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이었다.
성지는 지금도 신리란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신리 성지는 20여 평 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이었다.
이곳에서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에 의해 1866년 3월 11일 안 다블뤼 주교가 잡힘으로써
수 많은 무명, 유명의 순교자를 내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안 주교 부재시 이웃집에 난 불이 옮겨 붙어 귀중한 자료들이 다 타 버렸다.
지금도 그 때 불에 탄 서까래, 대들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난 중에 이 마을의 부호였던 박경래의 소유가 되었다.
1927년 합덕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페랭(Perrin, Philipe, 백 비리버 문필) 신부가 이 집을 사들여
서울교구 부주교로 승품하신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님께 주교 승품 기념품으로 바쳤다.
그러나 건물만 교회 소유가 되고 대지는 여전히 박경래의 소유였는데,
순교기념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경래가 대지 전부를 천주교 유지 재단에 기증하였고
후에 그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초가였던 이 집은 1954년 성모 성년 기념으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벽, 기둥, 서까래, 대들보, 주춧돌은 원래 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64년 다시 수리를 하면서 상량문을 다시 써서 올렸는데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天主降生 1815年 嘉慶 21年 丙子 2月 18日 辰時 上樑 (1954年 祝聖),
1964年 3月 23日 修理, 新里公所, 人間眞理 在於永生』이라고 씌여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가
2003년 10월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2004년 4월 원형대로 초가집으로 준공식을 갖었다.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기까지 21년간 지내셨던 장소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낮이면 문을 잠그고 숨어서
「한불사전」, 「한글문법」, 「불한사전」, 「달레의 천주 교회사」의 기초가 된
자료수집, 문헌 번역, 순교자 행적을 기록하였다.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2010년 7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옆에 조성된 야외성당은
정면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한 대형 부조상을 설치했다.
조각가 김종필(라파엘) 형제의 작품으로 중앙 조형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강복하는 모습,
왼쪽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성 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하늘을 향해 팔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
오른쪽 조형물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성 위앵 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신리 무명 순교자의 묘
손자선 성인의 선산에서 1972년과 1985년 2차에 걸쳐서 파묘하여
이장한 무명 순교자들의 묘다.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신리 성지 못 미쳐 궁리 정류소가 있고
여기에서 오른쪽 얕은 언덕길로 약 500m 올라가면
합덕읍 대전리에 무명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무명 순교자 묘(I)에는 목이 없는 32구의 시신을 6개 봉분에 합장 이장하였고,
무명 순교자 묘(II)에는 손자선의 가족묘로 표시하고
14구의 시신을 14개 봉분에 이장하였다고 표시되어 있다.
1972년에 손자선 성인의 선산(합덕읍 대전리 소재)이었던 산 일부가 개발되어
94,400평 이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는데, 그때 32기의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되었을 때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이 나왔다고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또한 묘마다 묵주가 나왔는데 그 양이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 정도나 될 만큼 많았다고 한다.
발굴된 32기의 유해는 그 당시 강계에 살던 손석윤 씨가
10여 명의 교우를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 4개에 담아서 지고
그곳에서 1km 떨어진 어떤 공동묘지에 일렬횡대로
6개 봉분에 나누어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이장 장소가 합덕읍 대전리 소재의 중상부에서 서남향에 있는
무명 순교자 묘(I) 6기의 분묘다.
아마도 32기의 묘는 손씨 집안의 순교자 묘이거나
박해기에 살던 손씨 가족들의 묘가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로 신리(거더리) 지역에서는 ‘손자선 성인의 선산에 있는 수십 기의 묘가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이 내려왔다고 한다.
32기의 유해들을 6개의 봉분에 합장한 이유는
각각의 유해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85년 4월에 또 그 산 일부인
대전리 상개(대전리 120-8)가 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에
그때에도 14기가 파묘되었는데, 역시 십자가와 함께 유해들이 나왔다.
14기의 묘는 서종순 씨의 작업 청탁으로
김병국 씨가 동료 김영기, 최동철 씨와 이장하였는데,
14기의 묘는 구전으로 전하는 바 손씨 치명자 가족묘로 전해 오고 있다.
무명 순교자 묘(II)에는 이 14기의 묘가 그대로 이장되어 있는 것이다.
◆ 순교자
◆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확실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무슨 이유로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