’을 자기 집 아이들에게 여물바가지로 한 바가지씩 퍼다 주기도 했었다. ‘엽전치기’나 하라는 뜻에서였다.
하동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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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기자 얘기로 돌아간다. 대한제국(大韓帝國) 당시 러일전쟁을 취재(取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던’기자는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무려 150달러나 되는 돈을 조선엽전(朝鮮葉錢)으로 환전했고, 그 엄청난 ‘엽전’더미를 보고 놀라 자빠진 것이다.
그리고 갈 길이 바빴던 ‘던’은 이 돈더미를 튼튼하고 정직(正直)해 보이는 장정 몇 사람을 고용(雇用)하여 지키도록 한 뒤, 일본군대(日本軍隊)를 따라 북으로 떠났는데 2주일 뒤 돌아와 보니 돈은 그대로 있었지만, 품삯을 지불(支佛)하자 돈더미는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엽전’의 가치가 추락(墜落)해버렸기 때문이다.
엽전 더미
![](https://t1.daumcdn.net/cfile/cafe/010FEE4850B4244835)
위의 사진에서 보는 산더미 같은 ‘엽전’이 장정(壯丁) 몇 사람의 2주간 품삯에 불과할 정도로 당시의 ‘엽전’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부잣집 아이들은 자기 집 광에 비축해 둔 ‘엽전(葉錢)’을 주머니에 가득 담고 나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서민가정 아이들은 이래저래 모아 둔 ‘엽전’으로 틈만 있으면, ‘엽전치기’를 했던 것이다.
지금껏 그 ‘엽전’들을 그대로 보관했더라면, 그 자체로 엄청난 고액(高額)의 골동품(骨董品) 가치가 있었겠지만, 그 시절 필자들은 그것들을 돈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후일에 무슨 골동품이 되리라는 것은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엽전 열닷냥
![](https://t1.daumcdn.net/cfile/cafe/1403F55050B3668E2B)
배경음악은 마침 ‘엽전’과 관련한 대중가요(大衆歌謠)가 있어 이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낭군님의 알성급제(謁聖及第)를 기원하며 청노새 안장 위에 실어주던 ‘엽전’ 열 닷 냥의 여심을 그린 한복남의 ‘엽전 열닷냥’을 음미해 본다.
엽전 열닷냥
천 봉 작사
한복남 작곡
한복남 노래
대장군 잘 있거라 다시보마 고향산천
과거보려 한양 찾아 떠나가는 나그네에
내 낭군 알성급제 천번만번 빌고 빌며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주던
아~ 엽전 열 닷냥
어젯밤 잠자리에 청룡꿈을 꾸었더라.
청노새야 흥겨워라 풍악 따라 소리쳐라
금방에 이름 걸고 금의환향 그날에는
무엇을 낭자에게 사서 가리
아~ 엽전 열 닷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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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쏘시개로 쓰는 2차대전 당시 독일 '마르크'화
![](https://t1.daumcdn.net/cfile/cafe/1149044E50B47CC9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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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중한 자료와 함께 엽전놀이 실감나게 잘 보고 느끼었습니다
동전치기로 찌그러진 동전 공중 전화박스에 들어가지는 않아
애를 먹든 생각이 나네요 가는데 마다 요즈음은 무슨 행운이양
던지는 문화가 있더군요 청계천에서는 매년 그걸로
어려운 사람 도와 준다니 좋은 일이기도 하구요
삼막사 갔을적에 남근 여근 암석이 있는데 유독 남근 쪽에만
많이 올려져 있는 걸 보면 아들 선호 사상이 아직도 절대적인 것 같기도 하네요
귀한 엽전들 지금은 가치가 많이 나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 내 건안 하심을 빕니다.
네...처음 듣는 얘기입니더....땡전이니...엽전가치가 그정도 똥값이었다니...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군요....요사이 대선 경쟁하면서....공짜니...반값이니....하는 것들이 결국은 이렇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그런데...그런 엽전 찍을려면 쇳가루가 얼마나 있어야 했을낀데..그게 다 어디서 나왔는지...궁금하기도 하네요...엿장사도 없었는지...ㅎㅎ
엽전 열닷냥 노래은 ....옛날 제 18번입니더..ㅎㅎㅎ 정말 생각해 볼점이 많은 감동적인 말씀들이 즐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