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명사전 ![](https://t1.daumcdn.net/cafefile/pds87/2_cafe_2008_08_15_09_33_48a4cecb4a826)
철우스님
“자네들이 내 머릴 깎아 주겠는가”
▶사진설명: 구미 금강사에 주석할 무렵의 철우스님. 사진제공=정우스님
“자네들이 내 머리를 깎고 중을 만들어 주겠는가?”
1908년 12월
초하루 불과 13살 된 한 소년이 밀양 표충사에 찾아와 스님들을 향해 ‘엉뚱한 소리’를 했다. 기가 막힌 스님들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며
시비가 붙고 말았다. 하지만 소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밀양은 전통적으로 유생(儒生)들이 많이 사는 고장이었지만 소년의 행동에 스님들은 기가
찼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온 한 노스님이 소년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가.”소년은
“모친이 돌아가신 후 마음 붙일 곳이 없어 골똘히 생각하다가 밀양에서 제일 큰 절인 표충사에 와서 머리를 깎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소년은 표충사에서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표충사를 떠들썩하게 하며 출가한 13세 소년이
바로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이다. 철우스님은 뒷날 부산 선암사 혜월(慧月)스님의 법제자가 된 뒤 평생 참선 수행정진에 전념한
수좌(首座)였다. 1979년 철우스님이 구미 금강사에서 원적에 들자, 제방 선원의 수좌들이‘전국수좌회장(全國首座會葬)’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전국선원수좌회장’은 드문 영결식으로 수좌들에게 존경받던 철우스님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양친 잃고 13세에
표충사로 출가 경봉 스님과 평생 도반으로 지내
철우스님은 1895년 3월8일 경남 밀양군(지금은 밀양시)
밀양읍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기철(鄭其鐵) 선생이고, 모친은 천주옥(千株玉) 여사이다. 형제로는
일갑(壹甲)ㆍ장갑(長甲)ㆍ운갑(云甲)씨가 있다. 여자 형제도 둘이 있었다. 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스님의 본명은 정만갑(鄭萬甲)이었다. 본관은
동래(東萊).
전형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한‘소년 만갑’은 어려서 서당을 다니며 한학(漢學)을 익혔다. 여섯 살(1902년)부터
출가직전까지 밀양 금서서당에서 노재영 선생에게 통감(統監)과 사서(四書)를 배웠다. 출가이후 일생을 수좌로 살았지만, 공부의 바탕에는 한학에
정통했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스님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은 부모님이 별세한 뒤였다. 7세에 부친이 돌아가시고, 13세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힌바 있다. “의지할 곳이 없어 큰 형님 댁에 있으면서도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서당에 가는 일이 시들해졌다. 다른 아이들 부모는 아직 정정하게 살아계시는데, 부모님은 왜 일찍 저승으로
가셨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다시 못 오시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1908년 12월 초하루 표충사
스님들과 싸운 후 출가한 스님은 1년간 행자생활을 거쳐 이듬해 사미계를 받았다. 은사는 김정암스님. 계사는 김보경 스님이었다. 이때 스님은
경학보다는 참선에 뜻이 있어 해인사 선방으로 갔다. 이때 함께 선방에서 공부한 도반이 경봉(鏡峰, 1892~1982)스님이었다. 세속 나이는
경봉스님이 세살 위였으며, 출가연도도 경봉스님이 1년 빨랐다. 더구나 경봉스님의 고향도 밀양이었다. 두 어른은 평생 뜻을 같이하며
정진했다.
“참선 안 하려면 뭐하러 출가했노”
철우(1895~1979)스님과
경봉(1892~1982)스님은 해인사 선원에서 처음 인연이 닿았다. 이때가 1910년 스님의 세속나이 15세였다. 두 스님은 처음부터
경학(經學)보다는 참선(參禪)에 뜻을 지니고 있었다.
철우스님의 상좌인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의 기억에도 유독 참선을 강조했던
은사의 모습이 또렷하다. 정우스님이 들려주는 철우스님의 육성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선을 해야지, 참선을 안 하려면 뭐 하러 집을 나서
출가를 했노. 머리를 깎았으면 공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아들 농사지으며 사는 게 옳지. 참선을
않고 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용없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방망이를 못 면한다.”
▶사진설명: 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오른쪽에서 두번째)과 함께한
철우스님(안경쓴 스님). 사진제공=정우스님
철우스님은 수좌들이 오면 반갑게 맞이했다. 해제 때 수좌들이
찾아오면“공부하느라 힘들었지”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디서 살다온 수좌인고. 그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고”라며 수좌들의 정진을 당부했던
철우스님이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수좌들에게는 반드시 여비를 챙겨 주었다. 여의치 않으면 당신의 의복이라도 건네주어야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한번은 빨랫줄에 걸어놓은 양말을 수좌의 걸망에 넣어주며 “열심히 참선 정진하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정진하는 수좌 사랑 극진 ‘생식수좌’ ‘묵언수좌’ 별칭
철우스님이 노년시절
구미 금강사에 주석할 때의 일이다. 지금은 사라진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정오가 되면 사이렌이 울렸던 시절이다. 젊은 수좌가 찾아왔는데 마침
사이렌이 울렸다. 인사를 받은 철우스님이 가만히 있다가 젊은 수좌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여”수좌가 답했다. “무슨 소리
들으셨습니까” 노스님과 젊은 수좌의 법거량이 벌어진 것이다. 철우스님이 말했다. “소리를 듣고 안 듣고도 없어야 하는 거여”
스님은
상좌들에게도 참선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을 경책했다. 상좌가 혹시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선방에서 정진하고 왔다면 웬만한 일은 모른 척 하였을
정도였다. 그만큼 참선의 소중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참선 안하면 출가사문이 될 필요가 없어.”(철우스님)
해인사 선원에서 결제한
후 현풍 유가사 도성암에 방부를 드릴 때의 일이다. 이때 안변 석왕사에서 온 유현 수좌가 방부를 드리려 하자, 원주스님이 “식량이 없어 안
된다”며 거절했다. 이 일을 목격한 스님은 이때부터 10년간 생식(生食)과 일체 말을 하지 않는 묵언 수행을 병행했다. 그 뒤로 제방선원에서는
철우스님을 ‘생식수좌’ ‘묵언수좌’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스님은 참선을 시작한지 4년째인 1913년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
지견(知見)이 열렸다. 그때 지은 게송이다. “心月孤圓 萬古空(심월고원 만고공) / 光含天地 照無窮(광함천지 조무공)/ 若能識得 個中意(약능식득
개중의) / 震震刹刹 極樂宮(진진찰찰 극락궁)”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어서 만고에 공(空)했고, 빛은 천지를 머금고
비추어 다함이 없도다. 만약 능히 이 가운데 이 뜻을 알아 얻을 것 같으면, 온 세계 조그마한 티끌까지도 모두 극락의
집이로다.”
27세 젊은 나이 ‘소년조실’
혜월스님
인가.법호 내려 제방 선원 조실 두루 역임
▶사진설명: 혜월스님이 철우스님에게 지어준 인가게송(認可偈頌). 사진제공
정우스님
1913년 태백산 각화사에서 깨달음의 향기를 맛본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은 그 뒤로 제방선원에서
화두를 들었다. 통도사를 비롯해 지리산 칠불선원ㆍ오대산 상원사 선원ㆍ금강산 마하연 등에서 정진에 몰두한 스님은 묘향산 금선대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하고 게송(偈頌)을 남겼다. “吾道(오도) 本虛靈(본처령), 千古(천고) 云呵寧(운아령), 萬山(만산) 杜字夢(두자몽), 忽罷(홀파)
一枝靑(일지청)”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나의 도는 본래 허허하면서도 영영한데, 천고에 정녕이 말했거늘, 일만산에 두견새가 꿈을 깨니, 문득
나무 한 가지가 푸르더라.”
당시 보현사에는 수월(水月, 1855~1928)스님이 주석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수월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3대 도인으로 존경받는 어른이다. 북방에서는 수월, 중원에서는 만공(滿空), 남방에서는 혜월(慧月)스님이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철우스님이 게송을 수월스님에게 보이니 수월스님은 “정말 공부를 잘 했다”면서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이어 수월스님은 “이제는 여기에
머물지 말고 남방으로 내려가 정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라”고 당부했다.
당시 혜월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고 있었다. 걸망을 메고
보현사 일주문을 나서는데 마침 수월스님이 감자밭을 메고 있었다. 합장 반배로 인사를 드리며 수월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남방으로 내려가
중생교화를 어떻게 할까요.” 그 말을 들은 수월스님이 호미를 들고 감자밭 한 가운데에서 몸을 한바퀴 돌리면서 두 팔을 벌리고 춤을 추었다.
수월스님은 춤을 추며 “如是(여시) 如是(여시)”라고 외쳤다. 이에 철우스님도 밭에 놓인 호미를 들고 수월스님과 똑같이 춤을 추면서 말했다.
“여시여시하겠습니다”그러자 수월스님은 철우스님의 손을 잡고 한마디 더 했다. “다시 의심할게 없구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부산
선암사에 도착한 철우스님은 혜월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철우’라는 법호를 받은 것도 이 때이며 스님의 세속나이 25세였다. 혜월스님은
철우스님에게 ‘인가게송(認可偈頌)’을 지어 건넸다.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性(본무진실성)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인가를 받은 이후 철우스님이 혜월스님을 모시고 부산 선암사에서 정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통영 용화사
도솔암에서 혜월스님에게 조실을 청하는 문서인 ‘조실청장(祖室請狀)’을 들고 왔다. 사시공양이 끝난 후 혜월스님은 대중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철우스님 앞에 ‘조실청장’을 놓게 하고 삼배의 예를 올리도록 했다. 철우스님은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실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이때부터
스님은 통영 용화사 도솔암 조실로 주석하면서 수좌들을 지도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조실에 오른 철우스님의 당시 별명은 ‘소년조실’이었다. 하지만
공부에 빈틈이 없고 화두를 타파하는데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에 철우스님의 주변에는 정진하려는 수좌들이 모여들었다. 철우스님은 이어 동화사 금당선원
ㆍ파계사 성전암ㆍ순천 선암사 칠전선원ㆍ금강산 마하연ㆍ선산 도리사 태조선원의 조실을 역임했다.
‘삼정승’의 만행
일화 유명
오늘은 ‘삼정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 삼정승(三政丞)은 조선시대 관직의 핵심에 있었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풀 삼정승(三鄭僧)은 ‘정씨 성을 지닌 세분의 스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각별한
도반 사이였던 철우(鐵牛)ㆍ운봉(雲峰)ㆍ운암(雲庵)스님의 속성이 모두 정씨였기에 삼정승으로 불리었다. 철우스님 상좌인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도 “평소 은사스님께서 운봉ㆍ운암스님과 함께 공부했던 시절이 좋았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다”고 회고했다.
세 스님은 함께
만행을 다니며 정진했다. 스님들이 나타나면 주위에서 “삼정승이 나타났다”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철우스님은 말씀을 아꼈고, 운봉스님은 점잖은
편이었다. 하지만 운암스님은 장난이 잦았다. 삼정승이 팔공산 동화사를 거쳐 태백산 각화사로 갈 때의 일이었다. 이날 세 스님은 세 번이나 마을
사람들과 시비(是非)가 붙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온다.
운봉.운암스님과 함께 정진 여러운 시절 만행의
풍속도
◀사진설명: 1964년 구미 금강사에 주석하던 시절 철우스님(오른쪽)이
상좌 정우스님과 함께 한 모습.
동화사를 거쳐 한 마을에 삼정승이 들어섰다. 마침 공양시간이 되어, 한 집을 찾아갔다.
입담 좋은 운암스님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가는 중입니다. 요기나 주시요.”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운암스님이 요기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자, 한참 만에 부인이 나와 스님들을 향해 쏘아 붙였다. “이보시오. 남의 아들은 병에 걸려 죽느니 사느니 하는데, 요기를
달라니요.” 물러설 운암스님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요기를 주면 아들이 나을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고생을 더 할 거요.” 그 소리를 들은
부인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운암스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철우스님이 간신히 뜯어 말려 수습이 되었다고 한다.
같은 날 삼정승이
고개를 넘어섰다. 한 사내가 지게작대기를 들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가 스님들을 향해 “여기 웬 계집 하나 넘어가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운암스님이 점잖게 한마디를 했다. “그래, 방금 전에 계집 하나가 내빼더라.”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은 사내가 말했다.
“내가 계집이라고 한다고, 스님도 계집이라고 합니까.” 운암스님과 사내가 싸움 붙을 것을 말린 것은 역시 철우스님이었다.
점심공양도
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시비가 걸려 신심이 지칠 무렵이었다. 해는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 동네 어귀에 도착했는데, 마침 샘이 있었다. 샘을
둘러막은 돌담 위에 운암스님이 걸망을 내려놓다가, 걸망이 풀어지고 말았다. 그로인해 우물이 엉망이 되었다. 지금 같은 양말이 아니라, 헝겊으로
발을 동여맨‘양말’을 신던 시절이다. 만행 때문에 며칠 동안 신은 양말까지 우물에 빠져버린 것이다. 때문에 우물은 더 이상 식수로 사용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마을사람들과 싸움이 붙고야 말았다. 그 싸움도 철우스님과 운봉스님이 겨우 중재해서 마무리됐다.
지금은 만행
풍속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 삼정승 이야기는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고초를 겪으면서 정진했던 노스님들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그냥 앉아 배꼽만 보면 견성 못해” 혜월스님과 경허선사 유골수습 “화두하고 씨름해서
결판내야”
▶사진설명: 1963년 경북 의성 묘선암에서 생전 예수재 법회에 참석한
철우스님(가운데). 사진제공=정우스님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이 금강산 신계사에 머물 무렵 설봉스님이 입산
출가했다. 당시 신계사에는 수좌 30여명이 정진하고 있었다. 설봉스님은 철우스님보다 늦게 출가했지만 세속 나이는 10살이나 많았다. 어느 날
아침 설봉스님이 철우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스님, 출가자가 되려면 스승은 누구로 해야 됩니까?” 그 말은 들은 철우스님이 답했다. “신계사에는
스님들이 많이 주석하고 있으니, 그 가운데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스님 앞에 가서 절을 하고 예를 올리면 됩니다.”
같은 날 사시
공양 시간이 되어 스님들이 모두 대중방에 모였다. 그때 설봉스님은 철우스님 앞으로 나와 절을 세 번 올리고, “은사스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철우스님은 한사코 은사가 되기를 사양했다. 결국 설봉스님은 다른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진했다. 하지만 선지와 학문이 출중했던
설봉스님은 철우스님을 은사처럼 모시면서 정진했다고 한다. 설봉스님은 당신이 해야 할 상단 법문(法門)도 철우스님에게 양보할 정도로 깍듯이
모셨다.
앞서 연재에서 밝힌 것처럼 철우스님은 혜월(慧月)선사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금강산에서 수월(水月)스님의 지도를 받은
철우스님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진할 때 혜월스님은 “철우수좌의 정진은 후학들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처럼 각별한
사이였던 혜월스님과 철우스님의 수행담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철우스님이 혜월스님을 모시고 경허(鏡虛)스님의 유골을 수습할 때의
일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철우스님의 상좌인 정우스님의 말이다. “혜월스님께서 철우스님을 비롯한 몇 분의 스님과 함께 수덕사에서 만공(滿空)스님을
모시고, 행방을 감춘 지 한참 된 경허스님의 묘소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혜월ㆍ만공스님과 함께 경허스님의 유해를 발견한 뒤 화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허스님의 유골은 장대한 황골(黃骨)이셨다고 합니다. 다비식을 하면서 혜월스님께서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뒷날
은사스님께서는 그날 혜월스님의 눈물을 처음 보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철우스님은 구미 금강사를 주석처로 삼은 후 대중을
위한 설법을 여러 차례 했다. 특히 결제철과 해제철을 맞아 설한 법문은 수좌뿐 아니라 재가불자의 정진을 독려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63년
4월15일 하안거 결제를 맞아 구미 금강사 반야선방에서 행한 법문에서 스님은 “수좌들이 진정으로 공부를 하려면
대분심(大忿心)ㆍ대의심(大疑心)ㆍ대발심(大發心) 없이는 견성(見性)할 수 없다”고 일렀다. “고인(古人)들은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크게 깨친다고
했습니다. 선사들은 어떻게 견성했는지, 다른 스님들은 견성하여 평생사를 마쳤는데 나는 왜 못하는가라는 대분심이 가슴에 응어리 져야 공부를 뚫어낼
수 있습니다. 그냥 앉아서 꾸벅꾸벅 배꼽만 내려다보고 졸기만 하면 인연을 맺을지는 몰라도 견성해서 장부의 일대사를 마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이
결제이니 만큼 내 몸 축나는 것은 생각지 말고 화두하고 씨름하여 결판을 내 보십시오.”
철저한 묵언수행
‘벙어리스님’ 별명
◀사진설명: 구미 금강사 조실방 앞에서 상좌들과 함께 한 철우스님(가운데
앉은 스님). 사진제공=정우스님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은 일제 강점기 옥고(獄苦)를 치루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스님이 양산 미타암에서 머물며 정진할 때, 3ㆍ1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의 궐기 소식은 경상도까지
도달했다.
독립을 열망하는 양산ㆍ동래 등 부산지역 주민들은 모월 모시를 기해 만세시위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궐기문을 작성한
주민대표들이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던 철우스님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궐기문의 일부 문구를 수정받았다.
며칠 뒤 양산ㆍ동래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관련자들이 연행됐다. 일경의 가혹한 고문을 받던 시위 주모자들이 궐기문 작성에 철우스님이 관여됐다는 실토를 하고
말았다. 곧바로 일경에 강제 연행된 스님은 갖은 고문을 받았다. 일경들은 스님의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것은 물론, 손톱과 발톱에 못을 치는
고문을 가했다. 더구나 스님의 온몸에 상상하기 힘든 ‘모욕적인 고문’을 했지만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스님은 묵언(默言) 정진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궐기문을 갖고 주민대표들이 왔을 때도 묵언하고 있었던 까닭으로 한마디 말도 않고, 단지 문안 가운데 일부만을 고쳐주었다.
묵언수행을 철저하게 지켰던 스님에게 주위에서는 ‘벙어리 스님’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다.
만해스님과 각별한
인연에 독립운동 참여 수차례 옥고
일경에 체포되어 말문을 열지 않은 스님은 궐기문을 작성해 준 일로 인해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묵언정진을 했던 스님은 붓마저 들지 않았다. 이유는 이렇다. 스님의 생전 육성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몸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하고, 왜놈들이 손톱과 발톱에 못을 치는 등 갖은 모욕을 받았으니, 나는 부모님께 불효를 한 것이다. 또 스승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으니 내 다시는 붓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1920년대 이후 스님의 친필 글씨는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철우스님이 출감하는 날 부산 인근의 스님뿐 아니라 서울에서 만해(卍海, 1879~1944) 한용운 스님도 찾아왔다고 한다. 이때 찾아온
많은 스님들이 “벙어리 수좌 왜 말을 못하지, 이렇게 몸을 못 쓰게 되어 나왔어”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좌인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은 “은사스님께서 한학에 아주 조예가 깊으셨는데, 글씨를 남기시지 않아 지금도 아쉬운 점이 많다”면서도 “그러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그 일이 연유가 되어 절필(絶筆)하신 점은 지금의 후학들도 깊이 배워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철우스님은 만해스님과 뜻이 통했던 동지(同志)였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해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했을 무렵 철우스님은 또 한번 수감이 되었다. 입적 소식을 듣고 상경한 철우스님이 “삼천리 강산아
울지 마라, 연(緣)이 오고 때가 오면 다시 빛을 찾으리라”고 땅을 치며 만해스님을 추모했기 때문이다. 만해스님의 입적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반드시 조국 광복은 이뤄질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본경찰에 의해 스님은 또다시 경찰서에 구금되고
말았다.
“수좌들이 무슨 살림을 합니까”
▶사진설명: 구미 금강사에서 상당법어를 하는 철우스님. 사진제공 정우스님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은 구미 금강사에 머물면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경산림(經山林)’을 많이 했다. 특히
정월달에 실시한 경산림에서는 주로 〈유마경〉을 강의했다. 참선정진을 강조했던 스님이었지만, 경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본래
한학에 정통했던 스님의 강의는 원근(遠近)에 널리 알려졌다. 신도뿐 아니라 스님들도 경산림에 동참했다. 심지어 성주군 월악면에 사는
유생(儒生)들도 경산림을 듣기 위해 달려왔을 정도였다.
벽진 이씨 문중의 유생들은 스님을 마을로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 상좌인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은 “큰스님을 모시고 월악면에 있는 유생들의 재실에 가서 묵은 적이 여러 번”이라면서 “스님은 한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도 화두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회고했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유생들에게 철우스님은 “죽을 때 어디로 가는
거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유생들은 아무 답도 하지 못했고, 그러면 스님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 마음을 내어 보시오. 지금
선생들이 갖고 있다고 믿는 마음을 나에게 내어 보시오.”유생들은 경청할 뿐 답을 내지 못했다. “사람이 100년을 사는 것이 아니니,
이것(마음이 무엇인지)을 알면 죽는 것이 겁이 안 나고 두렵지 않은 것이오.”(철우스님)
스님에게 ‘시심마(是甚磨)’의 화두를 받은
유생들은 “멀리서 도인스님이 오셨다”면서 별미인 국수를 내오는 등 극진한 예우를 아끼지 않았을 만큼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구미 금강사 ‘경산림’ 명성 문중 유생들도 설법에 감화
화두를
소중하게 여겼던 스님의 또 다른 일화. 철우스님이 대구 동화사 금당에서 한철 정진을 마치고 시내에 있는 보현사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동화사 금당에서 함께 화두를 들었던 고송(古松)스님과 한송(寒松)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두 스님은 보현사에서 원주(院主)와 별좌(別座) 소임을
보고 있었다. 절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두 스님은 소임을 제대로 보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나서다 철우스님을 만났다. 철우스님은 그 자리에서
‘장바구니’를 뺏어들고 내동댕이쳤다. 깜짝 놀란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이 철우스님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철우스님의
경책은 이랬다. “수좌들이 무슨 살림입니까. 제대로 공부하려면 한시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철우스님의 ‘호통’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은 곧바로 보현사로 돌아와 걸망을 챙겨들고 선방으로 갔다고 한다.
철우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담은
〈철우선사법어집〉에는 당시 일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철우스님은 고송ㆍ한송스님 보다 법납이나 세속 나이가 10년 위로 요즈음 같으면
후학이라 하여도 경책을 받아들여 단번에 걸망을 짊어지는 스님은 보기 드문 일이며, 큰스님의 경책의 말씀을 스승과 같이 받아들이는 후학들의 자세가
아쉬워지는 시대이다.”
신도들이 창건한 금강사에 주석
◀사진설명: 철우스님이 20세때 그린 선화로 선객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사진제공 정우스님
철우(鐵牛, 1895~1979)스님의 키는 대략 170cm 정도. 당시로서는 작지 않은 법체를
지녔던 스님이었다. 늘 하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수좌들을 보살폈다. 때문에 스님을 따르는 수좌들이 많았다. 후학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스님이었다.
서운(瑞雲)스님의 출가도 철우스님의 법문을 들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출가 이전에 대구에서
전매서장(專賣署長)의 공직에 있었던 서운스님은 철우스님이 법회에서“활연대장부가 돼야지, 죽은 장부가 되서야 되는가. 활연대장부는 바로
대자유인(大自由人)이다”라는 법문을 듣고 입산했다. 또 김해 육조사에 주석했던 대의(大義)스님도 철우스님의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했다.
성철(性徹)스님도 철우스님과 인연이 깊었다. 산철에 성철스님이 오면 “철수좌가 공부한다고 애썼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향곡(香谷)스님이
오면 “향곡이 왔나”라며 반갑게 맞이했던 어른이 철우스님이었다. 종정과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청담(靑潭)스님의 속명인 ‘순호’를 기억하고 “순호
수좌가 총무원장이 되었다지, 종단을 위해 큰일을 할 거야”라는 따뜻한 격려를 보냈다.
입적하기 전까지
도량청소 영결식은 전국 수좌장으로
스님이 1950년대 초반 이루 줄곧 주석했던 금강사와의 인연은 1945년
해방 이전으로 올라간다. 전국의 선방을 옮겨 다니며 정진하던 스님이 금오산 마애불에서 정진할 때의 일이다. 마애불 밑에는 용샘이라 불리는 샘물이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화두를 들고 일념(一念)하고 있으면, 호랑이가 근처에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도 참선을 하고 있다가 눈을 뜨면, 또 다시 근처에 호랑이가 다가와 꼬리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상좌인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이 은사인 철우스님에 들은 것이다.
이 같은 인연으로 해방 후 다시 구미를 찾은 철우스님은 해운사에 며칠 머물다
마애불을 친견하러 다녀오곤 했다. 그때 한 신도가 스님에게 현재의 금강사 자리에 절을 창건해 스님이 머물 것을 권했다. “나에게 머물 절은
필요하지 않다”고 한사코 사양했지만, 신도들의 뜻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여 지은 절이 1952년에 창건한 금강사이다.
철우스님의 하루 일과는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입적하기 며칠 전까지도 몽당 빗자루를 들고 도량을 깨끗이 했을 정도로
솔선수범을 보였다. 평생을 참선정진해온 스님은 1979년 3월12일 오후 11시 20분 원적(圓寂)에 들었다. 향년 84세를 일기로 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스님의 영결식은 수좌장(首座葬)으로 모셔졌다. 수좌장으로 장례를 모시는 예는 드물다. 그만큼 수좌들 사이에서
존경받던 스님의 행장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1979년 3월16일 오전 9시 구미 금강사에서 거행된 철우스님의 전국 수좌장에는 400여명의 스님과
700여명의 신도가 운집했다. 발인에서는 석암스님이 추도문을, 성공스님이 독경을 했다. 이날 스님의 영결식은 금강사를 출발해 오전 11시
구미역에서 고별식을 갖고, 오후1시에 직지사 다비장에서 엄수됐다. 현재 스님의 부도탑은 구미 금강사에 모셔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