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앞에서
고미화
‘그리움’이라는 명사에 색채를 입힌다면 주저하지 않고 오렌지색 물감을 먼저 집어 들겠다. 으깨진 홍시 같은 주홍색에 노랑색과 청색, 보라색을 곁들여 다채로운 노을빛으로 표현할 것이다.
해질녘이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고운 노을을 마주하고 서쪽을 향해 달리자니, 아련한 향수가 한 오라기 연기처럼 피어올라 가슴을 채운다. 질주했던 태양이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 일각일각 변하는 노을 앞에 서면 쓸쓸하고도 차분한 서정에 마음이 느슨해진다. 가슴속을 허허롭게 넘나들던 까닭 모를 파고도 그 품에 기대면 포근한 이불처럼 따듯하다.
수원에 계시던 친정어머니께서 세종시로 이사를 하셨다. 어머니가 가까이 오신 것도 좋지만, 노을 바라기를 좋아하는 내게 해거름에 친정으로 향하는 길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내 그리움의 시원과 원적을 동시에 마주하는 시간이 주는 행복감 같은 것이다. 유년시절을 보내며 겪은 성장통에는 ‘그리움’이라는 무늬가 짙게 배어있다.
어른들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는 것은 커다란 결핍이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할머니의 부르심을 듣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노을빛은 처연하게 고왔다. 붉은 노을빛을 따라가면 아득한 지평선 너머 어딘가엔 꿈꾸던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노을은 그리움의 잔영이 되고 꿈을 갖게 했다.
내 그리움의 무늬는 다채롭다. 새벽녘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도,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신작로에서 버스를 타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아릿하게 기억된다.
석양이 빚어내는 노을은 우리의 모습 같다. 닮은 얼굴, 비슷한 표정은 있을지언정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은 없다. 늦여름이나 초가을 맑은 날의 강렬하고 붉은 노을도 좋지만, 잔불이 남아 있는 아궁이 속처럼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2월의 유순한 노을빛도 좋다.
가까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리움은 원치 않은 잃음의 반영이다. 그리움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승화된 사랑이 열매로 남은 것이다.’ 그의 사유와 언어가 내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지금 곁에 없는, 닿을 수 없는 그 대상에 대한 간절함이 그리움이란 싹을 틔운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안에서 생성되는 것이라서 그리움을 담고 사는 이의 마음은 유순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해 아들이 군 복무 중일 때의 일이다. 포천 어느 부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를 했다. 매주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던 아들이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언론 매체는 연일 서해안 해군 함정 침몰 사건 관련 보도로 어수선했다. 염려와 그리움으로 소식을 기다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드디어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흥분된 어조의 첫 마디에서부터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흘러 나왔다.
“엄마 저 이틀 전에 집 근처까지 갔었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수송병으로 차출되어 평택항에서 비상근무를 하던 중에 증평에 다녀갔다고 했다. 가슴이 아렸다. 집을 지척에 두고 돌아가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니 코끝이 찡했다. 다음 날 일정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가는 길이었다. 중부고속도로 2차선에 군용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날 밤 아들이 한 말이 떠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간 거리와 속도 조절을 하면서 군용 트럭 운전석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군복을 입은 옆 모습이 모두 아들처럼 보였다. 길게 이어진 트럭 운전석 어딘가에 분명 핸들을 잡고 있는 아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선두에 선 트럭을 지나쳐 들어선 휴게소에도 군용 트럭들이 있었다. 다시 마음이 분주해졌다. 지폐를 몇 장 주머니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군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약간의 간식이라도 사 주는 것만으로도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덜어질 것 같았다. 망설임 끝에 인사를 건네자 한 사병이 웃으며 물었다.
“아드님을 군대에 보내셨지요? 어머님들이 부대 소속을 많이 물어보세요.”
호출을 받은 그는 미처 내 용무가 끝나기도 전에 인사를 남기고 뛰어갔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이제 곁에 있지만, 그때의 감정은 또 다른 그리움의 무늬로 남아 있다. 세월에 따라 그리움도 이동한다. 노스탤지어의 속성은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니까. 사랑과 그리움이 비례하는 것이라면, 나는 사랑을 많이 가진 사람인 듯하다. 추억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무늬가 소중한 그리움으로 간직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만남, 설레었던 시간들도 여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서쪽을 향해 달리는 이 시간, 나는 지금 미래의 그리움 속으로 가고 있다.
약력
2018년 <한국수필> 등단
무심수필문학회, 한국수필,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회원
lemonbam39@daum.net
첫댓글 그리움에 색채를 오렌지색 물감을 먼저 들고 으깨진 홍시같은 주홍색, 노랑색과 청색, 보라색을 곁들인 다채로운 노을빛으로 표현하고픈 작가의 느낌으로 시작한 서두가 비범합니다.
그리움을 노을로 승화시켜 이야기를 끌어 가시는군요.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노을이 그리움의 잔영이 되고 꿈을 갖게 합니다.
그리움은 석양처럼 다채로운 무늬가 되어 나타나면서 노을은 더욱 작가의 삶에 자리합니다.
그리움은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승화된 사랑의 열매라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생성된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제 작가는 추억의 갈피갈피에 새겨진 그리움의 무늬가 사랑과 비례하여 간직하고 미래의 그리움으로 노을빛 속으로 내닫고 있습니다.
작가의 그리움 속에 빠졌습니다. 그리움을 노을빛으로 볼 수 있는 남다른 안목이 부럽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줍잖은 글에 이렇듯 꼼꼼하게 감상평을 올리시다니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성실성에 언제쯤 다가갈 수 있을른지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노을= 그리움
그리움=사랑
노을=사랑
노을=마침표
마침표=또 다른 시작점
노을=시작점
노을은 지는 것이 아니라 끝임 없이 불타오르는 것, ㅎㅎ
역시 따뜻한 글, 즐감하였습니다.
😄 최선생님 명쾌한 정리에 감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원초적 사랑
선생님 부족한 글에 의미를 더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