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사사화, 갑술사화, 신임사화
유사(遺事) 내용이 많아 1, 2, 3번으로 나누었다.
1번, (8택으로 불리우는 8형제분.)
김춘택, 32세. 김보택, 32세 김운택, 32세. 김민택, 32세.
]김조택, 32세. 김복택, 32세. 김정택, 32세. 김연택, 32세.
김진구, 31세. 김진화, 31세. 김진일, 31세.
2번. 김만연, 28세. 김 이수, 30세. 김응희, 30세. 김위재, 33세.
김선재, 33세. 김상헌, 28세. 김익상, 30세. 김성택, 32세.
김영택, 32세. 김경택, 32세. 김용택, 32세.
김광택, 32세. 김경택, 32세.
김덕재, 33세. 김성재, 33세. 김준재, 33세. 김후재, 33세.
김대재, 33세. 김양재, 33세. 김득재, 33세. 김낙재, 33세.
김명재, 33세. 김종백, 31세. 김일관, 30세. 김 근, 28세.
김재정, 27세 . 김 오, 30세. 김계환, 29세. 김일경, 31세.
김만균, 30세. 김만중, 30세. 김만길, 30세.
김만재, 30세. 김만채, 30세.
3번 김광수, 31세. 김팔화, 31세. 김낙룡, 32세. 김 진옥, 31세.
김신망, 31세. 김요경, 31세. 김천여, 30세. 김천록, 30세.
김천상, 30세. 김진용, 25세. 김귀천, 21세. 김 계륭, 26세.
김계창, 26세. 김계중, 26세. 김계무, 26세. 김계홍, 2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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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초기부터 경종 말기까지 약 70년간 당쟁이 극심해 정권이 자주 바뀌었다.
처참한 보복과 희생의 연속이었다.
당쟁이란 이념은 친족이나 혈족을 초월하여 사생결단을 내는 슬픈역사다.
기사환국(사화):
숙종 15년(1689) 소의 장씨(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게 반대하는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제지하다가 남인에게 축출 당하였다.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사건으로 기사사화라고도 한다.
갑술옥사(환국):
숙종 20년(1694) 소론의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남인의 민암 등이 소론 일파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숙종이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에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 일파의 민암 등은 이를 계기로,
김춘택 등 수 십명을 체포하여 놓고
그 법위를 확대시켜 소론의 대두를 막으려 하였다.
숙종은 오히려 민비를 생각한 나머지 남인의 행동을 미워하여
민암을 사사하고, 권대문,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을 유배시켰다.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이 등용되고 기사환국 때 왕비가 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는 한편
그때 화를 당하여 죽은 송시열, 김수황 등에게 작위를 주었다.
신임사화(임인옥):
경종 1년(1721)부터 경종 2년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로
신축‧임인 양년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사화 또는 임인옥이라 한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성격이 온유하고 무자다병(無子多病)하여
왕세자를 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노론 사대신(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경종 1년 8월에 왕제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책봉하자,
소론파의 조태구, 유봉희 등이 시기상조론의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나 허사였다.
김창집의 건의에 따라 연잉군이 정무를 대리하게 됨으로 소론은
승지 김일경(아계)으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을 4흉으로 공격하는 한편, 목호룡으로 하여금
4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노론 일파를 처형하여 실각시켰다.
경종이 죽자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올라 다시 소론일파를 몰아내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그 자신이 왕세자로 있을 때
신임사화의 참담함을 몸소 겪으면서 비롯되었으나 붕당은 근절치 못하였다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
김만년(萬年, 28세)은
숙종조에 급제, 사포서 별감을거쳐 남행주서를 엮임.
문학과 행위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기사환국으로 온성에 유배되어 죽었다가, 이듬해 복작되었다.
김이수(以壽, 30세)는
숫종조에 문과급제, 전직을 지냈다.
우암이 유배되자, 병을 핑계로 두문자정하였으며,
페호간서를 좌우명으로 삼고 학문에 전념.
김응휘(應輝, 30세)는
장년전 참봉으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페위하였다.
여러날 석고대죄하여 왕비를 복위 할 것을 제청하였다.
김위재(偉才, 33세)는
신임사화로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영조때 사면되었다.
고향 서산으로 귀환후 한강를 건너지 않았다.
감역과 부설 벼슬을 제수했으나 취하지 않았다.
영조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선재(善材, 33세)는
신임사화 때 정의로 유배되었다가 사면, 첨정, 한산군수를 엮임.
김상현(尙鉉, 28세)는 숙종조에 급제, 지중추부사엮임
김익상(翊相, 30세)은
숙종조 무과 급제, 전라우군 수군절도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승지를엮임.
김성택(聖澤, 32세)은
숙종조에 급제, 예안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
김영택(令澤, 32세)은 대흥군수로 사복시정에 추증.
김경택(慶澤, 32세)은 영택의 아우로 의정부 좌찬서에 추증.
김용택(龍澤, 32세)은
신임사화 때 화를 입고, 영조때 신원, 사헌부 집의에 추증.
김광택(光澤, 32세)은
용택의 동생으로 신임사화여주우만으로 유배, 신원됨.
김경택(京澤, 32세)은 광택의 동생으로
신임사화 때 무주로 유배 되었다가, 21세로 요절.
김덕재(德材, 33세)는
훈신 적장자의 우대로 대호군에 배수되었다.
신임사화 때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신원됨.
이 때 동생들도,
김성재(聖材, 33세). 김준재(俊材, 33세). 김후재(厚材, 33세),
김대재(大材, 33세), 김양재(養材, 33세,) 김득재(得材, 33세),
김낙재(樂材, 33세), 김명재(命材, 33세)같은 운명을 겪었다.
김중백(重白, 31세)
생원 진사과로 합격, 학문이 성취하여 추앙를 받았다.
신임사화 때 숙부 김일관(一觀, 30세)과 함께 구검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석방되었고 저서로 졸와 유고가있다.
김 근( 瑾, 28세)은
벼슬은 통덕랑, 산림에 묻혀 후진양성에 힘을쓰다.
인왕산 낭떠러지에서
성삼문의신주를 찿아내 왕에게 품게하여 원혼을 위안했다.
우암에게 신반실당(神返室堂)의 의미를 물어 홍주 노은동 옛터에
사우를세워 향사케 했다.
김재정(在精, 27세)은
우암 송시렬이 화를입고 귀양을 갈 때
유생들과 함께 대궐밖에서 풀어 줄 것을 요구하다가 귀양을갔다.
동몽교관에 제수되고 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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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오( 洖, 30세)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묘배향을 제일먼져 상소하였다.
송시열의 무고 때 동지들과 함께 글을 오리다가
고문 끝에 흉변을 당하였다. 사헌부 지평에 추증, 유고가있다.
김계환(啓煥, 29세)은
숙종조에 급제, 사간원 정운으로 시작,
여려 관직을거쳐 대사관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31세 대제학 휘 일경 (양간공파‧의정공파)
1662(현종4)-1724(영조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인감. 호는 아계.
아버지는 증 참판 여중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안동 권씨이다.
1687(숙종14)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702(숙종29) 식년시 문과
장원 급제하고 숙종 34년 중시에도 장원 급제하였다.
숙종 35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과 집의에 제수 되었다가 사간,
시강원 겸 보덕으로 전직하고 교리와 수찬에 제수 되었다가
통정대부 동부승지,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그 후 부제학과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판, 대사성에 제수되고
양관대제학으로 제수되었다.
다시 병조판서 겸 대사헌으로 승진되고 판의금부사,
세제사부에 제수되고 판중추부사 겸 수어사를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의를 표명하였다.
1723(경종4) 우참찬을 제수하니 또 다시 상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해 좌참찬 지실록사에 임명되다.
왕세자(뒤에 영조)의 책봉을
적극 반대하여 이진유, 이명의, 박필몽 등과 함께
목호룡을 시켜 노론 일파가 왕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한 후
노론 4대신을 위시하여 김용택을 잡아 죽여 신임사화를 일으킨다.
영조 임금 즉위 후에 전일의 무고죄로 목호룡과 함께 잡혀 끝까지
왕에게 불복하여 공모자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아 처형당하였다.
사후 83년째 을사보호 조약 후
순조 2년(1908)에 신원 되어 복작 되었으며
저서로 아계 유고가 있다.
김만균(萬均, 30세)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향할 것을
소청하여 이루었다고, 승정원의 좌부승지에가 되었다.
김만증(萬增, 30세)은
진사시에 합격, 교관을 배수하고 여러고을의 수령을
거쳐 동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만길(萬吉, 30세)은
숙종조에 강원, 전라 양도 관찰사,
훌륭한 치적이 나타나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김만재(萬裁, 30세)는
숙종조에 참봉으로 남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면,
부평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
김만채(萬埰, 30세)는
대사간, 강원도 관찰사, 개성유수를 거쳐 병조참판이되었다.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