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10)
"지역 제보자 조일현 어르신과 고남산 이야기"
우리는 2007년 초에 어느날 노무현 대통령님을 발굴현장에 모시는 과업을 부여 받았다.
여러 여건상 안전 문제와 시간, 그리고 접근성이 우선 이기에 가능한 수도둰이나 경기권에 우리 국군의 전투지역에서 발굴 되는 유해가 식별되는 곳을 찾기로 했다.
나는 아들녀석 외가가 강원 철원 자등리라 줄곧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영평천을 경유에서 성동 검문소-일동으로 해서 집을 찾아가곤 했다.
그 이유는 이곳이 전쟁터이고 특히 양문리가 38선이었으며 만세교리 일대가 최초 줘항선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주 이곳에 들러서 뭔가 찾으려 이미 많은 공을 드리고 있는 때였다.
특히 이미 운명하신 이종록 참전용사님이 이곳에서 소대장을 하신관계로 벌서 2~3회 함께 탐사도 다녔다.
"남한에 남아 있는유일한 초기 벙커, 이곳에 오면 누가 공격자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신북 바디울 지역에 있는 6.25전쟁 당시 구축된 아군의 유일한 벙커(현재 현충시설로 보호 됨)를 찾아와 유해를 발굴 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벙커를 보면 누가 공격을 했는지 확연하게 알 수있는 곳이다.
적 전차포에 맞아 파괴된 모습이 그대로 인데 바로 43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북한군 전차가 사격을 가한 것이다.
작열한 포탄의 탄흔을 보면 북에서 갈겼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있던 우리의 국군 제7사단 병력은 그 안에서 절명했고 일사천리로 북한군은 의정부로 내려 갔다. 여기서 전사한 그 군인은 누구도 거둬주지 않았다.
한창 전쟁이 저기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에 워낙 냄새가 나니 당시 북한군의 통제에 따라 여기저기 죽어있는 시신을 치우는 작업이 진행 되는데 이곳도 그때 3구의 시신이 거둬져서 나무 상자에 옮겨져 벙커 위로 가매장 되었다.
이 사실은 이종록 용사님이 전후에 본인의 전우들을 한구라도 수습하려 이곳에 와서 당시 실제로 유해르 묻었던 당사자를 만나서 들었다.
신발도 있고 탄티도 있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가능성을 갔고 지뢰 탐지기로 주변을 탐사하여 금속성 물질 소리가 나는 곳을 식별해 냈다.
"발굴 되는 3구의 대전차 저격병, 님들의 탄티와 탄창들!"
그리고 굴토하여 본 결과 그 증언대로 탄티도 나오고 전투화도 나오고 갔고 있던 탄창도 나왔다.
전투화 속에는 발가락 뼈가 남아서 아직 부폐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약식제례를 올리고 소주 한잔 부어 그 영혼을 위로하고 흠양 하였다.
"요골에서 만난 조일현 지역주민"
나는 계속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이곳을 들렸는데 어느날 요골일대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다.
그 당시 78세의 나이로 전쟁 당시에는 17살이며 체구가 왜소하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북한군도 잡아가지 않았다.
'50.6.25일 전쟁이나고 일현 학생은 집에서 머물러 있다 어느날은 북한군 요구로 등짐을지고 서파까지 밤이면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퇴계원까지도 밤이면 걸어갔다 함께 간 포천 분들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몇 번이나 폭격으로 죽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국군이 진격하여 북으로 진출할 때는 경찰이 찾아오고지역 치안대가 찾아 왔다.
그래서 이때는 치안대에 가입하여 아직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잔적들을 소탕하는 일에 참여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은밀하게 이루어 지는 것이라 서로가 경계하는 그 당시에 집안이 대부분 조씨 문중들이 주변에 살고 있어 활동에 큰 지장이 없었다 한다.
그러니 집 주변에 많은 시신이 산에도 논이나 밭에도 죽어서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미친개들이 사람의 다리 한쪽을 뻘건 입으로 물고 다니고 난리가 아니다 보니 서로들 나서서 가매장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도 자연스레 참가하여 묻고 다녔다.
"샘가에 죽고 앞 밤나무 옆에 죽고 저기 산 밑에 방공호에도 묻었다."
지금이야 길이 4차선으로 넓지만 그 때는 단차로로 좁은 곳이고 바로 밭이고 산이었다.
나는 가끔 이곳을 지나며 그 일대의 산은 다 들어가 보며 정황을 찾으려 했는데 어르신을 만났다.
"뭐하러 그렇게 가끔씩 저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는거요?"
"네, 이곳이 전투 지역이라고 해서 혹시나 전사자의 유해를 찾을까 해서 다닙니다."
"혹시 어르신, 전쟁때에 이곳에 사셨나요?"
"무슨 소리요, 내게 그 당시 17살인데 북한군하고 잠도 자고 중공군하고 잠도 자고 미군따라 고나만에서 전투도 했는데?"
"그러면 혹시 이곳 일대에서도 국군이 죽어서 묻혀있는 곳을 알고 계시나요?"
이렇게 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161고지 일대를 함께 탐사하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래서 임무가 부여되어 은밀히 발구팀 몇 몇을 대동하고 이 곳 일대를 발굴해 유해를 찾았다. 그리고 심지어 당시 대전차 포인 2.36도 찾아내 병력 배치서늘 그려보니 1개분대가 전투편성된 그대로를 다 찾아 냈다.
"2.36"대전차 무기를 안은체 숨져간 용사님, 그리고 철모를 쓰고 숨져간 11명의 용사님"
모두 11구의 유해가 식별 되었다.
한 곳은 밭을 일구면서 나온 유해를 모아서 묻어논 곳도 있었다.
이곳에 대통령님이 오셨다.
"포천 관인 고남산 밑에 중리가 있고 수리봉이 있다. 이곳에서 '09년도에 10구를 발굴하다."
나는 어르신을 모시고 포천이 무럭고개와 왕방산일원, 가채리 가랑산, 창수면 추동리, 영중의 기양리 관인의 상노리등 많은 곳을 모시고 다니며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고남산을 공격하는 미군을 따라 기관총을 나르고 실탄을 옆에서 잡아주는 임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짜기 앞에서 선임자가 외폈다.
"뭣이 뭣이, 적 박격포가 터져 기관총이 날아가고 미군 흑인병사가 하늘로 솟구쳤다."
어르신은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눈을 떠 보니 얼굴에 찰과상만 입고 살아 났다는 것이다.
나보고 그 미군을 발굴해 달라는 것이다.
동네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미군이 이곳 일대에서 유해발굴이나 어떤 조사 활동을 했는지 알아보았으나 대부분 별도 이주하여 온 분들이라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한분이 저기 올라가면 소나무가 크게 한그루 있는데 그 곳에 많은 유해가 있다고 한다.
나는 박팀장에게 발굴 임무를 부여하고 계속하여 탐문을 다녔다.
그러다 유해가 나온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소나무 뿌리가 유해를 감싸고 있어 뼈에는 아무러 손상이 없이 발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이 유해는 중공군이지 아군인지 미군인지 누구일까?
제보에 따르면 당시에 미군들이 진격하며 이 지역 일대에서 많은 현지 노무자들이 참여하여 그들의 무기를 들고 다녔고 그러다 죽으면 그만이었다 한다.
살아 있으면 밥먹고 그것도 미군이 먹는 그대로를 먹고 일부는 옷도 얻어 입었다.
다행히 어르신은 살아서 미군을 따라 영평천에서 와수리 천불산 584고지 근처까지 갔다.
이때 국군이 와서 임무교대를 했다고 한다. 아마도 국군 제2사단인 모양이다.
미군 전차가 얼마나 포를 잘 쏘는지 87번도로를 따라 북으로 기동하면서 향로봉이나 종자산 지장봉에 수없는 포탄을 퍼부어 누구도 고개를 내밀지 못하게 하고 진격한다고 한다.
그러다 어찌된 일인지 휴전이 된다고 하여 집으로 가라해서 돌아 왔다가 전쟁 끝나고 다사 군에 갔다 왔다.
"금주산도 함께 오르고 양문리도 함께 갔다."
우린 조 어르신의 증언과 지역주민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어 이 일대에서 추가적으로 10여구의 유해를 발굴 하고 특히 금주리 관모봉 밑까지 탐사를 하였다.
금주리에서 안으로 들어가 너럭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1.4후퇴 당시 우리 국군 17연대 학도병들이 모여 있다가 많은 인원이 중공군에 포위 되어 죽었다는 제보가 있어서 들어갔으나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후퇴하던 병사들이 흩어져서 한 두명씩 돌아다니다 죽은 곳은 마을 사람들이 묻었다고 하는데 어느 곳은 산소 바로 옆에 묻혀져 우리가 굴토했지만 유품만 몇개 찾았다.
이곳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전후에 문등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동네 근처에서 사람 뼈를 찾아서, 때로는 돈을 주고 사 가기도 하며 병에 치료에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샘터와 밤나무옆을 1주일 발굴 했으나 전투화 한족만 찾았다."
어르신 집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샘물이 나오는 곳이 있다. 과거에는 약수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집 앞에 길건너 큰 밤나무가 있는데 그곳에도 우리 7사단 병력이 묻혀 있다하여 발굴 했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왕방산과 국사봉, 소요산에도 유해발굴 작전을 하다."
이런 곳은 사실 미군 제3사단이나 미 제25사단이 진격하는데 우리측에 관련된 전사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린 1.4후퇴 당시 국군 제6사단의 전사와 지역 주민의 제보로 발굴 지역을 결정해야 했다.
미군이 진출한 작전을 알아보면 '51.3.15 서울을 탈환후에 임진강 넘어로 철수하려는 북한군 제1군단의 3개사단을 압박하기 위해 미 제 1군단은 용진작전을 구상하여 시행한다.
용진작작전은 다음과 같이 2단계로 구분하여 진행 된다.
1단계는 행주-의정부선을 연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먼저 제187공수연대가 문산일대에 공중투하하여 1번 도로를 봉쇄하면 즉시 공격을 개시하여 임진강하구-문산 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한다.
2단계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한다.
이를 위해 미 제 1군단은 '51.3.22일 국군 제 1사단이 1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카이로'선(임진강 하고-의정부-가평-춘천 남쪽-한계 북쪽)에 도달하고 중앙에서 3번도로를 따라 진출한 미 제3사단과 우전방 미 제25사단도 진출하였으며 그 우측에서는 미 제24사단이 진출하고 있었다.
국군 제 1사단은 순졻게 진출하여 미 제187공수 연대와 연결 작전이 이루어 졌지만 중앙의 미 제 3삳ㄴ은 의정부로 진출하는 과정에 의정부의 천보산과 468고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미 제 187공수연대를 다시 덕정 북방 228고지 소리산을 점령하여 적의 철수를 강요, 동두천에 진출한다.
우익의 미25사단은 좌전방 제24연대가 소리봉-해룡산을, 중앙의 제27연대는 죽엽산-왕방산을, 배속된 터키여단이 주금산-국사봉을 목표로 진격중 중공군이 의정부-죽엽산을 탈환하려 역습ㅇㄹ 실시 했으나 대량 피해를 입고 국사봉과 소요산일대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진격은 중공군의 2월공세를 물리치고 진격하여 서울을 양익포위로 조기에 탈환하기 위해 시행된 리퍼작전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유엔군은 '51.3.31일에 문산과 춘천을 연하는 선가지 진출하게 되자 유엔군은 임진강 남쪽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을 캔사스선이라 하고 이곳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러기드 작전'이라 하였다.
또한 중부전선의 평강-철원-김화를 공격하여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고 캔사스선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한 공격을 '불굴 작전'이라 하였다.
캔사스선 진출을 위해 서부 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영29여단 배속), 미 제24사단 및 미 제 25사단을 전선에 배치하고 이미 캔사스선으러 진출한 국군 제1사단과 중앙의 미 제3사단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에 전념하고 '51.4.3일부터 미 제25사단은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의 계곡으로, 미 제24사단은 도로 동쪽에서 관음산, 국망봉으로 진격을 개시 하였다.
그리고 별다른 저항없이 4.6일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잇는 캔사스선에 진출한다.
중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및 영 제27여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51.4.3일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의 영국군과 중앙의 국군 제6사단은 별 저항없이 캔사스선에 진출했으나 우측의 미 제1기병사단은 중공군의 화천댐을 이용한 방어작전에 점령을 못하고 그 선에서 캔사스선 진출을 종료하게 되며 결국 제1기병사단과 교체하여 들어오는 미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하고 여기에 배속된 국군 1해병연대가 화천댐 돌파 작전을 수행하게 되다.
중서부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에 진출하게 되자 이미 계획된 철의 삼각지대로 진격하여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기 위해 '51.4.11일 불굴작전을 개시한다.
그런데 이날이 공교롭게도 미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 사령관 직위에서 해임하고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을 그 후임에 임명하고 리지웨이 장군 후임에는 벤플리트 장군을 4.14일 임명하였다.
하지만 공격 제대들은 적의 강력한 저항과 폭우에도 불구하고 20일을 전 후하여 미 제3사단은 연천을, 미 제25사단은 금학산을, 미 제24사단은 문혜리를 점령하고 영 제27여단은 사창리로 진출하였다.
"다시 4.21일 부로 와이오밍선 확보를 위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의 춘계공세"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제 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이 미 제 9군단이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으로 김화-화천으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제1군단의 우전방에서 광덕산으로 진출한 미 제24사단은 우인접의 국군 제6사단과의 연결을 위해 의도적으로 접전을 회피 하였지만 좌전방 보개산에서 철원을 공격한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은 적의 포격으로 공격이 돈좌되었다.
반면 중공군은 '51.2월공세에서 횡성전투에서는 부분 승리했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대패하는등 아군을 포위소멸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 병력을 멀리 이동시켜 차후 작전을 위한 준비를 온료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춘계1차공세 ('51.4.4.22~4.26)
이 당시에 미 제1군단(국1사,미 제3, 제24, 제25, 영 제29여, 터키여)은 임진강-한탄강선에 미 제 9군단(국6사, 미 제1해병사, 영 제27여)은 석룡산-유촌리선에 중동부의 미 제10군단(국5사, 미 제2, 제7)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국구니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국3사, 7사)은 내륙산악지대에, 제1군단(수도사단, 제9사)은 동해안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국군 제11사단이 거창 신원리 민간인 학살사건에 연루되어 '51.4.16일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양양으로 이동중 중공군이 공세로 양양-주문진으로 철수하였다가 5월초에 군단의 우일선으로 설악산 (마등령-미시령간)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중공군은 '51년초에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 제 19병단을 임진강 북쪽의 구화리-덕사리선에, 제3병단을 삭령-신탄리선에, 그리고 지난해 말 장진호 잔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전투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 제9병단을 철원-김화축선에 배치 하였다.
북한군은 제3,5군단을 양구-원통선에 배치하였다.
'51.4.22일 중공군은 미 제1,9군단의 와이오밍선 공격으로 중부전선이 돌출되자 방어종심이 앝고 이로 인해 상호지원이 횡적으로만 가능한 상황임을 간파하여 전선 분할과 우히 포위공격을 감행하여 유엔군을 다시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키려 했다.
"서울 북방의 결전의 결전과 유해발굴"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은 ㅘ전방 김포반도에 해병 제5독립대대(국1사 배속), 임진강 남쪽이 오금리-마지리에 국군 1사, 마지리-도감포에 영 제29여단(미 제3사 배속), 도감포-군자산에 미 제3사단, 군자산 앞 연천북방에 미 제3사에 배속된 필리핀대대로 주저항선 방어에 주력하고 있었다.
와이오밍선으로 공격을 개시한 미 제25사단은 공격중 돈좌 되어 배속된 터키여단이 대광리 일대의 남쪽 고지군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미 제25사단은 금학산-장흥리일대의 분지에, 제24사단은 신술리-문혜리을 점령하여 군단의 우익으로 진출한 미 제9군단이 좌익 사단인 국군의 6사단과 연결하였다.
중공군은 '51.4.22일 어둠이 깔리자 주력인 제19병단이 개성-문산축선의 국군1사단과 영 제29여단을 , 제3병단은 연천-전곡-동두천 축선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제9병단은 김화-포천-의정부 축선의 미 제25사단과 제24사단을 공격하였다.
"금굴산에는 전투화만 나왔다."
주요 전투지역은 금굴산(194m)일대에서 영 제29여단에 배속된 벨기에 대대가 방어작전을 하게되는데 금굴산은 한탄강 북안에 위치한 산으로 바로 남쪼기 38도선으로 ㅁㅍㄹ ㅇㅇㅇㄴ리 지역이고 북쪽은 백석리지역 일대로 개활지이다.
이곳은 마포잠수교가 있는 정도로 도섭이 유리한 지역으로 중요한방호지역이었다.
우리는 금굴산 일대를 1개팀을 투입하여 정밀 탐사와 지역탐문을 실시하였으며 이곳에 영국군의 화장터가 지금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산에는 그물망처럼 교통호가 연결되고 개인호가 다수 식별되어 발굴을 열심히 해 봤으나 전투화는 100여컬레 나오고 일부 파편과 틴피등이 나왔으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이 전투와 결부해서 강 남쪽의 250고지군 일대도 전수 탐사하였으나 큰 전투 흔적은 찾지 못했고 동쪽의 임진강 너머 전곡의 황지리 일대도 조사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파평산에서는 지금까지 100여구의 유해를 발굴 하고 있다."
이곳은 국군 제 1사단이 전투한 곳으로 이곳은 초기 전투에서는 북한군과 전투를 실시하고 1.4후퇴 당시와 '51.4월전투에서는 인민군 제 1군단,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는 곳이다.
사단은 임진강 너머 대덕산-백학산-강정리를 연하는 선에 정찰활동을 하고 오금리-마지리간에 주저항선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강정리는 파주 도라산역 남서쪽 사천강 동안에 있으며 백학사는 파주 군내면 읍내리에 있는 229고지로써 1번도로를 따라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에 이르다 우측에 있는 민통선지역으로 일명 장단지역이다. 이곳은 지금 주변에 제한된 인원의 경작이 진행되고 있으며 바로 초지 전투시 전투가 진행 되어 장단지서 경찰들이 출동하다 전차포에 맞아서 20여명미 절명한 곳이다.
대덕산은 38도선의 237고지군으로 백학산 전방에 있으며 지금은 북한 지역이다.
대덕산 우측이 고랑포리이며 자작리로 초기전투와 1.4후퇴시는 중공군과 국군 제1사단이 전투한 곳으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온 곳이다.
파평산은 고랑포리 임진강 남안으로 장파리 지역으로 국사봉이 횡격실 능선으로 367번 도로와 371번 도로가 그리고 임진강을 연하여 37번 도로가 잘 발달된 곳이며 문산에서 -파평산-감악산이 횡적으로 늘어져 문산 축선에 1번도로라는 가장 양호한 접근로가 있음에도 임진강이란 천연적인 장애물과 횡적인 고지군으로 방어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들어가 지역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이곳 일대의 전투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전쟁당시부터 살았다는 가장 나이든 어른부터 대부분 함구로 일관하여 특별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 북한의 판문점리 기정동 선전마을의 북한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판문점 우측의 67고지 근처에도 들어갔다.
이곳은 전쟁말기 우리 해병대 1개소대가 피해를 본 곳이라는 제보에 따라 들어가 보았으니 지금 JSA유엔군 초소가 자리 잡아 정확한 조사는 못하고 그 입구 주변을 탐사하여 많은 탄흔이나 개인호등의 흔적은 발견하였다.
도라산전망대는 150고지군으로 이곳에 올라서면 주변에 쉽게 개인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곳 또한 우리 해병대의 전투 지역이지만 전망대 공사로 주요 흔적은 다 훼손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경이선이 지나는 철로길을 따라 눈을 서북쪽으로 이동하면 바로 앞에 그 유명한 혼비고지(36고지)가 보인다.
"사천강 전투"
이곳 사천강은 국군 제1사단이 '51.6.24일에 이곳으로 진출한 이후에 '52.3.17일 준동부전선 펌치볼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미 제해병1사단과 이곳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사천 및 한강하류와 서해안 일원의 주저헝선을 인수하여 방어하게 된다.
그리고 국군 제1사단은 파주 금곡리에서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한 후에 '51.4.21일에 미 제1군단의 우익인 고양대로 이동하여 방어하게 된다.
우리 해병연대가 방어하던 곳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방어하던 곳으로 '52.4.1일에 중공군이 전초기지를 공격하여 5일가지 공방전을 벌여 한때 사천강으 ㄹ넘어 도라산지역가지 진출한 적을 강 너머로 돌려보냈다.
사천강 전투에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곳으로 '52.9.6일 중공군이 사천강을도하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우리 해병 1연대는 VT탄 사격과 최후저지사격, 진내사격등으로 맞서 중공군 1개대대의 공격을 1개소대가 막아내고 역습부대를 투입하여 적을 사천강 넘어로 밀어내버리는데 이때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하여 "혼비고지"라 부르게 되었지만 '53년 최후공세시에 적에게 피탈되어 지금은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다.
우리 해병대는 '52.9.6일부터 10월31일가지 계속 되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적을 약 1,550명 사살하고 아군도 66명 전사에 262명의 부상을 당하게 된다.
나는 통일촌 마을에 들어가 6.25전쟁때부터 살았던 분을 만나 이곳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쪽 가장 끝의 GP까지 들어가 보았다.
'10년도에 나이가 79세로 전쟁당시 20세였으며 카츄사로 전쟁동안 근무하고 나온 어르신이다.
어르신이 전쟁 종료후 최초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주 월롱산 밑에 피난민촌에 있다가 임진강 너머가 개방되고 군에서 통일촌을 만들 때에 최초로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럼 '50년 6월전투 때는 어디에 사셨습니까?"
"사천강 너머 지금 북측 출입국 관리사무소가 있는 평창동에 살다 전쟁이 날때 국군 제12연대를 따라서 남으로 내려왔다가 미군부대에 들어가게 되었지."
"네, 그러면 사실 지금 38선 인근의 전쟁 실태는 잘 모르시겠네요?"
"잘 모리지, 하지만 통일촌으로 들어와 처음 그렇게 통제가 심하지 않을 때에 여기저기 다니는데 특히 군 간부와 협력해서 사냥을 많이 다녀 이곳 일대의 왠만한 곳은 다 가 봤지요."
"아 예, 지금 우리는 전쟁 중에 전사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국군용사님이나 경찰 학도병등의 유해를 발굴하는 발굴단 입니다.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나요?"
"자유의 다리 건너오면서 바로 좌우측에 산에, 그러니까 노상리 지역 산에 가면 뼈가 하얗게 있었고 덕현동 지역 야산, 노하리 지역도 상당수 유해가 보였셨지. 그런데 지금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불도 자주나서 찾기가 어려울 겁니다."
우린 지역 군부대와 협조하여 어르신을 대동하고 그 당시에 가보았던 곳을 들어 갔으며 통제 구역은 혼자서 안내를 받아 서쪽의 마지막 GP까지 들어가 보았다.
비록 평지에 가가운 곳이지만 조그만 구릉처럼 생긴 곳에는 어김없이 개인호나 교통호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안에 관찰되는 유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때 수행하던 김상사가 본인이 부소대장 시절 보았던 전투화가 나오고 뼈가 보였다는 곳으로 안내했다.
가매복 진지를 굴토하다 나온 것으로 가 보니 조그맣게 봉분이 만들어져 있고 주변을 보니 기관총을 거치한 곳으로 판단되는 총상이었다.
그러나 비무장 지대 안이라 우리는 위치만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어르신에게 무슨 사냥을 다녔느냐고 물으니 조금 난색을 표하며 궁색한 답변을 하셨다.
"뭐 노루나 멧돼지같은 것을 잡아서 나눠 가졌지요."
"국군 제1사단의 작전지역에서 18구의 유해가 발굴된 노상리"
우리는 '11년도에 노상리 일대의 발굴 작전을 개시 하였다.
사실 이곳은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지만 이미 군부대가 한번씩 진지를 구축한 곳이 많아서 사전 지뢰 탐지기로 안전을 점검한 후에 발굴작전을 전개 하였다.
이곳은 초기 전투시 밀려 내려가는 국군 제1사단의 좌측연대인 제 12연대가 임진교를 건너기전 마지막 대안상에서 방어 작전이었으며 사실 임진교 폭파 작전이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그곳에 고립된 국군이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고 볼 수도 있는 곳이다.
반면에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는 국군 제 1사단이 '51.5.20일에 문산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51.10월 이후에 주저항선을 임진강 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11연대가 진출하며 적을 사살하거나 전사 했을 가능성도 있다.
"두매리고지를 바라보는 나는 힘차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11년 어느날 나는 백학산 우측으로 해서 두매리고지가 바라보이는 방축동에 올랐다.
이곳은 '51.12.28~'52.1.8일 어간에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와 15연대가 중공군과 치열하게 8일간이나 전투를 벌여 결국 피탈되고만 곳이다.
동시에 두매리고지 서측에 있던 철모고지와 무명고지도 피탈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1,611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아군은 전사 129명과 58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지역은 120고지군으로 대덕산으로부터 약 3km 동쪽에 위치하는데 양호한 기동로가 발달하여 좌우측방과 바로 정면을 통제하는데 유리한 지형이다.
담당 부대 작전장교와 1:5만 지도를 펴놓고 과연 전사한 우리 용사님들이 온전하게 후방으로 후송이 되었을까라는 의문점을 가지고 만약에 도중에 가매장 된다면 어디가 되겠는가를 토의도 했다.
백학산으로 이동한다.
지금 이곳은 서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으로 바로 앞에 지금은 북한지역인 대덕산이 서 있다.
대덕산으로부터 종으로 내려오는 능선이 백학산에 이르러좌우측으로 약 3km정도 되는 횡격실 능선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능선이 전수 개인호와 교통호로 연결 되는데 전쟁당시의 흔적이 대부분 중복되어 유해발굴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곳에 '68.1.21일날 서울 구파발까지 침투한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침투한 곳이 있다.
또한 그 멀지않은 곳에 바로 장단 파출소 경찰 20여명이 트럭으로 진출중 적의 전차포에 맞아 전사한 장단이 있다.
이곳은 내가 처음 소위를 달고 전방에 들어간 일반전초선으로 79년도 8월에 다이 지역 책임 중대장이 월북한 사고지역이다.
이곳에서 근무한 전역병의 제보로 시작된 조사활동은 개인호를 식별했으나 현재 것과 혼재 돠어 굴토가 어렵고 특히 산이 지세가 괜찮아 이곳 일대가 민간인 묘지가 많은 곳이였다.
몇번의 진지공사간 유해 노출로 현장 조사를 실시 했으나 모두 민간인으로 판명 되었고 산 좌단부 대대본부 군수과 막사 뒷편에 있는 무명용사 묘지도 수해로 주변이 훼손되어 우리가 확인 조사 결과 민간인 묘지로 판명 하였다.
백학산 진출로상에서 남쪽 임진강 강가로 가면 초평도 맞은편에 대추포가 있고 남산동이 있다.
이곳에 고구려 덕진산성이 있는데 과거 이곳이 수내나루라 해서 삼국시대에는 많은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여기를 찾아간 배경이 씁씁하다.
"문화재 발굴한다면서 6.25전쟁관련 유품이 나오는데도 신고하지 않는 현장"
나는 어느날 용인의 할미성근처를 탐사하게 된다. 용인시 포곡읍에 있는 삼성 애버랜드 안으로 해서 신원리 뒷산인 457고지를 백련사를 통과하여 올랐다.
이곳은 초기 전투시에는 한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혼성 7사단 소속 병사 및 2사단 병력이 동작동 및 신사리 일대에서 1번도로 또는 과천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내려가는 과정에 지나간 곳이다
그런가 하면 1.4후퇴 이후 재반격 간에는 미군과 터어키군 그리고 우리 국군 제 1사단 15연대 병력이 이곳 일대의 기동로를 이용하게 된다.
어느날 용인의 김량장동과 둔전리일대에서 탐문 활동중 한 어르신이 제보해 주기를 마성터널이 있는 곳으로 올라 북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엄청 많은 유해를 발굴하게 된다고 제보 하였다.
"하얀 도포자락 옷을 입고 대부분 죽었는데 비행기에서 쏜 원자폭탄에 다 죽었다고 하던데... ."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묻지마세요, 내가 15살 나이에 전쟁이 났고 전쟁 종료후에 현역으로 군대는 갔다 왔어요. 줄곧 전쟁동안 피난도 못가고 저 신원리에서 살았는데 북한군도 보고 중공군, 미군 터키군 캐나다 군도 보았어요.
"그러시면 중공군은 이곳에 머물며 못 된 짓같은 것은 없었나요?"
"함게 먹고 자고 해도 그런 짓은 없었고 동네에 안장차고 다니는 치안대라는 사람들이 사람들 잡아다 죽이기도 하고 집을 뒤져 다 약탈해 가고 했지."
"혹시 아군이나 유엔군은 어떻습니까?"
"그건 할 말이 못돼요. 중공군보다는 못해요."
"거동이 지금 좋으신거같은데 저희 차를 이용하여 마송고개에 가시면 않되겠습니까?"
"바빠서 가야 해요. 산에 올라가 보면 지금도 있을 거예요. 우리가 다 알고 있어요."
어르신은 정중히 사양하시고 존함도 밝히지 않으셨다.
이래서 나는 이곳을 탐사차 올라가려 먼저 백련사에 들려 호국영령님께 기도를 드리고 잠시 절의 사무장 되시는 분과 차를 한 잔 마시며 이곳 실태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절의 뒷산이 영험한 산이라는 것만 아시고 소문에 법화산쪽에 중공군이 하얗게 죽었고 신원리에서는 민간인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만 들었다고 한다.
나는 혼자서 산에 올고 차량은 동백리 향린촌 이로 보내 기다리도록 하였다.
정말 산에 오르니 457고지에는 개인호가 별로 없고 남서쪽으로 내려서는 능선에 오히려 개인호가 많았다.
특히 향린촌 바로 위에는 개인호가 대량으로 굴토되어 세월의 넋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 능선 바로 밑까지는 차량이 들어오게 된다.
육안으로 관찰해도 탄피도 있고 전투흔적이 보인다.
나는 할미성으로 향한다.
할미성은 349m의 고지로 신라시대 그러니까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시기인 6세기에서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유래는 마귀할멈이 하루 만에 성을 샇았다는 이야기로 인해 할미성이 되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중원문화재 연구소에서 시굴조사인지 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사활동하는 이눤을 만나 물 한모금을 마시고 여기까지 오게된 동기를 말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바로 이곳 초평도 너머에 있는 고구려성의 지표조사에 본인이 참여 했고 최초로 들어가 보니 성곽을 따라 개인호가 있고 탄피며 군화등 전투 유품이 즐비했다는 것이다.
"유해발굴 현장이나 문화재발굴 현장에서 관련된 것이 나오면 상호 연락하는 것."
이미 몇번의 공문서를 공유하였고 찾아가 협조도 직접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자존심인지 우월감인지 아니면 피해의식인지 한번도 연락받은 사실이 없다.
실제로 한강 강변북로 워커힐 위에 있는 아차산성(고구려 성으로 확인됨)에서 발굴작업을 할 때도 탄피며 통일화등 전투 유품이 발견 되었다고 나는 그 내부인원의 전언을 통하여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우린 문화재청에 찾아가고 협조공문을 보내고 매년 우리의 유해발굴 계획을 통보하곤 했다.
그런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할미성에서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곳이 바로 백학산 밑의 동파리 "덕진산성이다."
"할미성에서 다시 작고개 (마성터널)을 지나 석성산(471m)을 올랐다 고개로 다시 내려왔다."
석성산에 이르는 구간에도 간간이 개인호의 흔적이 그대로 있으며 마성터널 위에는 윤곾이 뚜렸한 개인호와 교통호 흔적이 다수 보였다.
이곳에서도 유해발굴이 이루어지는데 영문리와 마성링에 들어가 마을 회관을 돌며 지역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버드실골에도 들어가 실제 그당시 이곳에 살며 전쟁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어르신도 만나 실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50.6.25전쟁이 터지고 7월초에 국군 6사단이 김량장일대에 지나갔다는 이야기와 1.4후퇴시 일부 병력이 다시 이곳에 왔다 동쪽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는 일부 하였다.
그런데 1월말이나 2~3월에는 주로 유엔군이 찾아왔고 특히 미군과 터어키군이 많은 기간 이쪽 지역에 나타났다고한다.
전쟁시 아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주로 중공군이 도포자락을 쓰고 다녔고 미군 비행기가 연일 불폭탄을 산에 퍼부어 나무 한그루 제대로 서있는 것이 없었다면서 산에 올라가면 중공군이 하얗게 죽어서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다음날 나는 다시 마성터널 위에서 할미성-향린촌 위 고지-무푸레고개-법화산-사기막 탐사"
하지만 이곳 또한 많은 전투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고 작은 고지 주변에 집중으로 있는 분대규모의 개인호만 식별하였다.
그러다 사기막골로 내려오며 이곳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 한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분은 동네 이장인지 부녀회장인지 하고 있는 분인데 과거부터 이곳에 살던 분은 아니다.
이사 들어와 살면서 그 당시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에 중공군 지휘부가 있었고 말들도 많이 들어와 있었다 한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과거에는 산에 올라가 탄피도 캐고 불발탄도 주워다 잘못하여 터져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고 들었다 한다.
우리는 '12~'13년에 이곳 일대에서 80여구의 유해를 발굴 했다.
"사실 이곳은 1.4후퇴후 유엔군의 재반격('51.1.225~31)시기에 미 제25사(터키여단 배속), 미 제3사(국 제1사 15연대 배속)등이 중공군과 전투한 지역으로 이 내용은 차후 별도로 소개 하겠다."
'52년 후반기에 상방은 전 전선에서 대립하고 있었으나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판문리의 휴전회담 장소에서 휴전회담이 진행중에 있었기 때문이며 서로 군사력 증강에 주력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전초진지를 강화하기 의한 소규모의 제한 공격이 실시 되었으며 서부 전선의 미 제1군단은 '52년 6월초에 소위 "카운터작전"을 실시하여 미 제45사단이 진지 정면의 주요감제 곡지를 점하고 있는 적의 전초들을 탈취하였다.
그 작전의 결과 아군은 역곡천 북안의 백마고지(395m)' 화살머리고지(281m), 티본고지(290m), 와 역곡천 남안 구릉의 포크찹고지(255m), 불모고지(266m)등 111개 목표를 장악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 하였다.
'52년 후반 아군은 7월초에 부대배치를 조정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서로부터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 영연방 제 1, 미 제3, 미 제2사로 개성 남방 서해안으로부터 철원 서북방선에 주저항선을 담당하였다.
국군 제 1사는 '52년 7월13일부터 8월4일까지 남원과 밀양등지에서 지리산 및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하고 올라와 8월12일 다시 연천으로 들어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하고 10월1일부로 연천 서북방 S형굴곡부의 임진강 지역을 미 제3사로부터 인수 받는다.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9, 미 제7, 국군 제2, 미 제40(예비)로 금성방면을 방어 하였다.
같은 중부전선의 국군 제2군단은 국군 제6사, 수도사, 국군 제3사로 화천 북방의 금성천 북방의 교암산에서 북한강선을 방어 하였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7사, 미 제25사, 국군 제8사, 미 제45사(예비)로 양구북방을 방어하였으며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국군 제11사, 제5사로 건봉령 전방에서 고성 351고지에 이르는 선을 방어하였다.
그후 군단별로 부대이동이 실시되어 9월27일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8사단이 미 제45사단과 교대하여 부대교육에 임하고 10월2일 미 제1군단 예하 국군 제1사단이 미 제3사단과 교대하여 전선에 투입 된다. 동월25일에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40사단이 미 제25사단지역을 인수하고 미 제25사단은 예비로 된다.
"반면에 이 기간에 공산군은 야포를 증강시키고 소련으로부터 10개 고사포 대대의 장비를 보충받는다. 또한 전차 및 자주포로 장비한 중공군 2개 기갑사단과 인민군 1개 기갑사단 및 2개 기계화 사단을 전선에 배치할 정도로 전력이 증강 되었다.
그리고 '52년 5월에 유엔군 사령관으로 리지웨이에 이어 클라크대장이 부임하였다.
이시기에 국군은 10월말 병력수준을 250,000명에서 463,000명으로 상향 조정하기로 한미간에 합의하였으며 해군과 공군도 증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육군은 6개의 독립연대 창설에 착수하여 그결과 제 12사단(제53,55,56연대)와 제15사단(제57,58,59연대), 그리고 제37,38,39연대와 제50,51,52연대등의 독립연대들이 창설되어 교육훈련과 실전 훈련 및 공비토벌 작전등에 투입 되었다가 제 12사단은 제37,51,52연대로 12월10부로 동연대들이 정식으로 사단의 건제부대로 편입되어 미 제10군단의 미 제40사단의 진지를 인수하였다.
이 무렵 제 15사단도 제38,39,50연대로 개편되었다.
이밖에 사단 포병도 기존 105밀리 1개대대에서 105밀리 3개 대대, 155밀리 1개 대대로 편성토록 하고 무려 야포단도 12개의 포병단을 갖추도록 하고 미 제5포병단에서 훈려늘 마치고 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53년 1월부터 사단 포병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전차 부대도 '51년 2개 전차 중대에서 6개 전차중대로 증강하였다.
"고지 쟁탈전의 격화"
'52년 후반기부터 서부전선의 각 전초선에서 고지 쟁탈전이 본격화 되었다.
미 제1군단은 7월중순에 미 제9군단으로부터 미 제2사단을 받고 미 제45사단을 미 제10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였다.
미 제45사단의 카운터작전으로 전방의 주요고지군을 피탈당한 중공군은 9월중순부터 이 지역에 대한 파상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미 제1해병사단의 벙커고지(122m) 전투"
국군 제1사단의 진지를 인수받아 들어온 미 해병사단은 '52.8.9일 미 제1연대지역으로 기습을 감행한 중공군 제 118사단과 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벙커고지는 국군 제1사단이 전투를 실시한 두매리고지 남서쪽 하단부로 북서쪽에는 바로 대덕산이 있고 하단부에 요크고지가 있다.
이곳을 상실하면 바로 주저항선이 있는 백학산선까지 밀리게 되므로 상방간에 진지 고수와 탈환을 위한 전투가 무려 8.8~16일까지 7차례의 상호 쟁탈전을 감행하여 결국 미 해병이 승리하게 되며 이 전투에서 적 사살 570명, 부상 1,500을 시킨 반면 미 해병은 92명전사에 529명의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의 노무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재를 고지에 추진하고 참호공사를 하는등 많은 희생을 담당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지금 비무장 지대안에 위치하여 우리가 발굴 작전을 하기에는 아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고 있는 곳이다.
"사천강 전투(국군 제1해병연대: '52.9.6~10월초)는 앞에서 언급하였다."
"불모고지 부근 전투"
미 제9군단 예비로 있다가 미 제1군단으로 배속된 미 제2사단은 '52년 7월 17일 미 제45사단으로부터 군단 좌익 덕은동-281고지 일대의 역곡천 남쪽 주진지 및 전초진지를 인수하여 좌전방에 제23연대(배속 프랑스 대대)로 역곡천 동안 진지에, 제9연대(배속 타이대대)를 우전방 동광리 동쪽 천덕산 일대의 진지에 배치하고 제38연대 3대대와 네덜랁드 대대를 예비로 확보 하였다.
따라서 사단의 전초진지인 불모고지-포크찹고지-에리고지(191m)에서는 매일 공방전이 벌어졌다.
중공군 제38군이 '52.7.17일에 불모고지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뺏고 뺏기는 악전고투가 계속 되었으며 결국 피탈 되었다.
'52.7.18일에 인천에 머물던 제38연대 2개 대대가 전곡일대로 들어와 제45사단과의 진지 교대가 완료 되었다.
결국 '52.7.31일에 미군이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다시 불모고지를 탈환하였다.
이곳은 지금 유해발굴 작전이 진행중인 덕은골 일대의발굴지역에서 바로 육안에 들어오는 곳으로 '53년도에 결국 다시 적에게 피탈되고 만다.
"이곳 전투를 이해 하려면 '51.10.3일에 개시된 미 제1군단의 "특공작전"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 작전은 미 제10군단이 하계제한공격을 통하여 해안분지를 확보하고 방어선을 개선하는 한편 그 마지막 단계로 단장의 능선 전투를 치르고 있을 무렵 미 제1군단이 서부에서도 이와같은 추계공세를 수립하여 특공작전(Commando)이라 명칭을 붙였다.
이 작전은 한강 하구로부터 철원에 이르는 군단 방어선을 역곡천까지 10km를 추진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그 목표선은 고랑포 동쪽 임진강 제방에서 사미촌-고왕산-마량산-역곡천 남안의 고지군-281/395고지-중가산-438고지-한탄천과 남대천의 합류지점인 정연리를 연하는선으로 제임스타운선으로 명령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판부리 서쪽 91고지, 146고지, 일대(Moon)을 점령 방어한다."
"영연방 제1사단은 17고지, 고왕리 일대(Foster)와 마량산, 고잔리 일대(Moore)를 점령 방어한다."
"미 제1기병사단(그리스대대, 타이 대대 배속)은 늘음고개, 346고지 덕은동 일대(Courson)와 347고지, 갈현리 일대(Cralg)를 점령 방어한다.
"미 제3사단(벨기에 대대 배속)은 중토동-도밀리, 324고지-덕산리 일대(Butler)와 대마리-281고지-266고지-중어성 일대(Watts)를 점령 방어한다.
이대 우측에는 미 제9군단의 죄익인 미 제25사단의 배속 부대인 터어키 여단이 김화-평강 사이의 중간 지점까지 진출하여 미 제1군단의 작전을 지원토록 하였다.
미 제1군단의 특공작전은 '51.10.3일 이:00부터 공격 준비사격에 이어 06:00에 공격이 개시 되었으며 국군 제1사단은 Moon지역을, 역시 우익의 미 제25사단도 터어키 여단이 이길리 372고지를 점령하고 제14연대가 정연리 북쪽 430고지를 쉽게 점령하여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우익의 제3사단은 격렬한 전투끝에 11월23일에 이르러서야 제임스타운선에 이르게 된다.
"지금 이 작전지역은 주로 국군 제28사단의 통제구역이 대부분이고 제5사단의 일부가 포함되는 곳으로 주로 3번도로 북쪽의 고지군이 다 해당 된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상리, 대광리와 도신리 일대 노인정과 마을회관을 상대로 탐문 활동을 실시하여 정보를 구하려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인원이 타계하기도 하고 또한 북으로 넘어가 버려 실제 갑어치 있는 정보를 획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특히 대부분 민통선 북방이라 쉽게 민간인의 접근이 차단되어 현장 확인에도 많은 애로 사항을 느꼈다.
이 일대의 야월산, 천덕산, 진명산, 열쇠전망대, 태풍전망대, 고왕산은 물론 그 사이에 있는 왠만한 고지군은 다 올라가 보았다.
방아다리의 266고지군일대,신망리역 앞의 상리와 합수리 일대 고지군도 다 탐사 하였다.
태풍전망대부근과 밤고개로부터 적거리-엄고개-덕은골-천덕산에 이르는 고지군들도 전수 조사하여 특공작전의 실체를 규명하려 노력도 하였다.
DMZ지역인 화살머리고지도 오르고 백마고지 일대는 5회정도 탐사와 발굴도 2회나 들어갔고 열쇠전망대 동북쪽의 북측의 티본고지 바로 아래 에리고지도 1회 들어갔다.
제25사지역의 고랑포 땅굴 앞까지도 들어가 현장 탐사를 해보았다.
'12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전이 진행되어 현재도 지속 디는 것으로 덕은골 괴능선과 진명산일대에서 7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되고 있는데 이곳은 당시 국회의장인 정의화의원 일행이 찾아 오기도 한 곳이다.
'국군이냐 아니냐?'라는 의문점을 갖고 진행되고 있으며 우린 카튜사나 노무자일수도 있다고 보고 추진하는 것이고 좀 염려되는 것은 중공군이라 하더라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보내고 있으니 아군이란 부담없이 발굴 되도록 해야하는데 실제 발굴 현장에 올라오는 지휘관이 꼭 질문하는 것은 국적을 물어보기가 쉽다.
그러니 발굴 팀장이나 함께 동행하고 있는 김식관이 쉽게 중공군이라고 답하기가 곤란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적거리로 들어가 본인 밭 입구에 노출된 유해를 신고한 분의 안내를 받아 현장에 들어가 2구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이 일대는 어느 집안의 묘지가 가지런히 정열된 오래된 곳으로 이 주변에 많은 개인호가 있는데 이 제보자의 이야기는 중공군들이 그 묘지 일대에 굴을 파고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 굴은 모두 무너져 흔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 분의 전화가 왔다. "그리스 군이을 보았습니다."
지금 김해에 살고 있는 예비역으로 이곳에서 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야월산에 미군 통신소가 지금도 있는데 야월산과 천덕산 일대를 수색정찰하고 다녔다고 하며 60년 초반인데 그리스 군인을 보았다는 것이다.
TV를 보는데 유해발굴 다큐가 나와 보다가 방송사에 문의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그리스 군인이 베낭을 메고 철모를 쓴체로 산 중턱 계곡에 총을 멘체로 업드려 있는데 군복을 보고 알았다 한다.
우린 이걸 찾으러 야월산 천덕산을 ㅁ미확인 지뢰지대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다 방면으로 탐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 운용되어 기병사단의 우전방 7기병연대의 중앙으로 공격하였다는 전사와 이 야월산이나 천덕산 계곡과는 차이가 있다.
이 천덕산 일원은 우측의 미 제3사단 15연대가 격전을 치르고 점령한 곳이고 중앙의 7연대가 395고지(백마고지)와 266고지를 점령하고 281고지 즉 화살머리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우익 제65연대(필리핀 대대 배속) 백마고지 우측 284고지와 중가산을 점령하여 목표선에 도달한다.
물론 바로 그 우측이니 포로가 되었다가 전사했다고 유추 해석은 가능하다.
제1기병사단은 미 제3사단 좌측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적거리일대 346고지에서 가장 격전을 치르고 제3사단으로부터 지난 10월10일에 사다의 전초임무를 디고 학당리 388고지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퇴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를 배속까지 받아 가면서 공격을 실시하여 19일이 되어서 목표선을 확보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탐사를 하고 다닌 모든 곳이 전쟁터 였으며 나는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 에리고지에 올라 그 생생한 전투흔적을 직접 목격하였다.
백마고지는 3번국도와 경원선철도가 지나는 경기연천에서 대광리역 그리고 지금은 복원된 백마고지역이 있는 곳에서 바라보이는 395고지군이다.
이곳은 미군 제3사단이 먼저 점령하였다가 '51.10.17일에 국군 제9사단이 인수받아 백마고지 쟁탈전을 하고 '52.10월26일 다시 미 제3사단에 인계한 전투지역이다.
그러다 다시 국군 제2사단이 '52.12.27일 인수받아 이 지역일대를 방어하게 된다.
백마고지 오르는 입구에 무명 266고지가 있으며 조구만 강을 건너기전에 우측으로 돌아가면 중마산과 무명 284고지가 나온다.
백마고지는 북서쪽으로 능선이 길게 느러지는데 휴전선은 그 북쪽끝을 지나 우측으로 회도리를 쳐소 사실 활처럼 굽어 우리측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차량으로 GP앞까지 어르는 길에서 좌우측을 바라보면 비무장지대내에 교통호 흔적과 탄흔흔적이 보이는데 전투 유품도 노출되어 있다.
지피 안으로 들어가면 현재 지피보다 앞쪽에 구지피가 있는데 구지피 밖으로 나가 우리의 수색대원들이 매복을 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매복지점을 굴토하다 유해가 식별되어 나는 두번이나 들어가 수습해서 나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바로 앞으로 경계선이 지나가는 곳인데 발굴 되는 유품은 공교롭게도 전수 아군의 유품인 m1탄과 탄크립 전투화등이 수습되었고 개인호 위치도 북을 바라보고 있어 전형적인 아군의 호였다.
주변에는 수많은 호들이 존재하지만 우린 그곳을 발굴할 수는 없어서 지피 내의 변형되지 않은 곳의 전투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철조망 안은 대부분 다 지피 공사간에 건드려 안타까웠다.
쌍방이 거의 2만여명 전사한 곳이라는데 이제 그 흔적은 역사속에 묻히고 있다.
"나는 내 동기인 조영호를 만나 중대장시절의 발굴 이야기를 직접 듣고 함께 이곳에 왔다."
무명284고지 앞으로 추진철책이 지나는데 이 철책작업을 하면서 20여구의 유해가 나와 순찰로상 위에 4줄로 6구씩 매장했다는 당시 중대장 조영호 대위의 증언에 의해 현장을 확인했으나 그 이후 순찰로를 확장하면서 위치가 옮겨졌는지 지금은 그런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다만 한곳에 일렬로 무덤을 4개 만들어 놓은 곳이 있는데 혹시 그곳에 그렇게 줄별로 모아서 집단 매장하지 않았나 생각도 들지만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의 답변이 불분명해서 발굴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은 평지일대로 과거 민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고 실제 제보자의 내용이 민간인 신발이나 일부 유품이 목격 되었다는 사실도 직접 확인하였다.
원래 이 284고지는 필리핀 군대가 '51.10월에 최초로 점령한곳으로 바로 앞은 광활한 철원평야가 펼쳐진다.
어느 날은 예비역장군께서 국군 제5사단을 방문하는데 과거 9사단 참전용사님으로 백마고지를 가보자 한다는 연락을 받고 나도 그 팀에 합류하여 함께 들어가 보기도 했다.
휴전이 된다고 하여 한때는 구지피 바로 밑의 엄폐된 곳에서 인원들이 배구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당시 눈에 선하게 보이는 교통호는 대부분 중공군 유해로 가득차 있어 모두 흙으로 덥혀있는 상태라 하며 아무데나 파며는 유해가 나온다며 동행한 같은 중대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전쟁기간 백마고지 일대는 미군의 포병에 의해서 고지 상공이 조명탄으로 항상 밝게 비춰졌으며 미군 전차가 사후동으로 들어가 전차포로 아예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고 포병이 머리 위에 시한폭탄을 비오듯 퍼부어 중공군이 정말 구더기처럼 죽어나갔다고 술회 하신다.
아마도 미 제3사단이 처음 점령할 당시도 이런 화력으로 점령했으리라 본다.
나는 추진철책로를 따라 284고지를 지나 산명호저수지 뒤로해서 포리지역까지 도보로 때론 차량으로 탐사를 해보았으며 바로 앞에 북한군의 땅이라는 사실에 움찔하기도 했다.
이곳 일대에서 과거 발굴된 유해를 수습하거나 지피 안에서 4구를 발굴 하는등 7구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그당시에 아군의 전사자는 500여명이고 실종자는 400여명으로 기록에 나온다. 전사자 처리는 당시에 주로 노무자사단이 책임을 지고 들것으로 들고 나오게 되며 주로 화장을 무명266고지 앞의 강변에서 할 경우도 있었고 일부는 차량으로 운구하여 관전리 앞의 논에서 대규모로 했다고 한다. 강변에서 하다가 적의 박격포가 떨어져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모습을 산 위의 벙커에서 바라보며 서로 말은 하지않고 의미없는 미소만 띠웠다는 용사님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
전사자중에 유해를 미수습한 인원은 36명으로 기록 되고 있다.
화살머리고지는 현재 육탄10용사 선양회 사무총장을 하고 있는 유법사가 과거 이곳에 들어가 유해를 4~6구 수습하였다는 제보로부터 시작 되었다.
우린 이곳이 주로 프랑스 대대가 점령하여 전투한 곳으로 미 제3사단의 주 전초기지 전투였지 국군 제2사단은 '52.12.27일에 이곳진지를 미 제3사단으로부터 인수받아 그렇게 많은 피해를 가져오지 않은 곳으로 알았다.
기록에 보면 180여명이 전사하고 미수집인원이 17명이며 실종자는 16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에 중공군은 1,418명을 사살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 제2사단 참전용사님들도 저격능선에서 만ㅎ은 피해를 보았지 이곳에서는 그렇게 전사자는 없었고 부상자는 기록에 815명으로 많이 발생 하였고 당시 제17연대 의무병으로 근무한 김향종용사님의 증언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발굴되어 처리된 인원을 보면 사실 이곳은 그리 많은 유해가 남아 있지않아야 맞다.
처리돈 싯점이 '90년대 중반이라 하였는데 공교게도 5.18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31사단장이었던 정장군이 이곳에서 소대장을 하면서 진지공사간 유해가 나와 일정한 장소에 묻었다는 제보를 '07년도에 직접 나에게 하신 적이 있는데 그 유해를 처리한 것으로 우린 추정하였다.
지피에 들어가 보니 백마고지처럼 광정면이 없이 북서쪽으로 길게 능선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남북공동 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이 진행되었고 금년 4월부터인지 공동 발굴을 한다는데 자뭇 많은 의아심이 든다.
이곳의 유해는 처음 진출한 미군아니면 프랑스군대 일 확률이 많은 것이 사실인데 왜 이곳으로 북한은 중공군과 유엔군이 전투한 지역을 택하여 발굴하자고 동의 했을까?
프랑스군 전투자료에 보면 아군은 완전히 토치카를 만들어 놓고 전차가 실제 능선에 올라서 북측으로 사격을 하면서 방호하였고 국군도 이곳을 인수받아 '53.6월부터 7월 휴전시까지 2회에 걸쳐 실시적으로 진지전사면을 피탈 당하기도 하지만 진내사격을 요청하고 역습으로 재탈환하였다.
하지만 이곳이 갔고 있는 지형적 잇점이 상당히 크다.
만약에 이곳이 피탈되어 적이 우회기동을 실시하면 백마고지는 고립되고 철원평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지금 진출입로가 개설 되었다.
그러면서 발굴된 유해가 10여구 되는데 어떤 피아판단을 하는지 궁금하다.
또한 발굴 되면서 나왔던 인식표의 국군 전사자는 자력표에 자가봉송된 인원으로 나와 있는데도 섣불리 ?에게 보고 되고 이름을 호명하는 우를 범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순수성이 의심스럽고 이곳에 색안경을 쓰고 들어간 그 인원은 누구인지... .
"용사님이시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에리고지는 미 제9군단 예비로 있다가 미 제1군단으로 배속된 미 제2사단이 '52.7.17일 미 제3사단의 우익으로 들어와 '52.6월의 카운터 작전으로 역곡천 남안의 적을 격퇴하고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한 미 제45사단으로부터 진지를 인수받았다.
따라서 '52년도 미 제2사단의 전초진지인 불모고지(266m:미군)-포크찹고지(255m:타이 대대)-에리고지(191m)에서 매일 공방전이 전개 되었다.
모두 역곡천 남안의 고지들로 에리고지 일대는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우익을 담당하면서 주로 전투를 실시하였으며 그 앞의 290고지 티본고지에서 아스널고지, 에리고지에 이르는 종결실 능선의 끝자락이다.
그러니 미 제3사나 45사아니면 미2사또는 프랑스 대대가 전투를 했던 곳이다.
이 지역은 구릉처럼 되어 있어 접근에 아주 용이한 곳이며 바로 앞이 휴전선이다.
그런데 이곳에 매복작전을 들어간 대대장이 직접 연락이 와 화공작전을 실시후 정찰간 사람뼈를 식별하였다고 하여 와달라라는 전갈이 왔다.
그래서 수색대원이 선도하여 경계를 제공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 매일경제신문사 기자인 성용이르 데리고 들어갔다.
이동 도중에 갈대숲을 지나고 적의 감시카메라를 따돌리리려 이리돌고 저리 돌고 들어가는데 아마도 이곳이 옛날 방아간이 있었는지 방앗간 기계들이 녹이 슬어 수풀속에서 세월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에리고지에 오르기 직전에 아마도 그당시에 사주방어를 위해 설치한 철조망이 2중3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속은 토치카가 있다가 무너진 것으로 판단되는 출입구도 보인다.
또한 주변에 실탄이 얼마나 많은지 아예 탄통이 셀수 없을 만큼 그대로 남아 있고 철모도 있고 유품의 천국이었다.
올라서니 고지 전면에 개인호와 교통호가 그물망처럼 얽혀있으면서 그 호의 깊이가 엄청 큰 것으로 보아 유엔군이 점령하였음에 틀림없는 흔적이다.
이곳에 전차가 올라서 저 북쪽으로 전차포를 쏘아대니 누가 침범하겠는가.
하지만 전쟁은 그속을 파헤집고 철조망을 뚫고 진내에 수류탄을 까고 화염방사기로 지지는 것이다.
유해가 있다는 곳에 움크리고 앉아서 확인해 보니 주둥이가 긴 것이 영락없는 노루종류고 뼈들이 얇고 짧아 동물뼈임이 확연하다.
지금도 그곳을 갔다 돌아나오는 모습을 생각하면 소름이 돈다. 한발 움직이면 적진이라는데... .
한편 영연방 제1사단은 미 제1군단의 특공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51.10.4일 중앙의 캐나다 제25여단이 187고지 서단으로 진출하고 우전방 제28여단이 목표무어와 포스터의 중간에 위치한 고왕산(355m)와 227고지를 점령하였다.
또한 10.5일에 공격을 재개하여 마량산(317m)과 서남의 217고지를 점령하여 목표선에 도달 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마량산은 적에게 이후 피탈되고 지금은 고왕산만 우리가 방어하고 있다.
고왕산은 GP안에 있는 곳으로 나는 이곳 지피 통문 바로 옆에 유해가 있다하여 이곳을 가 보았다.
고왕산은 '51.11월부터 중공군의 동계공세로 마량산과 고왕산에 집중적인 공세를 가해 왔다.
11월 2~3일 영연방 사단의 좌전방 연대인 캐나다 제25여단지역에 양공 작전을 실시한 후에 4일 새벽에 우전방 제28여대가 방어중인 마량산과 217고지로 공격을 해왔다.
이렇게 해서 10월초에 학보한 마량산은 중공군측 자료에 의하면 5차례나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피탈되고 이어서 11월17일에 고왕산 서단 227고지를 공격하여 또한 피탈되며 전투 지경선 조정으로 고왕산은 미 제3사단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이런 부대배치의 조정을 알아챈 중공군이 고왕산을 공격하여 미군을 퇴각시키고 227고지와 고왕산 사잉에 있는 안부를 방어중이던 캐나다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캐나다군은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백병전을 불사하여 결국 중공군을 몰아내고 그 여세로 미군도 다시 고왕산을 공격하여 탈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금가지 마량산은 적지역이 되고 고왕산은 우리지역인데 고왕산에 오르니 철책으로부터 지ㅣ로 들어가는 진입로도 양호하고 능선이 넓게 발달하여 중대규모의 전투는 실시하는데 충분한 공간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시기가 이른 봄으로 겨우내 얼었던 전서늬 눈이 녹는 싯점이었는데 고왕산 전투가 얼마나 치영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지역에 눈이 녹아 구멍이 무슨 조그만 분화구처럼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포탄이나 비행기 폭격으로 생긴 곳으로 그곳에 세월이 묵으며 쌓여진 낙엽이 따스한 빛에 열이 나다보니 그곳부터 눈이 녹아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 특공작전(코맨도작전) 기간에 중공군이 무려 21,000여명 손실되고 미군도 4,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기는데 기병사단이 2,900여명이었다고 한다.
고양대 임진강부근전투는 다음의 시차를 이해하고 그림을 그려야 이해가 된다.
'51년 10월에 특공작전으로 미 제1군단이 역곡천변으로 진출한후 '51년 동계작전으로 두매리전초진지에서 국군 제1사단이 전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큰 전투가 없이 휴전협정의 타결을 기다리며 소규모진지전을 거듭 해 온다.
'52년 봄까지 주로 정찰전을 계속 하게 되는데 이때에 주요 전투가 '52.4.1일 사천강부근 전투로 미해병이 국군 제 1사단으로부터 인수후 벌인 전투였다.
그후 미 제3사단 우익으로 들어온 미 제45사단이 카운터작전을 실시하여 역곡천변의 주요 감제고지를 확보하게 된다.
7월 중순부터는 미 제45사단 지역으로 미 제2사단이 들어오면서 고지 쟁탈전이 격화 된다. 이때 주요전투가 미해병의 벙커고지전투와 국군 제1해병연대의 사천강전투, 미 제2사단의 불모고지 부근 전투, 국군 제1사단의고양대 임진강 부근 전투다.
국군 제1사단은 불모고지 전투가 소강상태로 들어가던 '52.10.1일에 군단 예비에서 군단 중앙의 미 제3사단지역을 인수하여 좌로는 영연방 제1사단, 우로는 미 제2사단과 병행하여 임진강 동서안, 역곡천 남안을 연하여 주저항선을 방어하였다.
특공작전시 진출선인 제임스 타운선상의 임진강 서안 신촌-동안264고지-고작동-역곡천 남안 음지촌-양지촌을 연하여 주진지를 확보하고 그ㅡ일대 텟시(150), 닉키(130), 소노리고지(110),베티고지등을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116사단은 주로 장개석군대의 투항병으로 구성된 인원들로 전투 경험이 풍부하였으며 산악전투에도 능한 인원들이었다.
이들이 드디어 '52.10.6일에 전 전초진지에 대해서 공격을 감행하여 왔다.
전 전초들은 동굴형 진지로 토치카가 구축되어 있었으며 중공군들은 아군의 철수로를 차단하고 진내로 진입하려 하고 아군은 최후저지 사격과 포병화력 그리고 비행기 폭격가지 실시 했으나 결국 피탈이 되고 사단 수색중대와 예비로 있던 11연대 3대대를 15연대 지역으로 다시 15연대로 전초기지를 탈환하려 하였으나 텟시-닉키고지는 탈환하지 못했다.
결국 11월에 접어들어 사단은 베티고지-소노리고지선으로 전투전초를 운용하게 되는데 중공군도 부대교대를 하며 다시 12월11일 공격을 개시하여 결국 대소노리고지 북쪽에 있는 대노리고지는 피탈되고 소노리고지와 베티고지만 사수하게 된다.
나는 베티고지 와 버블고지, 소노리고지를 탐사하려 DMZ안으로 들어가 접근하여 했으나 베티고지는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며 돌아왔고 버블고지는 임진강을 따라 들어가 바로 그 차안상에서 바라보았다. 물론 태풍전망대에 가면 육안 관찰은 다 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 우리 수중에는 아무것도 위치하지 않고 있으며 다 북한징역이다. 다만 비무장지대내에 들어와 있어 나무 한그루 없는 불모지 땅에서 그 진한 피 냄새를 맞으며 우리 용사님들의 영혼을 흠향하는 묵념만을 올려야 했다.
이곳 전투에서 숨져간 인원이 '52.106~12.13일까지 전사 238명, 실종 66명, 유해 미수집 인원이 67명이었다.
이와같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진출하기 위한 캔사스선 진출 작전과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와이오밍작전을 통하여 사실상 '51.6월초 문산 -영평천-포천선에서 3번도로와 경원선이 지나는 연천-철원-김화에 이르는 선으로의 진출은 '51년10월의 특공작전과 그 이듬해 6월에 실시된 카운터작전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보면 된다.
3번도로 북방의 서부지역의 주요 전투지역은 대부분 망라하여 알아 보았다.
3번도로 밑의 망라하지 못한 지역의 탐사및 탐문결과는 중공군의 2월공세와 4월공세, 그리고 5월공세에 이는 재반격 작전을 논하면서 빠진 주요고지군은 기술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