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 태양무극(太陽無極)
약속은 지켜야 한다.
'이제 죽는가? 하지만 나도 그냥 쓰러지지는 않는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아운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담담해졌다. 아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공격은 무서웠다.
아운의 손에서 튕겨 나갔던 삼살수라마정은 벌써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삼살수라마정으론 혈라강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운은 느낄 수 있었다.
삼살수라마정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불괴수라기공이 기혈을 뚫었다고 내상이 고쳐진 것도 아니고, 거의 사라진 진기가 보충된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불괴수라기공의 진기는 그의 내상을 회복시키느라 아주 적은 양만 남고 더욱 약해져 있었다.
그 정도로는 삼살수라마정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
었다.
아운의 입가에 실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단전에 남아 있는 무극신공을 전부 자신의 팔에 모았다.
약간 남아 있던 불괴수라기공에 무극신공이 더해졌다.
서로 이질적이지만 불괴수라기공이 워낙 미약했기에 무극신공이 팔에 모여질 수 있었다.
아운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혈라강기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삼절황만이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손에 모은 내공으로는 어림도 얼다. 그럼 삼살수라마정이라도? 그건 자살행위인데, 삼절황을 펼치고 싶어도 역시 내공이 부족해서 제 위력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많은 생각이 아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망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가라!"
고함과 함께 '번쩍' 한 가닥의 섬광이 아운의 손에서 뿜어졌고, 삼살수라마정 중 한 개의 마정이 아운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한데 속도가 다르다.
보던 사람들은 '번쩍' 하는 한 가닥의 섬광을 보았을 뿐이었다. 공격을 해 오던 탐우라가 갑자기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아운을 부술 것 같았던 혈라강기도 사라진 다음이었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탐우라를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탐우라의 몸이 부서져 내린다.
아운도 이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곤혹스런 표정으로 탐우라를 바라보았다.
'나는 삼살수라마정을 쏘았는가? 아니면 무극신공으로 태양무극섬을 쏘아 보냈는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쏘아 보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수라마정에 태양무극섬을 실어서 쏘아 보낸 것인가? 그렇구나. 수라마정이 비록 암기이지만 내 안의 진기가 아니던가? 결국 무극신공과 불괴수라기공이 합쳐질 수 있다면 수라마정과 삼절황도 합쳐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두 개가 합해지면 이런 위력이 나오는 것인가?'
아운은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그의 내부에서 미세하게 흐르던 무극신공과 불괴수라기공이 겹쳐지면서 그의 내부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두개의 진기가 합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기가 새끼줄 처럼 꽈리를 틀고 아운의 혈도를 타고 흐르는 중이었다.
약해졌던 불괴수라기공이 무극신공의 힘을 이용해 아운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겨자씨만한 했던 불괴수라기공의 진기는 무극신공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키우면서 아운의 내상을 치료한다.
아운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탐우라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라있던 야율초가 독기 오른 시선으로 아운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저 놈을 반드시 죽여라!"
그의 고함이 떨어지기도 전에 정신을 차린 광풍사의 전사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지옥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네까짓 것들에게 죽을 순 없지."
아운의 손에서 세 가닥의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앞장서서 달려오던 십여 명의 광풍사가 일렬로 머리가 뚫린 채 한꺼번에 쓰러졌다. 광풍사들이 놀라서 잠시 주춤거렸다.
전 힘을 다해 삼살수라마정을 쏘아 낸 아운은 그 틈을 이용해 건물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야율초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잡아라! 그가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
그 순간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삼층의 석조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광풍사들은 다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일부 발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광풍사 몇 명은 다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야율초의 안색이 푸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빨리 건물의 잔해를 치워라! 치우고 비밀통로를 찾아야 한다."
광풍사들이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데 걸린 시간은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내공을 지닌 무인들에게 그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물의 잔해 안에 아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야율초는 분한 표정으로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비밀 통로를 찾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지금 아니면 권왕을 죽일 수 없다.
그리고 죽은 사형들의 복수도 힘들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비밀통로가 갑자기 찾아 질 리가 없었다. 결국 두 시진이 지난 다음에야 무너진 건물의 바닥에 그려진 선들이 비밀통로를 여는 절진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한 시진이 지나서야 그 진법을 파괴하고 아운을 찾아 비밀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세시진이 지난 다음이었으니 그때까지 아운이 거기 있을 리 가 없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아운을 놓친 야율초는 무려 반 시진 가까이 고함을 질러 대었다고 한다.
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덮어 준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은밀한 일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승리에 도취되어 불야성을 이루었던 개방의 불들이 하나 둘 꺼지고 있을 무렵 두 명의 그림자가 개방의 별채를 향하고 있었다.
총단 뒤쪽에 있는 별채는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고, 입구는 개방의 고수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흑칠랑은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야한을 바라보았다.
"그래 후배야! 너는 서문정에게 무엇을 요구할 생각이냐?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야한의 표정이 매우 야릇하게 변했다.
"그건 비밀이오. 선배."
사람이란 게 비밀이라고 하면 더욱 궁금해진다.
흑칠랑처럼 호기심 왕성한 성격의 인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도 비밀이란 말이냐?"
무척 친근한 말투였다.
야한의 눈이 샐쭉해졌다.
"선배, 주먹질 할 땐 언제고 지금은 친한 척하는 것이요."
흑칠랑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감돌았다.
"흐흐 그래 너 말잘 했다. 오늘 나한데 복날 개처럼 얻어 터지고 말할래. 아니면 네가 자수해서 말할래."
"헉."
야한이 놀라서 흑칠랑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칠 기세였다.
야한은 정말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너 죽고 나살자고 덤비고 싶었다.
실력만 된다면?
야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굴욕은 어둠속에 숨길 수 있지만, 아픔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한 철학을 갖다 붙이면서 야한은 흑칠랑에게 이실직고 하였다.
"흠흠, 뭐 그렇다는 말이지, 사실은 말이오."
야한은 흑칠랑의 귀에 소근거렸다.
야한의 말을 들으면서 흑칠랑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는 결국 넋을 잃고 야한을 바라보았다.
"너 정말이냐? 정말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느냐?"
"못할게 뭐 있소, 난 정말 그걸 요구해 볼 생각이요. 흐흐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소?"
흑칠랑은 멍하니 야한을 보고 말했다.
"정말 네 놈이 그것을 요구하고 그녀가 그 요구를 들어 준다면 내 다시는 너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겠다. 앞으로 너를 존경하마."
야한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오?"
"물론이다. 하지만 네가 정말 그 말을 하지 못한다면 넌 평생 내 종노릇이나 해야 할 것이다."
야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걱정 마시오, 선배. 원래 동질의 인간끼리는 느끼는 감정이 달라 서로 쉽게 알아보는 것이오. 흐흐"
야한의 묘한 웃음을 보면서 흑칠랑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야한의 표정이 너무 자신 만만하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긴 하였다.
야한은 흑칠랑을 흘깃거리며 말했다.
"뒤에서 선배는 망이 나 잘 보고 게시오."
"아, 알았네."
대답을 하는 흑칠랑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별채에는 조그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흠흠, 거 계시우?"
자리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던 서문정은 갑작스런 야한의 부름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제야 야한과 흑칠랑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난 것이다.
'이 밤중에?'
갑자기 별별 생각이 다 난다.
불안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명색이 무림맹의 군사였다. 약속한 것을 쉽게 어길 순 없었다.
'설마 엉뚱한 짓이야 할 수 없겠지, 밖에는 개방의 제자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있으니 들어 오세요."
문이 열리며 야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군사."
서문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바로 두 시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으니 오랜만이란 말은 조금 어색하다 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와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설마 무림맹의 군사씩이나 되면서 약속을 쉬이 생각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말이오."
서문정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않고 있어요. 그래 제게 부탁할 말이 뭐죠?"
야한은 그녀의 앞자리에 앉으며 서문정을 바라보았다.
"뭐 별거 아니오."
말하면서 묘한 웃음을 짓자, 서문정은 더욱 불안해졌지만 그와 비례해서 더욱 궁금해졌다.
"말해보세요."
야한은 조금 신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살피다가 갑자기 포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서문군사가 할 수 없을 것 같소. 그만한 용기도 없을 것 같고, 그냥 가리다."
야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문군사는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용기가 없다니.
서문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야한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야한의 표정과 눈 안을 들여다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그는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머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서문정은 그의 표정, 특히 야한의 시선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보통 얼굴로 연기를 할 수는 있어도 눈 깊숙이 숨어 있는 자신의 심리는 쉽게 숨기지 못하는 법이다.
군사로서 서문정은 상대의 심리를 읽는 법을 배웠고, 그부분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한 편이었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지붕위에서 그 말을 듣고 있는 흑칠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런 쳐 죽일 놈. 살수의 인술(人術)을 이런 곳에서 써먹다니.'
자객의 인술이라 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한 서문정이 물었다.
"내가 용기가 없어 보이나요?"
"그건 나도 모르겠고, 한 가지는 알고 있소."
"그게 뭔가요?"
"머리 좋은 여자치고 용기 있는 여자가 없다는 점이오."
조금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서문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그 말은 옳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군사는 조금 다르죠.
용기가 없다면 전장의 가운데서 지휘를 할 수가 없어요."
야한은 그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붕위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칠랑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멍청한 계집. 인술에 당했군. 살수가 죽일 놈에게 접근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술은 네 년 따위의 독심술로 알아 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우 그 정도라면 삼대살수란 명예는 아무나 차지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저 놈이 부탁할 것과 용기가 관계있는 것인가? 에이 변태 같은 놈.'
흑칠랑은 괜히 심술이 나고 화가 났다.
제법 똑똑한 척 하는 서문정이 야한에게 넘어가는 것이 영 불편하고 샘이 났던 것이다.
야한은 서문정을 좀 더 자세히 보고 난 후 말했다.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소, 그럼 군사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 거라 믿고 말하겠소. 그래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말해 보세요."
"그럼 전에 군사가 한 약속을 무조건 지킨다고 맹세하시오. 그럼 말하겠소."
서문정은 서늘한 시선으로 야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음심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상하거나 여자로서 수치심을 가지게 하는 조건을 내세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자신은 무조건 이란 말로 약속을 한 상황이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도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가리겠는가?
"그렇게 하죠, 그러니 이제 말해 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흑칠랑은 귀를 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휴 역시 아직은 어린 계집이구나, 만약 야한 놈이 살심을 품었다면 벌써 죽은 목숨이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을까?'
흑칠랑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마침 흑칠랑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야한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말하겠소."
서문정도 정말 궁금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이리도 질질 끈단 말인가?
그녀의 귀에 야한의 전음이 들려왔다.
전음을 들은 그녀의 입이 딱 벌어지면서 침이 흘러 나왔다.
야한은 정말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군사가 반드시 약속을 지켜 줄 것이라 믿소."
"그... 그게."
"약속은 분명히 약속이오, 어기려 들지 마시오. 만약 그 약속을 지키지 못 할 거면 나는 서문낭자가 나에게 시집을 오라고 말하겠소.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전부 떠들고 다니겠소, 이미 서문소저가 한 약속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전부 믿을 것이오, 그게 싫으면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뭐 기간도 겨우 삼 개월 뿐이잖소."
나중 말은 완전히 협박이었다.
서문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럼 당장 시작하겠소."
서문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지금 당장 말인가요?"
"당연하지 않소. 약속은 약속이오."
말을 함과 동시에 야한은 그녀의 침실 위로 올라가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그녀에게 들이댔다.
"어서 시작하시오."
그녀는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뭐 하시오. 당장 시작하지 않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야한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지만, 하고 나니 몸이 짜르르 울리고 말았다.
야한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더 세게 치시오. 그래가지고서야 어디 맞은 티라도 나겠소."
"나... 나는,"
참으로 당혹스럽다.
"그렇게 약해서야 어디 전쟁터에서 견딜 수 있겠소. 내가 보니 하영영 소저는 약해 보여도 아주 강단이 있어 보이던 데."
하영영이란 말이 나오자, 서문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한다.
그녀는 손바닥을 들어서 힘껏 내리쳤다.
"찰싹 , "
맑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야한의 얼굴이 파르르 떨린다.
"크흐흐."
야한의 괴성과 함께 서문정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헉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서문정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떤 다음 얼른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방이니 당연했다.
'그래 이왕 시작한 것.'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야한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지붕위에 있던 흑칠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저, 진짜다.'
그는 부리나케 지붕에서 뛰어내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돈 주고 볼 수 없는 진풍경이 거기 있었다.
흑칠랑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햐! 그놈 엉덩이 한 번 탐스럽다. 그런데 저 여자 저거 눈 감은거 맞아, 볼 거 다 보면서 치네.'
흑칠랑은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지켜본다.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한 서문정의 손질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얼굴도 갈수록 상기되어 가는 모습이라니.
흑칠랑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야한이 더 없이 부러웠다.
'허! 사부님의 말씀에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은 여자일수록 독특하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 말이 옳은 것을 이제야 알겠다. 사부 당신은 확실히 천재요.'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가?
특히 야한의 저 표정이라니.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상아에게 나도 저렇게 해 달라고 할까?'
생각했다가 기겁을 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손바닥 대신 칼이 날아올 것 같았다.
그날 과연 야한은 그녀를 완벽하게 속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속아 넘어가 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 보여준 야한과 흑칠랑의 멋진 활약이 없었다면, 야한에게 기회도 없었을 거란 점이었다.
그 다음날, 흑칠랑이 멍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저 평범한 날이었다. 단지 야한이 가끔 히죽거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만 빼면.
천월은 무림맹의 비밀 통로를 통해 맹주부로 무사히 들어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눈을 감고도 맹주부내의 건물위치부터 정원에 놓여 있는 돌 하나까지 다 외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 있었다.
하영영이 어느 곳에 거처하고 있는지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월은 맹주부 내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영영이 있는 맹주부의 전각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이미 전각 안에 하영영이 있다는 것은 확인 한 다음이었다.
이윽고 자정이 되자, 전각의 불이 꺼진다. 그러나 천월은 그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함께 온 광풍전사들에게서 신호가 왔다.
아직 하영영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이 시간까지 하영영은 전각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는 전각 안에 있는 침실에서 잠을 잔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모두들 자리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 시진이 지나자, 천월은 그들만의 방법으로 신호를 하였다. 그러자 두 명의 광풍전사가 조용히 전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전각 밀실 안쪽에 자고 있는 우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의 살수가 슬쩍 우칠에게 기를 날렸다.
잠을 자던 우칠은 움찔거리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두 명의 전사들은 우칠이 밖으로 나오자 조심스럽게 신형을 날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아주 약간의 흔적만 남긴 채.
우칠은 다시 그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이제 전각에는 전각 외곽을 지키는 무림맹의 호위무사들 다섯 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 다섯 명은 천월과 또 한 명의 광풍전사에겐 있으나 없으나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가볍게 제압한 두 전사의 신형이 귀신처럼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전각안의 집무실 안쪽에는 소박하지만 이중으로 문이 만들어진 방이 하나있었다. 두 명의 전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그 안으로 스며들었고, 침상으로 다가서며 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천월이 침상으로 조용히 다가섰을 때였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 왔군."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방안이 환해졌다.
천월과 또 한 명의 전사는 놀라서 돌아섰고, 거기엔 검왕과 나군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전사는 안색이 굳어졌다.
한 눈에 두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실력으로 어쩔 수 없는 강자들이었다.
두 전사가 죽을 각오로 다시 덤비려 할 때였다.
"그만두세요."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하영영과 북궁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두 전사는 동작을 멈추고 하영영을 바라본다.
하영영은 두 명의 전사를 바라보면서 달래듯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기다려 봤어요. 그랬더니 정말 저를 노리고 있었군요. 두 분은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두 명의 전사는 주춤거렸다.
천월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냐?"
하영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두려워서 보내 드리는 것뿐이에요."
천월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렵다니? 우리가 말이냐?"
"정확하게는 광풍전사단이죠. 만약 여기서 두 분이 죽으면 광풍전사단은 돌아가던 말머리를 돌리고 다시 이곳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아쉽지만 그들이 오면 누가 이기든지 너무 많은 피를 보게 될 거예요. 사실 광풍전사단은 세상의 누구라도 벅찬 상대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천월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지혜롭구나. 네 뜻을 알겠다."
"가서 전해 주세요. 당분간은 피를 보고 싶지 않다고."
두 전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간 후 나군명은 새삼 감탄한 표정으로 하영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총사는 그들이 올 거란 사실을 어찌 알았소?"
"그들은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에요. 오빠에게 이용당하고 이곳을 공격했다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죠. 그 다음엔 저에게 또 다시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그냥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입니다."
나군명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후 다시 물었다.
"그들은 전사들이오. 무공을 모르는 총사에게 살수를 보낸다는 것은 수치일수도 있는데 그 생각은 안 해 보았소."
"그들은 전쟁을 아는 전사들이죠. 마치 오빠와 비슷한 면이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살수를 보낼 수 있는 거랍니다. 그것 역시 전쟁의 일부라고 볼 수 있죠. 전사지만 쓸데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자들이 아니라서 더욱 무서운 자들이죠. 사전에 광풍전사단에 대한 정보는 오라버니가 알려주어서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제가 무공을 모르지만 맹주대행이란 상징성이 있으니 무공을 모른다 하여 용서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군명은 다시 한 번 하영영을 바라보았다.
권왕이 왜 자신의 동생을 맹주대행으로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풍전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동심맹을 쓸어버리긴 했지만, 무림맹을 위해 청소를 해준 기분일 것이다.
결국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농락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만들어 준 것이 하영영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니, 그녀를 죽이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영영은 그 말을 피해갔다.
동심맹에 대한 이야기는 해 보았자 서로 좋지 않았고, 하영영 입장에서는 스스로 얼굴에 금칠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나군명은 그 부분을 모르지 않았다.
'참으로 이들 남매가 부럽구나, 내 서문진과 서문정 남매를 천하의 기재라 생각했는데, 이들 남매에게 비하니 한참 모자라는구나.'
나군명은 하영영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는 중이었다.
그도 처음 그녀의 말을 듣고 설마 했었던 것이다.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깨우쳐지는 것이 많았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지하 비밀 통로를 발견한 야율초는 비밀통로 출구를 중심으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아운을 찾으려 하였다. 아운의 부상 정도로 보아 결코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만약 아운의 상처가 다 낫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야율초는 그래서 마음이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야율초의 예상대로 부상이 심한 아운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건물을 무너트리면서 야율초가 발견한 비밀 통로가 아니라 그 반대편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결국 아운은 아직도 혈궁 안에 있었다.
피가 묻어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혈궁 내의 또 다른 비밀 통로로 들어간 아운은 평소 초비향이 무공 수련을 하던 지하 수련장으로 숨어들었다. 그 곳은 혈궁내에서도 초비향과 그의 아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였고 이곳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는 교묘하게 부셔 놓아서 당분간은 찾지 못할 것이다.
일단 수련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 자리에 주저앉은 아운은 운기요상을 시작하였다.
가슴이 부서져 나가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극신공과 불괴수라기공은 그의 상처를 조금씩 치료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처를 치료하는데 특히 탁월한 불괴수라기공은 아운의 모든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하였다.
아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그는 직감으로 최소 삼 일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외상은 어느 정도 나았다.'
아운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이 자리를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송문과 탐우라를 상대하면서 깨우친 것을 지금 연구하고 완성해서 나가야 하는가?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이 무림맹을 나온 것은 대전사를 상대하기 위한 무공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그 실마리를 잡았는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없다고 세상이 안돌아 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믿자.'
다시 한 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탐우라를 향해 수라마정을 쏘아 보냈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무극신공과 불괴수라기공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이미 두 개의 내공은 다시 하나로 뭉쳐져 있는 상황이었다.
'뭉친 듯하지만 아직 하나가 되진 못했다. 만약 나의 내공이 거의 고갈 상태에 이르면 다시 서로 분리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무극신공의 구 단계를 완전히 습득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운은 천천히 무극신공을 끌어 올렸다
세맥 속에 흩어져 있던 불괴수라기공의 진기가 무극신공과 함께 그의 단전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내공은 어차피 기를 다듬어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두 개의 내공이 완전해지면 서로 완전히 다른 형질의 기운이 되겠지만. 반대로 서로 가장 비슷한 형질의 기운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무극신공은 대해와 같고 불괴수라기공은 강과 같아서 무극신공이 불괴수라기공을 끌어안을 만큼 커지면 두 개의 내공이 하나로 뭉칠 수 있다. 그리고 삼살수라마정은 또 다른 진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운은 자신이 지닌 무공에 대한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두 개의 무공을 하나로 묶어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무극신공을 십 단계로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지고 있는 것을 응용해 최고의 결과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개방,
거지들의 본거지.
그들의 총타 하면 지저분하고 낡은 관제묘 정도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개봉에서 조금 비켜난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얼핏 보면 하나의 성에 가까운 장원이었다.
장원의 이름은 죽림장이었고, 죽림장은 개방의 제일 총단으로, 제 이 총단은 바로 죽림장의 지하와 연결되
어 있는 토지묘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개방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활기차게 시작을 하였다.
동이 트자 개방의 제자들은 비럭질을 하러 떠났고, 각 분타의 제자들도 전부 돌아갔다.
서문정은 하영영의 전서구를 받고 당분간 개방을 무림맹의 임시 분타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이미 큰 승리 후이기 때문에 한동안은 평온한 나날들이었다. 개방의 정보를 통해 몽고의 전사들이 완전히 물러난 것도 확인을 한 후였다.
또 한조의 몽골전사들이 돌아오면 그들과 힘을 합해 다시 한 번 도전해 올 것이라 생각했던 서문정은 반갑기도 하고 의문스런 일이기도 하였다.
그녀로서는 아운이 중간에 개입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결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탓이 라 할 수 있었다.
개방의 총단 정문을 지키는 두 명의 거지들은 개방의 이대 제자인 정삼과 고이였다. 두 사람은 이대 제자들 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정문 앞에 있는 누각의 위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장은 제 일 대 제자로 장문인인 지개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호개 장용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는 사시(오전 아홉시)가 되어가는 시간. 하나의 그림자가 천천히 개방의 총단인 죽림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고이와 정삼은 사람의 인적이 드문 개방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고 시선을 집중하여 지켜보았다. 그림자가 조금씩 뚜렷해지자, 두 명의 거지는 그 그림자가 한 명의 노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노인은 허리에 도 한 자루를 차고 있었다.
노인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장용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천천히 망루를 내려왔다. 졸고 있는 듯 했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용은 망루에서 내려와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
렸다.
'어디서 본 듯한데.'
알듯 말 듯한 노인의 얼굴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던 장용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졌다. 이제야 그는 노인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미 이전에 노인의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 놓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달리 개방이겠는가?
"고이."
"예 사숙."
"들어가서 대전사가 이곳에 왔다고 전해라!"
고이와 정삼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뭐하느냐, 냉큼 안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명!"
고이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장용은 고이가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노인을 향해 다가가서 정중한 모습으로 포권지례를 하였다.
"대전사님을 뵙게 되어 무인으로서 영광입니다."
대전사는 자신의 정체가 너무 쉽게 발각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개방이군. 자네는 누구인가?"
"장용이라고 합니다."
"개방십걸 중 팔걸인 호개 장용이 바로 자네인가?"
장용은 대전사가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인상을 굳힌다.
'이 분은 사람을 끌어 들이는 힘이 있다. 참으로 무서운 능력이구나.'
장용은 얼른 경각심을 가지면서 말했다.
"제가 그 장용이 맞습니다. 저 같은 무부의 이름을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대전사님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전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장용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에게 이곳에 왜 왔는지 묻지 않는군."
"그거야 안으로 들어가셔서 윗분들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불순한 마음으로 왔을 수도 있네."
"어차피 제가 어르신을 막을 능력은 없습니다."
"허허 그렀군, 과연 중원엔 사람이 많구나, 몽고엔 전사는 많은데 그들은 융통성이 부족해 참으로 부럽구만."
"과찬이십니다."
장용은 진심으로 허리를 숙였다.
이 소탈해 보이는 노인이 대전사란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