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창은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야구관련 사업을 파고들었다. 이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돔구장을 수주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다.(사진 김수홍) |
동료들과 야구할 만한 곳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그때마다 전 이런 꿈을 꿨습니다. '잔디나 조명도 필요 없다. 무릎이 까져도 좋고 촛불을 켜고 해도 좋으니 야구장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여러분. 오늘 전 그 꿈을 이뤘습니다. 1개도 아닌 6개나 되는 야구장을 만들게 됐으니까요."
- 10월 5일 ‘강진 Baseball Park’ 조성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 체결식장에서 우수창 -
지난해 7월 중순. 태국 캠카챠 국립공원 내 코리아 베이스볼 캠프. 스포츠테레카 대표이사 우수창(61)은 한 시간째 무언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눈꺼풀은 바이올린 현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수창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커다란 대나무에 걸려있던 '코리아 베이스볼 캠프' 현수막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일생의 꿈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머나먼 태국 땅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한 야구캠프를 1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닫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우수창은 2005년 10월 태국 아스캄 오란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태국 중부 캠카챠 국립공원 내 2만 5천 평 대지를 20년 동안 임대했다. 이곳에는 이미 야구인 박기준이 만든 3개의 천연 잔디구장과 투수 연습장, 수영장, 웨이트트레이닝 시설 등이 갖춰져 있었다.
우수창은 이 캠프를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등 아시아 각국 야구팀의 전지훈련장으로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우수창이 수익 창출보다 관심을 둔 건 재활시설 구축과 야구 아카데미 설립이었다.
"국내 의료기술이 좋아졌지만 재활분야는 큰 발전이 없다. 훌륭한 트레이너와 최첨단 장비를 갖춘 재활시설을 캠프에 구축한다면 선수들이 국내에서 재활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볼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럼 야구 아카데미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한 야구선수들은 프로가 아니면 갈 데가 없다. 프로 진출에 실패한 선수들이나 유망주들을 캠프에 모아 체계적으로 훈련하게 한 뒤 국내 프로야구에 공급하고 싶었다."
우수창에게 야구캠프는 수익과 온정, 사업가와 야구인 등 상반되는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장소였다.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캠프를 연 지 2달 만에 두산 선수단 21명이 20여일 동안 마무리 훈련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두산에 이어 KIA도 이곳에서 2차례 마무리훈련을 했다. KIA 노대권 홍보팀장은 "외딴 곳에 캠프가 있어 조용히 훈련하기에는 매우 좋은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캠프를 찾아오는 프로야구팀이 없었고 캠프 운영도 파행으로 치달았다.
"태국인들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업은 상대와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하며 진행해야 하는데 중간에 통역을 낀 상태로 의사 교환을 하다 보니 실행도 느려지고 오해도 쌓여갔다."
우수창은 고민 끝에 캠프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야구 불모지 태국에서 야구장 사업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계속 캠프를 운영한다는 건 자기 살뿐만 아니라 남의 살도 깎아 먹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저 이번에도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여기기로 했다."
캠프를 떠나던 날. 우수창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야구에 미쳐 그동안 비싼 수업료를 여러 차례 냈지만 이번만큼 아쉬운 적도 없었다. 그에게 야구장은 단순한 야구장이 아니라 꿈이었기 때문이다.
야구와의 악연 또는 인연의 시작
우수창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공부 외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그러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경서중에 다니던 1960년 처음으로 야구에 호기심을 느꼈다. 순전히 박현식(작고)의 영향이었다.
"학교 근처에 농협 야구팀의 숙소가 있었다. 농협 선수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곤 했는데 유독 박현식 선수가 눈에 띄었다. 그때 박현식은 한국야구의 수퍼스타였다." 우수창의 야구에 대한 호기심은 3학년 때 전학을 가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우수창이 야구와 재회한 건 10년이 지난 뒤였다. "1966년 고교를 졸업하고 한국통신(현 KT)에 입사했다. 그때 동대문전화국에 배치됐는데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사원들의 복지증진에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직장인야구팀을 생각했다."
우수창이 만든 야구카드.(사진 김수홍) |
1972년 우수창은 야구에 흥미가 있는 동료사원들을 모아 직장인야구팀을 조직했다. 국내 최초의 공무원야구팀이었다. 서울에 직장인야구팀이 4,5개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대문전화국 야구팀은 야구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야구장은 축구장처럼 흔하지 않다. 당시도 그랬다.
"어디 야구할 데가 있나. 학교 운동장이나 뒷골목이 경기장이었다. 운이 좋으면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건국대 야구장이나 상계동에 있는 성균관대 야구장에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운이 따르지 않아 야구경기 한 번 하려면 전국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때 늘 이런 생각을 했다. '하늘에서 야구만 실컷 할 수 있는 야구장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당시 우수창은 동료들에게 "나중에 멋진 야구장을 지을 테니 지금부터 잘 보이라"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럴 때면 동료들은 웃음으로 화답했고 우수창은 멋쩍은 미소로 농담을 마무리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것이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닫는데 35년이 걸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1984년 우수창은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만났던 일본 미쓰비시자동차판매주식회사 직장인야구팀 감독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게 됐다. 일본에 간 우수창은 야구경기가 아니라 한 장의 전화카드에 푹 빠지고 말았다.
야구계의 기인이 되다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공중전화카드를 발행했지만 일본의 전화카드는 역사가 깊었다. 우연히 전화카드를 샀는데 일본야구선수들 사진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당시만 해도 우수창은 일본야구선수가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일본어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전화카드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수창은 근속 20년이 되던 1986년 사직서를 냈다. "특별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다른 직장인들처럼 한 회사에만 오래 다니다 보니까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뭔가 다른 일도 해보고 싶었다."
퇴사가 결정되자 우수창은 먼저 일본으로 달려갔다. "일본에서 다시 전화카드를 봤다. 그때도 야구선수들 사진을 넣어서 판매하고 있었다. 오 사다하루(소프트뱅크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종신감독) 등 은퇴한 유명 야구인들의 전화카드도 눈에 띄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들의 전화카드를 판촉물이나 명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수창은 고심 끝에 일본처럼 야구선수들의 사진이 들어간 전화카드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곧바로 친정인 한국통신으로 달려가 제안을 했다. 첫 반응은 냉담했다. "이게 사업이 될까요."
우수창은 일본에서 사 온 나가시마 시게오의 전화카드 수백 장을 책상 위에 뿌렸다. "됩니다. 되고말고요."
1991년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진이 새겨진 최초의 전화카드가 국내에 출시됐다. 당시 LG의 최고스타 김용수, 김상훈, 정삼흠, 노찬엽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사진이었다.
당시 주요 모델이었던 정삼흠은 "야구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는 구단의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며 "로열티는 생각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최초의 전화카드에 등장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1996년 정삼흠은 통산 100승을 거두자 자비를 들여 자신의 투구장면이 새겨진 전화카드 100장을 만들기도 했다.
판매는 그런대로 잘 됐다. 확신을 얻은 우수창은 그해 아예 회사명을 바꿨다. "회사명을 테레카로 바꿨다. 일본에서는 전화카드, 즉 텔레폰 카드를 테레카로 부른다."
여기서 멈췄으면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수창은 인생 공부를 하는 데 비싼 수수료를 아까워하는 이가 아니었다. 다음해 역시 일본에서 눈여겨봤던 야구카드를 국내에 출시했다. 일정한 금액이 들어가는 전화카드보다 야구카드는 제작비용이 적게 들고 구매비용도 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규모도 커졌다. 전화카드에 LG 주요선수들만 등장했다면 야구카드에는 8개 구단 선수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때는 초상권이란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 별도의 돈을 지불하지 않아 좋은 점은 있었지만 야구카드에 쓸 필름을 8개 구단을 돌며 받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먼저 무작정 찾아간 구단이 LG였다.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당시 LG 프런트에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상사 주재원을 한 최종준(현 대구 FC 사장)이 있었다. 미국통으로 메이저리그 야구카드를 누구보다 잘 알던 최종준이었지만 우수창의 설명을 듣고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말씀은 잘 들었는데…." 최부장이 말끝을 흐렸다. 우수창은 순간적으로 일이 틀어졌다고 느꼈다. 그러나 최부장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확신이 생겼다. 최부장의 말은 이랬다. "과연 이게 될까요."
우수창은 몇 시간에 걸쳐 최부장을 설득했고 그의 진정성을 발견한 최부장도 흔쾌히 협조를 약속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우수창이 만든 공 닦는 기계, 스포츠테레카의 주력상품인 배팅케이지, 한때 우수창에게 꿈이었던 태국 코리아 베이스볼 캠프, 이동식 펜스. (가운데)고급 롱파일 인조잔디를 살피는 우수창.(사진 송기찬, 우수창) |
1993년 드디어 LG를 포함한 전 구단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처음에 각 구단들은 우수창을 가리켜 "이상한 사람" “기인”이라며 피했다.
그러나 마땅한 야구상품이 없던 가운데 등장한 야구카드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구단들은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야구카드를 받기로 했다.
미국이나 일본의 야구카드 시장만 본다면 대박이 예상됐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희귀 야구카드의 시세가 대학등록금에 상응한다. 국내 스포츠신문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선주문이 없는데도 야구카드를 50만 장이나 제작했다.
결과는 대박이 아니라 대재앙이었다. 창고에 쌓아둔 야구카드는 팔릴 줄을 몰랐다. 덩달아 LG 4인조를 벗어나 전 구단 유명선수들의 사진까지 넣은 전화카드 판매도 부진에 빠졌다.
"국내 야구역사가 짧고 야구시장이 좁다는 점을 지나쳤다. 그때 마침 PC통신이 유행하고 칼라 프린터기가 나온 것도 악재였다."
시간이 흘러 컴퓨터가 발전하고 인터넷이 생기며 심지어는 휴대전화까지 출현하자 우수창의 카드들은 오래된 집주소처럼 잊혀졌다. 우수창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수업료를 내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매우 비싼 수업료를.
진정한 야구 사업가로 거듭나다
1991년부터 시작한 전화카드와 야구카드 사업은 2000년 중단했다. 카드에서 돈을 벌지 못한 우수창은 판촉물 사업으로 적자를 메웠다. 2000년 인천 문학구장이 개장을 준비할 즈음 우수창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야구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번에는 야구카드와 거리가 먼 사업다운 사업이었다. "일본에 해마다 10번씩 출장을 갔다. 2000년 SK가 쌍방울을 인수하며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안면이 있는 SK 관계자가 '우대표님, 이왕 일본에 가는 김에 야구펜스를 알아봐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SK는 문학구장에 미관과 안전을 고려한 최신식 펜스를 고려하고 있었다. 부탁을 받은 우수창은 일본에서 펜스 샘플을 구해왔고 SK 관계자는 매우 만족했다. 이때 대뜸 우수창이 제안을 했다.
"내가 (펜스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우수창이 가져온 펜스 자체가 SK 내부 회의에서 부결됐다. 최종 결정권자인 당시 SK 안용태 사장이 "비싼 펜스라고 해서 효과가 특별하겠느냐"며 의문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1억 원이면 만들 펜스를 굳이 3억 6천만 원이나 드는 최신식 펜스로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이 말은 오히려 우수창을 자극했다. 우수창은 부결 소식을 듣고 안사장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 면담이 이뤄졌다. 우수창은 여러 말 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가져온 펜스 샘플을 탁자 위에 올려둔 채 이렇게 말했다.
"사장님. 지금은 일반 펜스가 괜찮아 보이실 테지만 1, 2년이 지나면 펜스 표면이 딱딱해지고 흉측해지게 마련입니다. 선수 보호기능은 기대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최신식 펜스는 10년을 보장합니다. 대구구장에서 펜스에 발이 끼어 크게 다친 강동우를 기억하십니까. 몸값이 비싼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창이 자리에서 뜬 뒤 안사장은 직원들에게 바로 재지시를 내렸다. "이 참에 좋은 펜스로 설치해 봅시다. 선수들 부상도 줄이고 말이에요."
제품은 선택됐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당시 가져온 펜스 샘플은 일본 쓰미토모 제품이었다. 그러나 설치할 기술이 우리에겐 없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한 쓰미토모를 설득해 문학구장에 기술자를 데려와 설치를 맡겼고 어깨 너머로 그들의 기술을 익혔다."
그 뒤 우수창은 국내 야구장 펜스를 도맡아 시공했다. 문학구장 안전 펜스를 본 각 지방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들이 앞 다퉈 펜스교체를 의뢰했다. "대전구장과 수원구장 펜스를 제외하고 모두 내 손을 거쳐 안전 펜스로 교체됐다."
야구계의 기인에서 진정한 야구 사업가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수창은 여전히 기인이었다. 2002년 문학구장 개장을 앞두고 그는 안전 펜스 말고 2가지 일을 더 했다. 국내 최초의 베이스볼 카페 개점과 이동맥주 판매였다.
"문학구장을 공사하면서 SK는 새로운 마케팅 아이템이 없는가 고민했다. 스카이박스도 그런 고민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나 역시 고민을 하다가 도쿄돔에 있는 베이스볼 카페를 생각했다."
우수창은 SK에게 베이스볼 카페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SK는 개장 준비 작업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럼 내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스카이박스 가장자리를 임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SK는 우수창에게 그 자리를 임대했고 우수창은 2억 원의 인테리어 비용를 들여 국내 최초로 베이스볼 카페를 만들었다. 그곳에서는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우수창의 아이디어는 10평 남짓의 베이스볼 카페에만 가둬두기에는 비좁았다. 야구 관전의 별미인 맥주를 야구 선진국처럼 제대로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SK사무실로 달려갔다.
강진 베이스볼파크 조감도.(사진 제공=우수창) |
SK와 우수창은 인천시에 주류 판매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축구장에 맥주 판매를 허용한 문화관광부도 이즈음 야구장에도 이를 허용할 계획이었는지라 인천시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승낙을 했다.
이때 우수창이 꺼내 든 아이디어가 이동맥주였다. 등에 맥주통을 짊어진 채 호스로 맥주잔에 맥주를 따르는 이들이 기억날 것이다. 국내에서는 우수창이 처음으로 이동맥주사업을 문학구장에서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생 20명을 구해 이동맥주를 팔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베이스볼 카페와 이동맥주사업을 시작한 우수창. 그러나 이 역시 대실패로 끝을 맺고 만다. 베이스볼 카페는 널리 소개되지 않아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고 이동맥주 판매는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20여명의 아르바이트비와 이동맥주 기계 안에 넣는 고가의 냉장가스를 충당하기에는 수입보다 지출이 더 컸다.
결국 우수창은 양쪽에서 모두 손을 떼고 만다. 지갑에서 엄청난 금액의 수업료가 또 다시 나갔다.
야구발명가 혹은 야구서적 출판가
야구관련 사업만 든다면 우수창은 성공보다는 실패를 많이 한 사업가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야구관련 사업가 이전에 야구발명가이자 야구서적 출판가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야구발명품은 부지기수다. 가장 유명한 발명품은 공 닦는 기계와 이동식 볼카운트, 이동식 마운드, 이동식 펜스다. 기발한 아이디어인데도 그는 발명특허를 내지 않았다.
"수요가 없는데 특허는 무슨." 그렇다면 왜 만든 것일까. "워낙 야구상품 만드는 게 재밌어서 혼자 만들다 보니까 하나둘 늘어났다."
물론 돈이 된 발명품도 있다. 레드 샌드다. 레드 샌드는 말 그대로 빨간 흙을 뜻한다. 올시즌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잠실구장에 새로 깔린 흙이 바로 레드 샌드다. 어떻게 흙까지 발명할 생각을 했을까.
"TV에서 야구중계를 볼 때면 흙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은 흙과 녹색잔디는 시각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데도 국내 주요구장의 흙은 검은색 일색이었다. 빨간 흙과 잔디가 가장 잘 어울리는데도 말이다."
백 번 양보해 시각적으로 빨간 흙이 좋다고 해도 야구장에 쓰이는 흙은 배수가 잘되고 물러야 한다. 진흙 성분이 많아 응집력이 큰 대신 선수들의 야구화에 붙지 않아야 한다는 양립하기 힘든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우수창은 빨간 흙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안동에 있는 어느 광산이었다. 이곳에 찾아간 우수창은 광산 관계자에게 야구장에 어울릴 만한 흙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는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눈을 크게 떴다. 우수창에게 그런 질문은 가능성을 의미했다.
우수창은 이 회사와 공동으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안동 광산에서 나는 빨간 흙에 특수 코팅을 한 야구전용 흙을 개발했다. 우수창은 잠실구장에 대대적인 공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LG와 두산에게 자신이 개발한 빨간 흙을 깔도록 설득했다. 그때만 해도 두 구단은 반신반의했다.
확답을 하기 전 두 구단은 잠실구장 뒤편에 이 흙을 깔고 배수와 응집력 실험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실험에 합격한 빨간 흙은 마침내 잠실구장의 대대적인 보수공사 때 깔렸다.
우수창이 언론에 이름을 가장 많이 알린 건 '한국프로야구 관전 가이드북'을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출판하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2군을 포함한 프로야구 전 선수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프로야구 경기일정, 한국프로야구 역사, 전광판 보는 법, 야구 룰 및 용어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가이드북이다. 이 책을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프로야구 전문가인 일본인 프리랜서 무로이 마사야가 한국야구를 소개하는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을 전해 듣고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무로이의 진정성에 감탄해 2004년 그가 일본어판 ‘한국프로야구 가이드’를 낼 때 초상권 획득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줬다. 그러다 일본인이 한국프로야구를 일본에 소개하는데 정작 한국에는 제대로 된 프로야구가이드북을 내는 이가 없을까 자괴감이 들었다."
전액 자비로 3천 부를 인쇄한 이 책은 과연 얼마나 판매됐을까. "판매된 게 거의 없다. 서점에도 납품했지만 바로 반품돼 창고에 쌓여 있다."
이번에는 야구책 출간으로 수천만 원의 손해를 본 우수창. 이전처럼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볼 수 있을까.
61살 야구소년의 꿈의 구장
10월 7일 전남 강진군청 소회의실. 황주홍 강진 군수를 비롯한 주민 대표와 야구 관계자 등 100여 명이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그 가운데 우수창도 있었다.
황주홍 군수(왼쪽)과 우수창은 강진베이스볼파크를 아시아 최대의 스포츠센터로 만들 계획이다.(사진 송기찬) |
올해 1월 태국 '코리아 베이스볼 캠프'를 정리한 우수창은 깊은 사색에 잠겼다. "야구장은 내게 일생일대의 꿈이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꿈을 포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때 갑자기 '차라리 국내에 야구장을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남해군에 있는 남해스포츠파크가 국내 유일의 야구캠프다. 따뜻한 남쪽에 야구장을 잘 지으면 국내 야구팀들이 굳이 해외로 훈련갈 이유가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우수창은 전남 해안 지방을 돌며 적당한 장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전남 해남, 영암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지인의 권유로 우연히 강진군을 둘러보게 됐다.
"강진군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야구캠프 입지조건이 월등히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강진군청의 자세는 다른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었다.."
우수창의 표현대로 강진군 공무원들은 아르마니 양복을 입은 뉴욕 월스트리트가의 증권거래인들처럼 사업 감각이 뛰어났고 투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10월 20일 서울에서 만난 황주홍 강진 군수는 "군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4만 2천 명에 머물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2004년부터 군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인구 감소 추세를 멈추고 젊은 인구의 유입을 위해서는 군에 새로운 사업을 유치해야 한다"며 "강진군에 대규모 야구캠프가 생기면 새로운 명소로 부각돼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9월 강진군과 우수창은 야구캠프 최종 후보지로 도암면 송학 해역복원사업 준설토 투기장을 선정했다. 그러나 해당 대지가 해양수산부 소유의 국유지로 신규 지번부여가 필요한 상태고 수산자원보호구역이라 현재까지 해양수산부, 재경부, 전남도 등이 사업성을 검토하고 있다.
검토가 끝나고 지번부여가 끝나면 강진군은 이 땅을 매입해 우수창에게 되팔아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순조롭게 사업이 진행되면 우수창은 73억 원을 투입해 정규 규격의 야구장 4개 면과 리틀구장 1개 면, 내야 연습장 1개 면, 실내연습장 2개 면을 만들고 야구박물관 1개도 세울 계획이다. 단일 야구캠프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다.
투자 양해각서 체결식은 야구캠프 사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강진군 신상식 투자유치팀장은 "내년 3월까지 설계 및 각종 인허가 작업을 완료하고 공사는 내년 4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수창은 강진베이스볼파크를 단순히 야구 훈련장이 아닌 야구를 매개로 한 아시아 최고의 스포츠센터로 만들고자 한다.
"선수들이 훈련이 끝나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동선에도 신경쓸 것이다. 강진은 주변에 빼어난 관광지와 특산물이 많기 때문에 야구를 보며 관광을 즐길 수 있다."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을 보며 야구의 재미에 푹 빠졌던 까까머리 야구소년 우수창. 직장인야구를 하며 실컷 야구를 할 수 있는 야구장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바랐던 야구청년 우수창. 야구로 실패한 사업 사례를 꼽으라면 아브라함의 가계도를 읽는 것만큼이나 시간이 걸릴 비경기인 출신 야구인 우수창. 그러나 결국 야구관련 사업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게 된 야구 사업가 우수창.
그는 야구를 통해 돈을 벌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 한 건 오직 자신의 꿈을 증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꿈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눈앞에 둔 61살의 야구소년 우수창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를 했다.
"야구캠프에서 큰 돈을 버는 건 바라지 않는다. 투자자들이 손해만 보지 않으면 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야구캠프에 독립리그를 만드는 것이다. 야구를 하고 싶은 이들이나 유망주들을 야구캠프에 모아 장학금을 주면서 키운다고 상상해 보라. 야구캠프가 완성되면 야구아카데미 1기생 50명을 모집한다. 팀당 25명씩 두 팀을 만들어 야구를 실컷 하도록 하겠다. 그곳에서 잘하면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수를 주관하는 달처럼 야구의 강한 인력은 우수창을 한순간도 놓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SPORTS2.0 제 79호(발행일 11월 26일) 기사
첫댓글 구장하나라도 갖고 싶다.. ㅠ.ㅠ
니,, 이글 다 읽었나?? ㅎㅎ
올드 수준엔 이글이 점 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