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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열 개의 키워드로 쓴 복음 - 하나됨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셨다(고전 1:30, GNB에서)
하나됨
카밀라(Camilla)와 나는 오후 네 시에 결혼했다. 우리의 결혼식 피로연은 오후 여섯 시에 시작되었다. 두 시간 동안, 그러니까 결혼식 주례가 결혼 서약의 질문에 대해 “네!”라고 한 대답과 결혼식 후에 “피로연을 시작합니다!” 사이의 두 시간 동안이 내 인생에서 꿈만 같은 가장 행복한 두 시간이었다. 사진 촬영과 하객 맞이를 하는 내내 나는 내 곁에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을 놀라움으로 바라보았다. 이 여인이 내 아내란 말인가? 나도 아내가 생겼는가?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가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내가 한 거라고는 “네!”라고 대답한 것 밖에 없는데. 이제 나는 왜 사람들이 결혼식에서 피로연을 여는지 알겠다. 그 이유는 놀라 당황하는 신랑신부에게 이제 막 일어난 일에 대한 놀람과 충격의 과정을 겪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게 위함이다. 이건 진짜다. 여기 모든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꿈꾸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들이 우리가 틀림없이 결혼했음을 확신하고 있으니 우리는 결혼한 거야.
예수께서는 한번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건 하늘에서 마치 새로운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생일축하 잔치를 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건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기쁨이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은 다가올 그 결혼식 피로연(혼인잔치)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약혼자가 아닌 신부를 데리러 다시 오실 것이다. 당신은 이미 그분과 결혼했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실재요, 당신이 처음으로 예수님께 영접기도를 드린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이제 두 시간 사이, 곧 결혼 서약과 결혼식 피로연의 두 시간 사이에 살고 있다. 얼마나 달콤한 시간인가, 그러나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가장 확실하게 결혼했다.
예수님의 신부 됨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셨고,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헛갈리는 설교자들은 이 말씀으로 잘려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교훈을 이끌어내곤 한다. 자, 찬찬히 보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신혼여행 중간에 이혼할까 불안해하는 것과 같다. 진정하시라. 예수께서는 이혼을 믿지 않으신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혼을 싫어하신다. 당신은 주님께 영원히 붙어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
이 말씀들을 다시 한 번 보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멀리 떨어진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사건이다.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포도나무의 일부가 아닌 가지는 없으므로, 당신을 건드린다면 그건 곧 그리스도를 건드리는 것이다. 당신이 환자에게 손을 얹는다면, 당신은 주님의 손을 그 환자에게 얹는 셈이다. 당신이 입을 열어 복음을 말하면, 당신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입으로 전하는 셈이다.
나는 결혼한 지 제법 되었으므로 이 말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일심동체의 팀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나는 학교에서 담임교사와의 면담이 있을 때마다 아내 카밀라를 생각한다. “하지만, 여보, 우리 둘 다 갈 필요가 있을까? 당신이 가는 것이 곧 우리가 가는 거랑 같아. 우리는 일심동체의 팀이잖아.” 그러면 아내는 보통 약간 흘기면서 대답한다. 지금 나는 중요한 점을 말했다. 우리의 일심동체의 하나됨은 모든 신자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하나됨을 보여주는 땅의 그림이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은 그분 안에 있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 주님도 가신다. 당신이 학부모, 담임교사 면담에 나가면 우주의 주님도 함께 가신다.
“잠깐만요, 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면 어떻게 우리와 여기에 함께 하실 수 있죠?” 좋은 질문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두 장소에 동시에 계실 수 있나? 어떻게 모든 신자 안에 동시에 계실 수 있는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예수께서 떠나가시면 보혜사께서 오시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육체적으로 있는 것보다 보혜사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었다. 그러나 곧 나는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다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떻게 예수께서는 우리를 떠나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가?”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성령으로 충만하면 예수로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있는 자는 아버지가 있고, 예수로 충만하면 아버지로 충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자는 아들과 아버지를 모신 자다. 하나님은 떨어질 수 없는 한 팀이다.
성령을 약속하시자마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고아는 아버지 없는 아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런 고아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너희에게로 와서 거처를 너희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참조). 당신은 하나님의 1/3로만 충만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충만하다.
더 나으냐 더 나쁘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절반만 이해한다.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함께 계시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건 구약시대에는 사실이다. 그 때는 성령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때에만 임하셨을 때의 이야기고, 하지만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은 다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신다(요 14:16~17). 거처라면 집을 말한다. 당신은 주님의 모텔방이 아니다. 당신은 성령의 전인데, 걸어 다니고, 살아 있고, 말하고, 숨 쉬는 성전이다. 주님은 어디에도 가시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지을 동안에도 나와 성령께서는 함께 하신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당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당신과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어떤 죄보다도 강하다.
옛 언약 아래서는 당신이 죄를 범하면 곧바로 하나됨은 깨진다. 당신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위기에 빠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너희의 손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면 잘라버리라고 하셨다(마 5:29~30). 왜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잘라내 버리는 말씀을 율법 아래서 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까? 왜냐하면 옛 언약 아래서 몸의 일부를 제거해 버리는 것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 옛 언약이 지나가버린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예수께서는 우리를 잘라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주님의 몸의 지체로 계속 남아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와 합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하)
옛 언약 아래서 우리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했지만, 새 언약 아래서 우리는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를 힘쓴다. 창기에 관한 바울의 경고를 다시 한 번 보자. 이 경고– 그렇게 하지 말라 – 배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놀랍도록 확실하게 공고히 하는 말이다. 바울은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창기와 하나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시겠는가? 땅의 결혼은 깨지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와 당신의 하나됨은 깨뜨릴 수 없다. 죄가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 중독도 깨뜨릴 수 없다. 당신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결정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는 우리가 한번 떠나가 보면 어떻게 되나 보자는 도전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당신을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놀라운 선언이다. 이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규칙으로 연약하게 끼치는 영향이 아니라(규칙은 없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가지는 불변하고 확고한 열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 죄는 그 사랑 앞에 시들해진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만나면, 그것이 당신을 변화시킨다. 당신은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이 세상의 찰나적인 사랑은 그 호소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더 진실하고 더 나은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외로운 사랑의 노래는 그만
그리스도와 하나됨이야말로 십자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나은 가장 첫 번째 이유다. 그 때로 되돌아가면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 대상이 없는 가운데서 사랑의 노래를 쓴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이 사모하는 분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을 볼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분을 향해 내 마음을 엽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가고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합니다.” 예배 가운데 이런 갈망과 부르짖음의 복음송을 들을 때 내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그 노래들은 예수님의 마음도 무너지게 할 것 같다. 주님, 어디에 계시냐고?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너의 안에, 그리고 너는 내 안에 있다. 어디로 가셨냐고? 나는 어디도 안 갔다.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여기 또 다른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곡이 있다. 그것은 옛 언약의 사랑 노래라는 앨범에서 온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였던 한 가지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하여금 여호와의 집에 내 평생 거하는 것이라(시 27:4a)
주님의 집에 거하게 해 달라고? 당신 자신이 주님의 집이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까지나 주님의 집에 거할 수 있다. 사실, 당신이 다른 데서 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이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보려면, 당신 자신에게 간단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 보시라.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께서 어떤 곳에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그 곳은 어딘가? 그 분께서는 저 위에 계신가? 아니면 저 멀리 계신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가?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언제고 어디서고 계실 수 있지만,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은 주님 안에 있다고 선포한다. 저 멀리 떨어져 계시다는 어떤 생각도 이 계시의 말씀에 의해 전적으로 폐기된다. 그분은 멀리 떨어져 계시거나 구름 뒤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마 28:20).
친밀함은 우리가 갈망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주님께 하늘 문을 열고 이 곳에 내려와 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는 이미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리시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복음은 이제 그리고 영원토록 당신이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주님께 드리는 새 노래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됨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신다. 비극적으로 성령께서는 하늘의 보안관으로 그려져 왔지만, 실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한 당신의 삶을 영화처럼 되돌아보시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장면의 배후에서 당신을 이끌어 가신 성령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당신에게 계시해 주신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누가 당신의 마음을 열어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셨는가? 성령께서 당신이 이 책을 읽게 하셨으며, 그분께서 지금 내가 당신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이 모든 좋은 소식을 믿게 하시는 분이시다. 만약 당신이 옛 언약 시대의 갈망과 외로움의 노래를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에게 친밀함과 충만함의 새 노래를 주실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당신이 지금껏 본 가장 좋은 친구시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나는 전에 이 말씀이 물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물세례로 재연(reenactment)되는 진짜 세례를 말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는 옷감을 염료에 담그듯이 담그는 것을 말한다. 흰 천이 담기면 자색 옷감이 나온다. 당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께 담가질 때 일어나는 일도 이와 같다. 당신은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나온다. 세례를 받기 전에 당신은 하나님의 생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나서 당신은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도 모른다. 성령께 물어보시라. 그분이야말로 이 일을 이루신 분이시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면 된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심어졌으면, 우리는 주님의 살으심과 함께 심겨질 것이다.(롬 6:5)
이 구절 안에 있는 어떤 단어는 성경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신학자들을 흥분하게 하여 손사래를 치며 극도로 심호흡을 하며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단어는 숨푸토스(sumphutos)인데, 이는 함께 심겨지다 (planted together)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하나됨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단어다. 그 의미는 ‘함께 태어나다’ 또는 ‘공통의 근본을 가지다’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로는 동생(同生, connate)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의 온전한 것을 형성하기 위해 하나된 개개의 부분이라는 뜻이다.
동생 연합(connate union)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그림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긴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은 전체를 이루기 위해 합체되는 두 부분이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따로 떼어 독자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가지가 없는 포도나무는 이미 포도나무가 아니며, 포도나무의 일부가 아닌 가지는 이미 가지가 아니다. 그건 그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런 동생 연합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우리는 성장할 수도 없고, 우리는 살 수도 없다. 이는 오래 전부터 온 인간의 경험이다.
우리의 최초의 부모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걸어나갔을 때, 그들은 자동적으로 생명나무에서 떨어져 나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도 생명나무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와 인류는 꺾인 가지가 되었으며 말라 시들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에서 일어나 새 생명으로 나아갈 새 길이 열렸다. 그리고 생명의 포도나무와 중요한 하나됨으로 연결된 자연적인 결과로 그 생명은 흐른다.
하나됨의 열매
복음은 이 새 생명이 있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받으면 된다. 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의 소유가 된 하나됨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뿐이다.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러나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나는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당신의 믿음을 감정에 맡기지 말라. “”너희는 가지다”고 선언하신 분을 믿으라. 그의 영원하신 말씀은 당신이 일시적으로 느끼는 감정보다 더 진실되다. “하지만 나는 열매 맺기 위해 애쓰고 있는 걸요.” 그런 몸부림을 멈추시라. 열매를 맺는 것은 당신의 일이 아니다. 당신의 일은 당신 안에서 열매를 맺고 계시는 그 분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포도나무시다. 당신 자신만의 작은 포도나무가 되려는 노력을 멈추라. 예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 우리의 역할은 주님을 신뢰하고 모든 일에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된 것은 사실이니 하나되어 살아가라. 결혼한 사람으로 살아라, 왜냐하면 당신이 결혼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하나되어 행하라(골 2:6)
결혼한 사람이 계속 미혼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결혼의 축복을 많이 놓치게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실패한다면 그는 하나됨의 축복의 많은 부분을 놓칠 것이다. 새 생명은 살게 됨을 의미한다. 그건 불신자들이 보고 놀라게 할 정도로 표현되고 즐거워하고 놀라운 일을 해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애씀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자연적으로 자란다(막 4:26~28). 우리는 이 과정을 우리의 노력과 지식으로 일어나게 하려고 할 때 도리어 방해를 하게 된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당신은 이스마엘을 낳게 된다. 오직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라 그리고 하나님의 만지심을 신뢰하라 그러면 당신은 주님의 열매를 애쓰지 않아도 맺게 될 것이다.
하나됨의 많은 유익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하나됨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주시되(엡 1:3)
새 생명 가운데서 당신은 복을 받은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을 100% 다 아는 것은 아니리라. 이 축복들 중의 몇을 생각해 보면, 먼저 구원으로 시작한다. 당신의 구원에 있어서 기초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이다. 당신이 영접 기도를 통해서 마법적인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모든 일을 참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딤후 2:10).
우리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은 구원이 천국행 티켓이라며 판매하는 것이다.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라, 그건 정말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구원은 구조선에 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태워지는 것이다(엡 1:3). 그뿐 아니라, 구조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조받을 필요가 있다. 구조선을 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정신적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불안하게 대양을 떠다니면서 그들은 이미 구원 받은 확신이 없다. 그 반대로 그들은 일반적인 죄인보다 더 심판날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구주 자신처럼 안전하다. 우리는 정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롬 8:1).
이 책의 후반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거룩해졌고 의롭게 되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거룩하시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성경에서 가장 잘못된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고전 1:2) 당신도 마찬가지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건 당신이 영성 수련회에 참석할 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루어진 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거룩하신 분에게 담겨졌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당신보다 더 거룩한 체 행동한다. 마치 거룩함에도 단계가 있는 것처럼. 그러나 거룩함에는 오직 한 가지 등급이 있을 뿐이다. 그 등급은 예수님의 등급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거룩함이 되셨다. 당신은 성인 반열에 이르고자 땀 흘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자들의 모임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시어 우리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의를 함께 가지게 하려 하심이다.(고후 5:21)
굿 뉴스 바이블(The Good News Bible)이 가장 문자적인 번역본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공유된 의로움이라는 개념을 전달할 때 그것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를 의롭다고 부를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포도나무가 의롭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지와 그 의로움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떻게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는가? 우리가 밀접하게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포도나무는 의롭지만 가지는 의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이야기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의로운 존재다.
이런 신약성경의 계시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이 꾼 가장 급진적인 꿈보다 더 뛰어나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의로운 분에 관하여 말했으며 의로운 가지에 대해서도 예견했다. 그들은 그 가지가 포도나무가 되어 스스로 수백 수천만의 의로운 가지들을 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은 보았지만 주님의 생명과 성품을 간직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될 그리스도인들이 올 것은 보지 못했다.
우리의 하나됨이 주는 복은 많으며 나는 계속 나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렇다. 바울처럼, 나의 기도도,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통해 우리의 삶에 우리가 받은 모든 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빌레몬 1:6).
우리는 어떻게 율법의 요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이방인 신자들은 이 계시 가운데서 걸을 때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을 분개하게 하였다. 이 풋내기들이 누구길래 율법의 모든 축복은 주장하면서 그 저주는 전부 무시하는가?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모두 완성하신 포도나무에서 나온 행복한 가지들이다. 이건 솔직히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다. 포도나무가 복을 받았으니 그의 가지들도 복을 받는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우리의 권세는 어떤가? 어떤 근거로 우리나 우리 자신을 머리이며 꼬리가 아니라고 부르는가? 무슨 권세로 폭풍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를 치료하는가? 이제 이 모든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과 우리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여기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늘 위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앉아있다. 그의 것은 우리의 것이다.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 원수를 물리치신 분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자다. 우리 편에서 필요한 일은 그저 신나게 춤추는 일이다.
축복의 목록은 계속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하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화목한 자다. 평화, 기쁨, 공급하심, 그리고 모든 부수적인 것들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됨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하여 여러분은 모든 것에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고전 1:5)
아직 모르시겠는가? 당신은 크게 복을 받은 자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된 자기 때문이다. 당신의 필요는 금식이나 기도, 그리고 성경 공부를 통해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사역에 씨를 뿌리거나 그런 수업을 듣는다고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필요가 무엇이든 당신의 풍성한 공급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내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됨의 목적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얻는 복은 많을 뿐 아니라 놀라운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됨의 목적과 비교해 볼 때 그것들은 오히려 작은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하고 넘치는 삶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우리를 지으신 분과 함께 기쁨으로 교제하라고 지으심을 받았다.
너의 창조주는 너의 남편이요 전능하신 주님이 그의 이름이시다…(사 54:5)
한 마디로 모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됨의 수단이시며 하나됨의 진정한 목적이다. 참으로 예수께서 모든 것의 이유가 되신다. 삶은 예수님과 떨어져 살게 될 때, 만족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함이며 그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 선물을 찾으려고 선물을 주시는 분을 떠나 다른 데서 찾는다면 반드시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 영생은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낡고 깨어진 생명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서 하나님을 알 때, 그리고 그 성령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걸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옛 생명과 새 생명의 차이는 잃은 것과 찾은 것의 차이다.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고 했을 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고 부활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승리의 외침으로서 한 사람이 더 넓은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을 때 내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는 신실한 삶이 없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와 자원에 기초하여 독립적으로 생명을 찾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진짜 자아를 잃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당신이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한다면, 그 때는 당신이 진실로 누군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면 당신은 진짜 살게 된다.
하나됨의 복음
아마도 당신은 어떤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께로 원래 왔을 것이다. 그런 필요로는 아마 치료, 용서, 아니면 천국행 티켓이었을 수도 있다. 당신의 필요가 무엇이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공급을 받으시고 축복된 삶을 사시라. 그러나 그 때 축복의 충격을 받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시라. 복을 주시는 분께서 복보다 더 위대하시다. 복을 주시는 분께서 그 복 보다 훨씬 더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우시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창고를 얻게 하는 광고물은 아니다. 복음은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이 당신과의 하나됨을 통하여 영원토록 주님께서 생명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시는 흥분되는 계시다. 이를 믿는 사람에게 복음은 지금부터 영원토록 그분과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는 기쁜 선언이다. 방황하고 불안정하던 당신의 삶은 이제 다 끝이 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이미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이미 본향(집)에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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