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북궁천은 검을 뻗어내 다시 십여 명을 죽이며 무겁게 말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조심할 것이오. 저들이 서궁세가의 십대가신이라면...]
적용운은 천마십대장로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로잡도록 하시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들 천마십대장로는 동시에 대답하고는 단엽을 향해 몸을 놀렸다. 거의 동시에 적요운의 곁에 서 있던 철류향은 북궁천을 향해 몸을 날린다. 이리하여 철류향과 북궁천, 그리고 천마십대장로와 단엽간의 대격전의 막은 올랐다.
(숨이 막히는군.)
단엽은 천마십대장로에게 포위당하자 거대한 압력을 느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으음...북궁천의 말에 의하면 천하의 어떤 고수라 해도 이들 가운데 삼인을 동시에 상대할 수가 없다 했다. 내 그 말을 믿지 않았거늘...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군.)
천마십대장로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했다. 면사에 가려진 얼굴 가운데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 그 열쌍의 눈은 단엽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기이했다.
그 눈빛은 마치 단엽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듯했다. 만약 단엽의 정력이 굳강하지 않았다면 그 눈빛의 강요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천마교의 부활을 막기 이전에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 같군. 그렇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럴 수야 없지. 적사도를 나온 그 이후 아무 한 일도 없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찌됐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일단, 이곳 마황성의 실체를 대강 파악한 것으로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이후 북궁세가를 도와 이들 마황성의 인물들을 상대한다면 설사 천마교의 부활은 막지 못한다 해도 그 힘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빠르게 염두를 굴린 단엽.
파아아... 그는 한손으로는 천마도법 가운데 제 일초식인 천마멸을 전개했고 다른 한손으로는 단엽천불수를 펼쳤다.
가공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불문최고의 기학과 천마교 사상 최강의 무공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위력은... 천마십대장로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현상이었다.
스스스... 그들의 신형은 움직였다.
단엽을 중심으로 느릿하게... 그러나 느릿하다는 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었다.
단엽은 찰나지간 그들의 신형을 아무데서도 볼 수가 없었다. 천마도가 허공을 찌르는 듯한 느낌만을 받았고 단엽천불수를 전개한 왼손이 마치 바닥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공허함만을 맛보았을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 슈욱!
동시에 불쑥 단엽을 향해 날아드는 열 쌍의 손. 그것은 그냥 보통의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이 미처 단엽에게 접근하기도 전 칼날보다도 수십 배 더 날카로운 장력을 뿌렸다. 그 장력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전신은 걸레처럼 묵사발이 되어 버릴 듯 싶었다.
[으음...]
단엽의 입에서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온 침음성.
(도저히 피할 수가 없다.)
한쌍의 손이 삼백육십 방위를 완벽히 차단한 채 공격해오니, 무려 열 쌍의 손은 실로 바늘 끝만한 틈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기마저 차단한 듯 단엽은 심하게 호흡곤란마저 느껴야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전면대결이다.)
단엽은 우수에 십이성의 수음마공을 끌어올렸다. 순간, 그의 우수는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가공할만한 음한지기가 사방으로 자욱하게 날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좌수에느 마라독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천마삼절학 가운데 이절학을 동시에 전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여지는 없었다.
그의 쌍수는 천마십대장로를 향해 뻗어나갔다.
콰콰쾅! 그대로 그들의 장력은 허공에서 가공할만한 격돌을 일으켰다.
쿵쿵쿵... 천마십대장로는 그 충격에 못 이겨 삼보나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악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신의 빛. 그들 중 다섯의 전신은 하얀 서리에 뒤덮여 있었고 나머지 다섯은 가슴의 옷이 독에 의해 누렇게 퇴색이 되어 있었다.
만약, 그들의 무공이 고강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한줌의 물로 녹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상대인 단엽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입가에는 가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무릎까지 지면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으니 그 역시 낭패를 면치 못한 것이다. 진탕되는 기혈이 목구멍까지 치미어 올라왔으나 그는 억지로 그것을 삼켰다.
(으으... 이들 열 명을 상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
단엽은 절감하고 있었다. 이때, 이 결전을 주시했던 적용운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서운 무공이다. 어찌 저자가 천마삼절학 가운데 이절학을 몸에 지니고 있단 말인가? 아니 천마도법까지 완벽하게 삼절학을 연성하고 있다.)
그의 마음에 불신의 빛이 떠올랐다.
(불가능한 일이다. 천마삼절학 가운데 단 하나의 무공을 연성하는데 무려 백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래도 연성이 불가능한 무공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 있다니...)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북궁천만을 의식해 왔는데... 오히려 저 자의 능력은 북궁천의 위인 것 같지 않은가?)
이 순간 그의 가슴에 일고 있는 한 가닥 전율.
분명한 것은 단엽이 결코 천마십대장로를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다는 것. 이것은 확신이었다.
천마십대장로를 상대로 하여 승리할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 없는 것이다. 이때, 단엽은 어두운 눈빛으로 힐끔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북궁천과 철류향의 일전은 실로 치열했다.
북궁천의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흐르고 있었다. 이 땅에서 자신의 적수는 오직 가주뿐이라는 그의 확신은 이 순간 철류향을 상대로 싸우면서 여지없이 깨지고 있었다.
철류향의 무공은 강했다. 군협천의 최고무학인 군협삼대금학을 대성한 듯 그녀는 완벽하게 그 세 가지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있었다.
북궁천은 사령자하수와 사령전린검법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었지만 연신 뒤로 밀리는 것은 북궁천이었다. 그러나, 결코 북궁천의 무공이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백중지세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북궁세가의 가장 강한 무공인 사령마안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북궁천이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뒤로 몰리는 것은 전혀 수비를 하지 않는 철류향의 무모한 공격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직 공격만을 아는 것 같았다. 물론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수비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함께 죽자는 식이다.
북궁천이 철류향의 허점을 노려 공격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될 경우 북궁천 역시 철류향의 공격을 피할 수 없고 결국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다. 북궁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어쩔 수가 없는가?)
북궁천은 입술을 깨물며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순간, 팔랑... 그의 이마에 매여 있는 검은 띠가 풀렸다. 그러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눈, 그것은 가공할만한 마기로 뭉쳐져 있는 마안이었다.
고오오...
영혼을 지닌 모든 생명체를 단지 눈빛만으로도 죽일 수가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사령마안인 것이다. 철류향의 몸에 격렬한 떨림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 그녀의 눈빛은 다시 몽롱하게 풀어졌다. 이어, 손. 도대체 이렇게 흰 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새하얀 백옥수가 북궁천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북궁천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럴 수가... 이지를 이미 상실하고 있는 저 여인이기에 사령마안은 통하지 않는다.)
결국 사령마안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허점을 노출시킨 것이다. 군협삼대금학 가운데 백야수. 어떤 호신강기라 해도 단숨에 파괴할 수 있다는 백야수가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북궁천에게 날아들었고 북궁천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순간,
[우우...]
단엽은 북궁천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자신도 위급한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우선은 북궁천을 살려야 함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저 자가 죽으면 북궁세가는 그 힘이 반으로 상실되고 만다. 현재 서궁세가를 상대할 유일한 세력이 북궁세가인 만큼... 저자를 살려야 한다.)
손, 진홍빛 단풍의 문양이 새겨진 단엽의 손은 그대로 백야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쾅! 단엽의 몸은 백야수의 가공할 위력에 밀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곳은 바로 북궁천의 앞이었다.
[욱!]
북궁천은 한 모금의 더운 선혈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단엽이 철류향의 공격을 막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막지 못했기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혼절해 버린 것이다.
단엽 역시 입가에 가는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으며 신형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철류향 그녀역시 십여 보 가량 뒤로 물러선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이때, 천마십대장로의 공세가 다시 단엽과 북궁천에게 밀려들었다.
단엽은 벼락처럼 북궁천을 안아들었다. 이어, 뇌옥
이라는 회백색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곳만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이었기 때문이었다.
쾅! 뇌옥의 문은 거칠게 열렸고 그대로 단엽과 북궁천의 몸은 문을 통해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되었소.]
적용운은 천마십대장로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천마십대장로는 장력을 회수하며 적용운의 앞으로 내려섰다.
철류향의 눈빛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러나, 뇌옥의 문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가끔 기이한 흔들림을 보이고 있었으니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지... 적용운은 천마십대장로를 보며 말했다.
[뇌옥의 문을 철저히 차단하시오.]
[명을 따르겠습니다.]
천마십대장로는 공손히 허리를 굽힌 후 뇌옥의 문으로 다가갔고, 적용운은 신음 비슷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두 사람 다 나에게는 무서운 상대였지만 그 가운데 단엽이란 인물은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누구인가? 누구인데 천마삼절학을 완벽하게 연성한 것이며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것인가?]
거듭되는 의혹. 지금으로서는 쉽게 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이제는 상관없게 되었다.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남은 인물은... 북궁세가의 가주인 북궁추림 뿐이다. 그러나 그 여인 역시 서궁세가의 가주에 의해 머지않아 제압이 될 것이다.]
그는 철류향을 어깨를 감싸 안으며 걸어갔다.
철류향은 멍한 눈빛으로 다시금 뇌옥의 입구를 바라본 후 적용운을 따랐다.
동굴.
단엽이 북궁천을 안고 뇌옥의 문을 들어선 곳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동굴은 끝없이 안으로 뻗어 있었다. 공기는 지극히 눅눅했으며 습했다.
천정에서 흘러내리는 야명주의 불빛이 희미하게 동굴을 드러내고 있었을 뿐이다.
저벅저벅...
단엽의 발걸음소리만이 여운처럼 길게 울리며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단엽은 비틀거리는 신형을 애써 추스르며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이 뇌옥으로 잡혀 들어온 셈이 되고 말았군.]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북궁천을 주시했다. 그의 품에 안겨진 북궁천은 죽
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큰일이로군. 상태가 좋지 않다. 치료를 해야 할 텐데... 내겐 전혀 의학
의 상식이 없으니...]
난처했다. 이대로 두면 북궁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상처가 치명적인 듯 했다.
[무서운 무공이었다. 이 자의 몸은 거의 금강불괴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이런 심한 상처를 입히다니...]
단엽은 철류향을 뇌리에 떠올리며 그 무서운 무공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빙후 역시 철류향에 의해 죽음을 당했음을 확신했다.
[천마십대장로... 그들의 무공은 또 어떠한가? 그들이 합친 힘은 철류향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단엽은 천마십대장로라는 인물들이 서궁세가의 십대가신임을 상기했고, 또 다시 서궁세가의 거대한 잠재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벅저벅...
그는 무작정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데 문득, 그의 발길이 뚝 멈추었다. 누군가가 전면에서 다가옴을 느낀 것이다. 최초로 그가 상대의 기를 느낀 것은 무려 백장 쯤 떨어진 동굴의 안쪽이었다. 한데, 찰나지간에 그는 상대의 기를 바로 눈앞에서 느끼고 있었으니...
(인간인가? 아니면 유령인가?)
단엽은 경악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그러한 속도를 낼 수 없었기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 고요히 한명의 청년이 나타나 있었다. 일신에 단아하게 학창의를 걸쳤으며 머리에는 고아하게 통천관을 쓴 이십삼세 가량의 청년. 지극히 평범한 용모의 소유자였고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백치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단엽의 앞에 선 채 한동안 단엽을 직시했다.
단엽은 마치 청년의 눈빛으로 자신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전율이 일었다. 자신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는 인물, 그의 시선은 잠시 후 북궁천에게로 던져졌다. 여전히 백치 같은 무표정이다.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대신 그는 북궁천을 향해 가볍게 손을 뻗는 것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는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어 긴 여운처럼 들려오는 한 줄기의 음성이 있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그 상태로 생명이 유지될 것이오.]
단 한번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다 죽어가는 북궁천의 생명이 한 달이나 연장이 되다니... 단엽은 믿을 수 없어 북궁천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궁천의 백납처럼 새하얗던 얼굴에 은은히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이럴 수가!]
단엽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단엽은 깊은 의혹을 느끼며 계속 걸어갔다.
얼마나 안으로 걸어들어 갔을까. 석실. 돌연 동굴의 양쪽으로 십여 개의 석실이 보였다. 조그만 철창문을 제외하고는 창 하나 없는 뇌옥이었다.
뇌옥 안은 의외로 깨끗했다. 가운데에는 탁자가, 벽쪽에는 나무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나무침상이 놓여 있었으며 족자도 하나 걸려 있었다.
무심히 석실을 들여다 보던 단엽의 얼굴에 돌연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저들은 군협칠대무황이 아닌가?]
분명히 석실마다에 걸려 있는 인물들은 저 위대한 군협칠대무황이었다.
실질적으로 수많은 마인들을 잡아들여 무림칠대뇌옥으로 보냈던 인물들. 삼대에 걸친 군협칠대무황이 잡아들인 마인들이 바로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삼 대째의 군협칠대무황.
이들의 자질과 무공은 역대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최고라 하였다. 한데, 그들이 단엽과 헤어진 지 삼년 만에 저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석실에 갇혀진 신세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단엽의 시선이 예황 부소영에게로 향했다. 후리후리한 키에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 그러나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초췌해 보였으며 눈빛은 풀어진 채 몽롱했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눈빛은 몽롱했다. 그들은 제각기 석실의 벽에 기댄 채이거나 비스듬히 벽에 서 있었고 천황 혁련궁과 검황 염무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단엽이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정상이 아니다. 누구에겐가 이지가 상실된 것이 분명한데...)
단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예황 부소영의 수척한 얼굴을 주시하는 그의 눈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아이야...]
돌연 한줄기 격동에 떨리는 음성이 단엽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순간, 단엽의 몸이 격렬한 떨림을 일으켰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던 것이다.
(아버님?)
단엽은 급히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맨 마지막에 위치한 석실이었다. 석실에는 한명의 중년승인이 있었다. 수척한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비범해 보이는 그는 바로 천엽성승이었다.
대소림사 사상 가장 뛰어난 기승이며 단엽의 부친이기도 한 천엽성승이 분명했다.
[아버님이....이럴 수가...]
단엽은 경악하며 석실 앞으로 다가갔다.
[아들아...]
천엽성승은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단엽은 북궁천을 바닥에 내려놓고 와락 천엽성승의 손을 잡았다. 천엽성승의 손은 싸늘했다. 예전의 천엽성승이 아닌 것이다.
적사도를 빠져나온 이후 단엽은 천엽성승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모습으로 행동하던 부친, 한데, 그가 돌연 이곳에 이런 초라한 몰골로 갇혀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아마도 너와의 만남은 모두가 불존의 뜻인가 싶도다.]
천엽성승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얼마간의 격동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 부자의 실로 감격적인 해우는 오래가지 않았다. 단엽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의혹들. 그리고 천엽성승은 천엽성승대로 의혹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더 이상의 감격적인 행동을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엽은 정색하며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아버님...]
천엽성승은 길게 탄식했다. 한동안 멍하니 단엽의 얼굴만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이야... 우선 너에 대해서 듣고 싶구나. 너는 어찌해서 적사도에서 살아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며...어찌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느냐?]
천엽성승의 물음에 단엽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간략하게 말했다. 그러자 천엽성승은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 아들아...]
그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단엽의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자신에 대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아비는 너의 희생으로 제이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천엽이 아닌 너의 이름으로... 세상은 천엽이란 이름을 잊기 시작했고 단엽옥승이란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아니 세인들 모두가 단엽옥승이라는 이름을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대소림사의 인물들과 풍운회의 인물들만이 그 이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풍운회에 대해선 궁금함을 느낄 것이다. 기실 풍운회는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조직이다. 이 아비가 풍운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군협천주 철군무를 만나면서 비롯되었다. 삼 년 전 네가 보낸 서찰을 예황 부소영으로부터 전해 받고 군협천주 철군무가 암살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군협천 전체가 엄청난 음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아비는 그 길로 군협천주 철군무를 찾아 나섰고 반년 만에 그를 만날 수가 있었다. 당시 군협천주 철군무는 비밀리에 하나의 조직을 결성하고 있었지.
그것이 바로 풍운회였다. 군협천주 철군무는 이 아비의 출현에 크게 반가와
했고 풍운회의 부회주가 되어주길 간청했다. 이 아비는 그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부터 이 아비는 풍운회의 부회주로서 그리고 단엽옥승으로서 활약을 하게 되었다. 우선 대소림사를 풍운회의 한 조직으로 끌어 들였으며 더불어 구파일방 가운데 팔파일방의 도움을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아비가 천엽성승임을 아는 인물은 군협천주 철군무 외에는 없었다.
이 아비는 철저히 천엽이 아닌 너의 존재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풍운회는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군협천의 거대한 힘을 이용하고 있는 음모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군협천의 모든 문서를 조작하고...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를 조작하고 있는 음모자들을... 그리고 무려 이백여 년의 세월에 걸쳐 천마교의 힘을 무림칠대뇌옥에 응축시킨 장본인들을... 그들 음모자에 대해서는 이미 군협천주 철군무가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단엽은 궁금한 듯 물었다. 천엽성승은 숨이 찬 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천
천히 말을 이었다.
[군협천 내에는 천루라는 조직이 있다. 천루가 하는 일은 군협천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천루야 말로 군협천의 핵심 기관이다. 그들은 군협천의 모든 기밀문서를 관리관장하며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들은 바로 천루를 통해서만이 전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천루에서 행해온 그 일은 일이십년 동안 행해진 것이 아니라 군협천의 창단과 동시에 시작되어 무려 오백여 성상 동안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이제는 짐작이 가느냐? 이 모든 음모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천엽성승은 단엽을 보며 물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천루입니까?]
[그렇다. 천루만이 그 모든 문서를 조작할 수 있으며 명령서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 대체 그들이 누구입니까? 누구인데 그런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까?]
[그들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면 오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백년 전 천마교에 의해 난세에 빠진 무림을 구하기 위해 군협천이 세워졌다. 당시의 최고의 정파기재를 중심으로 십만 정도인은 군협천을 세웠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워낙 급조된 군협천이기에 그 위계질서가 제대로 잡혀질리 없었으며 상하조직의 관계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갑에 전해져야 하는 명령서가 을에 전해지고 을에 전해져야 하는 문서가 갑에 전해지는 오류는 당연한 결과처럼 찾아들었지. 이에 군협천인들은 고심했고 급기야는 초지자들의 가문인 서궁세가를 끌어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엽은 이 순간 무엇인가 확 트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희미했던 서궁세가에 대한 존재가 확실하게 잡혀진 것이다.
[그리하여 서궁세가는 군협천 내에 천루라는 조직으로 들어서게 되었으며...그들의 뛰어난 지혜를 이용하여 불과 수일 만에 완벽하게 군협천의 위계질서를 잡아나갔던 것이다. 그로부터 서궁세가의 인물들이 군협천의 모든 문서와 명령서를 관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했으며 공정했고 정확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대대로 군협천주들은 그들을 더없이 신망했다.
그들은 위대했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무림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게 되고 말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워낙에 방대하고 치밀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모든 문서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태였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인물들이 천루의 일을 대신할 수가 없었기에... 서궁세가의 인물이 아닌 그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가 없었떤 것이다.
만약 서궁세가가 하는 일을 다른 인물들에게 넘겨주려면 적어도 일백년 이상의 세월은 소비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무림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군협천에 존속하게 된 것이다. 작금에 이르도록... 한데 그들이 무려 이백여 년 전부터 군협천의 문서를 조작하고 명령서를 조작하여 대과헌을 만들었고 급기야는 천마교의 힘을 무림칠대뇌옥에 비축하기 시작했으니...]
천엽성승의 표정은 무거웠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는 군협천주 철군무조차도... 그들이 왜 이런 거대한 음모를 꾸며야 했고 또한 군협천을 특히 군협천주를 무섭게 증오하고 있는지... 그들은 본래 무림의 야망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인물
이었다. 그들은 초지자들이었고 현자들이었으며 또한 성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이런 음모를 꾸미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들 서궁세가의 인물들은 목적대로 천마교의 부활을 지금에 와서 시작하고 있다. 무림칠대뇌옥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이며 그 가공할 힘이 거의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아... 그들이 노리는 최후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천마교의 부흥이겠느냐? 천하의 제패이겠느냐? 아니다. 그들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군협천의 붕괴였다. 그 확실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은 군협천에 엄청난 한을 품어왔고 그래서 천마교의 힘을 이용하여 군협천을 파멸시키려 했던 것이다.]
단엽은 너무도 무서운 사실에 침음성을 토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군협천에 대해 한을 품었는가 하는 것이로군. 대체 무엇 때문인가? 무슨 이유로 천하의 현자이며 성자인 그들이 군협천에 무서운 증오심을 갖게 된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로군.)
알 수 없는 일이다. 군협천주 철군무조차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천엽성승의 말은 무겁게 이어졌다.
[군협천이 가장 위기에 직면한 것은 무림칠대뇌옥이 파괴되면서 비롯되었다. 서궁세가의 인물은 군협천주의 고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상적인 명이었다면 군협천의 인물들은 충분히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막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은 군협천의 인물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당시 풍운회가 나서지 않았다면 군협천의 고수들은 칠할 이상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풍운회가 나서 위기에 몰린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했고 그들을 풍운회 아래 예속시킨 것이다. 군협천의 거대한 힘이 그렇게 해서 풍운회에 흡수된 셈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서궁세가의 계산속에 있었다면 믿겠느냐? 기실 풍운회의 실체는 창단되는 그 순간부터 서궁세가의 인물들에게 드러난 것이다.]
단엽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풍운회의 출범이 처음부터 비밀로 시작된 것인 만큼 당연히 서궁세가의 인물이 몰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군협천주 철군무의 행적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노출된 것이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풍운회에 배신자라도?]
[그렇다. 배신자가 있었던 것이다.]
천엽성승은 무겁게 고래를 끄덕였다.
[배신자가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배신자가.]
[누구이옵니까?]
[내가 아는 배신자는 오직 한명 뿐이다. 그는 바로 개방의 대장로이자 이 아비의 고우인 만박대선개이다. 이 아비가 믿었던 그에 의해 제압이 되어 이곳에 왔다. 적사도에서 나온 너를 만나고 난 이후 나는 그에게 나의 진실한 신분과 너에 대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것이 실수였지... 그는 결국 이 아비를 암습했고 그제야 이 아비는 그가 서궁세가의 인물임을 알았다.
놀랍게도 서궁세가의 인물은 단지 천루에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하의 각 문파에 첩자로서 파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음모가 이백년 전부터 시작이 된 만큼 서궁세가의 인물은 그때부터 자신들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각 문파에 잠입하였던 것이다. 아니 잠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 뛰어난 자질을 이용해 떳떳하게 입문했던 것이다. 서궁세가의 핏줄을 받은 인물은 그 이후 각 문파의 최고 인물로 성장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 가운데 한명이 바로 만박대선개였던 것이다. 어쨌든 풍운회의 모든 움직임은 철저하게 서궁세가에 보고가 되었고 그럼에도 그들이 풍운회가 군협천의 힘을 끌어들이도록 방치한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무서운 고통을 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군협천주 철군무에게 풍운회의 힘은 천마교로써 상대하고 군협천주 철군무는 철군무의 딸로 하여금 상대케 하려는...]
[아아...]
단엽은 아연실색하고 만다.
[도대체 서궁세가의 인물들의 한과 증오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들은 군협천에 무서운 한과 증오를 품고 있고 군협천주 철군무에게 향한 한과 증오는 더욱 큰 것이다. 철류향으로 하여금 철군무를 상대하려 하게 하는 것은 차마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이다. 그것도 서서히... 군협천주 철군무에게 무서운 정신적인 고통을 주며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천엽성승의 말은 일단 여기에서 맺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천엽성승은 힘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사실은 현 천루의 루주이며 서궁세가의 가주인 서궁수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다.]
[서궁수?]
[너도 보았을 것이다. 네가 오기 전 그자는 이곳을 나갔으니...]
[그렇다면?]
단엽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조금 전 보았던 지극히 평범한 신비청년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서궁세가의 가주란 말입니까? 그 평범한 인물이?]
천엽성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가 틀림없는 서궁수이다. 그리고 그는 서궁세가 사상 가장 뛰어난 기재이기도 하다. 현재 그의 무공은 천하에 적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적수가 있다면 오직 군협천주 철군무 뿐이다. 그런 그는 군협천에 있을 당시에 적용운을 자신의 아래로 끌어들였고 적용운으로부터 천마교의 부활을 대가로 일 년 동안 천마교의 힘을 서궁세가의 아래에 둘 것을 약속받았다.]
단엽은 거듭 침음했다.
천엽성승의군협칠대무황에게로 향했다.
[저들 군협칠대무황조차도 서궁수의 일백초 적수가 되지 못했다. 무서운 일이다. 저들의 합공은 천하무적이라 알려졌거늘... 그가 저들을 이곳에 잡아들인 것은 한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단엽은 묵묵히 천엽성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실 군협천에는 서궁수가 가장 두렵게 생각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군협천주 철군무보다도 더욱... 그들은 바로 군협천의 구대장로이다. 그들의 나이는 모두 이백세가 넘었으며 장로원에 칩거한 채 백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가히 입신지경에 이르러 그 힘의 한계를 그 자신들도 모를 정도이다. 그들은 군협천주조차도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오직 단 한번. 군협천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만 조사령의 발동으로 그들을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한데 그들을 군협천주 철군무가 암살을 가장하여 군협천을 떠날 당시 대동한 것이다.
현재 그들은 풍운회의 구대장로의 신분으로 있다. 서궁수가 뛰어나다 하지만 그들 중 삼인 이상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 군협칠대무황을 이곳에 잡아들인 것은 바로 그들 구대장로를 상대하기 위함이다. 물론 현재의 군협칠대무황의 능력으로는 구대장로를 상대할 수 없지만 이들의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현재의 능력보다 두세 배 강하게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설사 이들이 그래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천마십대장로로 하여금 구대장로를 상대케 할 것이다.
그들 천마십대장로는 군협천의 구대장로를 상대하기 위해 키워진 인물들임으로 막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놈들이 군협칠대무황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놈이 북궁천을 이곳에 잡아들인 것도 북궁세가의 힘을 이용해 군협칠대무황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려는 계산이 있어서이다.
북궁세가의 인물만이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만남이 운명인 것도 네가 바로 군협칠대무황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야할 막중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단엽은 탄식했다. 천엽성승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방법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면 길은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죽을 수야 없지요.]
단엽은 어깨를 쭉 펴며 빙그레 웃었다. 천엽성승은 단엽을 대견한 듯 보며 말했다.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서궁수를 상대할 사람은 군협천주 철군무가 아니라 바로 너임을... 너만이 유일하게 서궁수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보겠습니다.]
[헛허허... 좋아. 그 기백 마음에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비는 현재 아비가 지니고 있는 모든 공력을 너에게 전해 줄 것이다.]
[아버님!?]
[어떠냐? 현재의 너의 공력에 이 아비의 공력이 주입된다면... 너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서궁수 이상 가는 공력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아버님,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단엽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무인에게 공력을 전함은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 방법도 이미 오래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데 지금, 천엽성승이 스스로 무공의 전폐를 각오하고 자신의 공력을 단엽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천엽성승의 얼굴에 비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운명이다. 서궁수가 군협천주 철군무를 상대하기 위해 이 아비를 살려둔 것도... 나의 무공을 폐지하지 않은 것도 운명이며... 이 아비가 공력을 전하는 역기천이대법을 알고 있는 것도 운명이다.]
[하...하오나...]
[거역해서는 안 된다. 무림의 운명이 너의 어깨에 달려 있다. 만박대선개의 진실한 신분을 군협천주 철군무에게 전하는 것도 너의 임무이며 풍운회의 부회주로서 서궁수를 상대해야 함도 또한 너의 임무이며 운명이다. 만약 이를 거역하면 이 아비와 군협칠대무황은 이지를 상실한 상태에서 천추의 한을 남길지니...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아버님...]
단엽은 뜨거운 무엇이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름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천엽성승은 자상하게 웃어보였다.
[과거 너는 나를 위해 희생하였으니 이제 이 아비가 너를 위해 희생하는 것뿐이다. 자, 몸을 돌려라. 어서 등을 보이도록 하여라.]
단엽은 천엽성승의 뜻을 더이상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순간, 천엽성승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어 한 손은 단엽의 명문혈에 대었고 다른 한손은 백회혈에 대었다.
[대소림사의 칠십이 종 절예 가운데에는 단엽천불수에 필적하는 두 가지의 불문기학이 있다. 이름하여 달마선공과 달마고해보이다. 단엽천불수가 내가기공과 외가기공이 조화된 완벽한 무공이라면 달마선공은 내가기공만의 무공이다. 내가기공만을 놓고 따지자면 달마선공이 오히려 단엽천불수보다 한 단계 위이다.
천엽성승의 말은 담담히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쌍수는 여전히 단엽의 백회혈과 명문혈에 대어져 있었고 그의 팔만사천모공으로부터는 회백색 기류가 서서히 분출되고 있었다.
[달마선공은 유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강한 공격을 받아도 유함으로 바꿀 수가 있으며 너의 몸에 잠재된 수음마공과 마라독공, 그리고 단엽천불수의 힘을 하나로 합일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세 가지의 무공을 동시에 전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마선공은 대소림사 사상 누구도 연성치 못한 무학이다. 단엽천불수는 이 아비에 의해 연성되었고 달마고해보는 이 아비 이전에 대과헌의 헌주이셨던 여래신승께서 최초로 연성하셨다. 만약 네가 달마선공을 연성하게 된다면 너는 최초로 그 무학을 연성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달마고해보는 신법과 보법으로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불가해의 무학이다.]
단엽은 눈을 내리감은 채 천엽성승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 그의 명문혈과 백회혈로는 기이한 힘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미증유의 거력.
바로 천엽성승의 몸에서 분출되었던 회백색 기류가 스며드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천엽성승의 이백년 공력이 흘러드는 것이었다.
부르르...
단엽의 전신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몸과 영혼이 무저의 공간 속을 떠도는 듯한 느낌. 그리고 폭발할 듯한 힘의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거대한 힘이 밀려들면서 그는 이제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몸은 더없이 가벼워졌으며 영혼은 무엇인가에 씻겨지는 듯 청명해진다.
이때, 천엽성승의 음성이 희미하게 단엽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정신을 집중하여라. 이제부터 달마선공과 달마고해보의 구결을 전하겠다.]
그리고, 천엽성승의 음성은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간다. 얼마의 시간이 흘
렀을까.
철창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단엽의 얼굴은 담담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과거의 눈빛은 물처럼 고요하고 담담했다. 그것은 고요에 잠긴 대해와도 같았고 또한 가을하늘처럼 깊었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지금의 눈빛은 무어라 형언하기조차 힘들었다. 고요하고 깊으며 신비로운 것은 예전과 같으나 그 이면에는 깊은 늪과 깊은 바닷속과 같은 알 수 없는 무한대의 힘이 또한 함유되어 있는 듯했다.
그것은 폭발하지 않은 미지의 정적이었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움직이려 드는 잠재력이기도 했다. 과거의 단엽은 분명히 아니다. 천엽성승의 공력을 전해받은 현재의 그의 공력은 무려 칠갑자. 이것은 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평생을 가도 오를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지고한 경지였다.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으므로.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한 사람의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바로 천엽성승. 그러나 천엽성승은 준 것만큼 변해 있었다. 지고한 공력 탓으로 인해 백삼십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사십의 중년인의모습이었던 그이다.
한데 지금의 그는 나이 그대로 노쇠하여 버렸다. 얼굴에 깊이 패인 수백겹의 주름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고, 허리는 구부정했으며 눈빛은 정기를 잃고 지극히 흐렸다.
철창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예전의 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엽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자애롭기 이를 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