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이사야-26 이방인들의 소망(이사야 56장 1-3절)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 56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입니다.
[이사야 56장]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이사야서 56장에는 성경이 흘러가다가 전혀 새로운 한 장이 열리는 그런 장면인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이전에는 이방인들은 거의 소망도 없는 사람들로 이렇게 인식이 되어 있어요. 유대인들에게..
이 이방인들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그런 인식이 그때뿐 아니라, 이 이후에도 한참 사도바울이 쓴 글에 보면 이방인들을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존재들 이렇게 그런 인식이 몸에 베였고, 이방인 하면 이방 죄인 이렇게 입버릇처럼 유대인들 인식에는 ‘이방인들은 그저 가축과 방불하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거기 구원의 반열에 든다든지 영생을 유업으로 받는 다든지 이런 것은 상상도 못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유대교에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고 유대교에 입교하거나 연합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야. 오래전부터..
경건한 유대인들은 참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더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른바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세상 만국에 흩어져서 살아갈 때 유대인 공동체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삶을 흠모하는 거야.
첫째 이 유대인들의 삶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일부일처와 가족이 아주 화목하거나 가족 결속력이 굉장히 단단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유대인들은 게으르지 않고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은 참 부지런하게 살았어요.
부지런하게 살고 하니까 잘 삽니다.
그리고 나라없이 떠돌이처럼 살아갔던 유대인들은 생활력이 아주 강하고 돈을 잘 벌어요.
거기에 비해서 헬라인이라든지 이방나라를 보면, 오늘도 우리 사회에 남자들 보면 참 이상한 사람들 많잖아요.
그런 것을 보고 경건하게 사는 유대인들이 볼 때, 아 우리도 저 유대교를 좀 믿어야 되겠다. 해서 온갖 헬라인들 세계에 가면 신들부터 문란해요.
신들이 막 자기 어떤 신은 자기 딸과 살고 이런 신이 있어요.
신들부터 문란하니까 신들이 사람들이 자기 형상을 따라 신을 만든 것이거든..
그러니까 그 세계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하고 음란하냐? 하는 것 뻔한 얘기죠.
그런데 유대인들을 보니까 정확하게 일부일처를 지키면서 정결한 삶을 살고 그리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교육을 자녀들 교육을 집에서부터 열심히 하고 회당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이런 것을 보면서 이방의 귀부인들이 유대인들과 친해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는 소스가 사도행전에도 들어있고 꽤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수기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처럼 이렇게 거룩한 율법을 가진 나라가 세상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거룩한 법을 가진 것만 해도 큰 유산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정작 수많은 유대인들은 그 율법 자체를 가졌다는 것이 큰 유산인줄 몰랐죠.
그러나 바벨론 포로가서는 포로된 중에 그들이 위낙 경건하게 훈련을 받고 또 성경을 배워서 달라지는 삶의 모습을 보더니 이방인들이 연합해 온 거예요.
다시 말하면 바벨론 사람들인데,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돌아오는..
다니엘 사건이라든지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 사건이라든지 이런 것을 볼 때 느부갓네살 왕까지도 다니엘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한것 아녜요?
그런데 그런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연합되어 가지고 은근히 무슨 생각을 하느냐?
자기들은 살아온것을 볼 때 너무 엉망으로 살아와서 이 유대인의 삶에 우리가 연합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서 우리는 개밥에 도토리처럼 밀려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고..
또 레위기에 보면 남자들 중에 성기능불능자 다시 말하면 선천적으로 성경에는 고자라고 되어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사리스’라고 되어 있는데, 인위적으로 환관도 있고 바벨론에서 사람들을 잡아왔을 때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런 사람들은 거의 환관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환관으로 만들면 일단 거세를 합니다. 거세를.
그러니까 갈등이 생기죠.
레위기 21장 같은데 보면 거세된 자 내지는 남자가 성기능이 떨어지면 제사장 반열에 들어올 수도 없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런 사람들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맡겨졌다고 되어있죠.
환관장. 환관장 밑에 누가 있겠어요? 환관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에 우리가 그런 말 하지 않지만 정직히 말하면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환관이라는 거예요.
궁내에서 궁궐내에서 왕의 곁에서 왕의 참모처럼 이렇게 내시가 되는데, 궁궐안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으니까 여자들과 무슨 사건이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거세를 해 버립니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고, 왕에서 적어서 바벨론 왕에게 자문을 할 정도의 실력자들인데, 환관이 되어가지고 그러면 우리는 소망도 없는게 아니냐?
일껏 뼈빠지게 하나님 뜻에 의해가지고 이렇게 되었는데 이게 뭐냐? 이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이방인중에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께 연합된 사람도 있고 결국은 우리도 밀려나서 쫓겨날거야. 이렇게 생각하는데,
56장에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사야 56장]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맨 먼저 하나님께서 거론하시는 것이, 공평을 말씀하십니다. 공평..
여러분 우리 사람이 자칫하게 되면 인정에 끌리거나 아니면 어떤 이윤에 이익에 끌려가지고 사람의 마음이 좌로 우로 치우치게 되는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어떤 인정에도 어떤 이윤에도 끌리지 않고 항상 공평한 것.
그래서 특히 지도자는 더하고, 사람을 가르치거나.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맨 기초가 공평이라는 거예요. 공평.
공평무사해야 돼요.
어떤 사람에게 지나치게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공평..
그 다음에 정의,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공평과 정의. 항상 따라다니는 거예요.
하나님 보좌의 기초라 그러죠. 공평과 정의가..
그래서 공평과 정의가 무너지게 되면 결국은 균형에 깨어지면서 인격이 흔들리게 되니까, 우리가 평소에 공명정대하고 공평무사하게.. 공평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
..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여기 거론하시는데, 사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맨날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이 덕 보는 것처럼 그런 인식이 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지킨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네 집에 남종이나 여종이나 육축이 숨을 돌릴 수 있게 해 주라는 겁니다.
자비입니다. 자비. 안식일 법은 자비와 긍휼의 법이예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좀 쉬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하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이고, 또 성경 전체를 봐도 근본 그 율법이 주어질 때 목적을 봐도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고 남종이나 육축이라도 일 하지 말고 쉬게 해주고 숨을 돌릴 수 있게 해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이 덕보는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해서 지키는 줄 알고 착각을 해요.
그래서 안식일 법도 사실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에 기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계획을 세울 때 사람이 질서가 있어야 돼요.
엿세 일하고 하루 쉬게 질서가 있는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여러분 제가 우리 샤론교회 말씀을 전한지 1년 반 지났는데 여러분에게 주일 성수 합시다. 그런 말 한적 있습니까? 거의 못 들었을 겁니다.
제가 제정신으로는 그런 소리 안하니까..
주일 성수합시다. 그런 소리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주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지킵니까?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누리는 거죠.
그래서 저는 주일은 쉬고 은혜 받는 것을 누리자 하는 것이지 지키자 것은 너무 율법적입니다.
누리는 거예요. 누리는 것..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두 주간만 교회에 안 나가면 길게 한달만 교회 안 나가면 내가 평생에 예수 믿었는가 할 정도로 그렇게 됩니다.
그게 아니면 더 쉽게 해 봐요.
밥을 세끼만 굶어봐요. 내 평생에 밥 한번도 안 먹은 것 같애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주의 날에 육신적으로는 쉬고, 영적으로 조금 충전되고 하는 것이 그게 은혜가 아닌 것 같애도 그게 은혜예요. 우리가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든 누리거나 지키거나 간에 사람이 시간도 절도가 있고 질서가 있어야 돼요.
그냥 일에 매여가지고 휴식도 안식도 없고 주일도 없고 이렇게 가게 되면 결국은 어딘가 사고가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아까 말씀드렸죠? 유대인들의 경건한 삶을 보고 흠모해서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께 연합되어 온 사람이 있는데,
..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그러니까 고자중에서 선천적으로 된 사람이 있지만 환관으로 그렇게 기용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은혜에서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더러 했던 모양인데, 그런 생각을 안 하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 안하신다는 거예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런 의식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 말씀이 일방적으로 들려오지만, 그런 말씀이 나오기까지 어떤 배경이 있고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그말이죠.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가까운 관계를 부자지간 자녀 아닙니다. 자녀. 자녀가 최고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이 제일 가까운 것 아녜요?
아들과 딸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일 가까운 관계예요.
부부는 가까운 관계가 아니고 한몸이니까 가까운게 아니죠. 그런데 그것도 잘못하면 곤란해요. 그렇죠?
님인데, 거기다가 점하나 찍어버리면 남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님하다가 점 하나 찍어버리면 남이 됩니다. 남..
그건 아주 위험한 관계예요. 참 조심스럽게 잘 간수해야지 점을 아무데나 찍었다가는 큰일나는 거죠.
그런데 아들 딸 엄마 아빠 아버지 어머니 이것은 깨어질 수 없는 관계예요.
최고 이름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건데, 하나님을 잘 믿으면 환관되고 성기능 장애가 있다할지라도 아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
뭘 주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연합해온 이방인이나 혹은 하나님 앞에 정말 안식일을 지키고 그 계명과 율례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면 아들보다 더 좋은 이름도 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나를 하나님께서 밀어낼거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온게 너무 소중한 거예요.
여러분 나는 예수님 말씀중에 누가복음 15장에 탕자얘기를 참 좋아하고, 요즈음 제가 구약을 하다보니까 그 얘기를 할 시간이 잘 없는데,
제가 어디가서 전도할 때는 그게 단골메뉴예요.
시골에 살다보니까 시골에서 집 나간 아들이 많잖아요.
시골에서 전부 농사짓기 싫어서 아버지 어머니 슬하를 떠나서 도망가고 집나가면 어머니들이 아들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엄마 아빠가..
그것 가지고 이야기 하면 아주 씨가 먹히는 거야.
그때 사실은 탕자 비유가 아니고 아버지 비유거든요. 아버지 비유..
그 탕자를 아무 조건없이 너희 이놈 자식 돈 어디다 썼냐? 그런것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돌아온게 너무 즐거워서 잔치할 마음밖에 없는..
아버지 마음 비유예요. 아버지 마음..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관계라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관계인데,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연합해 왔거나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잘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정말 하나님께 내가 연합되었다는 것 때문에 정직하게 공평과 정의를 행할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녀보다 더 나은 이름을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돌아온 것이 너무 귀하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방인들이 함께 유업을 누린다는 것을 용납 못해요.
그런데 제가 출애굽기 9장 5절 6절 지난번에 공부했는데, 거기 보면 사실은 유대인을 택한 목적이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선택된 거예요.
이방인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들이 선택되었는데, 이 멍청한 것들이 하나님이 자기들만 선택했다. 그런 무식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 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볼 때 멍청한 사람도 많은 거야.
천하에 좋은 사람도 유대인이고, 천하에 나쁜 놈들도 유대인이야.
그래서 성경을 정말 이기적인 안목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입장에서 성경을 천천히 창세기부터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도 꽤 편협하게 굳어있어요. 아주 편협한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가 좀더 마음을 넓히는..
사도바울이 내가 너희를 향하여 마음을 넓혔으니까 너희도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볼 때 바울도 꽤 좁은 사람이거든요. 천국가서 혼날지 모르지만.
바울은 면도칼 같은 사람이예요.
여러분 봤잖아요. 마가 요한이 첫 번째 전도여행 때 도중 하차할 때, 바나바는 지난번에 몰라서 그랬으니까 이번에는 알고 가겠다니까 같이 갑시다.
안된다면 안되는 거요. 형제여..
바울은 안 되는 거야.
굉장히 꼬장꼬장한 그런 분인데, 그분이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너그러워 졌어요.
제가 보니까, 잘 들으세요. 연세가 들어가시는 분 잘 들으세요.
연세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넓어지는 사람이 있고, 연세가 들어가면서 좁아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곤란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좀 푸근하고 넓어지고 이해하고 이렇게 하면 참 좋은데,
거꾸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강퍅해지고 ..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은 대화가 안 돼요.
자기 생각에 딱 굳어져버렸기 때문에 이미 강퍅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융통성이 없어요.
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마음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요.
어렵지만 마음이 그저 청년때처럼 안 굳어진 상태로 오래갈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문득 나도 생각이 굳어있구나. 그런 것을 봐요.
여러분은 가능하면 너무 빨리 굳어지지 마세요. 굳어지면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자, 여기 또 충격적인 얘기죠. 유대인만 기도하는 집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집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여기 우리 말로는 ‘만민’이라고 해서 그냥 만민교회가 나오고 했는데, 히브리어를 보면 ‘콜’이라고 쓰는데, ‘모든 민족’이라고 되어 있어요. 모든 민족..
그러면 또 모든 민족교회가 나오겠네..
제가 아마 우리 에스라하우스 성경강좌에 신청한 것 보니까 ‘모든 민족교회’가 있는 것 같애요. 교회 이름이 ‘모든 민족교회’라고.. 김해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때 이 말을 나중에 스데반이 설교할 때 이런 말을 인용해요.
그러니까 스데반이 굉장히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급진적이라고 해서 경계했을지 모르지만 스데반이 일찍 마음이 열린 사람이예요.
바울은 안 열려서 애를 먹는 사람이고, 스데반은 일찍 마음이 열려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그런 말 한 것이고..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지금 현재 이사야서 후반부를 쓰고 있는 이 이사야는 상당히 마음이 넓어져 있습니다. 이 분이 글을 쓰는 것을 보면..
그러니까 예언자이고 선지자예요. 일찍 알고 일찍 깨달았어요. 전혀 유대인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일찍 깨eke고 일찍 보고 그래서 선견자 선지자 선각자..
하나님의 마음을 일찍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온 백성 외에 더 많은 백성을 여호와께 연합하게 할 것이다 하는 얘기죠.
그러면서 9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주 앞뒤가 꽉막힌 꽁생원들 이런 사람을 보고 질책을 하시는데,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 말씀이 다정스럽게 나왔다가 준엄하게 나왔다가 이렇게 나와요. 보면 대상이 달라요.
9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뭘 삼키느냐?
파숫군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당시에 민족의 지도자 파숫군들은,
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지도자들이란게 그런 사람들인거야.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그래서 우리 지도자된 사람들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깊이 삼가해야 돼요.
이익을 따라서 그저 생각하고 자기 성공을 위해서 성도들이 혹사당하게 하고 그런 목회가 있다는 거예요. 이런 목회가..
가끔 우리 교회에 이런 저런 장로님들이 찾아오고 전화로 상담을 할 때 장로님들이 마음이 상해가지고 온 거야.
왜 그런가 물어보니까, 내가 생각해도 그 장로님 말이 맞고 그 목회자가 잘못된 거야.
그런 수가 있어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성공을 위해서 자기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온갖 것을 다 하는데, 이런 것은 위험하다는 거예요.
여기 이사야 56장에도 이런 말이 있고, 에스겔서 34장에도 그 잘못된 목자들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질책이 있는데, 그런 것은 다 목사님들이 잘 안 봅니다.
‘주여 통과’ 그러고.. 양심에 찔리니까 안 보는 거야.
그런데 저는 남들이 잘 안보는 곳에 관심이 있어요. 남들이 잘 안 보는 그런 것을 잘 봐야 돼요.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런 잘못된 목자들이 있다는 거야.
57장은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들은 의인들인데 얼마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것을 놓고 아쉬워하죠.
[이사야 57장]
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돌아가신 분들이 정로, 바른길로 걸어가다가 돌아가셨다면 언제나 고난이나 화액이나 더 큰 어려움이나 이런 것을 피해서 하나님께서 취해간거야.
그래서 헤어짐에 있어서는 우리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지만 평안에 들어갔다는 거야.
자기 침상에서 쉬는 곳에 올라갔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볼 때 헤어지고 한 것이 장기간 헤어져 있어야 되고 이별이 참 아프고 하지만, 하나님 볼 때는 너무 짧은 시간이예요. 금방 만난다는 거야야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이후에 2000년이 지났는데, 2000년이 우리가 볼 때 굉장히 길죠. 천년이 두번이고 가니까..
그런데 아담 때 같으면 두 사람 평생이야.
아담이라든지 노아홍수 이전 같으면 다 사람 평생밖에 안 되는 너무 짧은 기간이예요. 얼마 안돼.
영원에 비추면 한 경점에 불과한 거예요. 눈깜짝할 사이 밖에 안돼요.
그래서 저도 집사람 떠난 후에 혼자라는 것. 여러분 아직 별로 경험이 없죠.
그런 데에는 제가 선배죠.
그것이 참 허구한 날 아직도 내 만약에 오래 산다면 그러니까 빨리 죽으면 일을 못할 것이고, 오래살면 이 고독 외로움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하는데, 하나님이 볼 때는 너무 짧은 기간이야.
우리가 인생을 너무 짧게 살다 보니까 1000년 하니까 길지, 하나님은 1000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1000년 같다는 거야.
너무 짧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 아끼던 사람들이 우리 곁에서 떠나가는 것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지만 잠깐 후면 만나는 거야.
오래가는 것 아니라는 겁니다.
밤의 한 경점 같애. 너무 짧은 겁니다.
그래서 화액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전혀 모릅니다.
사람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하고, 그런 때와 기한도 하나님이 전혀 누구에게 알려주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젊고 아직 건강하다 할지라도 천국가는 것은 누가 먼저 갈지 아무도 몰라요.
천구의 법칙이 나중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해요.
오늘 간증하신 명집사님 얘기 들어보니까 앞으로 제가 볼 때는 우리 교회에서 제일 빨리 성장하고 성숙할것 같애요. 왜냐하면 시간에 많으니까..
계속 성경보고 계속 기도할텐데, 벌써 7월 8월 2개월 지나갔는데, 저렇게 빨리 생각이 깊어지고 넓어진것 보세요.
누가 나중 된 자인지 누가 먼저 된 자인지 모른다는 거야.
우리는 바빠서 성경을 보지도 못하고 뛰어다닐텐데, 집사님은 계속 성경보고 기도하고 할 텐데, 빨리 영적으로 그래서 할일도 생기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짧은 시간을 너무 아쉬운 짧은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람있게 광음을 아껴서 알차게 보내야 돼요.
왜냐하면 언제 우리 인생의 천막을 거둬라 할 때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예요. 이런 일이 올 때 최소한 우리가 한 가지는 알아야 되는데,
의인들이 취하여 감을 입었다면 화액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물론 그게 잘 안돼요. 잘 안되는데, 하나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화액전에 불러주신 거야.
갑자기 만약에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굉장히 심상치 않은 일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온 세계에 지구 온난화 것은 일은 충격적인 일이고 앞으로 지구상에 어떤 재앙이 닥칠지 몰라요.
이것이 천천히 진행되는게 아니고 앞으로 몇십년 몇백년 후의 변화가 아니라 굉장히 급속하게 진행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마지막 대환난의 고통이 올 때 입에서 물 쏟아지듯 쏟아지는 것이 뭐냐? 자금 이후로 주님 안에는 죽은 자가 복이 있다.
산 자가 복이 있는 게 아니고 주 안에서 죽은 자 이미 천국 간 사람이 얼마나 복이 있는가? 이런 고통 이런 환난 겪지 않고 그저 작년까지 해서 돌아가신 분이 너무 복이 있다.
그런 말이 입에 줄줄 흐른다는 거야. 마지막때..
그래서 살아있는 자가 행복한건지 먼저 부름받은 자가 행복한지 잘 모른다는 거야.
우리 인간의 판단은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2절에,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한편,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3절이죠.
3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그러니까 순 바벨론에 음녀의 자식들 우상숭배에 빠진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 유대인들을 잡아다가 희롱하고 했던 모양이죠.
..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5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
이런 악한 짓을 하면서 누구를 조롱하느냐는 거죠.
6 골짜기 가운데 매끄러운 돌 중에 너희 소득이 있으니 그것이 곧 너희가 제비 뽑아 얻은 것이라 너희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7 네가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을 베풀었고 네가 또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으며
8 네가 또 네 기념표를 문과 문설주 뒤에 두었으며 네가 나를 배반하고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고 올라가며 네 침상을 넓히고 그들과 언약하며 또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여 그 처소를 예비하였으며
9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향품을 더욱 더하였으며 네가 또 사신을 원방에 보내고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으며
10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아니함은 네 힘이 소성되었으므로 쇠약하여 가지 아니함이니라
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래 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
12 너의 의를 내가 보이리라 너의 소위가 네게 무익하니라
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14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15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거기도 줄을 그으세요.
하나님께서,
15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지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통회하고 겸손한 사람, 자기 죄를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의 영혼을 소성케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16절,
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이것은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죠.
성경에 번역이 조금 어쭙잖게 된 곳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영원히 노하지 아니하신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영원히 노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면 노를 영원히 품지 않는 것처럼 되어있는데, 그렇지 않고 ‘영원히는 노하지 않으신다.’ 노하기는 하시지만, ‘는’ 자가 들어가면 큰 차이가 나는 거죠.
‘는’ 자가 빠지면 영원히 노하지 않는 분이 되는데, ‘영원히는’ 하면 노하기는 노하는데 영원히는 장구히는 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랫동안 진노하시면 약한 영혼들이 피곤해하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은 노할것을 가지고 노하지만 우리는 별로 노할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노하는 수가 있어요.
그런 것으로 너무 오래 노하면 안 된다는 거야.
노를 품어도 죄를 품지 말고 밤이 될 때까지 노와 분을 품고 잠을 자거나 하지 말라고..
그러면 반드시 악령이 틈을 탑니다.
자다가 분을 못삭여 흑흑 신음하면 곤란합니다.
아주 그런 것은 안 좋아요.
우리도 분을 품을 수 있는데 빨리 풀어야 돼요.
별로 의롭지도 않으면서 분을 풀지 못해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거야.
저도 가끔 화를 내지만 빨리 풀려고 노력을 해요.
전에는 화를 한번 내면 두 달씩 안 풀어져가지고 그러면 결국 나만 손해야.
화가 안 풀리면 자기만 손해지 아무 것도 아녜요.
그래서 하나님도 영원히는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하신다.
왜냐하면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라.
인생들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장구히는 노하지 않으신다.
여러분 노를 품지 않는 것이 좋은데,
저는 오래되었는데, 아마 중학교 다닐 때 같아요.
중학교 다닐 때 어느 약국에 들어갔는데, 약국에 항아리가 하얀 항아리가 있었어요. 꽤 큰게..
거기다가 한 속담처럼 한 경구를 써놨는데, ‘화를 낼줄 모르는 사람은 바보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군자다.’ 그런 말을 써놨어요. 참 씹어볼 만한 말이다.
지금까지 중학교때 읽은 것을 아직도 남아있는 것 보세요.
화를 낼 줄 모르면 바보죠. 그런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군자다. 그런 말이 있더라고..
그래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죠. 그렇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진노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노하시되 장구히는 또 영원히는 노하지 않는다.
이게 정확한 해석이예요.
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거기도 줄을 그으세요.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맞아도 각성이 안되고 회개가 안되고 돌이키지 못하고 그리고 여전히 패역하게 해서 자기 마음의 길, 이게 못된 길입니다.
제멋대로 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의 길..
번역을 좋게 하니까 자기 마음의 길이라고..
제멋대로 가는 길인데, 방종한 우리 마음의 가는 길로 놔두면 안 됩니다.
율례와 계명으로 쳐서 우리를 복종시켜야지 내 마음의 길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이 상담을 해 오는 것 보면 자기 마음을 완전히 다 놔 버렸어요.
마음을 놔버리고 나니까 수동태에 빠지는 거예요. 수동태에..
자기 의지도 박약하고 감정의 폭력에 의해 가지고 의지도 지성도 아무 기능을 못하고 끌리는 대로 마음을 놔버리니까..
그래서 마음의 길로 가는 거예요. 수동태..
이게 귀신이 들어가는 데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은 거야.
정신을 차리고 단호한 의지와 결단과 명철한 분별을 가지고 판단해서 기도하고 바른 길을 가야지..
내 마음을 내 감정에 맡겨서 떠내려가는 식으로 수동태에 맡겨버리면 그냥 귀신이 덮쳐 버립니다.
특히 여성들이 위험해요.
여성들은 항상 지성과 의지보다는 감정적으로 많이 대화를 하기 쉬워요.
아주 위험해요.
절대로 그냥 자기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고 놔버리면 그냥 귀신이 덮칩니다.
그리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잠이 들거나 하면 아주 위험해요.
이런게 정말 영성훈련이예요.
심령훈련 영성훈련 아주 섬세한건데, 이런 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 마음판을 마귀에게 다 내어줘서 큰일나는 거예요.
심하게 되면 강박관념으로 억압관념으로 우울증으로 비관주의로 더 심하면 자살까지 가는 거죠.
자살도 따지고 보면 타살이야. 마귀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 말씀드렸죠.
굉장히 큰 일이 일어나도 약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추스리고 조금 지나면 다 해결돼요.
터널이라는 것은 지나가고 나면 금방 햇빛이 나는 거예요.
터널은 빠져나가는 것이지 계속 무슨 죽을 때까지 가는 게 아녜요.
계속 터널이면 무저갱이죠.
계속 터널이 아닙니다. 조금 지나가는 거예요.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조금 지나가는 그저 소나기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그 때를 잘 추스려야 돼요. 인생을..
여러번 그런 고비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18절,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억지로 강제로 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면 그런 별것도 아닌것은 다 녹아버립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게 되면, 하나님이 너무 먼데 있으니까 이런 오해 저런 오해 싸우고 볶고 찌지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면 다 녹아버립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을 너무 괜히 과장 확대하지 말고 약간 그저 문제가 있었다 하고 담담하게 넘어가요.
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악한 사람에게는 안정이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어요.
악인들은 스스로 계속 불안해서 몸들바를 모르고, 앉을 때 설 때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쫓아오는 사람 없어도 도망가고 자기 발자국 소리에 놀라고.. 악인은 그런 거예요.
그래서,
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에 평강이 없고 하면 남들은 놔두고 우리 자신을 살펴 봐야 돼요.
정말 의인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어딘가 누군가 오해한거야.
그러고 넘어가는 겁니다. 넘겨요. 넘겨.
한장을 넘기면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너무 작은 일에 너무 크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항상..
그래서 여기 안정치 못하고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것처럼 요동하는 바다처럼, 요동하는 바다는 계속 밑바닥에 있는 것이 떠올라옵니다.
그래서 이 악인들은 그 스스로 평강을 누리지 못해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서 도망하지만 의인의 사자처럼 담대하다..
참 의롭게 정당하게 살아왔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조용할 수 있다는 거죠.
바울같은 분도 보면 처음에 고린도 교인들이 온갖 못된 말로 바울을 괴롭혔어요.
10가지 12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바울을 모함하고 참소하고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온갖 못된 소리 다 했어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한 거예요.
바울이 처음에 보면 굉장히 그것을 못견뎌 합니다.
못견뎌서 격한 편지를 써요. 쓰고 속상해하고 잠을 못자고 그리하다가 그랬었는데,
바울이 나중에 완숙해지고 성숙해졌을 때는 다 익은 포도주처럼 잠잠해지는 거야.
그리고 아예 스스로 그래요. 내가 죄인중에 괴수라고. 내가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라.
나 같은게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깊이 겸손해져서 쓴 편지를 보면 알거든요. 바울이 쓴 편지..
초창기에 쓴 편지는 부글부글 끓어요. 끓는게 많아요.
그런데 나중에 쓴 편지는 다 익은 포도주야. 잠잠하고 담담하게 쓰고 있어요.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가 요동하고 있어서 온전치 않다는 거야. 불안하다는 거야.
그래서 그런 말이 있죠. 공자의 말 속에 성경에는 그런 말이 별로 없는 것 같애요.
공자는 그런 말을 했어요. 이순(耳順)이라고..
60이 되니까 귀가 좀 순해진다 듣는게 순해진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순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귀가 있다는 건데, 글쎄 저도 내년이 만 60인데, 그 쯤 되면 좀 나아질런지 모르죠.
우리 성도들은 좀 그런게 필요합니다.
귀가 좀 순해져야 돼요.
누가 뭐 아무리 곡해해서 말해도 잘 고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말이 그 말이겠지 새겨들을 수 있는 그런 자세.
공자같은 그런 위대한 인물도 70이 되어서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를 어긋남이 없었다 그런 얘기를 해요.
사실은 저는 예수님 믿기 바로 직전에 그것을 읽고 있었어요.
사서삼경 중에 공자의 인격완성에 대해서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도자가 찾아온거야.
내가 대뜸 물었죠.
‘여기 보니까 공자님은 70되어서 그래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 했어도 법도를 어긋남이 없었다는 그런 인격 완성을 이루었다는데,
내가 전도사님이 소개하는 그 예수님을 믿어서 그렇게 될 수 있겠소?’ 물었더니 빤히 나를 쳐다보더라고. 될 수 있다.
그래가지고 제가 ‘그래요? 그럼 내가 교회 나가죠.’
나보고 교회에 나가자는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자진해서 나간라고 말 했어요.
내 말에 내가 올무가 되어가지고 안 나갈 수 있습니까? 내가 신사인데, 나간다면 나가야죠..
주일 낮에 나가는 것을 몰랐어요. 밤에 나가면 되는 줄 알고..
처음에 밤에만 나갔죠.
그런데 아이고 나는 그래도 내가 글줄이나 읽었다 생각하고 사서삼경도 어쩌고 저쩌고 할 때니까 내가 어디가서 남의 말도 못 알아듣는 숙맥은 아니니까 알아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요.
이사야가 뭔지 예레미야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뭐가 몇장 몇절 하는데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다가 정말 자아가 깨어지는, 이른바 중생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런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꽤 교만을 떨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어려서부터 나쁜일 하지 않고 우리 형님들 위에 두 형님들은 이것을 많이 해가지고 이걸해가지고 우리 아버지 속을 어지간히 많이 썩였어요.
우리 어머니와 함께 형님을 찾아다니고 했기 때문에 나는 크면 저런것은 안해야 되겠다. 그런 것도 안했지..
동네애들 나쁜짓 할 때 가능하면 빠졌거든요. 가끔은 하지만 자주는 안 했으니까..
하여튼 나는 우리 반에서도 남들 애들 때리는데 한번도 내 손으로 때려 본적이 없어요. 얻어맞기는 얻어맞았지만 누구를 때려본 적이 없어요.
싸움이 붙었을 때는 때릴 수 있지만 내가 먼저 누구를 해칠려는 그런 마음을 안 품어봤으니까..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한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자아가 다 무너지고 교만이 다 무너지는데, 그러고 나니까 정말 귀가 할례를 받은 것처럼 그냥 하나님 말씀이 들리고 들리는 것 뿐 아니라 보이는데, 그래도 그것 가지고는 안돼요.
그로부터 제가 그렇게 진리를 사모하고 성경을 알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했는데, 꼬박 15년 걸렸습니다.
77년부터 시작해가지고 92년에 제가 계시록까지 정리했으니까, 꼬박 15년 걸려서 정리가 된 거예요.
여러분 성경강좌에 와서 제가 강의한 내용 전부다 15년 쯤 되었을 때 다 정리된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다 정리하고도 한 15년 지나간 거죠.
그래도 아직도 혈기라든지 아니면 무슨 어떤 감정이라든지 이게 아직도 정리가 덜되어가지고 가끔은 이렇게 제가 참 성격이 급해요. 조금 더 감정이 말을 더듬고 말을 못하고 말문이 막히고 그렇거든요.
제딴에는 많이 좋아진거예요. 옛날에 비하면..
그래도 인격의 수양은 더 필요한 것 같고..
사도바울을 보니까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그런 말을 하더라고..
어디까지 있든지 계속 달려가야 돼죠. 앞으로..
하나님의 바라시는 차원까지 우리가 갈려면 아직도 요원한 거야.
꾸준히 자기를 다스리면서 공평과 정의와 그리고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거룩한 길로 가다보면 변화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씩 어떻든 간에 한번은 자기가 왕창 다 무너지는 그런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애요.
모태적부터 온 성도들은 모태에서 다 무너졌는지 모르겠는데, 무덤덤한 사람이 더러 있어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은 중간에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무너지게 되고, 그 이후에 바르게 성장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볼 때 늘 그래요. 늘 우리 중심으로 보지 말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말고 일단 사실파악을 먼저 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잘 보세요.
보게 되면 그러면 우리가 배울것도 보이고 우리가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아까 우리 명집사님이 성경강좌 한번 참여했거든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그런 말 하잖아요.
그런 말은 딴 교회에서 잘 못하는 말이죠.
이런 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을 제가 달리 했기 때문에 사람 중심으로 하지 않고 맨 구원중심 축복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봤기 때문에 한번 참여하고도 그런 것이 보인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을 정말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 말씀이니까..
보시면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을 알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격으로 점점 가까워질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서 800년간 860년간 훈련을 해도 훈련이 되지 않았는데, 바벨론에 가서 70년 동안에 기본적인 것을 깨닫게 했고 그들이 범죄한 것에 비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얻어맞았기 때문에 징계를 달게 받고 매를 순히 받고 나름대로 기초를 깨달아 돌아와야 될 그런 시점에서 주셨던 그런 말씀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잘 배워서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끼어드는 악령의 세계를 우리가 잘 분별하고 이 혼탁한 세상 가운데 진리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어서 만민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증인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 중심으로 매사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훈련도 이 말씀을 배우는 중에 계속 진행되어서 이제는 우리가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