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공간
Mensch und Raum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Otto Friedrich Bollnow 1903~1991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자. 괴팅겐 대학교의 철학 및 교육 부교수. 튀빙겐 에서 철학과 교육을 위한 의장직을 역임했으며, 1980년 독일 프리메이슨 문화상을 수상했다.」
[서론]
1. 문제 제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인간 존재의 시간적 구성 틀 문제는 실로 현대철학의 기본 주제라고 할 만큼 지난 수십 년 동안 맹렬한 기세로 철학계를 점령했다. 베르그송은 이를 처음으로 지속의 문제로 파악해,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과 달리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라는 말로 인상 깊게 표현했다.
이 문제와 관련된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헌 가운데 여기서는 외젠민코브스키(1885~1972.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열증>, <살아가는 시간>, <우주론을 향해>등의 저술이 있다.)의 기본서인 <살아가는 시간>만 언급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2. 수학적 공간과의 차별성
시간에서는 시계로 잴 수 있는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시간과 살아 있는 인간이 구체적으로 체험 하는 시간을 구별하듯이, 공간에서도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다루는 추상적인 공간과 인간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 없이 공간이라는 말을 쓸 때는 흔히 미터와 센티미터로 측량 가능한 3차원의 수학적 공간을 생각한다. 바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공간이고, 실제 삶에서(이를테면 새 집에 덩치 큰 옛날 가구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할 경우)측량 가능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가늠할 때마다 기준으로 삼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간의 특정한 일면에 불과하고, 직접 경험하는 구체적인 공간은 결코 이런 추상적인 수학적 공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처럼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간다. 그래서 공간의 특성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것을 깊이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공간 연구는 그간 당연시해온 관점의 전환, 또 거의 주목받지 못한 삶의 근본으로 회귀를 전제하는 특별한 철학적 과제이다.
수학적 공간의 핵심 특성은 균질성이다. 즉
1) 어느 점도 다른 점보다 우월하지 않다. 수학적 공간에는 원래 정해진 좌표의 중심점이 없다. 우리는 편의에 따라 간단히 좌표를 이동시켜 아무 점이나 좌표의 중심점으로 만들 수 있다.
2) 어느 방향도 다른 방향보다 우월하지 않다. 간단히 좌표를 돌리면 공간의 어느 방향이라도 좌표축으로 만들 수 있다.
수학적 공간의 내부는 나뉘어 있지 않으며 완전히 균일하다. 그러므로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연장된다. 반면 체험 공간에는 이 규정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1)체험공간에는 우월한 중심점이 있다.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 중심점은 체험하는 사람이 머물러 있는 공간 속의 장소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정해져 있다.
2)체험 공간에는 우월한 좌표계가 있다. 그 좌표계는 인간의 신체 그리고 중력에 저항하는 직립 자세와 관련이 있다.
※위의 특성에 몇 가지 규정을 덧붙여 보완하겠다.
3)체험 공간 속의 구역과 장소는 각각 질적인 차이가 있다. 체험공간은 이들의 상호 관계를 토대로 내용상 다양하게 분류된다. 반면 수학적 공간은 그렇지 않다.
4) 체험공간에는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유연하게 넘어가는 통로도 있지만 뚜렷하게 구분되는 경계선도 있다. 체험공간에서는 심한 변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
5) 체험공간에서는 무한성의 문제도 근본적으로 복잡해진다. 체험공간은 처음에는 폐쇄된 유한한 공간으로 주어지나 훗날의 경험을 통해 무한히 넓은 공간으로 확장된다.
6) 체험 공간은 전반적으로 가치중립적인 영역이 아니며, 삶에서 인간을 돕거나 방해하는 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체험공간은 인간의 생활터전으로서 우리 삶을 지탱하기도 하고 가로막기도 한다.
7) 체험 공간 속의 모든 장소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곳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체험공간을 기술할 때 언급하는 개념들은 인문학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범주들이다.
8)체험공간은 인간과 분리된 현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체험공간은 인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3. 체험공간의 개념
체험공간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열려 있는 공간을 뜻한다. 뒤르크하임은 앞에서 언급한 저술에서 이 용어 대신 ‘살아가는 공간(gelebter Raum)이라는 말을 썼고, 민코브스키도 같은 뜻을 지닌 에스파스 베퀴(espace vecu)라는 말을 사용했다.
4. 인간 삶의 공간성
현존재가 공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여느 물체와 똑같이 자기 몸으로 일정한 공간을 채운다는 뜻이 아니다. 즉 인간이 일정한 부피를 취하고 있고, 가끔씩 -성경에 나오는 바늘귀를 통과하려는 낙타처럼 - 좁은 입구로 들어가지 못할 때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살면서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관계를 통해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민코브스키도 똑같은 의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삶은 공간으로 뻗어나가지만, 그렇다고 기하학에서 말하는 의미대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살기 위해 확장해야 하고 관점을 가져야 한다. 공간은 시간과 다름없이 삶의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삶이 공간 속에서 진행된다는 말은 조금 부주의한 표현이다. 인간은 물건이 상자 안에 있는 식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공간의 관계는, 마치 처음에는 공간이 없는 주체가 존재하다가 나중에 공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삶은 근원적으로 인간과 공간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생각에서조차 공간과 떨어질 수 없다.
공간은 인간과 무관하게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공간적인 존재인 이상, 다시 말해 인간이 공간을 구성하고 자기 주변에 공간을 펼치는 존재인 한에서만 공간은 존재한다.
공간을 만들고 공간을 펼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간의 근원일 뿐 아니라 공간의 영원한 중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은 달팽이가 제 집을 이고 다니듯이 인간도 자신의 공간을 이리저리 가지고 다닌다는 뜻으로 거칠게 이해하면 안 된다.
인간 삶의 공간성과 인간이 체험하는 공간은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으며 서로 대응한다. ~~~이 책에서는 체험공간의 탐구에서 출발해 인간의 공간성 구조를 역 추론 하려 한다.
이 책은 체험공간이라는 문제의 중요성과 생산성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려는 예비적 성격의 저술이다. 연구에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주목하기 위해 나는 다방면으로 눈길을 돌려 개별 학문에서 제시한 영구 성과들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통일된 모습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1부] 공간의 기본적인 분류
1.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개념
1) 자연속의 장소
2) 그릇으로서 공간
2. 일상에서 쓰이는 공간 관련 용어와 영어의 역사
1) 일상적 어법
2) 언어사적인 정보
• 공간
공간은 계속되는 움직임이 사물로 인해 방해받는 곳에서 끝난다. ~~~공간은 ‘살아 있다’는 의미를 가진 활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한다.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 공간이라는 말을 쓸 때에도 그 존재가 움직이고 그리하여 생명체로 간주될 때에만 그런 용법이 가능하다. 얼마나 공간이 필요한지는 각 개인의 요구에 따라 달라진다.
• 공간 관련 동사들
패배한 적군은 군대를 철수시켜 싸움터를 내준다. 이사를 나가는 임차인은 집을 비울 때 자신의 가구를 빼내 새로운 입주자에게 공간을 마련해 준다.
• 요약
3) 공간 속의 곳과 위치
• 곳
• 위치
위치도 공간 속의 특이한 점을 지칭 한다.
• 자리
• 장소
• 장
3. 자연에 따른 좌표계
1) 수직축과 수평면: 직립 인간
수학적 공간의 특징이 균질성인 데 반해 체험공간의 특징은 비균질성이다. ~~~체험공간에는 임의로 돌릴 수 있는 동등한 축방향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우월한 특정 방향이 있고 이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통해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다.
2) 지표면
3) 바닥의 견고함과 바닥의 상실
4) 앞과 뒤: 이동 중인 인간
5) 오른쪽과 왼쪽
4. 공간의 중심
1) 공간의 기점
인간을 공간 경험의 주체로 생각할 때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 공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럴 때 공간의 위와 아래,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은 그의 신체에 의해 규정된다.
2) 떠남과 돌아옴
우리는 일상에서 두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떠나고” “돌아오는” 행동이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정지 점에서 이탈하면서도 이것을 일시적인 이탈로 이해하고 다시 처음의 출발점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내가 카페에 앉아 있다가 신문을 사러 가려고 “내” 좌석에서 일어날 경우라면 나는 볼 일을 본 뒤 조금 전에 앉아 있던 내 좌석으로 돌아온다. 다른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좌석이 기준점이다. 그러나 나는 빨리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내 방을 떠났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올 수도 잇다. 이 상황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기준점은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일시적인 체류 점으로 변하고, 이제부터는 내 방과 내 방이 있는 집이 나의 움직임의 중심이다.
인간에게 자기 집과 가족이 있다고 해서 절대적인 종착점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해 과거에 경솔하게 포기했거나 자신의 의지와 달리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옛날 거주지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그러면 “향수”에 시달린다. 향수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집의 이면에 있는 고향은 더 이상 본래의 기준 점은 아니지만 모든 공간 관계의 중심 영역이다. 하지만 아직 절대적인 기점은 주어지지 않았다. 고향도 낯설어질 수 있고 고향을 떠난 뒤 인간은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도 있다.
3) 중심을 둘러싼 질서
공간 관계의 체계는 집을 출발점으로 해서 분류된다. 내가 집을 떠나 찾아갔던 곳들은 공간체계의 중심점인 집을 기준으로 얽혀 있다. 이사를 갈 때는 새 집을 기준으로 세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된다.
도시 내에서 이사를 가면 도시 전체는 전혀 다른 성격을 획득한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새로운 도시를 기준으로 주변 경관을 비롯해 다른 도시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되면서 지금까지 외곽에 있던 곳은 중심으로 들어오고 중심은 외곽으로 밀려난다.
현대의 대도시에서는 이 관계가 옛날보다 알아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어떤 유목민들은 성스러운 기둥을 가지고 다니면서 정착하는 곳마다 그 기둥을 새로 세웠다고 한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지구상에서 유랑하면서도 중심을 가지고 다닌다는 점, 즉 체류 지를 바꾸더라도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 세계의 유한성
5. 방위
1) 공간에서 방향 잡기
우리가 익숙한 장소를 떠나 어떤 이유에서건 외부공간으로 멀리 나아 갈 때는 그곳의 길을 파악해야 한다. 즉 목적지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거주지와 가까운 익숙한 지역에 있을 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 지역의 길을 알고 잇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을 기점으로 이 길을 서서히 파악해왔고 그 길에서 이동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익숙한 지역을 벗어나 미지의 땅으로 가면 우리는 길을 분명히 확인한 뒤 가야할 방향을 정해야 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지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의 거주지를 기점으로 뻗어 잇는 방향들이다. 즉 태양의 운행과 함께 정해지는 동서남북의 보편적인 네 방위다. 인간은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삼아 어느 지역에서든 “방향을 잡는다.”
2) 신화적 지리
3) 다른 종류의 방향 도시
4) 선호하는 자리
5) 길의 방향과 삶의 영역
6. 지평선과 시점
1) 지평선의 이중적 측면
어느 공간을 유한하다고 말하려면 공간이 끝나는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 ~~~낮에 뚜렷하게 보이는 공간들은 지평선이라는 다른 종류의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 지평선(Horizont)이란 말은 그리스어 어원에 의하면 둘러싼다는 뜻이다.
지평선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지리학적 정의로는 하늘이 지표면에 얹힌 곳에 있는 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지평선은 어떤 물체에 의해 가려지지 않는 이상 일정한 지역 안에서 우리의 자연스러운 시야를 사방으로 에워싼다. 인간이 좁은 산비탈에서 평지로 나가면 지평선이 열린다.
지평선은 좁을 수도 있고 넓을 수도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지평선은 넓어지고, 우리의 시선이 넓게 펼쳐진 평지를 훑으면 엄청난 범위로 확대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간은 결코 자신의 지평선을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지평선은 아래에 머물지 않고 저 너머에서 같이 솟아오른다. 지평선은 언제나 인간이 서 있는 높이에 머물러 있다. ~~~수평으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먼 곳이 아무리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잡아끌어도 우리는 결코 지평선에 도달하지 못한다. 멀리 나아갈수록 지평선도 그만큼 뒤로 물러난다. 우리는 지평선에 가까이 간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지평선의 이중성격을 반 퍼슨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평선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계지만 그 못지않게 인간이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는 “도달 불가능한 한계와 전진의 공간”이라는 말로 “지평선의 이중 측면”을 강조했다.
반 퍼슨은 그의 논문에서 ~~~지평선은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고 인간과 무관하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지평선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지평선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일부다. 인간이 공간에서 사물과 마주칠 때는 모두 지평선의 범위 안에서 만난다. 지평선이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시점
모든 사물의 모습은 필연적으로 일면적이다.
3) 비유적인 의미의 시점과 지평
[2부] 넓은 세계
1. 넓은 곳, 낯선 곳, 먼 곳
1) 새로운 문제 제기
2) 무한히 넓은 공간으로의 진출
새로 경험한 우주의 무한성은 지리상의 발견과 마찬가지로 훨씬 위험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주의 광대함은 공허도 의미했다. 초기의 감격이 사그라들고 각성이 시작되면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 공간에 처한 인간의 극한 외로움이었다.
3) 바로크의 실내 공간
4) 좁음과 넓음
일반적으로 독일어에는 드넓은 공간을 가까운 주변 공간과 구별하는 세 가지 개념이 있다. 바로 넓은 곳, 낯선 곳, 먼 곳이다. 이 세 개념은 관련 상황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다.
넓다는 개념부터 설명하자. 이 말의 의미는 반대 개념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넓은 것의 반대는 좁은 것이다. 옷이나 신발은 꼭 끼거나 클 수 있다. 옷이나 신발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몸이나 발로 적절히 채워지지 않아 주변이 헐렁하면 크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 사람이 뚱뚱해지면 옷이나 신발은 너무 낄 수 있다. 거주공간도 넓을 수 있다. 반대로 너무 가까운 곳에 신축 건물이 올라가면 전망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좁은 계곡에서 평지로 나가면 시야가 넓어진다. 좁은 거리와 골목길이 있고, 바다 양옆에 육지가 바짝 붙어 있는 해협이 있다. 반대로 널찍한 장소와 널찍한 경관도 있다. 또 무한히 넓은 바다라는 말도 사용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좁거나 넓을 수 있다. 본래 좁은(Enge)을 뜻하는 불안감(Angst)이 들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즐거운 기분이 충만하면 마음은 다시 넓어진다. 여기에서 좁음과 넓음의 비유적인 의미들이 발전해 나왔다.
기존 법 규정에 얽매인 편협한 해석이 있는가하면,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도 있다. 인간은 너무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때 아량이 넓어질 수 있다. 또 애석하게도 정신적 지평이 좁은 사람도 있고, 초라한 생활 형편으로 인해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는 이도 있다.
좁음은 언제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한하는 외피와 관련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옷이 몸을 조이면 몸에 꼭 낀다고 하고, 집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활동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면 좁을 수 있다.반면에 넓다는 것은 이런 방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이런 뜻에서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사람도 낯선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지면 입을 다물지 못한다.
5) 낯선 곳
먼 곳과 낯선 공이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 두 낱말이 언어학적으로는 의미가 동일할지라도 오늘날엔 분명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리되었다. 낯선 것의 반대는 아는 것, 익숙한 것, 일반적으로 ‘네 것’이다. 내 것과 낯선 것은 이렇게 대립한다. 그래서 낯선 사람, 낯선 풍습과 관례, 낯선 나라들이 있다. 낯선 것은 언제나 나의 본질과 모순되어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 것이다.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이란 곧 모르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오랜 기간 낯선 사람을 나쁜 사람이란 뜻으로도 이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근원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아는 것은 좋은 것이고 모르는 것은 나쁜 것이다. 이런 생각은 희한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낯선 언어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괴상한 횡설수설처럼 들려 웃음을 유발한다. 낯설다는 의미는 더 크게 퇴색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 돈이나 남의 돈으로 집을 짓고, 유산이 남의 손에 넘어갈 때도 있다.
이 개념의 중심에는 변함없이 공간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어법에서도 낯선 사람들이란 자신의 출신지에 살지 않는 사람, 외국인을 뜻했다. 현대의 관광 사업은 이 낯선 이들을 끌어 모으려 애쓴다. 그러나 인간이 낯선 나라에 가는 즐거움을 위해서만 여행을 한 것은 훨씬 훗날의 일이다. 원래 인간은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불행으로 느꼈다. 아이들도 미지의 세상에서는 낯을 가리고 그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아해한다. 인간이 자진해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자유로운 넓은 곳과 달리 낯선 곳은 무언가 불쾌하고 위협적인 영역이다.
헤세는 낯선 이의 섬뜩한 힘이 인간을 전율케 하는 악마적인 모습으로 어린아이의 친숙하고 든든한 공간에 침투하는 모습을<데미안>에서 여러 번 인상 깊게 묘사했다. 그럴 경우 인간은 불안해하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한편 인간은 직업상 부득이한 일이 있거나 낯선 당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할 때 자진해서 낯선 곳에 가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일에는 관심 없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러나 인간이 낯선 곳에 가는 것은 언제나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지 결코 막연한 욕구 때문은 아니다. 지식을 넓히러 가기도 하고, 고향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고 가기도 한다. 또 한편 상인이나 도적이 되어 낯선 땅의 산물을 집으로 가지고 오려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낯선 곳은 언제나 일시적인 체류지이기 때문에 인간은 목적을 달성하면 다시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6) 먼 곳
먼 곳의 반대어는 가까운 곳이다. 거리의 개념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개념을 그저 간격과 거리의 의미로 중화시키지 말고 그것이 삶에 표현하는 온전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넓은 곳과 달리, 또 인간이 쫓겨 가는 낯선 곳과 달리 먼 곳은 무언가 사람을 유혹하는 구석이 있어서 우리는 수동적으로 이끌려 거기에 가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낭만주의자들이 달콤한 언어로 묘사했듯이 먼 곳을 동경하게 된다. 지평선에 보이는 어스레한 푸른 산이 멈 곳을 상징적으로 구체화 한다. 우리는 갈 수 없는 먼 곳이라는 말을 하면서 별을 압운어로 배치하기도 한다. 티크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 작은 금빛 별 들
내게는 영원히 먼 곳“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낯선 곳과 달리 인간은 결코 먼 곳에 있을 수 없다. 그곳은 지평선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가가려 하면 뒤로 달아난다. 먼 곳은 본질상 갈 수 없다. 신비롭게 유혹하는 먼 곳에 대한 채워질 수 없는 동경만이 남을 뿐이다. 갈 수 없는데도 인간은 거기에 가고 싶어 하고, 먼 곳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잡아끈다. 먼 곳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본질 깊숙이 자리 잡은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간은 먼 곳에서 무엇을 찾을까? 낭만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노발리스의 글에 먼 곳에 대한 동경은 “내면으로 가는 신비로운 길”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것의 최종 목표는 귀향이라는 점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고향에 대한 향수와 먼 곳을 향한 동경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양자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게 아닌지 물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 먼 곳에서 찾는 것은 바로 자신의 깊은 본질이다.
이로써 우리는 먼 곳에 대한 동경이 탄생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 고유의 본질을 자신의 바깥에 잇는 먼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분주한 일상에서 자기를 상실했을 때, 제 집이 더 이상 제 집이 아닐 때, 고향이 낯설어질 때, 이 만족스럽지 못한 자기 소외 상태에서는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 막힌 것처럼 보이고, 그러면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잃어버린 고향이 아스라한 먼 곳으로부터 나타난다. 먼 곳에 대한 동경은 사실상 삶이 진정 삶다웠던, 지금은 잃어버린 시원을 향한 갈망이다.
그러므로 동물들에게는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갈망이 없다. 동물은 그가 처한 환경 속에서 보호받고 있고 고향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으며 지상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더라도 고향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본질적으로 고향이 없는 상태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먼 곳에서도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참다운 먼 곳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쿤츠는 <상상의 인간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인생 초기에 경험한 포근한 어머니 품의 상실에서 탄생한다. 사라져버린 가까운 곳은 애절하게 잡아끄는 먼 곳으로 전환되어 인간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을 되찾으려 한다. 따라서 먼 곳은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 속에 공간으로 규정되어 뿌리박혀 있는 곳이다. 쿤츠가 말했듯이 “먼 곳은 실존하는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일상에서 먼 곳은 가려져 있다. 그러니까 먼 곳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 인간이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그를 일깨우는 특별한 사건이 필요하다. 쿤츠는 이것을 “먼 곳의 잠입”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설명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도심의 고풍스러운 공원에서 2월 초에 들려오는 올빼미 소리, 곡식 익어가는 들판에 여름이 내려앉을 때 한밤중이나 한낮에 들려오는 메추라기 울음소리, 밤거리에서 찾아드는 노랫소리, 이러한 ..... 사건들은 ..... 아련한 먼 곳에 감싸여 형언하기 힘든 마력을 풍긴다.”
쿤츠에게 그것은 잦아드는 소리이고, 아른거리다 사라지는 모습이다. 또 우리에게 기묘하게 다가오면서도 붙잡을 수 없도록 “슬며시 달아나는 가까운 곳” 낯선 모습에서 먼 곳을 탄생시키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미세한 죽음의 숨결이 도사리고 있다가 우리를 향해 불어온다. “가까운 곳이 사라진 자리에 죽음의 일반적인 상징인 소멸 가능성이 다가오면 먼 곳이 잠입 한다”
인간처럼 허무와 죽음의 존재에 깊은 충격을 받아 익숙한 삶의 환경이 주는 안정된 기반이 찢겨나가고 고향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존재만이 먼 곳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내면 깊숙이 고통 받은 인간이 채 듣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소리에 골몰하면 마음속에서는 그 소리를 따라가고 싶다는 갈망이 싹트고, 그 갈망으로부터 태어나 조종을 받는 상상은 사라진 고향의 모습을 새로 만들어낸다. 쿤츠에게 갈망의 산물은 결국 “고향의 구축”이고, 그것도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진 어릴 적 고향을 이제는 꿈에서나 실현되는 이상의 고향으로 새롭게 만드는 행위이다.
2. 길과 도로
1) 공간의 열림
인간이 집을 나서면 대지에서 아무렇게나 이동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특정한 이동 경로에 묶이게 된다. 대지 자체는 공간에서의 전진에 장애물 노릇을 하기 때문에 인간은 공간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가장 유리한지를 살펴야 한다.
6) 길 위의 인간
3. 도보여행과 오솔길
1) 도보여행
인간이 어느 시대에나 오늘날과 같은 도보여행을 한 것은 아니다. 지난날 편력하던 수공업자 도제나 유랑 생활을 하던 학생들은 우리가 말하는 도보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움을 얻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났고 모험을 즐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났다.
요즘 말하는 도보여행, 즉 그 자체가 목적인 도보여행은 근대 문화 비판의 산물이다. 도보여행은 낭만주의 시대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20세기 초의 “반더포겔”(wandervogel: 철새라는 뜻으로, 1896년에 베를린에서 서민층 청소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청소년 운동)에 이르러 생활양식으로 발전했다.
도보여행자는 차가 덜 다니는 조용한 길을 이용하고, 풍경 안쪽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는 인도를 선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별도의 도보여행 도로를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도보여행이 다른 여행 방식과 구별되는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여기에 맞는 도보 여행로의 특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도보여행 때 공간은 어떤 식으로 열릴까? ~~~~도보여행자는 정해진 목적지를 가장 빠른 길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보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걷는다. 도보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 말은 도보여행자가 산에 오르거나, 전망 좋은 곳을 방문하거나, 저녁에 여관에 들어가는 식으로 목적지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지들은 도보 여행에 내용을 채우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누군가 특정한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길을 떠났다가 중간에 풍경의 매력에 사로잡혀 도보여행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이 여행자는 자신의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정처 없음과 연결되는 도보여행의 두 번째 특징은 서두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보여행자는 전망이나 경치가 좋은 곳에서 멈춰 선다. 그는 항상 조용히 관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각에 잠기기 때문에 외적인 계기가 없어도 멈춰선다. 도보여행자는 늘 몽상에 빠지는 버릇이 있다.
2) 오솔길
도로는 철저히 인위적으로 건설된 시설이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도로를 “걷기 위한 도구”라는 극단적인 말로 지칭했고, 나아가 차를 타기 위한 도구라고 표현했다.
오솔길은 모든 면에서 이와 정반대다. 이 길은 다음 여정에 있는 목적지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풍경을 따라 굽이치고 장애물을 비켜가면서, 도로 건설자라면 단호하게 개입해 파괴했을 지형에 순응한다. 오솔길 바닥은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았다. 그나마 인위적인 것은 물에 젖지 않고 건널 수 잇도록 질퍽한 곳에 놓인 돌멩이 몇 개와 냇물 위에 걸쳐 있는 좁다란 나무다리다. 따라서 도보여행자는 오솔길의 바닥에 적응해야 한다. 그는 마치 행진할 때처럼 똑같은 걸음걸이로 박자에 맞추어 걸을 수 없다. 린쇼텐은 이 모습을 아주 빼어나게 묘사했다. “모래, 바윗길, 자연 그대로의 바닥이 도보 여행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발걸음을 바꾸고 발을 바닥에 밀착시키게 하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자는 유연한 자세로 여기에 적응하고 풍경에 자신을 맞춘다. 걷다가 발을 접지르는 사람은 풍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도보여행자는 바닥상태에 맞추어, 바닥과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발걸음을 크게 하거나 작게 하며 걷는다. 울퉁불퉁한 강바닥 위로 냇물이 흐르듯이 도보여행도 불규칙적으로 흘러간다. 그렇기 때문에 도보여행자는 풍경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풍경도 더 이상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이 아니다. 도보여행자는 실제로 풍경 속을 지나가면서 풍경의 일부가 되고 풍경 속에 완전히 흡수된다.
3) 정처 없음과 시간에 구속되지 않음
도보여행의 본질이 여기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하나는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인간은 걸으려 한다.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인간은 걸을 곳을 찾지만, 걸어갈 목적지를 찾지는 않는다(또는 그 목적지는 최소한 부차적인 사항이다).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은 도보여행의 본질이다. 도보여행자는 걷고 싶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어느 곳에 다다를 마음은 없다. 아이헨도르프의 <방랑아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아른 아침 집을 떠나는 첫 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나는데, 옛날부터 알던 사람들과 동료들은 그제나 어제나 항상 똑같이 일하러 나가고 땅을 파고 쟁기질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마치 영원히 일요일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은 마차에 탄 두 명의 여성이 이렇게 일찍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부끄럽게도 나 역시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뱃심 좋게 ‘빈으로’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들은 그를 즉시 마차에 태워 빈으로 데리고 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시려 하는 사람을
넓은 세상으로 보내시네~~~“
슈텐첼은 논문인 <도보여행의 인간학적 기능>에서, 목적에 매인 여행과 단순한 도보여행은 뚜렷이 대비시킨 만프레트 하우스만의 정확한 글을 인용한다. “모든 여행자의 꿈은 도착이다. 여행 자체는 부차적이고 불필요하며 그야말로 저주받은 것이다. 반면에 도보여행자에게는 그런 도착이나 목적지가 없다. 바람이 잔잔한 노르웨이의 계곡을 걷든, 어느 도시의 주말농장을 배회하든~~~~그는 여행의 목적과 목적지를 알지 못한다. 도보여행은 추상적이고 목적이 없고 불확실하다. 도보 여행자에게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도보여행, 길 위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길이다.”
인생의 모든 상황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아브라함 아 산타클라라 <세상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라는 교육적이고 훌륭한 그림책에 있는 문구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멋진 오솔길은 가끔씩 도보여행자들을 매혹하지만
그들을 옆으로 빠지게 하고 고향으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자랑스럽게 대비시켜 강조했다. ”지방도로는 속이지 않는다.“
도보여행자가 불확실하게 뻗어 있는 굽이길 에 서두르지 않고 몸을 맡기려면 자신이 거기에 맞게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상태, 조용히 순간에 머무르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달라진 시간 개념이다. “시골길은 서두르지 않고 생겨난 모습대로 걷게 한다.”고 린쇼텐은 말했다. ~~~그는 여유를 가져야 하고, 아름다움에 빠질 시간을 내야하며, 꽃과 양치류를 관찰하고, 기어 다니는 딱정벌레와 획 스쳐 지나가는 도마뱀, 팔랑대는 나비와 붕붕 소리를 내는 잠자리를 살피고, 백리향의 여름 향기와 소나무 숲의 송진 냄새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고, 멀리서 나무에 구멍을 뚫는 딱따구리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뻐꾸기 소리를 세어야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나 나무 우듬지가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시간과 세상은 순수한 현제의 행복 속으로 가라앉는다. 시간을 “영원한 일요일”처럼 느꼈던 “방랑아”를 다시 상기해보자. 아예 시간이 정지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시간은 근심스럽게 앞을 보고 달려가는 특성을 잃어버렸다. 시계는 더 이상 코앞에 닥친 요구를 상기시키면서 경고하지 않는다. 시간은 하루의 흐름에서만 존재하고 해와 별의 운행을 통해서만 현존한다. 그러나 이 흐름은 지방도로의 성급함과 달라 인간을 받아주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고요한 리듬이다.
4) 출발의 행복
인간은 대체 왜 도보여행을 할까? 인간을 그토록 저항하지 못하게 도보여행으로 잡아끄는 것은 무엇일까? 도보여행의 묘사에는 정처 없음, 목적에서의 해방, 시간에 구속되지 않음 같은 특성들이 부각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도보여행이 특히 현대의 문명인에게 발휘하는 기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도보여행은 인간이 대책 없이 커진 현존재의 목적 지향성을 부수고 나오려는 형식이다. 도보여행은 탈주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인간은 비좁은 도시와 문명화된 현존재의 조급함에서 나오고 싶어 도보여행을 한다. 이렇게 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대도시 베를린에서 반더포겔이 탄생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도보여행은 좁은 공간에서의 해방이고 자유로운 곳으로의 돌진이다. 그래서 도보여행자들은 남보다 우월한 자신의 홀가분함을 의식하고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고 싶은 자, 근심 걱정을 떠안고 집에 남아라!”
도보여행자는 근심의 세계, 권태로운 현실의 직업 세계를 두고 떠난다. 그는 ‘속물’을 경멸한다. “방랑아” 역시 익숙한 일터로 나가는 동료들보다 자신이 숭고하다고 느꼈다. 도보여행은 속박을 떨쳐내는 일이다. 아이헨도르프는 용솟음치는 생명욕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것은 숲과 푸른 들판을
해쳐 가는 여행이어야 해.
그것을 멋진 삶이라고 하지.....
세상이 열렸다.“
이 마지막 문장이 이른 아침에 새롭게 열리는 넓은 세계의 공간 감각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세상이 열렸다.” 용솟음치는 기운을 느끼며 넓은 세상으로 진출하는 자는 바로 인간이다.
5) 근원으로의 회귀
“참된 도보여행에는 태곳적의 내밀한 행복으로 돌아가는 회귀 같은 것이 있다. 그 행복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혹은 앞날의 실현을 알려주는 전령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 자신의 내밀한 중심으로 쏠려 있는 풍경은 도보여행을 하며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린쇼텐은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설명을 계속한다. ”도보여행이 자연의 고요함과 평온으로 돌아가는 행위이고 심오한 의미에서 풍경의 내재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도보여행자가 걷는 길은 되돌아가는 길, 친숙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태곳적 내밀한 행복으로의 회귀”,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의 회귀, “친숙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처럼 여러 가지 낱말로 표현되면서 다양한 울림을 주는 도보여행의 정의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노발리스가 처음 제기한 후 다시 터져 나온 낭만주의의 기본 주체, 즉 되돌아가는 길, 근원으로 가는 길, 인간 삶의 시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이르지 못할 동경의 대상으로 마음으로만 그려보았던 것이 여기에서는 실현되었고 인간은 다시 돌아왔다. 여기에서 ”친숙한 고향“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회귀를 우리는 공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회귀이고, 존재와 근원과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의 회귀이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함께 묻어나지만, 그 회귀는 이런 기억을 넘어 본질의 더 깊숙한 층위로 돌아가는 일이며, 이간이 기술로 세계를 지배하기 이전으로, 그래서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또 합리성이 침투하기 이전으로, 그리고 직업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한마디로 자기 소외 이전의 상태, 경직되고 고착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말한다. 인간이 도보여행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의 본질 전체의 회춘이다.
6)도보여행의 기능
그리스 신화에서 거인 안타이오스가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며 계속 새 힘을 얻었듯이, 인간도 도보여행을 하면서 젊어진다. ~~~인간은 시간과 목적에서 해방된 도보여행을 통해 자꾸만 앞으로 밀어내는 일상의 조급함에서 완전히 물러남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곳에 자리 잡은 삶의 근원과 다시 접촉한다.
도보여행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독자가 오해하지 않도록 보충 설명을 해야겠다. 근원으로 회귀해 행복을 경험한다는 말은 인간이 이 근원 상태에 머물러야 하고 모든 발전은 근원적 본질의 폐기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도보여행에 인간학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을 때, 인간은 평생 목적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하고 방랑자가 인간의 삶의 이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노동과 직업의 영역,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대의 기술화된 산업 세계, 즉 인간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고, 현실적 삶의 엄숙함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 운동은 도보여행을 지속적인 상황으로 간주함으로써 많은 오류를 범했다.
도보여행은 여가활동이고 본질상 직업생활에서의 일시적인 해방이다. 인간은 도보여행의 본질인 근원으로의 회귀를 통해 심신을 회복하고 젊어져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젊어진 심신으로 다시 엄숙한 삶으로 돌아와 자신의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3부] 안식처로서 집
1. 집의 의미
1) 세계의 중심으로서 집
인간은 자신이 다니는 모든 길의 기준이 되는 고정된 기준점, 그 길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이 되는 곳이 없으면 딛고 설 발판을 잃어버린다.
중심의 문제도 방위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세계의 중심을 “객관적인” 의미에서 자기 민족의 거주지에 옮겨놓고 그곳을 성스러운 지점으로 강조해 상징화한 신화적 견해는 지구 표면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제한되어 있던 시절에만 관찰될 수 있었다. 새로운 대륙들이 발견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 견해는 더 이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지 않았고 지표면의 모든 점이 근본적으로 동등하기 때문이다.
집은 인간이 사는 세계의 구체적인 중심이다. 어느 주택용 비문에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헤르만 브로흐의 멋진 시구가 적혀 있다.
“모든 먼 곳의 중심에
이 집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집이 좋다.“
집은 가깝고 친숙한 것들이 있는 영역을 가리키며, 이 영역을 중심으로 사방에 먼 곳이 자리 잡고 있다. ~~~“먼 곳의 중심”은 먼 곳이 가득 찬 곳, 만 곳이 빽빽이 들어찬 곳. “가장 먼 곳”, 즉 먼 곳의 심장부라는 뜻도 된다. 내 집은 가장 가깝고 당연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먼 곳이다. 우리는 집에서 살면서도 먼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집은 상처받기 쉽고 따라서 우리는 집을 좋아해주어야 한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어느 곳에도 특별히 매여 있지 않게 된 까닭에 고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세계에서 영원한 망명자가 되었다. 이것이 현대인이 직면한 위험이다.
인간은 더 이상 중심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며, 자발적으로 중심에 서서 모든 외부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이로서 중심의 창조는 인간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제는 인간이 자신의 집을 짓고 거기에 거주함으로써 실현된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집을 피상적으로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집과 내적인 관계를 구축해 집이 우리에게 든든한 발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 거주
거주한다(wonhnen)는 낱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다시 언어사적인 정보를 참조하는 것이 좋다. 이 낱말은 처음에 편안하다, 만족하다는 일반적인 기본 의미를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머무르다’, ‘있다’를 뜻하는 공간적인 의미의 낱말로 발전했다.
3) 안도감의 공간
4) 바슐라르가 말하는 거주의 행복
바슐라르가 볼 때 집은 첫째로 품어주고 보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집은 그 자체로 바깥세상의 무질서가 제거된 정돈된 영역이다. 집은 인간의 삶에서 우연한 사건들을 배제한다. 불안정하게 떠도는 망명자의 삶과 달리 집은 인생에 깊이 있는 지속성을 부여한다. 집은 항구적인 요소이다.
5) 집의 인간학적 기능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과제를 이루려면 안도감과 평화를 주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인간이 외부 세계와 싸우고 지쳤을 때 돌아와 심신의 긴장을 풀고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인간은 거주일 때만, 집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공공의 영역과 분리된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을 때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으려면 그런 든든한 영역이 필요하다. 인간에게서 집을 빼앗거나,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해 집의 평화를 빼앗으면, 그의 내면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한 대목에서 말한, 도망자, 집 없는 자, 목적지도 안식도 없는 비인간이라는 표현을 상기해 보자. 집 없는 인간이 비인간이라면, 즉 인간의 참된 본질을 잃어버린 자라면, 반대로 인간은 집을 가졌을 때만 참된 인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이 자기 집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락한 삶을 보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집에서 사는 사람은 실제로 낭만주의자들이 비웃었던 속물이 된다.
“집에 앉아
난로 앞에 앉아
평온을 누리는 자
행복하구나“
아니다. 인간은 세상으로 나아가 자신의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 실러도 “인간은 적들이 있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위험에 내던져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과제를 완수하고 나면 집의 보호 속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도 가져야 한다.
6) 집의 취약성
인간은 어느 집에서 살든지 다시 그 집을 떠날 수 있는 내면의 자유도 잃지 말아야 한다. 집에는 그 집의 상실로도 영향을 받지 않는 궁극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실존철학이 말하는 의미에서 집의 실존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 인간이 자기 집의 견고함이 위협받는다는 사실과 취약성을 안다고 해도 계획적인 이성을 동원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삶의 질서를 만들고, 끈질기게 계속되는 무질서한 힘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과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집이라는 안전한 섬은 이러한 부단한 싸움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2. 신성한 공간
1) 신화적 사고로의 복귀
2) 성스러운 공간
세속적인 공간은 성스러운 공간과 달리 균질적이고 구조가 없다. ~~~반 데어 레우는 ~~~“성스러운 공간은 그곳에서 힘이 반복 작용하거나 인간이 그 힘을 반복 작용하게 함으로써 성지가 되는 장소이다.”
3) 세계의 형상으로서 집
3. 살기 좋은 공간
살기 좋다는 말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낱말은 살기에 적합하다는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향처럼 편하다는 말 역시 새로운 정보를 주지 못한다. 이 말은 집이나 어떤 사물이 고향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늑하다는 낱말은 꽤 많은 정보를 준다. 이 말은 울타리, 둘러싸다, 에워싸다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4. 문과 창문
1) 문
2) 자물쇠
3) 문지방
4) 창문
창문이 수행하는 단순한 과제 중의 하나는 내부 공간에서 바깥 세계를 관찰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인간이 커다란 유리창을 설치하기 아주 오래전에는 최소한 박을 내다보는 구멍이 있었다.
5) 주변세계의 파악
6) 창문의 밀어내는 작용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 세계는 먼 곳으로 밀려난다.
5. 침대
1) 집의 중심인 아궁이와 식탁
2) 중심으로서 침대
5) 직립 자세
6. 깨어남과 잠듦
[4부] 공간의 여러 관점들
1. 호돌로지적 공간 : 길이 열어주는 공간
1) 거리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공간의 전반적인 성격을 논의했다. 이제는 공간의 내부 구조로 더 깊이 들어가 보겠다. 여기에서도 우선 수학적 공간과 비교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에 부합할 듯하다. 다 알다시피 우리는 주변 공간을 얼마든지 수학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 사용자라면 누구든지, 이를테면 산길을 걸어 여행할 때 그런 기하학적 공간 묘사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현실에서 공간을 걸어갈 때 경험한 거리가 지도에서 읽어내는 직선거리 및 꼼꼼하게 측량한 도로의 거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직접 경험한 거리는 미터로 표시된 두 지점 간의 거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목적지까지의 도달 가능성, 극복해야 할 크고 작은 난관, 난관 극복에 필요한 힘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직선거리가 결코 두 지점을 있는 지름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도리어 우회로가 필요하거나 우회로로 가는 편이 더 합리적일 때가 있다.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거리에는 이 우회로를 포함해야 한다. ~~~~이 관계를 조금 추상적으로 극단화해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웃집에 면해 있는 내 집 벽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이웃 집 벽의 해당지점까지의 구체적인(경험에 의한)거리는 얼마나 될까? 추상적으로, 즉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벽의 두께에 따라 몇 센티미터에 불과할 테지만, 구체적으로는 훨씬 먼 거리이다.
2) 주거 공간의 동굴적 성격
체험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집은 요즘도 산에 있는 동굴과 같다. 집에는 출입구가 있고 이곳을 통해서만 집은 주변 공간과 연결된다. ~~~동선은 사방에서 벽이라는 경계와 마주친다. 공간은 여기에서 끝난다. 안에서는 이 벽 바깥에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 그곳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창문 너머 내다보이는 것들은 직접적인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동굴에도 안쪽에 경계가 있다. 굴이 암벽과 만나는 곳이다. 그 뒤쪽에는 또 다른 공간이 아니라 공간이 아닌 곳, 다시 말해 무정형의 암벽 덩어리가 있다. 아예 공간이 없는 곳이다.
이 관계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쿠젠베르크의 환상 소설<천국의 술집>에 나온다. 쿠젠베르크는 교회와 술집의 기능을 동시에 가진 건물을 묘사한다. 들어가는 입구에 따라 건물 전체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술집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두 생활 영역이 어떻게 갑작스럽게 출몰하는지, 어떻게 교회에 술집 손님들이 불쑥 나타나고 술집에는 소년 성가대와 교회 신자들이 등장하는지를 기괴한 분위기로 하나하나 그려내고 있다.
3) 레빈의 호돌로지적 공간
이런 맥락에서 레빈이 도입하고 사르트르가 수용한 호돌로지적(hodologisch)공간과 거리라는 개념은 매우 투명하고 생산적이다. 길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도스에서 유래한 호돌로지적 공간은 길이 열어주는 공간을 의미한다. 앞에서 린쇼텐과 연관 지어 길을 논의할 때, 길이 공간을 열어주고 그 길을 통해 지나온 거리를 열어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개념은 독일어로 “길이 개척하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돌로지적 공간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수학적 공간에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양 지점의 좌표에 의해서만 결정되므로 그 사이에 놓인 공간의 구조와는 무관한 객관적인 수치다. 반면 호돌로지적 공간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목표지점까지의 다양한 도달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던 요소가 추가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포함한다. 그래서 두 지점을 잇는 최단거리인 직선대신 레빈의 표현에 따르면 “최상의 길”이 등장한다. “최상의 길”은 여러 가지를 뜻할 수 있는 데, 그 길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레빈은 이것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최상의 길은 ‘가장 돈이 적게 드는 길’, ‘가장 빨리 갈 갈 수 있는 길’, ‘불편함이 가장 적은 길’, ‘가장 안전한 길’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 최상의 길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요구되는 극단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편안한 길이라고 해서 반드시 최단 거리의 길은 아니다. 최단 거리의 길도 반드시 가장 빠른 길은 아니다. 그것은 장(場)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따라 달라진다.
4) 사르트르의 공간
사르트르는 레빈을 언급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찬된 세계 공간은 레빈이 호돌로지적이라고 말한 공간이다.” 다른 대목에서는 다음처럼 말한다. “나에게서 발견되는 원래 공간은 호돌로지적이다. 호돌로지적 공간은 길과 도로에 의해 개척되고, 도구적이며, 도구의 장소이다.”
사르트르는 이 길은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을 넘어 무엇보다도 타인의 존재를 통해 의미를 얻는 장소와 연관된다. “인간은 장소와의 관계, 즉 그곳의 위도와 경도를 통해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공간을 통해 위차가 결정된다.”
5) 풍경의 호돌로지적 분류
레빈이 (수학적인 공식을 염두에 두고) 다소 추상적으로 파악한 호돌로지의 원칙이 풍경의 분류에 적용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개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평화 시의 풍경은 균일하게 먼 곳까지 뻗어나간다. “그 풍경은 앞과 뒤가 없이 둥글다.” 반면에 전시의 풍경에는 두 가지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그 하나는 한쪽으로 향해 있다는 것, 즉 일관되게 “전선”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전선”으로 인해 풍경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전선에 맞춰져 있지만 전선 뒤에서는 모든 게 끝난다.
2. 행위 공간
1)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의 확장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은 체험공간의 내적 분류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데는 생산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특정한 맥락을 규명하는 하나의 관점만 제시하므로 체험 공간 자체와 동일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일면적인 관찰에서 벗어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관점들도 받아들여 체험공간의 내적 분류를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은 두 방향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호돌로지적 공간은 공간 속에서 개별 장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의 체계를 기술한다. 그래서 호돌로지적 공간은 공간 속을 이리저리 흐르는 자력선에 비교할 수 있다. 자력선은 물리학적인 의미에서도 그것을 생성하는 전하나 질량과 관계가 있다. 체험공간에서도 길은 방향과 거리와 더불어 그 길로 이어지는 목적지와 관련된다. 모든 길은 어느 곳으로 가는 길 혹은 무엇이 있는 쪽으로 가는 길이다. 길은 이 관련성을 통해 비로소 길이 된다. 길의 목표점에는 인간이 그곳으로 가야 하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또는 인간이 그곳에서 피신해야 하는 의미도 있다. 가고 싶은 곳만 있는 게 아니라 위험하고 불쾌한 곳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주로와 출구도 길의 체계에 포함해야 한다. 인간의 체류지에서 시작되는 모든 길은, 사르트르가 올바로 보았듯이, 구체적인 공간에서 인간의 상황을 결정한다. 그러나 각각의 목표점은 공간 속의 사물과 인간을 질서 잡힌 하나의 전체로 만든다. 그래서 체험공간은 의미 있는 장소와 자리가 합리적으로 나뉜 총체이다.
두 번째로 살펴 볼 관점도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을 넘어선다. 우리는 길이라는 말을 집 바깥에 한정해서만 의미 있게 사용 한다. 길은 인간이 활동하는 개별 장소와 집과 일터를 연결한다. 집 안 활동도 걸어 다니면서 하지만, 집 안에서는 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농부가 밭을 경작하면서 이동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길을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길은 일터로 가는 접근로이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 특히 집배원이야말로 길을 걷는 행위를 본질로 삼는 유일한 직업일 것이다. 이를 제외하면 길은 인간의 활동 장소와 휴식 장소를 연결한다. 이런 장소에서 발생하는 일에 길의 개념을 적용 하는 것은 억지스럽고 적절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다.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은 길에서 수행하는 의미 있는 행위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그 행위는 걷기와 탈 것을 타고 가는 행위이다. 걷기와 타고 가는 행위는 풍경 속에서 진행되는 비교적 광범위한 이동이다.
2) 공간 내부에서 사물의 포착 가능성
하이데커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공간성을 짧게 분석하는데, 이는 행위 공간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과 그 본질적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3) 공간정리
4) 생활공간의 이해 가능성
5) 행위 공간의 여유
6) 행위 공간 개념의 확장
3. 낮 공간과 밤 공간
1) 두 공간의 관계
어둠이 찾아오는 저녁이 되면 공간에 있는 사물의 가시성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두 공간을 대비할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맞 공간이 시각을 통해 파악된다는 것, 다시 말해 낮 공간은 시각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낮 공간에서는 시각이 주도하면서, 만지고 듣는 다른 감각들은 보완적으로만 나타난다. 반면에 밤에는 후자가 우세하다.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최소한도로 밀어낸다. ~~~~실제로 심리학에서 실행한 이런 감각 공간들의 연구 결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낮 공간
낮 공간은 공간 경험에서 우위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공간 개념은 낮 공간에서 얻어낸 것들이다.
낮 공간의 본질적 특성은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확장된 상태로 조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개별 사물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간 전체에 편입해 바라본다.
우리는 사물을 처음부터 온전히 입체적인 모습으로 본다. 시각적 깊이까지 포함해서 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시각적 깊이의 체험이 어떻게 유전학적으로 발생했느냐 하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시각적 깊이가 주어졌다는 순수한 현상적 사실이다. 시각적 깊이에서 사이 공간을 채우는 연속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가까운 사물을 지나 멀리 있는 사물이 있는 공간까지 도달하는 시선이다. 이때 시선면의 완결성을 만들어내는 연속체는 빈 공간이 되고 이것이 가까운 사물을 먼 곳의 사물과 분리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 사이의 사이 공간까지 지각할 수 있다는 점이 낮 공간의 특성이자 낮 공간을 다른 공간 형식과 구별해주는 점이다.
3) 어스름한 공간
•숲
어스름한 수평적 공간으로는 먼저 숲을 들고 싶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형태를 분명히 알아볼 수 없다. 오히려 숲에서는 사물 자체가 시선을 방해한다. ~~~숲은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 사이에 자리 잡은 일종의 중간 지대라고 할 수 있다. 숲은 넓게 퍼진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분명히 끝나는 지평선도 없는 곳이다. 인간은 숲에 포위된다.
그러나 이것은 여타 전환 현상의 포위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어느 정도 물질적인 포위이다. 안개를 비롯한 포착할 수 없는 매개물이 시선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나무나 덤불처럼 잡을 수 있는 실제 사물이 이동 능력 자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숲의 포위는 통과 불가능한 경계선을 표시하는 고정된 담의 포위도 아니다. 숲에서 인간은 좁은 공간에 묶여 있지만 거기에는 표시할 수 있는 정해진 경계선이 없다. 숲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숲을 통과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숲의 한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인간의 시선은 갇힌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겨우 조망할 수 있는 좁은 영역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인간은 숲에서 길을 쉽게 잃는다. 그래서 불안감이 생겨날 수 있다
•안개
안개 속에서 사물은 포착할 수 있는 성질을 잃어버리고 붙잡을 수 없게 달아나면서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온다. ~~~사물은 안개 속에서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진다. 왔다 가는 모습을 볼 수도 없이 두 현상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래서 내 마음은 사물의 접근에 대비하지 못한다. ~~~이 세계는 거리가 단계적으로 천천히 바뀌지 않ㄴ느다.
헤르만 헤세는 이 경험을 인간 고독의 체험으로 인상 깊데 묘사했다. “안개가 이웃한 사물들, 서로 친근해 보이는 것들을 모두 떼어놓고, 모든 형체를 덮어버리고, 차단하고, 피할 수 없이 외롭게 만드는 것을 볼 때면 이상하게도 늘 마음이 아프다. 시골길에서 한 남자가 네 곁을 지나간다. 암소나 염소를 몰고 가는 사랑 일수도 있고, 손수레를 밀고 가거나 여행 보따리를 지고 가는 사람일수도 있다...... 그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네가 인사를 하면 그 사람도 답례 인사를 한다. 하지만 그가 막 네 곁을 지나가자마자 몸을 돌려 바라보면 그는 어느새 모습이 희미해지고 이내 자취도 없이 희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다른 세계의 소리는 들려오지만 그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 고독은 더욱 더 마음을 짓누른다. “네 귀에 아주 가까이에서 사람과 짐승의 소리가 들려와도 너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걸어가고 일하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조금은 동화 같고, 낮설고, 다른 세상의 일 가다. 그러면 너는 잠시 그 속에 있는 상징성을 분명하게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게 낮설고, 그게 누구든 인간도 다른 인간에게 너무도 낮선 존재이며, 우리는 길을 가며 겨우 몇 걸음 옮기는 동안 서로 스치며 만날 뿐 겉으로만 서로 비슷하고 가까우며 친절하다고 느낀다.”
“안개 속을 걸으면 이상하여라!
수풀과 돌은 저마다 외롭고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모두 다 혼자다....
안개 속을 걸으면 이상하여라!
삶은 외로운 것.
사람들은 서로를 모르고 산다.
모두 다 혼자다.“
•내리는 눈
슈티프티는 <수정>에서 두 아니가 함박눈이 쏟아지는 길을 걷는 모습을 으스스한 분위기로 묘사했다. “ 아이들 주변에는 온통 하얀 눈뿐이었다. 그것을 차단하는 어둠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눈은 넘쳐흐르는 거대한 빛처럼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세 발자국 앞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유일한 하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그림자가 없으니 사물의 크기도 가늠할 수 없었다. 급경사에 발이 걸려 어쩔 수 없이 위로 방향을 틀어야 할 때까지 아이들은 자기들이 위로 가는지 아래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황혼
황혼이 깃든 후 어둠이 점점 짙어지다가 곧 깜깜한 밤으로 바뀔 때의 상황도 안개와 비슷하다. 두 현상은 흔히 함께 나타난다. 황혼이 깃들 때 특히 안개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땅거비에서 피어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안개는 밝은 빛이 넘칠 때의 안개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황혼의 안개는 인간이 빨아들여 그가 허공으로 떨어진다고 믿게 하는 무(無)의 느낌이 아니라, 반대로 실체를 가진 어떤 것이 인간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느낌을 준다. 지각과 착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변해 붙잡을 수 없는 위협적인 세계가 탄생한다. 어스름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수풀은 위협적인 형상으로 바뀐다. 곳곳에 알 수 없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고, 깊은 불안감이 인간을 엄습한다.
4) 밤 공간
•밤길
밤길을 걸으면 먼 농가에서 개 짖는 소리,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 등 여러 소음이 들려오듯이 가시성의 흔적도 조금 남아 잇다. 일례로 나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별들이나 구름 뒤에 숨어 있는 달 빛, 멀리 떨어진 부락의 불빛을 볼 수 있고, 몇 걸음 앞에 놓인 길이 그 옆의 어두운 풀밭과 어떻게 다른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간할 수 있는 곳은 희미한 근접 지역뿐이다. 그 뒤쪽 세계는 균일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에게 스며들던 불빛조차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그래서 밤길을 걸을 때는 눈앞에 나타난 불빛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피곤한 상태에서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어둠 속에서 걷는 나의 움직임이 바뀐다. 그 공간을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여지가 없다.
•민코브스키와 베를로퐁티의 묘사
4. 분위기 있는 공간
1) 좁은 느낌과 넓은 느낌
어스름한 공간과 밤 공간을 관찰한 결과 공간은 대상의 인식과 합목적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항상 동일한 장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감정이나 의지와 밀접히 결부된 곳이고 인간의 전체 심리 상태와 관련되는 곳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레빈도 호돌로지적 공간은 대지의 외형적 조건만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체험공간 전체에도 적용된다.
앞에서 논의했던 공간의 좁음과 넓음의 문제를 한 번 더 살펴보자. 우리는 이 문제를 인간의 삶의 여유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려 했다. 좁은 것은 삶의 발전을 방해하고, 넓은 것은 삶에 충분한 발전 여지를 준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넓고 좁음이 결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척도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도 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넓게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충분하거나 좁게 느껴질 수 있다. 일할 때 좁은 독방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역량을 펼치기 위해 커다란 홀 전체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좋아 책상을 창문 가까이 붙여놓고 간간이 생각에 잠겨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도 잇지만, 닫힌 공간에서만 충분한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에 책상을 창문에서 돌려놓는 사람도 잇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심리 상태와 그때그때의 필요성에 따라 공간에 대한 욕구가 달라진다. 깊은 슬픔에 빠졌을 때는 동굴처럼 좁은 곳으로 들어가고, 즐겁게 들뜬 상태에서는 넓게 펼쳐진 공간이 필요하다. 바슐라르도 거주 기능을 분석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오두막과 성이라는 두 극단적인 현실이..... 은둔과 확장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잠을 잘 자려면 커다란 방에서 자서는 안 된다. 일을 잘 하려면 좁은 은신처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 다른 상황에서는 또 다른 욕구가 생길 것이다.
2) 분위기 있는 공간의 개념
분위기 있는 공간이란 다른 공간들과 별도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호돌로지적 공간 혹은 행위 공간을 뜻하며, 공간을 관찰하는 관점을 나타내는 말이다. 분위기는 모든 공간이 갖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단지 어느 상황에서는 그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고 어느 상황에서는 약하게 나타날 뿐이다.
3) 색채의 감각적 · 윤리적 작용
비가 온 뒤의 청명한 저녁이나 비가 오기 직전의 저녁에는 멀리 있는 산과 집이 아주 가깝게 다가온다. 그것들은 갑자기 손에 잡힐듯이 가까이 있는 동시에 입체감도 아주 커진다. ~~~멀리 있는 사물이 가깝게 보이면 날씨가 좋지 않다는 징조이다. 그러나 아지랑이가 핀 곳에서 특히 해를 마주보고 있으면 사물은 멀리 달아난다. 산은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완전히 아지랑이 속으로 사라져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색채가 공간을 좁게 또는 넓게 만드는 것도 같은 현상에 속한다. 밝은 색은 공간을 환하고 넓게 만들지만, 어두운 색은 좁게 만든다. 검은색 천장은 압박하고 마치 짓누르는 듯 한 특성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폐쇄적이고 집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괴태는 이렇게 강조한다. 노랑에는 밝고 활발하고 부드럽게 자극하는 성질이 있다. 특히 우중충한 겨울날 노란색 유리를 통해 풍경을 관찰하면 이 따뜻한 효과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눈이 즐거워지고, 가슴은 펴지고, 마음은 밝아지며, 바로 옆에서 따스한 기운이 우리에게 불어오는 것 같다. 노란색이 내는 자극적인 효과는 노랑이 빨강에 가까워질수록 상승한다. 주황색이 편안하고 밝은 느낌, 따스함과 환희의 느낌을 준다면, 주홍색에서는 이 작용이 견딜수 없는 위력으로까지 상승한다. 주홍색의 활동적인 측면은 극도의 에너지에 있다.
완벽한 주홍색 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면 그 색채가 정말로 신체 기관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이 노란 빛은 내는 빨강이 가장 활동적인 색깔이다. 이 색깔은 인간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고 그가 있는 공간을 좁게 만들지만, 동시에 사람을 자극한다.
파랑은 정반대의 영향을 미친다. 주홍은 우리를 파고들면서 우리가 있는 공간을 좁히지만, 파랑은 우리 앞에서 뒤로 물러난다. 우리가 파란색을 바라보기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잡아끌기 때문이다. 높은 하늘의 색깔이자 먼 산의 색깔인 파랑은 우리 주위의 공간을 확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파랑은 차가운 느낌을 주고 그늘을 연산케 한다. 이런 느낌은 파란색을 실내 공간에 사용했을 때도 나타난다. 괴테는 이렇게 적었다. 파란색으로만 도배한 방은 어느 정도 넓어 보이지만 텅 빈 듯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녹색은 주황과 파랑의 상반된 작용이 해소되면서 좁게 만들지도 넓게 만들지도 않고 중립을 지키는 탁월한 색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녹색을 특히 안정감을 주는 색으로 찬양하면서 거주 공간의 색으로 선호한다. 우리의 눈은 녹색에서 진정한 만족감을 얻는다.
4) 내부 공간
5) 두려운 마음을 압박하는 공간
비구름은 인간을 그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고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일례로 아이헨도르프의 소설 속 주인공인 “방랑아”는 비가 내리는 흐린 날이었다면 자신이 살던 방앗간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오면 방랑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다. 햇빛은 우리를 먼 곳으로 유혹하지만, 어두운 구름은 우리 주변의 세계를 아주 좁게 축소하기 때문이다.
6) 도취의 공간
5. 현재적 공간
1) 소리의 공간적 성격
인간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존재와 하나가 되고, 걷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춤을 추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고 니체는 말했다.
2) 춤의 무 목적성
6. 인간의 공동생활 공간
1) 삶의 공간을 둘러싼 투쟁
인간은 여럿이 함께 좁은 곳에서 살면서 기존의 생활공간을 나누어 써야 하므로 그들 사이에 경쟁 관계가 발생한다.
2)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생활 공간
3) 공간을 창조하는 사랑의 힘
4) 고향의 토대
빈스방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간을 사랑으로 만드는 공동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고향을 지상을 초월한 영원한 고향으로 이해했다.
5) 우호적인 협력으로 탄생하는 공동 공간
[5부] 인간 삶의 공간성
1. 공간에 있음과 공간을 가짐
1) 지향성
인간 삶의 공간성과 이 삶에 상응하는 체험공간 혹은 살아가는 공간은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인간과 공간의 내적인 관계를 자주 거론했다. 그러나 대상적인 측면을 좇는 흐름을 깨지 않으려고 문제의 주관적인 측면에는 계속 주목하지 않았다. 이제 그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인간 삶의 공간 문제는, 되도록 쉬운 말로 표현하면,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이다. 혹 이 말이 공간을 대상적인 사물로 파악하여 인간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공간과 관계를 맺는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면 달리 표현해 보자. 인간 삶의 공간성 문제는 공간이 어떤 식으로 인간의 본질에 속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인간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객관화된 진술은 이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의 의심스러운 면을 이미 은폐해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태에서 당연시되는 부분을 밝혀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이데거는 인간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사물이 그릇 속에 존재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둘의 차이는 이렇다. 인간은 사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지향성(Intentionalitat)이라는 특징으로 설명해야 한다. 인간이 공간과 관계를 맺는 한 -더 신중하게 말하면 공간 속에서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한- 인간은 공간 내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오히려 그의 공간성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다르게 말해보자. 인간이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은 그를 둘러싼 세계 공간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인간과 관련된 지향적 공간에 대한 규정이다.
인간은 공간 속의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위치 자체는 상상의 공간 속에 있지 않으며 그 본질을 규정하기도 대단히 어렵다. 우리는 이 위치를 하나의 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도 우리는 수학적인 용어로 자연적인 좌표계의 기점이라는 말을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점은 공간에 편입되지 않으며, 공간에 주어진 모든 것들과 거리와 방향을 통해 관계를 맺는 확인할 수 없는 중심이다. 이것은 바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점이 아니라, 특정한 그곳이나 저곳과 연관되는 여기의 이곳이다.
지각 심리학은 이 지향적 공간을(주체와 관련된) 감각 공간, 특히 시각 공간으로 보고 자세히 연구 했다. 인간이 주변에 이 공간을 구성하는 방법은 방향과 거리를 통해 지각하는 인간과 관련된 극좌표계를 통해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관계를 그의 현존재 분석의 철학적 틀에 받아들이고, 내용적으로 분류된 공간에 맞게 “현존재의 공간성”을 심리학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따라 이해해야 하는 “거리 없애기”와 “방향 잡기”로 설명했다.
2) 매개체로서 공간
지각하고 움직이는 인간 주위로 지향적 공간이 구성되듯이, 그 공간은 중심을 이루는 인간의 현 위치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이 공간의 어디에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여기에서 의미 있게 제기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처한 영원한 중심이고, 사물의 연관 체계인 공간은 인간이 움직이면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서두에서 강조했듯이, 인간이 공간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 공간을 정지한 것으로 본다는 말에는 그럴 만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공간속 “어딘가에”, 즉 특정한 위치에 존재한다. 이때 인간은 공간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표면을 고정된 것으로 느끼고 인간이 서 있는 모든 자세의 토대가 되어준다고 느낀다.
“대지, 그대여 지난밤도 변함없더니
어느덧 새로운 생기로 내 발치에서 숨을 뿜으며“
잠에서 깨어난 파우스트는 고정된 공간에서 당연히 안도감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지향적 공간 개념으로는 이렇게 의식하는 이유를 의미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지향적 공간 개념에서 보면 공간 속의 변화는 하나의 좌표계로부터 이 좌표계에 대응해 움직이는 다른 좌표계로의 이행이며, 정지와 움직임은 관습적으로만 규정될 뿐이다.
3) 공간 느낌의 형식
하이데커는 인간의 세계 -내-존재를 던져져 있음으로 설명했다. 던져진 상태는 공간 관계도 포함하므로 우리는 이것도 던져져 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무엇인가에 던져져 있다는 것은 중립적인 의미에서 그 무엇인가에 처해 있는 상태 이상의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혹은 그의 의지에 반하여 어떤 거친 방식으로 낯선 매개체 안으로 들어갔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감지되는 감정상의 색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던져졌다는 말은 신중하게 선택된 단어지 우연히 생각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던져졌다는 것은 인간이 어딘가에 들어가 있다거나 이식되어 있는 것 이상을 뜻한다. 여기에는 부주의함과 우연성의 요소가 들어 있다.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에는 언제나 공격적인 느낌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는 조심스럽게 그 앞에 차려놓지만, 사나운 짐승에게는 그 앞에 먹이를 던져준다. 인간도 낯설고 적대적이고 무시무시한 매개체 안으로 던져진 자신을 발견한다.
공간에서 인간의 상황적 심정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공간은 낯설고 압박하는 매개체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잉여적”이다. 즉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이는 실제로 고향을 잃어버리고 뿌리가 뽑혀나간 우리 시대의 인간이 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확하게 본 모습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인간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모습은 인간의 공간 관계에서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을 경우에만 나타나는 현대인의 특징이다.
4)거주
앞에서 논의할 때 집의 소유가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문제 삼았다면, 이제는 거주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마음 상태가 논점이다.
거주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주에는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구체화되어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는 공간성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거주는 공간 속 임의의 위치에 우연히 머무르는 일시적인 체류와 반대된다. 거주한다는 것은 특정한 자리에 속하여 뿌리를 내리고 그곳을 집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거주한다는 것은 분리된 안전한 영역, 즉 인간이 위협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개인 공간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거주한다는 말은 집에 산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고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공간에 처한 그의 상황적 심정성 전체를 뜻하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인간의 공간성 전체를 거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 혹은 자아는 몸에 거주하고, 집에 거주하고, 사물들에 거주하고, 세계에 거주하고, 공간과 시간에 거주한다. 또 의미도 낱말과 기호 속에 거주하고, 표현된 정신은 표현 속에 거주한다. 거주라는 말이 적용되는 이런 넓은 분야를 떠올리면서 그 적용사례를 열거하다보면 이렇게 다양한 관계들을 거주라는 공동의 개념 아래 묶어주는 근본적인 특성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 말이 쓰인 곳마다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이 공간적인 것에 녹아있는 긴밀한 관계가 표현되어 있다. 기존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관계이다. 한 대목에서는 거주를 과학적인 태도와 대립시켰다. 체현된다든지 관여되어 있다는 표현도 이렇게 바꾸어 쓰거나 간접적으로 암시할 뿐이다.
5) 공간을 가짐
우리는 인간이 집에 있다거나 서재에 있다고 말한다. 이 경우 그는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그러나 이 진술은 공간에 대한 그의 내적 관계, 지향성을 가지고 어디에 있다는 의미의 공간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것은 찬장에 그릇이나 찻잔이 있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이 진술은 인간을 찾고 발견할 수 있는 특정한 내부 공간을 표현한다. 여하튼 여기에서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 있으며, 이 진술은 객관적인 확인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인간을 그 공간에 있는 사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 바깥에서 인간은 더 이상 공간에 있지 않고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지역에 있다. 이 경우에도 인간이 추상적인 의미에서 공간 속에 처해 있다거나 공간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 진술은 학술용어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렇다 할 의미를 던져주지 못한다.
서두에서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많거나 적을 수 있고 어느 때는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공간의 필요, 공간 부족, 공간 과잉이라는 말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공간 낭비라는 말도 쓴다. 인간에겐 공간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어느 제한된 공간에 있거나 처해 있지만,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간이라는 말 앞에 항상 관사가 나오는 앞의 경우는 양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간인 반면, 언제나 관사 없이 사용되는 뒤의 경우는 인간과 밀접히 연관되어 양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 공간이 바로 인간이 불특정한 방식으로 갖고 있는 공간이며, 인간이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의 공간보다 더 근원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공간성의 본질적 바탕에 이를 수 있다.
결국 서로 다른 세 가지 공간 개념이 존재하므로 여기에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 ~~~이 새로운 공간을 어색하게나마 일단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라고 표현하겠다. 이렇게 해서 사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 내적이고 객관적인 공간, 거리와 방향이 있으며 인간이라는 주체의 주변에 구성되는 지향적인 공간, 이 두 공간에 세 번째 공간 개념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 추가되었다.
인간이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공간을 갖거나 어느 하나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의 규모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6) 개인 공간
만일 인간이 세상에서 혼자 있다면, 이를테면 사막 같은 곳에 있다면 그는 최대한의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무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공간이 필요한 한 사람의 욕구가 다른 이의 욕구와 충돌할 때이다.~~~ (이로 인해)배타적으로 귀속되는 공간이 탄생한다.(개인 공간이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하고 인간이 소유하는 개인 공간이 얼마나 커야 하는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2. 개인 공간의 형태
1) 거주의 세 영역
그렇다면 인간이 공간을 소유한다는 말, 즉 개인 공간이 그에게 귀속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 사용할 수 있을까?
• 자기 몸인 공간
• 자기 집의 공간
• 주변의 일반적인 공간
2) 몸
• 몸과 외부 공간
인간은 공간의 중심에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는 거기와 저기와 관련을 맺고 있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를 정확히 규정하려면 곧 어려움에 처한다. 나는 당연히 여기에 있다고 우리는 말한다. 즉 공간 속의 이 자리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어둠 속에 있어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소리를 질러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물어볼 경우 내가 공간속에서 위치하고 있는 이 어디는 대단히 불확실하여 센티미터 단위로 정확히 특정해 말하기 힘들다. 만일 내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잡으려고 그의 팔을 붙잡는다면, 그는 내가 팔을 붙잡은 그곳에 있는 것일까? 이니면 이 그곳은 그의 몸이 차지하는 공간적 부피와 일치할까?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인간을 그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의 공간적 구성틀의 지향성을 놓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공간 속의 내 위치를 표시하는 하나의 점을 내 몸에 정해놓아야 할 것이다.
한쪽 눈으로만 볼 경우 이 점은 내 눈동자 속에 상당히 정확하게 정해져 있다. 그러나 두 눈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는 순간 이 확실함은 사라진다. 그곳은 두 눈 사이 어딘가에 불확실하게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정확하게 확인하려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그 위치를 정확히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본능적인 의식으로 느낌이 발생하는 자리는 심장 부근이고 춤을 출 때는 이 중심이 몸의 무게 중심으로 이동한다. 공간 속의 여기는 내 몸이 짐작하는 불확실한 곳일 뿐이다. 그 이상 정확히 확인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로써 몸 전체는 인간의 공간성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공간에 있는 나는 몸이라는 신체적 사물과 동일하지 않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몸 역시 신체적 사물이 아니다. 몸은 시신이 되었을 때야 신체적 사물이다. 몸은 직접적인 의미에서 나의 자아가 있는 자리이며, 모든 공간적 세계는 몸을 통해 처음으로 나에게 전달된다. 더 쉽게 말하면, 나는 내 몸을 통해 공간의 세계로 진입했다.
• 눈에 띄지 않는 몸
공간적 구성물로서 몸은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주어졌을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자기 몸을 가지고 있을까? 몸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의 몸은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항상 자기 몸을 건너뛰어 직접 세계의 사물들과 접촉한다. 사르트르는 이 문제를 아주 예리하게 표현했다. “몸은 건너뛴 것, 은연중에 발생한 것이다.” ~~~나는 내 몸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몸을 건너뛰어 내가 관여하는 사물들과 접촉한다.
따라서 단순하게 생각하면 몸은 고유의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을 넘어선 저쪽에서, 피부 바깥에서 공간이 시작된다. 말하자면 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 한 비(非)공간이고 모든 공간적 거리의 시작일 뿐이다. 몸은 공간 속 거리 체계에 대해 점의 기능, 기점의 기능만 갖고 있다. 몸 자체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내 몸이 공간적 구성물로서 분명히 의식되려면 내가 공간에서 움직일 때 몸이 성가시게 방해하여 확연히 알아챌 때가 그렇다. 특히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몸이 귀찮아질 때라든지 병이 났을 때 갑자기 몸의 감각기관과 상태에 대해 지금까지 전혀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할 때가 그렇다.
이 문제는 플뤼게가 대단히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몸이 질병으로 낯설어진 후에야 우리의 관심권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또 다른 깊이 있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 몸이 건강하다면 그래서 아직 고통이나 다른 방해 요소들에 의해 몸이 객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 몸의 공간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주어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몸이 직접 주어진 방식을 살펴보려 한다.
• 몸의 소유 방식으로서 체현
소유의 개념에서 시작하려면 인간이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어려움에 부딪친다. ~~~마르셀은 인간이 자기 몸을 가지고 잇는 방식은 다른 소유물을 가지고 있는 qdktlr과 동일하지 않다. 인간은 다른 소유물과 같은 방식으로 몸을 이용할 수 없다. 그는 몸과 어떤 식으로든 밀접히 묶여 있다.
인간은 자기 몸과 거리를 둘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소유의 특징인 자기화 문제, 이미 외적으로 소유한 것의 내적인 흡수도 여기에는 없다.
3) 집
• 집에서의 체현: 몸의 소유와 집에 거주함의 유사성
인간이 소유한 개인 공간의 두 번째 형태는 집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집의 관계가 인간과 몸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집은 어떤 면에서는 확장된 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몸의 경우와 비슷하게 자신을 집과 동일시하고 집을 통해 더 커다란 주변 공간에 편입된다. 몸과 마찬가지로 집에도 경계가 있다.
몸과 집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몸이라는 개인 공간과 떨어질 수 없고 내가 가는 곳마다 그 공간을 가지고 다니지만, 집이라는 개인 공간은 고정되어 있어서 나는 그곳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집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는 집과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 인간은 집에서 살면서 그 안에 현존해 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 그의 의사를 무시하고 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마치 신체적으로 타격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농부는 밭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누가 자기 땅에 무단으로 들어올 때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이를테면 곡식이 짖밟혀 피해를 볼까 걱정이 돼서가 아니라 그의 공간을 침입한 데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이 그의 공간에 들어오면 그는 자기 자신이 피해를 입고 모욕을 받았다고 느낀다. 국가가 영토 침해 상황에 맞닥뜨릴 때 불안을 느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 집에서 인간의 변화
집 내부와 외부는 공간 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외부 세계는 일을 하고 사무를 보는 곳이며 인간이 업무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상황을 장악하고 예기치 않은 일에 대응하려면 인간은 항상 완벽히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매순간 자기가 하는 일을 통제할 수 있는 의식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외부 세계는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갈라진 영역이다. 그곳은 인간에게 낯ㅅ러고 무시무시한 공간, 그가 내던져진 공간이다.
반면에 평화로운 집에서 인간은 이렇게 긴장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집에서는 금방 주체와 객체 간의 긴장이 풀리고 공간 관계의 지향적 성격도 느슨해진다. 이런 상태가 바로 인간이 공간과 융해되는 조건이며 스스로 공간에 들어가 둘러싸이고 공간에 의해 지탱되는 조건이다.
범위를 넓히면 이 상황은 고향의 공간, 타지의 공간, 그리고 대규모 개인 영역을 낯선 공간과 구별하는 여러 공간에도 해당되며, 범위를 좁히면 집 내부의 다양한 공간에도 적용된다.
• 동물의 영역
인간의 삶은 특정한 거주지와 고향의 영역에 연결되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견해는 동물의 행동에서도 확인된다. ~~~~스위스의 생물학자 헤디거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동물은 동물을 둘러싼 공간과 하나가 되고 통일체를 이룬다. 동물의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계획과 조직이다. 신체 구조, 행동, 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계획과 조직이다.
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자유롭게 숲에서 이동하며 살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생활 영역에 매여 있으며 그곳을 자발적으로 넘어서지 않는다. ~~~동물은 모두 동종 동물의 침입에 맞서 자기 영역을 방어한다.
일정 영역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특정한 표시를 해서 그 영역의 소유구너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소유 표식을 다는 것이다. 새들의 경우 음성 신호나 울음소리 또는 노래가 그런 표식이다. 포유동물은 주로 냄새를 표식으로 이용한다. 대표적인 동물이 개다. 개는 다른 개가 이해할 수 있는 표식을 이용해 자기 영역의 경계를 정한다.
첫째, 새는 자기 영역 바깥보다는 안에 있을 때 훨씬 강하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의 둥지는 항상 위협을 받고 있어서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 확인되는 힘의 균형을 통해 영역이 다시 나뉜다.
4) 열린 공간
• 공간의 보호성
인간이 사는 곳으로 볼 수 잇는 세 번째 공간을 우리는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트인 공간이라고 불렀다.
시간 속에서 인간은 안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간은 다르다. 공간 속에서 우리는 보호받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렇게 말한다. “공간, 커다란 공간은 존재의 친구다.” ~~~커다란 공간의 의미는 인간이 상상 속에서 이곳의 좁음을 벗어나 어느 다른 곳으로 갈 수 잇다는 의미이다. ~~~~친구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이고,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며, 그 옆에 있으면 안도감이 드는 사람이다.
• 열린 공간에서의 거주
공간은 그 자체가 울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무한한 공간에서 흘러 다니다 증발한다는 느낌을 막아준다. 무한히 열린 공간이 어떻게 인간 의식의 증발을 막아줄까? 음향 현상에서는 소리를 반사하는 벽이 필요하다. 벽이 없다면 소리는 무한한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보호하는 벽이 공간 일반에 이 상황을 적용해 보면, 공간은 마치 벽이 잇는 것처럼 작용하여 인간이 막힌 공간에 잇을 때처럼 그 안에서 안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간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이방인이 되어 그에게 낯선 요소인 공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공간과 결속되고 융해되어 공간에 의해 지탱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간은 몸과 다름없이 인간의 dfl부이다. 우리는 공간에 대해서도 소유와 존재의 중간에 위치하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공간에 체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공간에 체현되어 있다거나 공간에서 산다는 말은 그가 공간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 말은 인간이 매개체 속에 있다거나 그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만 의미하지 않고, 그 자신이 매개체의 일부이고 경계를 통해 매개체의 다른 부분과 나뉘면서도 경계를 벗어나 매개체와 하나로 이어지고 매개체에 의해 지탱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공간에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편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붙잡아줄 외벽이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진입한 우리는 공간에 의해 떠받쳐지고 그 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공간과 인간의 원초적인 관계는 거주의 관계이지 지향성의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앞에서 다루었던 지향성으로 분류된 행위 공간의 형태는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것은 파생적인 혹은 후발적인 형태로 거주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 공간과 합일의 다른 형태
인간이 공간과 융해되고 합일된다는 주장을 하기가 약간 주저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취감에 빠져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을 이겨내지 못할 주장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문제 자체가 지닌 필연성 때문이다. ~~~이 주장이 다양하게 인용된 여러 작가에 의해 증명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인간이 공간과 융해된다는 주장은 이질감을 얼마간 덜어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가 바로 슈트라우스가 설명한 춤의 현세적 공간이다. 춤을 출 때는 “공간을 통해” 움직이지 않고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는 슈트라우스의 말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공간 관계를 암시한다. 이때는 주체와 객체의 긴장이 풀린다고 슈트라우스도 분명히 강조했다. 그는 또, 이렇게 “완전히 달라진 공간”은 방향이나 거리가 아닌 깊이나 넓이 같은 다른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했다. 이 상황은 지향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정의한 개인 공간과 완전히 일치한다.
빈스방거가 묘사한 낙천가의 공간은 사물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그 사이를 자유롭고 가볍게 활주할 수 있다면, 이것도 주체와 객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감소로 보아야 한다.
민코브스키의 밤 공간은 마치 피부 위에 얹혀 있고 뚜렷한 경계 없이 나의 내면으로 퍼져 들어오거나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고 말할 때, 이 역시 인간이 공간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공간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매개체처럼 나타나 인간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파악하기 힘든 경험을 포함한다.
3. 요약과 전망
1) 공간서의 변화태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 혹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관찰하는 동안 우리는 여러 형태의 공간들을 추려냈다. 그 공간들은 상호 배제하는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라 서로 겹치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공간성의 변화태라고 부를 수 있다.
• 첫째는 공간에 대한 소박한 믿음, 어린아이가 느끼는 안도감이다. 이 느낌은 훗날 살아가면서 집과 고향에서 느끼는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안도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럴 때 인간은 자기가 사는 공간과 융해되고 그 공간에 직접 체현되어 있다.
• 둘째는 고향이 없는, 혹은 집이 없는 상태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무섭고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버려졌다고 느낀다.
• 그에 따라 셋째로, 집을 지어 안도감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여기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논의했다. 이렇게 해서 외부 세계와 분리된 보호하는 내부 공간이 탄생한다. 그렇다고 위협적인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날 뿐이다.
• 인간이 지은 모든 집은 공격당할 수 있다. (또 집 내부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위험한 공간이 도사리고 잇을 수 있다.) 여기에서 고정된 집에 머무르려는 집착을 극복하고 인간이 만든 개인 공간이 아닌 더 넓은 공간에서 다시 궁극의 안도감을 얻어야 하는 마지막 과제가 생긴다. 다시 말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허울뿐인 안도감에 집착하는 허상에서 벗어나. 소박한 공간성이 더 높은 차원에서 회복되는 열린 안도감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은 허울뿐인 안전에서 탈피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2) 보호 공간의 우위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공간에 대한 연구가 아무리 중요해도, 이것은 행복한 공간에 대한 분석이 끝난 뒤에야 시도할 수 있다. ~~~바슐라르의 접근법에 의하면, 공간성의 두 변화태, 즉 행복한 공간과 적대적인 공간은 동일한 차원에서 동등한 형태로 대립하는 게 아니다. 행복한 공간이 원초적인 공간이고, 이 조건을 바탕으로 추후에 적대 공간을 경험 한 후 다시 이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와 동일한 맥락에 잇는 것이 앞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핵심을 강조했던 다음 문장들이다.
“집은……. 인간 현존재가 만나는 최초의 세계이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자들이 가르치듯 ‘세계 속에 던져지기’전에 집이라는 요람이 눕혀졌다.”
“적대적 세계는 ……. 훗날에 경험한다. 초창기에는 모든 삶이 행복이다.” 이로써 분명한 순서가 정해졌다.
“근원에 주목하는 현상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현존재가 ‘세계 속에 던져진’ 순간부터 연구하는 의식적인 형이상학은 2차 형이상학이다. 이 형이상학은 선행 단계를 건너뛴다. 현존재가 행복인 단계, 원래부터 현존재와 하나였던 행복 속에 인간 존재가 들어가 있는 단계를 생략한다.” 바슐라르가 구체적으로 사르트르를 두고 말한“의식적인 형이상학” 혹은 “의식의 형이상학”은 형성된 의식에서 출발하는 철학적 입장을 뜻한다. 여기에 맞서 바슐라르는, “근원”에 주목하고 현존재가 행복인 “선행 단계‘에 주목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대립시켰다.”의식의 형상학“과 대립하는 상태에서 이 현상학은 대상적 의식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하던 현존재의 근원적 층을 밝히려는 태도이다. 우리도 공간과의 원초적 합일 경험을 묘사할 때마다 이 태도를 견지해야만 한다.
3) 참된 거주를 위한 요구
공간성의 네 변화태, 즉 공간과 맺는 인간의 네 가지 관계는 시간적인 순서로만 전개되진 않는다. 이 관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면서 다양하게 나뉜 층의 체계에서 서로 중첩된다. 시간의 관점에서(하이데거가 분석한) 본래적인 시간성이 저절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모든 실존을 걸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듯이,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공간에서 누리는 참다운 삶을 거주라고 표현했지만, 이 거주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쏟아 부어 온전히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거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하이데거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그러나 참된 거주에 대립하는 두 가지 양태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공간적 구성틀의 관계는 시간성의 관계보다 복잡하다. 하나는 고향 없이 적대적인 공간에 내던져진 비거주이고, 다른 하나는 소심하게 집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거주이다. 이 두 대립 관계에서 참된 거주 장소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중간적 위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대립 관계는 여러 차원에서 작용한다.
참된 거주의 과제는 세 방향으로 나뉜다. 이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세 가지 요구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요구는 공간에서 불안정하게 방황하는 도피자와 모험가의 고향 없는 상태를 겨냥한다. 이 요구는 공간 내의 일정 장소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단단히 토대를 다지고 안식을 주는 개인 공간을 마련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머지 두 요구는 이 개인 공간에서 참된 거주 방식을 실현하지 못할 위험에서 비롯된다. 이중 첫째 요구는(전체로 따지면 둘째 요구)내부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을 위험을 지적한다. 따라서 위협적이고 위험한 외부 공간도 온전히 삶 속에 포함하고, 인간의 삶이 실현되는 유일한 바탕인 내부와 외부 공간의 긴장을 이겨낼 것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협적인 외부 공간과 긴장 상태가 지속되더라도 자기 집의 굳건함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극복하고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큰 공간에 몸을 맏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가 마지막 장에서 묘사했듯이, 이 ‘큰 공간’도 위험한 성질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보호 공간이 되어준다. 결국 이 셋째 요구는 집에서 거주하면서도 더 큰 공간 전체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세 가지 요구에 응할 때 인간은 공간에서 참된 거주를 실현하며 인간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
[Review]
11월은 코로나로 격리되고, 책 두 권 읽고 절반이 지나갔다. 벽에 걸린 달력에 숫자들이 선명한 시간의 실체로 다가온다. 창밖을 보다가 까닭 없는 그리움이 가슴에 노을처럼 번진다. 조금 전 친구가 보내준 카톡을 다시 열어보았다.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노을 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오기도 하고 ”
“중략”
시간과 풍경이 오버랩되고 조금 전 읽었던 책 <인간과 공간>에서, 알 듯 모를 듯 하던 내용들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이 책은 인간이 차지하는 공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즉,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공간을 갖거나 어느 하나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의 규모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심도 있게 관찰한 연구 논문과 같은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보는 공간을 “체험 공간”으로 시간과 비유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시간에서는 시계로 잴 수 있는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시간과 살아 있는 인간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을 구별하듯이, 공간에서도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다루는 추상적인 공간과 인간이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을 구분할 수 있다.”(본문)
지금까지 알았던 공간이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체험 공간“은 공과 사의 모든 공간을 함께 어우르는 주관적인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인간은 내적인 공간에서 외적인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인간이 지니는 공간이 확장된다는 의미다.
“사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 내적이고 객관적인 공간, 거리와 방향이 있으며 인간이라는 주체의 주변에 구성되는 지향적인 공간, 이 두 공간에 세 번째 공간 개념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 추가되었다.“ (본문)
이 책의 전반부에는 ‘공간의 기본적인 분류’ 즉, 공간의 개념과 용어, 좌표, 중심이란 어떤 것이며, 시각적인 의미에서 시작과 끝. 그리고, ‘공간의 넓은 세계’ 즉, 넓은 곳, 낯선 곳, 먼 곳 그리고 길과 도로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 있다.
후반부에는 ‘안식처로서 집’이 갖는 중요성. 집의 구조와 내용물이 갖는 의미 등과의 연관성. 그리고 ‘공간의 여러 관점’ 호돌로로지적 공간 개념과 공간의 분위기, 현세적, 공동생활로서의 의미. 그리고 끝으로 ‘인간 삶의 공간성’이라는 총체적인 결론으로 나누어졌다.
오늘날에는 공간에 대한 관점이 더 크게 확장되었으나, 이 책이 출판된 1963년에는 저자의 말대로 처음 시도한 연구이며 ‘예비적 성격의 저술’이기에 오늘날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내용의 모호함, 명쾌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지루함을 느끼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소 피상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공간의 시각적 의미로 지평선에 대한 관찰, 둘레길을 걷는 마음,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가정, 귀향 등 다양한 것들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저자(오토 프리드리히 볼노. Otto Friedrich Bollnow 1903~1991) 는 독일 태생으로 철학자이자 교육자, 괴팅겐 대학교의 철학 및 교육 부교수. 튀빙겐에서 철학과 교육을 위한 의장직을 역임했으며, 1980년 독일 프리메이슨 문화상을 수상했다.
<본문>
“인간은 어느 제한된 공간에 있거나 처해 있지만,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간은 인간과 무관하게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공간적인 존재인 이상, 다시 말해 인간이 공간을 구성하고 자기 주변에 공간을 펼치는 존재인 한에서만 공간은 존재한다. ”
“이 책은 체험공간이라는 문제의 중요성과 생산성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히려는 예비적 성격의 저술이다. 연구에서 대두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주목하기 위해 나는 다방면으로 눈길을 돌려 개별 학문에서 제시한 영구 성과들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통일된 모습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를 살피려 한다.”
“인간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그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위험에 내던져져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과제를 완수하고 나면 집의 보호 속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도 가져야 한다.”
“공간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좁거나 넓을 수 있다. 본래 좁은(Enge)을 뜻하는 불안감(Angst)이 들면 마음이 움츠러들고, 즐거운 기분이 충만하면 마음은 다시 넓어진다. 여기에서 좁음과 넓음의 비유적인 의미들이 발전해 나왔다.”
“호돌로지적 공간 개념은 길에서 수행하는 의미 있는 행위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그 행위는 걷기와 탈 것을 타고 가는 행위이다. 걷기와 타고 가는 행위는 풍경 속에서 진행되는 비교적 광범위한 이동이다.”
“사물과 인간이 존재하는 세계 내적이고 객관적인 공간, 거리와 방향이 있으며 인간이라는 주체의 주변에 구성되는 지향적인 공간, 이 두 공간에 세 번째 공간 개념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간”이 추가되었다.“
“수학적 공간에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양 지점의 좌표에 의해서만 결정되므로 그 사이에 놓인 공간의 구조와는 무관한 객관적인 수치다. 반면 호돌로지적 공간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목표지점까지의 다양한 도달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던 요소가 추가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포함한다.”
“넓다는 개념부터 설명하자. 이 말의 의미는 반대 개념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넓은 것의 반대는 좁은 것이다. 옷이나 신발은 꼭 끼거나 클 수 있다. 옷이나 신발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몸이나 발로 적절히 채워지지 않아 주변이 헐렁하면 크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 사람이 뚱뚱해지면 옷이나 신발은 너무 낄 수 있다. 거주공간도 넓을 수 있다. 반대로 너무 가까운 곳에 신축 건물이 올라가면 전망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좁은 계곡에서 평지로 나가면 시야가 넓어진다. 좁은 거리와 골목길이 있고, 바다 양옆에 육지가 바짝 붙어 있는 해협이 있다. 반대로 널찍한 장소와 널찍한 경관도 있다. 또 무한히 넓은 바다라는 말도 사용한다.”
“인간은 거주일 때만, 집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공공의 영역과 분리된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을 때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고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으려면 그런 든든한 영역이 필요하다. 인간에게서 집을 빼앗거나,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해 집의 평화를 빼앗으면, 그의 내면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호돌로지적 공간은 근본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공간과 대조를 이룬다. 수학적 공간에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는 양 지점의 좌표에 의해서만 결정되므로 그 사이에 놓인 공간의 구조와는 무관한 객관적인 수치다. 반면 호돌로지적 공간은 인간이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목표지점까지의 다양한 도달 가능성이라고 표현했던 요소가 추가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포함한다.”
“특정 지역에서 최상의 길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요구되는 극단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편안한 길이라고 해서 반드시 최단 거리의 길은 아니다. 최단 거리의 길도 반드시 가장 빠른 길은 아니다. 그것은 장(場)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따라 달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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