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3권 2-4 2 석로釋老 4 贈敏上人 민 대사에게 주다 3首
1
소년상인민기명少年上人敏其名 소년 대사 그 이름 민敏이라 부르는데
미목릉릉추수청眉目稜稜秋水淸 눈썹과 눈이 반듯하고 가을 물같이 맑았네.
언화지아패란영言和志雅佩蘭英 온화한 말 아담한 그 뜻 난초꽃을 찬 듯하고
의고심소회거경意高心小懷琚瓊 높은 뜻에 작은 마음 보석이라도 품은 듯
온자풍류무여방蘊藉風流無與方 넓고 깊은 그 風流 비교할 데 없으리니
일견하해천인장一見何解千人腸 한번만 쳐다보아도 천 사람 마음을 풀어 줄 듯.
이이미소사춘풍怡怡微笑似春風 즐거운 듯 미소함은 봄바람과 같고요
락락정립여추상落落挺立如秋霜 저 높이 우뚝 섰을 맨 가을 서리 같아라.
인인앙지약고산人人仰止若高山 사람마다 우러러보길 높은 산인 양하여서
불감용이규기방不敢容易窺其傍 어디라 감히 그 옆인들 쉬 엿볼 수 있을 건가?
웅문학한류雄文學韓柳 웅대한 그 문장은 한퇴지韓退之ㆍ유자후柳子厚에 배웠고
아구사리두雅句師李杜 아담한 그 詩句는 이태백·두자미杜子美에게 배웠네.
기담잡로장奇談雜老莊 기이한 그 담화談話엔 老子·莊子 섞였고
필법전석고筆法傳石鼓 글씨 쓰는 법은 석고石鼓의 체를 바로 전래 받았네.
아이몽동사십년我已幪憧四十年 이 몸이야 흐리멍텅 사십을 이미 지냈건만
각소공비도룡전却笑空費屠龍錢 용龍 잡으려 헛돈 쓴 걸 이젠 되려 비웃네.
나지초조옥당수那知草詔玉堂手 내 어이 알았으리 옥당玉堂에서 조서詔書 쓰던 그 손으로
은궤번경개북유隱几翻經開北牖 안석에 기대어 불경 뒤적이며 북창을 열 줄이야.
백중훈지시상인伯仲壎篪是上人 형은 질나팔, 아우는 피리 불듯 의도 좋은 대사거니
등안막교령운종登岸莫教靈運從 언덕 위에 오를 적 사영운謝靈運일랑 따르지 마소.
일어리회여포정一語理會如庖丁 말 한 마디에 깨닫기는 포정의 일과 한가지라
백세수능출기우百世誰能出其右 백세百世가 다 지난들 누가 이보다 뛰어나랴!
►민상인敏上人, 준상인俊上人, 근사根師 등 일본승려로 추정함
►능릉稜稜 ‘모날 릉(능)稜’
모가 나고 쭈뼛쭈뼛함. 추위가 몹시 甚함. 模樣이 위엄威嚴이 있음.
►온자蘊藉 교양敎養이 있고 도량度量이 크며 얌전함.
►이이怡怡=이연怡然 기쁘고 좋음. ‘기쁠 이怡’
►낙락落落 큰 소나무의 가지 따위가 아래로 축축 늘어짐.
여기저기 떨어져 있음. 남과 서로 어울리지 않음.
►정립挺立 높이 솟아 있음. 남보다 뛰어남.
►석고石鼓 주周·진秦시대의 각석刻石.
그 모양이 북과 같고 모두 10개가 있는데 거기에 쓰인 글자는 예전 전자[古篆]이다.
두보杜甫의 〈이조팔분소전가李潮八分小篆歌〉에 “陳倉石鼓又已訛 大小二篆生八分”이라 하였다.
한유의 <석고가>와 더불어 동파 소식蘇軾이 나이 28세에 처음으로 부임하여
봉상부태수 진희량陳希亮(능허대기의 太守陳公) 밑에서 첨서판관사簽書判官事의 벼슬을 하였는데
이때 둘러 본 봉상부의 여덟 곳에 관한 시가 바로 봉상팔관鳳翔八觀이다.
이 봉상팔관의 첫 번째 시가 <석고가石鼓歌>인데
석고石鼓는 주선왕周宣王(BC827~BC782) 때 조성된 것인데 이 석고가와
두보의 <이조팔분소전가李潮八分小篆歌>에 이렇게 나온다.
진창석고우이와陳倉石鼓又已訛 진창陳倉의 석고石鼓 또한 이미 변해버렸으나
대소이전생팔분大小二篆生八分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팔분서八分書를 낳게 했네.
►도룡屠龍 용을 도살하는 재주. 뛰어나지만 쓸모없는 재주.
용을 잡는 기술을 배우려고 가산을 허비함을 말한다.
<도룡기屠龍技> 용 잡는 기술/<莊子 열어구列禦寇>篇
주평만朱泙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집안 재산을 팔아 千金을 마련하였다.
기술을 배우러 스승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는 지리익支離益이란 선생을 만나서 용을 요리하는 기술을 배웠다.
3년 동안 열심히 배운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지난 3년 동안 너는 어떤 기술을 배웠느냐?"
"나는 지리익을 스승으로 모시고 용을 도살하여 요리하는 기가 막힌 기술을 배웠다."
그는 잔뜩 뻐기면서 손발을 써가며 용 잡는 기술을 신나게 설명했다.
용을 잡을 때는 어떤 칼을 쓰며 용의 머리는 어떻게 자르고
내장은 어떻게 처리하고‧‧‧
그의 말이 다하기 전에 사람들은 웃으면서 물었다.
"너의 용 잡는 기술은 정말 기가 막히는 기술이구나,
그런데 네가 잡을 용이 어디에 있니?"
용을 잡는 기술 즉 특이한 '도룡기屠龍技'를 익힌 사람이
정작 용이 없어서 우습게 된 허탈한 이야기다.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별칭.
임금의 자문諮問ㆍ조칙詔勅 같은 것을 代作하는 곳이다.
►훈지壎篪
백씨취훈伯氏吹壎 백씨가 질나발을 불면
중씨취지仲氏吹篪 중씨가 젓대를 부니라/<詩經 小雅 하인사何人斯>
‘伯氏’ ‘仲氏’는 형, 아우로 사이좋은 형제를 이르는 말로 ‘훈지壎篪’라 한다.
►사령운謝靈運(385-433) 남조南朝시대 송宋의 양하陽夏 사람.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書畵에 능하여 문장은 江湖 제일이었다.
동진東晉 때 강락공康樂公 봉작을 계승해 사강락謝康樂이라고도 불리는데
뒤에 모반謀叛으로 광주廣州에서 기시棄市 되었다.
(기시棄市 형벌刑罰의 하나로 罪人의 屍體를 길거리에 버리던 일)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문장의 아름다움은 안연지顔延之와 더불어 제일이었다.
동진 때 관직이 상국종사중랑相國從事中郞까지 올라갔다.
남조의 宋에 들어서는 侯爵으로 내려갔으며
영가태수永嘉太守·시중侍中·임천내사臨川內史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정치적 권세에 열중했고 또한 문벌가문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중용되지 못함에 따라 마음속에 늘 분노와 원망을 품고 있었다.
이에 비록 몸은 관직에 있었지만 政務를 돌보지 않고 마음대로 산수를 유람했다.
후에 결국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벌목하여 길을 내고
기묘한 정치를 찾아다니는 것으로써 정치적인 불만의 정서를 스스로 위로했다.
만년에는 탄핵을 받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군사를 일으켜 항거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광저우[廣州]로 추방되었으며 이후 피살되었다.
사령운의 시는 대부분 영가태수에 임명된 이후에 지어진 것들로서
주로 江南 산수의 경색을 묘사했는데 언어가 정교하고 화려하며 묘사가 섬세하다.
산수시는 정치적 좌절과 불만을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탐닉과
유흥으로 해소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산수는 세상사를 잊어버릴 수 있는 위안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내심을
산수를 통해 표현한다기보다는 산수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탐미적으로 묘사하는 데 특징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내용이 부족하고 현언玄言과
불교의 교리가 많은 편이라 정조가 비관적이고 퇴폐적이다.
또한 字句를 지나치게 조탁하여 '구절은 있으나 편장은 없다'는 결점이 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한 폭 한 폭 천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어
당시 제대로 문학적 표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산수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의 주제로 채택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대표적인 시로는 〈등지상루登池上樓〉〈초거군草去郡〉 〈세모歲暮)〉 등이 있으며
불경을 깊이 연구하여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번역하기도 했다.
►포정庖丁 옛날에 주정역廚丁役(料理)을 맡은 사람.
<포정해우庖丁解牛> 백정의 소 잡는 법도/<莊子 內篇 第3篇 養生主>
포정위문혜군해우庖丁為文惠君解牛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수지소촉手之所觸 손으로 쇠뿔을 잡고
견지소의肩之所倚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족지소리足之所履 발로 소를 밟고
슬지소기膝之所踦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획연향연砉然嚮然 〈칼질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획획 하고 울리며
주도획연奏刀騞然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쐐 소리가 나는데
막부중음莫不中音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합어상림지무合於桑林之舞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 부합되었으며
내중경수지회乃中經首之會 경수經首의 박자에 꼭 맞았다.
문혜군왈文惠君曰 문혜군이 말했다.
희譆 선재善哉 “아! 훌륭하구나.
기합지차호技蓋至此乎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석도대왈庖丁釋刀對曰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신지소호자도야臣之所好者道也 “제가 좋아하는 것은 道인데
진호기의進乎技矣 이것은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시신지해우지시始臣之解牛之時 처음 제가 소를 해부하던 때에는
소견무비우자所見无非牛者 눈에 비치는 것이 온전한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삼년지후三年之後 그런데 3년이 지난 뒤에는
미상견전우야未嘗見全牛也 온전한 소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금지시方今之時 신이신우臣以神遇 지금은 제가 神을 통해 소를 대하고
이불이목시而不以目視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관지지이신욕행官知止而神欲行 감각기관의 지각 능력이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의호천리依乎天理 비대극批大郤
대신 신묘한 작용이 움직이면 자연의 결을 따라 커다란 틈새를 치며
도대관導大窾 인기고연因其固然
커다란 공간에서 칼을 움직이되 본시 그러한 바를 따를 뿐인지라
기경긍경지미상技經肯綮之未嘗 경락經絡과 肯綮이 〈칼의 움직임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데
이황대고호而況大軱乎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양포세경도良庖歲更刀 할야割也
“솜씨 좋은 백정은 일 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살코기를 베기 때문이고
족포월경도族庖月更刀 절야折也
보통의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금신지도십구년의今臣之刀十九年矣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칼은 19년이 되었고
소해수천우의所解數千牛矣 그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인데도
이도인약신발어형而刀刃若新發於硎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피절자유간彼節者有間 이도인자무후而刀刃者无厚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 끝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이무후입유간以无厚入有間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회회호기어유인필유여지의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넓고 넓어서 칼날을 놀리는 데 반드시 남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이십구년이도인약신발어형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이 때문에 19년이 되었는데도 칼날이 마치 숫돌에서 막 새로 갈아낸 듯합니다.
수연雖然 매지어족每至於族
비록 그러하지만 매양 뼈와 근육이 엉켜 모여 있는 곳에 이를 때마다
오견기난위吾見其難為 저는 그것을 처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출연위계怵然為戒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
시위지視為止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고
행위지行為遲 손놀림을 더디게 합니다.
동도심미動刀甚微 〈그 상태로〉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서
획연이해謋然已解 스르륵 하고 고기가 이미 뼈에서 해체되어
여토위지如土委地 마치 흙이 땅에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제도이립提刀而立 칼을 붙잡고 우두커니 서서
위지사고為之四顧
위지주저만지為之躊躇滿志사방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선도이장지善刀而藏之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칼을 닦아서 간직합니다.”
문혜군왈文惠君曰 문혜군이 말했다.
선재善哉 “훌륭하다.
오문포정지언吾聞庖丁之言 득양생언得養生焉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道를 터득했다.”
2
자도산중오한서自到山中五寒暑 산중에 온 이후로는 다섯 번 춥고 더웠는데도
좌고우면무여어左顧右眄無與語 좌로 우로 돌아보아도 얘기할 사람 하나 없네.
흡사고학탁창태恰似孤鶴啄蒼苔 어쩌면 외로운 학이 푸른 이끼 쪼는 듯 싶어
공회만리운수조空懷萬里雲水阻 만리 장공 날고픈 마음 있지만 구름 물 막혀 허사였네.
춘화추월이아신春花秋月怡我神 봄꽃이며 가을 달이 이내 정신을 기쁘게 하고
산상백운위아려山上白雲爲我侶 산마루 흰구름이 나의 반려伴侶되어 줬네.
아욕탄고금我欲彈古琴 내가 옛 거문고를 한 곡조 탈까 했네마는
조고현절무지음調高絃絕無知音 가락 높고 줄 끊어져 소리 아는 이 없구나.
아욕창청가我欲唱淸歌 이 내가 맑은 노래 한 가락 뽑을까 했네마는
양춘백설무인화陽春白雪無人和 양춘백설 묘곡에 화답할 사람 아무도 없어
아아만장창애심峩峩萬丈蒼厓心 높고 높은 만 길 저쪽 푸른 언덕 같은 마음은
일거월래올여음日去月來兀如瘖 날 가고 달 오는데 오똑 앉아 벙어리 같네.
량이료료포유독兩耳聊聊抱幽獨 두 귀는 그런대로 한적한 고독 안고서
공문초당첨류적空聞草堂簷榴滴 할 일 없이 초당 처마에 낙숫물 소리 들을 뿐인데
희자원방혜연래喜子遠方惠然來 기꺼워라! 그대 멀리서 홀연히 예 와서
엄류수월청담극淹留數月清談劇 두어 달 묵으면서 청담淸談도 많았어라.
탕아십년발울장蕩我十年勃鬱腸 십년 쌓인 답답한 창자 일시에 가시게 하고
치아무회화서향置我無懷華胥鄉 시름없는 태평한 시골에 날 앉혀 주었네.
군재뢰락불가적君才磊落不可敵 그대 재주 하도 헌걸 차 대적할 이 아무도 없고
아담륜균난가억我膽輪囷難可抑 내 가슴 속 구기고 뭉친 것 누를 길 없었더니
량인대소산화개兩人對笑山花開 둘이 만나 서로 웃으니 산에 꽃이 피어난 듯
수타청산농욕적數朶靑山濃欲滴 두어 구비 청산에 진한 빛 떨어지려 하네.
►좌고우면左顧右眄 왼쪽을 둘러보고 오른쪽을 짝눈으로 仔細히 살핀다.
무슨 일에 얼른 決定을 짓지 못함을 比喩(譬喩).
►양춘백설陽春白雪 옛 가곡歌曲 이름. 楚나라에서 가장 고상하다고 하던 가곡.
고상高尙한 노래는 가락을 맞추어 같이 부르는 사람이 적음.
훌륭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움을 비유함.
양춘지곡화자필과陽春之曲和者必寡
고상高尙한 시의 정서를 뭇사람은 해득解得하지 못한다.
/송옥宋玉 <대초왕문對楚王問>
<문선文選> 송옥대초왕문宋王對楚王問의 주註에 “陽春白雪 高曲名也”라 하였다.
옛날 초나라 영郢이라는 땅에서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있어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저속한 노래를 부를 때는 따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으나
‘양춘백설’이라는 고묘高妙한 곡조에는 따라 부르는 이가 적었다 한다.
►아아峩峩 높다. 산이 높고 험한 모양, 의용이 엄숙하고 위엄 있는 모양
‘높을 아峩’ 높다. 높게 하다. 위엄威嚴이 있다, 위의威儀가 당당堂堂하다
►료료聊聊 한담하다. 잡담하다
►혜연惠然 따르는 모양. 호의를 표시하는 모양.
►발울勃鬱=울발鬱勃 속에 꽉 찬 氣運이 밖으로 나올 듯이 성한 模樣.
‘답답할 울/울창할 울鬱’ 답답하다. 우울憂鬱하다. 울적鬱寂하다
‘일어날 발/노할 발勃’ (우쩍)일어나다. 노怒하다. 발끈하다
►화서華胥 화서지몽華胥之夢 화서가 꾸었던 꿈이란 뜻으로 좋은 꿈을 일컬음.
이상세계. 몽경夢境
황제黃帝가 낮잠을 잤는데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서 노닐었다.
중국 상고시대 화서국 지도자로 복희와 여와의 어머니이며
염제炎帝와 황제黄帝의 직계 조상으로 人祖로 불린다.
중화문명의 본원이며 모체로 중화민족은 始祖母로 추앙했다.
<列子 黃帝>편에 기록이 전한다.
►뇌락磊落 도량이 넓어서 작은 일에 구애拘碍하지 아니하는 모양.
① 마음이 활달豁達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 없음.
저앙각유의低昻各有意 그림 속의 학이 구부리거나 고개 쳐든 모양이 각기 뜻이 있으니
뇌락여장인磊落如長人 뇌락한 양이 장자長者와 같구나.
/<두보杜甫 통천현서옥벽후설소보화학通泉縣署屋壁後薛少保畫鶴>
진장뇌락부운허盡將磊落付雲虛 뇌락한 생각은 헛된 구름에 부쳐 없애고
불향수유변생멸不向須臾辨生滅 나고 없어짐을 분별함에는 잠깐이라도 기울이지 않겠네.
/<이색李穡 시주가詩酒歌>
② 수가 많은 모양, 주렁주렁/<반악潘岳 한거부閑居賦>
뇌락성월고磊落星月高 별과 달은 무수히 높다랗고
창망운무부蒼茫雲霧浮 구름과 안개는 아득히 피어나네.
/<두보杜甫 발진주發秦州>
►윤균輪囷=륜개輪箇 석대모碩大貌 큰 모양.
반곡모盤曲貌 꼬불꼬불한 모양.
3
유객유객미여영有客有客美如英 객客이 있네, 객이 있네, 아름답기 꽃과 같은
년미삼십문예정年未三十文藝精 나이야 서른이 안됐네만 문예文藝는 아주 정숙하네.
편편운곡계종왕翩翩雲鵠繼鍾王 펄펄하기 구름에 고니라 종왕鍾王 명필가를 계승하고
과과려주우성당顆顆驪珠優盛唐 알알이 여룡의 구슬 같은 것 성당盛唐보다 뛰어나네.
백운퇴리휴아유白雲堆裏携我游 흰 구름 쌓인 그 속에 나를 이끌고 놀다가
우연별아환신주偶然別我還神州 우연히 나와 이별하고 신성한 땅으로 돌아가니
신주망망삼천리神州茫茫三千里 신성한 땅 망망하기 삼천리나 되는데
유사분분야행리遊絲紛紛惹行李 하루살이 어지러이 나그네 행장 들춰내어
유아춘수천만서遺我春愁千萬緒 천만 가지 봄 근심을 내게 남겨 주었네.
쾌재요요향남포快哉遙遙向南浦 장쾌하다! 머나먼 남포南浦 향해 가는데
남포춘파록가염南浦春波綠可染 남포의 봄 물결 그 푸르름 물들여질 듯
가완일단춘회고可浣一段春懷苦 한 조각 봄 생각의 괴로움마저 씻어낼 듯
중년작악지기하中年作惡知幾何 중년中年에 받는 괴로움 얼마인지 아는가!
나사별이원제처那似別爾猿啼處 어쩜 잔나비 우는 곳에서 그대 이별함과 같아
십년랑유산수간十年浪遊山水間 십년 세월 동안 방랑하며 산수 간에 놀다 보니
연하고질파한서烟霞痼疾怕寒暑 안개 노을 고질 됐어도 차고 더운 게 겁나서
장지미소근력피壯志未消筋力疲 큰 뜻이야 사라졌으랴만 근력이 하 피곤하여
흡사수학공헌거恰似瘦鶴空軒擧 여원 학이 공연히 높이 날려는 거와 똑같아.
만권도서로차산萬卷圖書老此山 만권의 도서圖書 가지고 이 산에서 늙으려 하니
원자귀래오지여願子歸來吾遲汝 원커니 그대 돌아오라, 내 그대를 기다리리.
타년전다석간변他年煎茶石澗邊 돌 시냇가에서 언젠가 차를 끓일 그 적에
삼수공불청산연衫袖共拂靑山烟 옷소매로 우리 함께 청산의 연기를 떨쳐 보세나.
►편편翩翩 ‘나부낄 편翩’
가볍게 나부끼거나 훨훨 나는 模樣. 풍채風采가 風流스럽고 좋은 模樣.
(建築物이)번듯하고 雄壯하고 華麗한 模樣.
►종왕鍾王
종鍾은 위魏의 종요鍾繇이고 왕王은 왕희지王羲之로 모두 명필로 유명한 사람들이다.
<종요鍾繇(151-230 후한 원가1~위 태화 4)>
1. 중원을 회복시키다
허난성 영천潁川 창사長社 사람으로 자는 원상元常.
동한 헌제 때 상서랑尙書郞과 양릉령陽陵令을 지내고
상서복야尙書僕, 정위정廷尉正과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을 역임했다.
동향 출신인 순욱의 천거로 조조 휘하에 들어가 위나라 3대 군주를 보좌했다.
조조 집권 때 중용되어 시중상서복야侍中尙書僕射로 옮기고 동무정후東武亭侯에 봉해졌으며
사례교위를 맡아 관중의 군대를 감독했다.
위문제魏文帝 조비 때 정위廷尉(형벌 관리직)에 오르고 숭고향후崇高鄕侯로 진급하였으며
명제明帝 조예 때에는 정릉후定陵侯를 거쳐 태부가 되었다.
당시 전시 체제에서 치안을 확보하고 유랑민들을 집결시키는 등 중원의 회복에 힘쓴 그는
옹주雍州(陝西성 서쪽)의 내정을 공고히 한 공로로 相國(재상)까지 진급해
화흠(157-231), 왕낭(~228)과 더불어 삼공이 되었다.
219년 장수 위풍魏諷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를 천거한 책임으로 관직을 임시 박탈당하기도 했다.
225년 종요는 75살의 나이로 득남하였는데 그가 곧 위나라의 무장으로 활약하던 종회이다.
종요는 230년에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시호는 성후成侯이다.
2. 서법 ‘소해’로 명성을 떨치다
종요는 서법가로서 명망이 높았으며 그의 서법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덕승에게서 서법을 배워 팔분과 해서, 행서에 뛰어났다.
특히 해서체의 일종인 소해小楷(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창시자
‘해서비조楷書鼻祖’로 불리며 호소와 더불어 ‘호비종수’라 불린다.
장지, 왕희지와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었는데
장지와 함께 ‘종장鍾張’, 왕희지와 함께 ‘종왕鍾王’이라 불렸다.
유작에 <선시표宣示表>와 <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
<천계직표薦季直表> 등이 법첩으로 수록되어 전해온다.
그중 <천계직표>는 계직季直이라는 인물을 문제 조비에게 추천한
上表文(임금께 올리는 글)으로 왕희지 보다 앞서는
古體의 해서로 되어 있는데 후세의 위작이라고도 본다.
이 외에 <공경상존호주公卿上尊號奏><수선표受禪表>는 서명은 없으나 그의 글씨라 전하며
<진상재첩眞賞齋帖>의 <천관내후계직표薦關內侯季直表>
<강재묵묘鬰岡齋墨妙>의 <하첩표賀捷表>
<쾌설당법서快雪堂法書>의 <묘전병사첩> 등도 진위 논란이 있다.
<왕희지王羲之(307-365)>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山東省 臨沂縣인 낭야琅琊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7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郗鑒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書風을 배웠고
뒤에 漢나라 ·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 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淸談을 나누고
또 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十七帖>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宋의 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공시중첩孔侍中帖><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네이버 지식백과
►과과顆顆 알알이 ‘낱알 과顆’
►려주驪珠 여의 구슬. 여룡驪龍의 턱 아래에 달린 값진 구슬.
<장자 열어구편列禦寇篇>에 “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라 하였다.
►행리行李
군대軍隊의 戰鬪 또는 숙영에 必要한 物品을 실은 치중輜重.
길 가는 데 쓰는 여러 가지 物件이나 차림.
►요요遙遙 멀고 아득함.
►남포南浦 포구浦口 이름. 평안남도 평양平壤 대동강大洞江 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