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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류씨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주류씨호은공파족보에 따르면 상조(연원)은 신라 때 각간을 지낸 류기휴이다. 전주 류씨는 신라 시대 부터 존재하였던 성본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문중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전주 류씨는 혼(渾), 습(濕), 지(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파가 있는데, 혼(渾)파에서는 신라 때 각간 류기휴를 비조로 하고 습(濕), 지(池)파는 선계을 상고할 문헌이 없다고 한다.
문화 류씨의 시조는 고려 초기 황해도(유주) 신천군 구월산에 세거한 호족 류차달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다. 기존의 류차달의 연원에 대해서는, 신라 시대에는 차(車)씨로서, 신라의 내분으로 황해도에 은거하다가 조모의 성씨인 버들 양(楊)을 본따 버들 류(柳)를 성으로 하였다는 류차동원설로 설명되었다.[5] 그러나 문화 류씨는 대종회는 류차동원설이 근거없다 하여, 2008년 차류대종회를 해체하였고, 류차동원설도 폐기하였다. 문화 류씨 측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하여 류차달은 본래 고려 태조 왕건과 마찬가지로 선대에는 성을 기록하지 않거나, 쓰지 않다가 류차달 때 처음 류(柳)씨로 창성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설명하면서, 문화 류씨가 한국의 차씨와 연관이 있거나 혹은 중국 유(柳)씨에서 비롯됐다는 일반 추정을 부정하였다. 문화 류씨의 인구는 2000년 기준 대략 28만명이다. 인물로는 고려 문신 유공권, 유경과 조선 학자 유형원, 유득공, 유수원, 사육신 유성원 등이 있다. 한국의 유(柳)씨는 고려, 조선에 걸쳐 명문거족이었다. 한편 중국에도 유(柳)씨가 있는데, 주(周)왕조의 후손인 노나라 13대 군주인 효공의 자손계열과 중국 서초의 황제인 의제(초회왕)의 후손 계열인 2가지 부류가 있다.
풍산 류씨의 시조는 고려 수주(樹州, 부평)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류절(柳節)이다. 후손 류성룡(柳成龍)은 조선 중기의 재상을 지냈다. 풍산 류씨는 문화 류씨와는 계통이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며, 풍산 류씨 문중에서도 문화 류씨와의 관련성은 전혀 언급 하지 않고 있다.
고흥 류씨 시조는 고려 선종(재위, 1083~1094) 때 고흥의 호장 류영(柳英)이고,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7세손 류청신(柳淸臣)을 1세조로 하고 있다. 류청신은 고려 충선왕(재위, 1308~1313) 때 고흥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고흥(전남)을 본관으로 삼았다. 문중에 설명에 따르면 고흥 류씨는 한국의 어떤 류(柳)씨와도 상대(上代)에서 연관이 없는 성본으로, 문화(文化)계 류씨(柳氏), 또는 기타 다른 류(柳)씨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혼인하여 왔다고 한다. 인물로는 독립운동가 유관순이 있다.
진주 류씨의 시조는 고려 때 진강부원군 류정(柳挺)으로, 대대로 진주에서 선비 집안이라고 한다. 진주 류씨 중에는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는데, 이들은 문화 류씨에서 분파하였다고 주장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는데, 현재까지 고증할 문헌을 찾지 못하여 선계는 유래는 정의되지 않고 있다. 또한 문화 류씨의 후예, 즉 류공권(柳公權) 또는 류언침(柳彦沉(琛))이 본관을 진주로 고쳤다는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
정주 류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三重大匡) 지낸 류천궁(柳天弓)의 본관으로, 연원은 전하지 않는다. 정주(貞州, 경기도 개풍)는 왕건의 1번째 부인 신혜왕후, 6번째 부인 정덕왕후, 고려 숙종의 부인 명의왕후의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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