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박꼭질
이나영
이를테면 두 번째 칸 화장실을 매번 쓰고
딱 그만큼 어두워진 밤, 같은 길을 걸어가고
밥상도
동일한 밥상
이맘때를 생각한다
행간이 감감하다 보고처럼 쓰는 일기
얼음 녹는 속도만큼 밀려나는 일상이라면
그럴까
내가 숨을까
난독의 동공 속에
흑점黑點
한사코 뿌리치는 너의 어지럼증엔
무언가 있지, 싶은 가을날 해거름 녘
비밀리
자라고 있다던
뇌하수체
꽈리 하나
좁아진 시야만큼 햇빛도 일렁인다면
태양의 밀도 속에 움츠러든 코로나처럼
궤도를
이탈하는 중
너는, 늘
오리무중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하여
목서리 잃어버린 시선만 진득하다
혼자뿐인 길에서도 매무새 가다듬고
하루에
몇 번이더라
언제나 스탠바이
비밀 없는 원테이크 나대로만 행동할 것
걸음마다 따라붙으니 매사에 조심할 것
찍힌다
두리번거리며
숨어드는 당신까지
정전停電
불현 듯 쳐들어오는
어둠에 안겨든다
관성의 법칙으로
그러나 꼼짝없이
적들은 일제히 숨었다
저릿해진 한순간
읽다 만 책장 위
그윽해진 밑줄 몇 개
너와 이은 필라멘트
끊긴 지 오래인데
단 한번 긁힌 적 없는
섬광으로 빠져든다
시차를 두고 있는
눈동자 움직임을
누군가 엿보다가
맞바꿔 던져버린
자라난 검은 구름이
목덜미를 건드린다
사이렌은 울리고
미숙한 충고란 건
이토록 시시한 일
연거푸 마셔대도
마른침만 삼켜지는
빤하게
툭, 던져진 말
미간으로 흩어진다
수천 마리 벌 떼들이
입 밖으로 쏟아진다
서로의 징그림을
마주하고 있을 만큼
지난한
우리였나요
괴괴한 숨만 남은
내민 손은 주워 담고
울지 못한 등을 돌려
배경만 남은 식탁
고갯짓이 저물어간다
털고 갈까요
캄캄한 제자리로
카니발의 시작
뱉어낸 한마디가 시큰하게 박혀 있는
빗장뼈 어디쯤일까 못 자국 난 언저리에
다 마신 맥주 캔처럼 구겨진, 내 얼굴
엄지로 꾹꾹 찍던 놓쳐버린 문자들이
허공을 더듬다가 제풀에 굴절되면
뜨겁던 말과 말들이 식어간다, 한 방울씩
맺히다 떨어지는 눈물의 옹송그림
농도 짙은 몇 마디가 흩어져 직립하다
기우뚱 지구 한쪽이 젖어든다, 남모르게
고양이를 부탁해
불 켜 든 가로등 밑
비틀대는 짧은 치마
음습한 거리에서
풀린 눈 치켜뜬 채
포자로 옹글진 울음
난반사로 번져간다
허물어진 골목 위를
활보하는 길고양이
반쯤 끊긴 울음의 결
네 삶을 네가 할퀴어
뒤엉킨 목덜미 핥으며
밤을 단장해야지
십자드라이버
헐겁게 돌아가는 우리의 나사들이
귓바퀴에 매달려서 끊임없는 신경전이다
가끔씩 목소리마저 망가졌나, 풀어졌나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너를 꺼내
별들과 별들 사이 음계를 조율하면
내 안에 잠든 운율도 노래가 될 거야
그날의 영정影幀
만발한 꽃들 앞에서 마음껏 웃고 있다
거기가 좋다고 다시는 안 오겠다고
등 돌려 스러져가는 얼굴을 수습하며
네가 불러들였구나, 질색하는 흰 국화
얼떨떨한 나를 멀끔히 바라보더니
건넌편 줄 선 꽃들과는 뭘 좀 아는 눈치다
뺨의 연애사
괜찮냐 묻는 말이 목덜미 핥아내는
가만한 한낮에도 안녕은 팽팽해진다
자국 난 비명이 들려?
들으라고 운 건데
조금씩 뜯겨 나간 얼굴의 페이지
발목에 감기는 줄 모른 채 마주 보다
서로의 양 볼 겨누어
방아쇠를 당긴다
무릎 꺾는 아이
제 것이
아니었던
손과 발을 바라보다
고쳐 쓴 이름마저
자라나 삐뚤대는
수능을
며칠 앞둔 날
제 발자국
지운 아이
책상 위
진열됐던
소녀는 뭉개졌다
꼭 다문 입 밖으로
새어 나온 혼잣말
한 번쯤
공중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는 걸까
도마뱀 꼬리라면 잘라낼 수 있다지만
한 벌뿐인 목숨이란 그런 게 아니어서
시리다
한늘 한쪽이
아프다
땅 반쪽이
- 이나영 시인의 시집 『언제나 스탠바이』 (2020. 책만드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