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蒼巖 李三晩)은 전북이 낳은 명필중의 명필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명성은 조선8도만이 아니라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진 명필이었다. 그는 1770년 전주 교동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면서도 하루에 1천자 씩 쓰면서 글씨공부에 힘을 다 했다. 그의 신조는 '적어도 평생에 벼루 세 개쯤은 먹으로 갈아 뚫지 않고는 무슨 글씨공부이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30세가 넘어서 결혼을 했다. 이때 이름을 삼만(三晩)이라고 했다. 만학(晩學) 만교(晩交) 만혼(晩婚)이라는 뜻이다. 한 때 정읍 내장에서 잠시 지낼 때의 일이다. 근처의 약방주인의 청으로 두루 마리에 수많은 약명(藥名) 약재(藥材) 등을 적어준 일이 있었다. 이 글씨가 대구 약령시의 중국 상인의 눈에 띄어 마침내는 중국에서까지 조선의 명필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후 1840년 창암은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에 들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 만난 일이 있다. 이때 추사는 창암의 글씨를 보고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료. 대단한 경지입니다."라고 칭찬했다.
창암은 후진들에게 언제나 겸허한 지세를 갖도록 했다. 물 흐르듯 써내려 가는 그의 글씨는 유수체(流水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낳았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을 신팔창립(神八創立)의 것이라고 그의 서법을 설명했다. 그는 1847년 2월12일 77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