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6.
국내 명소 여행기를 쓰기는 그야말로 수십 년 만이다. 번개로 계획되어 보물섬을 후닥닥 다녀온 느낌에, 기억을 남기고자 몇 자 적는다. 5월 어느 날, 김교수님과 사모님 덕으로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의 '삼국유사 유적답사회'와 어찌어찌 엮여 졌는데, 그 이튿날 진도(珍島)를 함께 다녀오게 된 것이다. 급하게 마련된 여정에 비해 그 열매가 매우 크고 알차다. 연구원 김재원 원장님, 회장님, 총무님, 그리고 여행을 기획 실행하신 모든 분들께 큰 신세를 졌으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급히 강행군을 하다보니 아내가 하도 힘들어 하여 다음에 감히 함께 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너무 좋은 분들, 참으로 유쾌한 시간이었다.
진도, 보물섬
진도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막연히 알려져 있으나 정작 가보기는 만만치 않은, 우리나라 남서쪽 끝의 섬이다. 2014년 4월 바로 이 섬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고 3백여명의 생명이 스러졌다. 어른들의 잘못, 나라의 아픔, 무엇을 더 말하랴. 그보다 더 멀리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 명량(울돌목)이 여전하고, 또 더 올라가면 삼별초가 아직 숨쉬는 듯한 공간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거나 확인한 사실이 몇 개 있는데 우선 이들로 시작 -- (이하 내용은 연구원 김재원 원장님이 준비하신 소개자료 및 위키 등에 나온 것임)
- 제주, 거제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현재 인구는 29,000명쯤으로 지속 하향세…
- 진도가 사람이 살지않는 공도(空島)였던 시절이 꽤 많았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은 등 이유로 영암으로 주민 전체를 옮겼다고 한다.
- <호남 유배인 목록>에 의하면 고려 시대 이후 제주 239명, 신안 160명에 이어 진도로 귀양 온 사람이 109명이라 한다.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인 강진에는 의외로 38명뿐?)
- 식도락 측면에서도 가성비 최고이다. 진도홍주를 못가져온 게 안타깝다.
대구에서 4시간쯤 목포-해남을 거쳐 진도대교를 건너니 보물섬이다. 남도 어딜 가나 느끼는 일이지만, 무얼 먹어도 맛의 차원이 다르다. 그저 백반집이라 하는데 지난 몇 달간의 식사 중 최고이다. 거듭 우리 총무님께 감사!!
진도항 –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텐데, “팽목항” 이라 하면 아마도 대부분 알 것이다. 그렇다. 10년전 그 젊디 젊은 청년들이 꿈을 품고 제주로 가는 길에 이 항구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에 영원히 잠들었다. 우리 일행도 혹시 (이제는 이름이 바뀐) 진도항을 가는가 했는데, 아마도 이런저런 사정상 직접 내려서 보지는 못하였다. 차라리 잘되었는지 모른다. 현장에서 바다를 보기가 정말 두려웠을 것이다. 그 저린 마음, 아픈 상처를 어찌 해야 했을까.
첫날 첫 행선지는 운림산방(雲林山房).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허련 선생이 1856년 고향으로 내려와 화실을 지었다. 운림산방 어딜 가나 조용한 명상공간, 멋진 산책길이지만 가장 유명한 곳은 화실 앞의 연못인 듯하다. 솔직히 남종화, 북종화의 차이를 잘 몰랐는데 그나마 조금 눈을 떴다. 가는 길, 버스에서 원장님이 소개 겸 질문 등을 하실 때 ‘초의선사’ 등 이름이 자연스레 청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단의 수준이 보통 아님을 알겠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 얘기는 웬만큼 들었지만, 추사께서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 - 이렇게 극찬을 한 화가가 허련이라니 놀랍다. 남종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그 이후 그의 5대손까지 예술가 집안으로 명맥이 이어져 왔다. 실로 보기드문 예술가 집안이 한반도 남쪽 끝자락 섬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실은 여행 전날 밤 유튜브를 통해 미리 공부를 좀 하면서 운림산방을 사전 관람했는데, 현장 직관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바로 옆에 위치한 첨밀산 쌍계사까지 가서 보고 배웠다.
우연히 운림산방은 우리의 첫 목적지였지만, 이 글이 우리의 여정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우선 진도를 살피고, 다음에 삼별초와 만나며, 이순신 장군 알현이 마지막이다.
삼별초, 고려의 보물군대
이번 여행 직후에 문득 사서 읽게 된 소설 <삼별초>(이동연, 2021)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역사적 고증이 정확히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픽션의 재미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게가 훨씬 더하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개경 정부가 항복한 이후에도 삼별초는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옮겨가며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한다. 남서 해안을 장악하고 한동안 유리한 전세를 유지하다가 결국 ‘몽골-고려 연합군’의 숫자에 밀려 최후를 맞이한다.
<삼별초의 나라, 조고려> 그날부터 용장사를 궁궐과 관가로 개조해 썼다. 낙성식에서 온 황제가 선포했다. “오늘 짐은 단군 조선과 고구려를 함쳐 조고려(朝高麗)란 국호로 나라가 개창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진도가 조고려의 황도니라. 단군 조선을 고구려가 잇고 고구려를 고려가 이었거늘, 개경의 옛 왕 무리는 몽골 놈들에게 빌붙어 있도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의 후예가 아니다. 조고려 만세!” (왕온, 소설 <삼별초>) |
우리 일행이 첫날 갔던 벽파진은 1984년 진도대교가 육지를 연결하기 전까지 진도의 관문 나루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 진영이 설치된 곳이었고, 그 훨씬 이전에 삼별초 병선 1천 척이 처음 정박한 곳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진다. 소설 <삼별초>에서도 언급된다.
용장성은 과거 진도의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기존에 있던 용장사를 중심으로 조성한 궁성과 성곽의 터가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실제 건물은 아니지만, 돌 축대 등 유적지 약 7천평을 볼 수 있다. 진도로 옮겨 간 삼별초 정부는 스스로 고려의 정통성을 자부하였던 바, 자신들이 옹립한 신왕 온을 황제로 칭했다. 소설에도 묘사되듯이 몽골에 항복한 개경 왕조를 강력히 비판한다. (역시 김재원 원장님의 안내서에 의하면) 1271년 당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자신들이 고려의 정당한 정권이라고 주장했으며, 몽골과의 적대관계 및 일본과의 잠재적 연대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여몽 연합군과의 결전> “으음... 적을 너무 얕잡아 봤고. 우리에게 연전연패한 적이 이렇게 공격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소. 우리 특기인 수전을 별였어야 했는데, 힌두에게 속은 거요... 우리 3천 병사 중 많이 죽고, 2천명 남짓한 수로 개미떼처럼 덤벼드는 적을 상대하기 어렵소. 전략적 후퇴가 필요하오.” (삼별초 대장 배중손) |
소설의 이 장면, 참 안타깝다. 삼별초 군의 실력과 백성들의 신망이 상당하여 한동안 몽골 및 개경정권에 대항할 만 했건만, 숫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밀리는 모습을 본다. 진도 삼별초의 초기에 전라도 연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 거제, 마산은 물론 제주도까지 세력을 확충했다. 대장 배중손이 여몽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한 곳이 바로 남도진성이다. 우리 일행도 여기 들렀지만, 남도진성의 안쪽에는 동헌, 객사 등 복원된 옛 건물 뿐이고, 삼별초의 옛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와는 무관하게 남문 밖의 해자 격인 단운교와 쌍운교라는 무지개다리가 단아하다. 마음만 아스라이...
삼별초의 또다른 장군인 김통정은 진도를 빠져나와 제주도로 옮겨 최후 항전을 계속한다.
<제주 패배 이후, 남쪽으로> 김통정 일행이 스스로 삶을 끝낼 때 달래는 서귀포를 떠나 한참 남행 중이었다. 달래는 가끔씩 서귀포를 되돌아보다가 50여척의 배가 빠른 속도로 뒤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적선이 아니었다. 서해안과 남해안에 잔류하던 삼별초 병사들이었다... “대장님은? 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기 연기 나는 곳이에요...” (달래, 소설의 끝 부분) |
드디어 삼별초 정권의 마지막 부대인 김통정 군이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 중 일부가 더 남쪽으로 즉 오늘의 오키나와까지 갔을지 모른다는 여지를 남기면서 소설이 끝맺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 달래의 마지막 말에서 김통정 대장과 부대원들이 장렬히 전사했음을 말하고 있다.
진도에서 삼별초를 느끼면서, 대하면서 드는 생각 – 왜 삼별초를 주제로 한, 제대로 된 영화나 드라마가 아직 나오지 않았을까? 전 세계에서 이젠 농담이 아닌 K-드라마, K-culture 흐름을 본다면 조만간 누군가 뭔가를 내놓아도 이상하지 않겠다.
울돌목과 벽파진, 조선의 보물 물길
앞서 얘기했듯이 벽파진은 고려시대 삼별초 군의 함선 1천척이 처음 정박한 곳이라 한다. 그 장관을 상상한다. 300여년 후 일본과의 커다란 전투가 바다에서 벌어진다.
1597년 벽파진 해전은 명량해전의 전초전 격으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량해전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도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따로 구분하고 싶을 것 같다. 김재원 원장님의 안내서에 의하면 명량해전의 주전장이 벽파전 앞바다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130척의 왜선이 벽파진으로 와서 대포 등으로 총 31척을 격침하였다니 상당히 큰 전과가 아닌가.
사진에 나온 진도교, 아래쪽이 진도이며 위는 해남이다. 전라 우수영이 다리 너머에 위치한다. 이미 영화로도 크게 히트한 대로, 명량-한산-노량은 그야말로 16세기 한일 전쟁의 성패를 결정지은 전투였다. 물론 영화 순서와는 달리 시대적으로는 한산-명량-노량이 맞다. 한산대첩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모함에 희생되어 문초 받았으며 파직된다. 그 직을 이어받은 원균과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당한 이후에야 무능한 조정이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 즈음에 기록된 가슴 절절한 어구가 많지만 여기에 2개만... 명량해전을 앞두고,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려는 걸출한 해군 제독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무릇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울돌목(명량, 鳴梁) 해전의 상세 기록을 여기에 다시 옮기는 건 적절치 못하다. 역사에서, 교과서에서, 영화에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어떤 다큐에서는 13척이 333척을 이긴 싸움으로 그리고 있는데, 역사적 고증에 일부 문제가 있어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예컨대 쇠줄을 해저에 미리 깔아서 해전에 이용했다든지 하는 그런 주장... 어쨌든 이 역사적 전투현장을 보면서, 다들 우러러보고 당시 싸움터에서 직접 느끼는 듯한 열정을 간직하는 건 좋은데 한가지 짚고 싶은 게 있다.
영화 <명량>에도 그려져 있고 이런저런 역사서에도 나와 있지만, 명량해전 당시 총 13척이 300척 왜선을 상대했다. 그런데 초반 즉 오전 8시경에 직접 싸운 건 이순신 장군의 대장함 하나 뿐 아니었던가. 다른 12척의 함선들은 겁을 먹고 멀찌감치 물러서 있었다. (다른 출처가 아니라 김원장님의 안내서를 재인용하더라도) 약 40분간의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중군장 김응함, 거제현령 안위의 배를 불러 그들을 혼내킨 후 싸움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오시(12시) 쯤 조류가 바뀌면서 급격히 조선 수군에 유리하게 되면서 12척 함선이 함께 뛰어들어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았다. 자, 이렇게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오전 8시 싸움에서 대장선 외에는 어쩌다가 다들 움츠려 들었을까. 지휘관이 혼자서 싸우는데도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왜군의 대함대에 너무 기가 죽어서...? 반면, 왜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많은 함선을 가지고도 어떻게 판옥선 1척을 이기거나 아니면 우회 전진하여 움츠려든 조선수군 12척에 덤벼들지 못했을까? 조선 대장선의 화력이나 전투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더군다나 이때만 해도 조류는 왜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했지 않은가. 물론 조선의 조선술이 당시 일본에 비해 월등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내가 잘 이해 못하는 의문을 제외한다면 울돌목 해전의 결과는 다 아는 대로이다. 선조실록을 재인용하면) 실전에 참여한 왜 수군의 전선 330척 중 30여척이 초전에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고 전사자만 10명 미만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왜군 전함들은 오후 6시경까지 모두 철수했다고 기록된다.
우리 일행은 여행 막바지에 전라우수영도 들렀다. 명량대첩의 배후기지였던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해남에 있다. ‘명량대첩비“가 이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행방불명되었다가 이를 되찾아 해방 이후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다고 한다. 1597년에 명량대첩이 있었고, 대첩비를 세운 것은 1688년 숙종 때이다. 1947년 비를 다시 찾았으나 원래 자리가 아니었던 것을 2011년에야 제자리 즉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34로 옮겼으니 참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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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린 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만 들었던 진도에 직접 발을 디디게 되었으니, 김교수님과 사모님께 거듭 감사배례!. 난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함께 하도록 해주신 영남불교문화연구원/삼국유사답사회에도 감사드립니다. 번개 계획으로 보물섬을 잠깐 찾았지만, 꼭 한번 더 길게 오고싶다. 깊고 진하게 느낀 보물이 많다. 세방낙조 또한 꿈 속의 꿈이 아니었다. 문득 나니아에 가서 사과 하나 찾아서 돌아왔다.
첫댓글 읽기가 재밋어요.^-^
선비님께서 올려주신글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머리속에 올려주신 글들이 속속 박히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
첨성선비님의 진도 기행담을 대하니 다시 진도를 걷는 느낌입니다. 그때 받은 많은 감회들이 뒤섞여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첨성선비님의 명쾌한 살핌으로 대강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조용한 명상공간, 멋진 산책길, 화실 앞 연못, --- 등이 갖춰진 雲林山房. 연못에 크게 감탄하신 첨성선비님의 정서에 공감합니다. 연못 옆 벤치에 앉아 연못, 운림산방, 뒷산을 한눈에 바라보며 일어나기 싫었습니다. 고려-몽골전과 용장성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현장-역사를 기억하는 보충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단아한 무지개다리(쌍운교) 사진과 친절한 설명은 무관심했던 저의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동학란-동학혁명, 삼별초의 난- 삼별초 혁명.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민란의 성격에 대한 역사가들의 인색한 해석이 우리를 어리둘절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울돌목(鳴梁)해전의 기적 -우리겨례의 저력으로 승화했겠지요. 첨성선비님의 꿈속의 꿈- 세방낙조를 배경으로 나란히 선 네분이 너무도 편안한 모습입니다. 또 그 꿈속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첨성선비님,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