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팔아먹기 장사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예전에 일본 축구와 비교하며 애국심으로 포장된 언론 보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칼럼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일본 축구를 깎아내리면서 자극적으로 클릭수 장사를 하는 행태는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창피한 건 우리가 일본 축구에 보내던 조롱이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모양이다. 최근 박주영과 김인성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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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모토는 아스널에 입단했지만 정규리그에 단 한 차례도 출전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를 ‘유니폼 판매원’이라고 조롱했다. (사진=아스널 공식 홈페이지)
우리의 눈엔 티셔츠 판매원인 이나모토
일본 축구선수 이나모토 준이치는 2001년 아스널에 입단했었다. 동양인 최초 아스널 입단이었다. 하지만 일본 축구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이나모토는 아스널 유니폼을 입고 정규리그 경기에는 단 1분도 나서지 못한 채 팀을 떠났다. 그러자 여기에 한국 언론은 조롱에 가까운 표현을 썼다. 네티즌 반응이라는 명목으로 ‘유니폼 판매원’이라고 비웃거나 ‘아스널의 새 경기장은 이나모토가 지어줬다’고 했다.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마케팅용 선수라는 의미였다. 한국 언론은 벤치에 앉은 이나모토의 모습을 보면 깔깔대고 웃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뒤에는 이나모토를 조롱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네티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아스널 일부 팬들이 이나모토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티셔츠, 꺼져”라고 소리쳤다는 사실을 끄집어 내면서 비아냥을 일삼았다. 수만 명이 들어 찬 경기장에서는 당연히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법인데 유독 몇몇 관중이 이나모토를 비난하는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이게 대세인 것처럼 조롱했다. 이나모토가 영국 언론과 서포터스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놀림감이었다. 여기에는 삐둘어진 애국심을 가진 네티즌과 자극적인 언론의 환상적인 호흡이 있었다. 이나모토가 영국 현지에서 조롱받는다는 사실만 우리의 귀에 들어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이나모토가 당장 아스널에서 주전으로 뛸 실력이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아스널은 티에리 앙리를 비롯해 은완코 카누, 데니스 베르캄프. 프레드릭 융베리, 로베르 피레, 파트릭 비에라 등 최강의 선수들로 구성된 강팀이었다. 아스널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경기력을 자랑하던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 다 무시하고 이나모토가 벤치에 앉아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보란듯이 이나모토와 일본 축구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누가 보면 이나모토가 무슨 축구선수로의 자질도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이나모토는 아스널에서 실패한 뒤 풀럼과 웨스트브롬위치, 카티프시티, 갈라타사라이, 프랑크푸르트, 스타드렌 등 유럽의 훌륭한 팀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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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은 아스널에 입단한 뒤 주전 경쟁에서 밀려 벤치를 지키고 있다. 10년 전 이나모토가 그리 다른 상황이 아니다. (사진=연합뉴스)
박주영 외면한 벵거, 3류 감독?
10년이 지나고 이제는 박주영이 똑같은 신세가 됐다. 박주영은 많은 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아스널에 진출했지만 좀처럼 벤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 몇 경기에 나서지 못할 때는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아르센 벵거 감독은 시간이 흐르고 팀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박주영을 기용하지 않고 있다. 이나모토가 아스널 소속으로 정규리그 경기에 단 한 번도 나서지 못했는데 박주영이 정규리그에 교체로 한 차례 나섰다고 해도 이게 박주영이 이나모토보다 낫다는 증거가 될 수도 없다. 2012년의 박주영과 10년 전 이나모토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거기서 거기다.
당연히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속 보인다. 10년 전 이나모토를 실컷 비웃던 네티즌들은 이제 벵거 감독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왜 박주영을 기용하지 않느냐”고 한다. 만약 일본 선수가 현재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이나모토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 축구를 망신시킨 선수라면서 조롱했을 것이 뻔하다. 박주영이 릴 이적을 앞두고 행선지를 갑자기 아스널로 틀어 벤치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아무도 입밖에 내지 않고 있다. 네티즌들에게는 금기시되는 발언이다. 이나모토를 무지막지하게 비웃던 우리는 똑같은 상황에서 한없이 박주영을 감싼다.
팬들의 반응은 그렇다 치자. 보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좋지만 한국 선수 사랑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언론도 네티즌 수준과 다를 게 없다는 건 큰 문제다. 우리 언론에 따르면 벵거 감독은 용병술도 없는 고집불통 영감일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벵거’,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벵거’, ‘1월 거짓말, 벵거는 박주영을 어떻게 속였나’ 등 언론 보도 제목만 보면 벵거는 무슨 저질 3류 감독으로 묘사돼 있다. 10년 전 주전 경쟁에서 실패했던 이나모토를 조롱하던 언론이 똑같은 팀에서 똑같은 상황에 처한 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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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에 따르면 벵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최소한의 배려도 없고 거짓말을 일삼는 3류 감독일 뿐이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선수 조롱하는 게 애국심은 아니다
만약 벵거 감독이 불합리하게 박주영을 대하고 있다면 여기에 일침을 가하는 보도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런 논리도 없는 상황에서 박주영을 기용하지 않는 감독을 비난하며 자극적으로 이를 묘사하는 건 ‘이나모토 조롱 시즌2’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이나 팔아먹는 치졸한 장사 수법일 뿐이다. 그가 릴에 가지 않고 아스널을 선택하면서 시작된 불행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아쉬워하는 보도는 별로 본 적이 없다. 10년 전에는 감독한테 무시당한 이나모토가 멍청한 놈이었고 10년 후에는 선수의 가치를 무시하는 그 감독이 나쁜 놈이 됐다. 아주 우리 언론 수준 한 번 훌륭하다.
아마 10년 전 이나모토가 당시 언론 표현을 빌려 유니폼이나 팔고 벤치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을 때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꿈을 위해 아스널에 도전한 동양인을 실컷 조롱한 우리 언론은 결국 10년 뒤 똑같은 현상에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차마 박주영까지 이나모토처럼 조롱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나보다. 주관이란 게 애당초 없었으니 박주영이 아스널에서 주전경쟁에 밀려 고생하고 있어도 일본 선수가 다른 클럽에서 똑같은 상황을 겪으면 자극적으로 조롱하며 클릭수 팔아먹을 게 뻔하다.
개인적으로 박주영이 아스널에서 잘 됐으면 한다. 10년 전 이나모토처럼 박주영을 조롱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신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분석을 내놓을 자신이 없다면 남을 깎아내리면서 애국심 팔아먹지 말라는 이야기다. 네티즌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 선수 비웃고 놀린다고 해서 우리 축구 수준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특정 일본 선수가 유럽에서 벤치만 지킨다고 해 그게 우리 축구 수준이 더 높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그냥 우리는 10년 전 이나모토가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게 배 아팠고 그가 아스널에서 실패해서 고소해 한 것 아닌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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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는 숨만 쉬어도 한국에서 까인다. 그는 한국 언론과 네티즌들에게 언제나 ‘조롱 1순위’다. (사진=연합뉴스)
‘조롱 1순위’ 혼다, 그리고 팀동료 김인성
더 흥미로운 건 김인성이 최근 우리가 그토록 개그 소재로 써먹던 일본 선수 혼다 케이스케의 팀 동료가 됐다는 점이다. 혼다는 언제나 우리 언론과 네티즌들의 조롱 1순위였다. 유럽의 변변치 않는 팀에서 뛰면서 이적을 위해 유럽 일주를 하고 있는 답 없는 축구선수가 바로 혼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이적설 종결자, 이적설 세계일주, 이적설로만 지구 한바퀴 등 그에 대한 수식어는 다 이렇게 자극적이고 조롱이 섞여 있다. 우리 언론은 돌려 말했고 네티즌들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네 주제에 무슨 빅리그냐. 그냥 러시아에 뼈를 묻어라.” 언론이 조롱성 보도라는 크로스를 올리면 네티즌들은 솟구쳐 올라 비웃음이라는 헤딩 슈팅을 날렸다.
그런데 내셔널리그 강릉시청 출신 김인성이 최근 혼다가 소속된 러시아 CSKA모스크바로 이적했다. 졸지에 이 팀은 유럽 빅리그 소속은 아니지만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의 명문으로 급성장(?)했다. 이거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닌가. 혼다가 뛸 때는 그저 그런 팀이었고 혼다라는 선수 자체도 기량 미달이었지만 한국 선수가 입단하니 모든 반응이 달라졌다. 물론 일본 대표 출신 혼다와 주목받지 못한 내셔널리그 출신 김인성을 똑같이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객관적으로 봐도 김인성의 스토리가 훨씬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두 선수는 이제 똑같은 신분이 됐다. 이래도 앞으로 혼다를 조롱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혼다는 우리가 비웃을 만큼 그렇게 하찮은 선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평발이라는 단점으로 유소년 팀에서 외면받던 그는 네덜란드 리그 VVV벤로에 입단해서는 팀이 강등됐지만 이적하지 않고 남아 다시 VVV벤로를 1부리그로 승격시키는 의리와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지성을 가장 존경하는 그는 지난 한일전에서 일본이 3-0으로 한국을 크게 이긴 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해 대승에 도취된 일본 팬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는 이유로 비난 받기도 했다. 김인성이야 혼다를 능가하는 감동 스토리가 있지만 혼다 자체로만 놓고 봐도 그는 분명히 멋진 선수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선수가 부진하면 그것만 놓고 비판하면 된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조롱을 받아야 할 선수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조기축구회에서 공 차는 배 나온 아저씨의 헛발질도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 선수 비웃으면 우리 수준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일부 네티즌과 이들의 입맛에 맞춰 자극적인 조롱성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은 지금 한국 축구에 먹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브라질이 아르헨티나 축구 조롱하는 것 봤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내 키가 167cm라고 166cm인 친구 놀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래봤자 185cm인 다른 친구는 이 모습을 보면 웃음만 나온다.
이런 애국심 장사는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자. 우리는 10년 전 이나모토를 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그런데 이제 박주영은 당시 이나모토와 크게 다르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다. 하찮은(?) 러시아리그에서 뛰며 빅리그 입단을 타진하고 있는 혼다는 언제나 우리의 조롱거리였다. 그런데 이제 김인성은 혼다와 한 팀에서 뛰게 됐다. 박주영과 이나모토, 김인성과 혼다는 전혀 다르지 않다. 이나모토와 혼다를 조롱하는 게 애국은 아니다. 그럴 시간에 한국 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footballavenue@nate.com
http://sports.news.nate.com/view/20120206n03522?mid=s1000
좋은글인것 같아 퍼옵니다.
첫댓글 그렇네요.. 박주영은 제발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제발..
제발 이런글을 다른 사이트에 올리고 하면서 네티즌들과 기자분들(?) 생각을 좀더 객관적으로 할필요가있다... 라는걸 보여ㅜ줫으면
그래도 박주영은 많이 나왔는데 칼링에서라도 또 최근에 EPL 데뷔도 했고;;
이런 분은 다른 기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