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삼모작
최 양 귀
싱싱한 상추로 쌈밥을 먹는다. 싱그러운 식감이 입안에 가득 풋내를 뿜는다. 친구농장에서 직접 따온 상추이다. 동일직종에 근무한 친구들이 은퇴 후 작은 텃밭을 만들고 농작물 재배를 시작했다. 우리는 오륜기 정신을 담아 애칭도 오 원이다. 우린 그 작은 텃밭에 자주 만난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찻집에 빙 둘러앉아 이야기도 한다. 우리는 작물이 성장하는 모습에 이야기꽃을 피운다. 눈은 반짝이고, 얼굴에 화색이 돈다. 직접 키운 채소를 먹으니 기쁨이 더하다.
그러나 나는 농작물 재배에 경험이 없으니 소외감에 떨떠름하다. 은퇴 전에는 업무 중심 대화여서 너나 모두가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그 무렵에 난 흙 없이 자라는 식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콩나물 수경재배가 떠올랐다. 즉시 대형 플라스틱병을 가위로 비스듬히 오리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었다. 적당히 불린 콩을 병에 넣어 자주 물을 주었다. 콩나물이 생각만큼 잘 자라지 않는다. 당근과 고구마 순 키우기는 손자 관찰용이다. 농작물 재배에 경탄하는 그들처럼 기쁨을 맛보려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바꾸어 수묵화를 시작했다. 옛날 선비들이 붓글씨 쓰다 남은 먹물로 장난삼아 그린 그림이 수묵화의 유래라고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큰 붓에 먹물을 묻혔다. 햇살에 비치는 난초 잎을 연상한다. 나는 잎을 가늘게 그리다 두텁게 가늘게 길게 뻗친다. 스승을 정해 사사하지도 않아서인지 그 위에 꽃대를 세우고 꽃잎을 달아주는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붓을 씻어 공중에 매달아 응달에 말린다. 붓을 바라보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난초 과정이 끝나면 대나무를 그려야 한다. 먹물의 농담을 맞출 수 있을까! 손과 옷이 먹물투성이다. 만만치가 않았다.
그 후 생각을 바꿔 이제는 수필 쓰기를 시작했다. 현재와 과거사건을 연결해 본다. 기억 속에 잠자던 생각을 하나둘 꺼내니 마음이 들떴다. 정신과 머리 회전도 활발해진다. 주위 사람들 삶에서 시사점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어 글로 써본다. 어떤 이는 자신의 글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고 하였다. 글이 감성을 건드렸던 모양이다. 자기가 쓴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글쓰기는 가치가 있다.
나는 삶의 변곡점이었던 사건을 글감으로 잡아 글을 써본다. 사건을 묘사하니 상황의 늪에 푹 빠져들었다. 나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의미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글쓰기는 진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인 것 같다. 무의식이 의식으로 연결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글쓰기는 마음 깊숙이 잠자고 있는 감성을 찾아가는 길이며 인생 수련공부다. 시든 화초에 물을 주고 정성을 들여 살리는 과정과 같다. 글쓰기를 생각하고 집을 나서면 기대감으로 충만하다.
오늘은 우리들의 작은 텃밭에 모이는 날이다. 현관을 나와 남편과 함께 작은 텃밭인 농장을 향해 걷는데 문득 비둘기 한 쌍이 부지런히 모이를 쪼고 있었다. 비둘기 발은 빨간색이다. 그 빨간 색 발에 눈길을 쏟으며 다정해 보이는 그들에게 말을 건넨다.
“모이는 많아? 친구 사이는 어때? 구구구.”
금방 비둘기와 친구가 된다. 상추밭을 향해 가고 있는 그동안에도 비둘기에게 말을 건다. 비둘기뿐만이 아니다. 나는 눈을 돌려 주위를 살피며 사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갑자기 친구가 많아 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내 우리들의 텃밭인 상추밭에 도착한다. 상추 속에 담긴 햇살과 달빛, 바람 소리, 향기를 음미하려고 눈을 감아본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는지 남편이 뜬금없이 묻는다.
“당신 어디 아파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대답했다.
“아니요, 맛을 음미하는 중이에요. 흙이 준 영양분을 먹으니 행복감이 내 안에 퍼져요”
사춘기 소녀처럼 다소곳하다. 상추밭에 와서도 내 생각의 주머니 밭에는 글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속삭인다. 바다로 들로 산으로 시공을 초월한 세계가 자유로이 자라나고 있다. 집에 돌아가 이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가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두드려야 하겠다. ‘타닥타닥’ 한 글자 한 글자가 모여 문장이 되고 작품이 된다. 신기한 글쓰기다.
글쓰기의 매력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진리라도 발견한 듯한 기쁨이다. 진선미가 무엇인가 고뇌하던 날 ‘아르키메데스의 유리카’ 이런 느낌이었는가! 뭉게구름을 타고 몸이 공중에 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잎새에 부는 바람, 새소리 등 만물이 새롭게 다가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창조의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청춘을 채색했다. 흥분과 긴장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삶이 진지해진다.
친구는 상추밭 옆에서 키웠다는 오이를 선물로 주었다. 길쭉하게 잘 생긴 오이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가며 재배했단다. 아침저녁 물을 주고 거미손도 제거하며 정성껏 가꾼 결과다. 친구의 가슴에는 수확의 기쁨이 가득 차 있다.
나는 남편과 오이를 껍질째 먹었다. 꿀맛이다. 친구가 작물 키우기에 재미에 들려 있듯이 나는 글쓰기 동산에 땀과 열정을 쏟는다. 신문과 책을 꼼꼼히 읽고 메모한다. 귀에 들리는 말소리도 하나하나 보듬어 담는다. 과일나무의 자양분을 만들고 있다. 비바람과 눈보라에도 이 나무가 잘 자라 아름다운 글쓰기 과일나무로 가꾸어야지!
‘나의 과일나무야 무럭무럭 자라다오!’ 반짝이는 작품이 열리도록 정성을 쏟아야 하겠다. 한 그루 장미꽃 같은 글을 써 보고 싶다. 어느새 내 글쓰기 과일나무는 인생 삼모작이 되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