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0: 24. 분히 여기거늘 - 마 20: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마 20: 24. 분히 여기거늘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
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그런 유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1] 열 제자가 듣고,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간청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기록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들 두 형제의 어머니가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간청한 이 사건을 말한다.
2]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왜 분히 여기는가? 그것은 그들 속에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동일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10제자가 두 제자에게 심히 분노했다.
이 모습이 바로 성령 받기 전의 제자의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령 충만한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성령이 충만하면 먼저 마음이 넉넉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살면 '누가 크냐?'고 다투게 되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나보다 남이 앞서도 괜찮다.
때로 남이 큰 실수를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넉넉하게 대한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면 밝은 얼굴이 되고,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되고 지나친 염려와 근심이 없고 한(恨)에 맺혀 사는 것도 없다.
어린아이들은 매를 맞아도 다음날에는 환하게 웃고 논다.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때리면서도 아이들은 때린 후에는 스스로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우울하게 되지만 정작 맞은 어린아이들은 하루만 지나면 잊어버린다. 어른이 맞았다면 한이 맺혀서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금세 잊어버린다.
어린아이들은 어제 싸우고도 오늘 친구가 된다. 어른들은 싸우면 가슴에 맺히지만 어린 아이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다시 친해진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성령 충만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이유나 변명을 하든지 원한 맺힌 감정을 품고 사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다. 아무리 대단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 같아도 마음속의 한과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 충만 및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충만한 것이지 결코 성령 충만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가슴에 맺힌 것, 섭섭한 것을 다 버리고 '그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십자가였다. 그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 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넉넉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본문의 야고보와 요한만 주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탐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분노한 열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든지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하고 또 많은 재산, 명예, 존귀해지기를 원한다.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다.
* 고전 3: 3 -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마 20: 25. 이방인의 집권자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적 행위이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는 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런 유의 권세를 부정하신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1]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충고하시는 모습은 다양하다.
특히 본문은 제자들을 불러드려 그들에게 충고하는 모습이다.
2]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집권자들'은 통치자들, '고관'은 고위 관리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남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인지 모르겠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보시고 너무나 딱하셨다. 그래서 세상 권력에 대한 것을 말씀했다. 세상 집권자들은 그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강제로 주관한다.
여기서 고관이란 권력을 쥔 자로써 권세를 부리면서 사람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한다. 이것은 세상의 권력의 교만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이런 권력을 너희가 탐내지 말고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높은 보좌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마 20: 26. 크고자 하는 자는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이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1]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성도의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높은 지위, 즉 남을 지배하는 위치가 없다. 주께서는 그런 류의 권위와 권세를 다 부정하신다. 그러므로 고위 성직자 개념은 비성경적이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하다. 모든 성도는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2]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교회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마 20: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불의와 거짓과 교만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려 한다면, 그런 곳에는 아무 싸움이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
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천국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높은 직분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자이다. 이렇게 한다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다 서로 높아지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서로 낮아지려 하고 서로 섬기려 하는 곳에 무슨 싸움과 갈등이 일어나겠는가?
2]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를 앞세워 주의 나라에서 제자들을 막중한 자리에 앉혀 주기를 소청했을 때 나머지 열 제자들은 매우 크게 반발을 하고 나섰다.
예수님께서는 험악해진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매우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제자들을 다시금 훈계하셨다.
(1) 다른 열 제자들은 두 제자에 대하여 분노하였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열 제자들에게도 야고보와 요한이 가졌던 것과 같은 욕심이 있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만이 주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앉기를 간구한 데 대하여 다른 열 제자들이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도 이러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만이 특별히 욕심이 많았던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욕심은 열두 제자 모두에게 있었으며, 단지 야고보와 요한은 그 대표자로서 나선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욕심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참된 성도라면 결코 자기만이 남보다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② 우리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하나 얻는 교훈은 우리는 남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떠한 죄인이라도 결코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찌기 마음 속에 품은 죄나 행동으로 드러난 죄가 차이가 없이 동일함을 지적하셨다. 그리하여 행동으로 드러난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정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 3)고 질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눌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함으로써 남을 쉽게 정죄치 않는 진실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다툼에 중재자로 나서게 되었다.
① 예수님께서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즉각 제자들을 부르셨다.
일찌기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하는 자라고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잘못된 욕심으로 인해서 알력이 생기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그들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곧 그들을 부르셨다.
* 마 5: 9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같은 예수님의 행위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의 분쟁이나 갈등은 오래 끌 필요가 없는 무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논쟁이나 불화를 중재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② 예수님께서는 훈계하심으로써 제자들 사이를 화목케 하셨다.
화목하게 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열두 제자의 스승이요 구주이셨지만 결코 그들의 죄를 정죄하여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부드럽고 온화하며 설득력있게 훈계하심으로써 제자들 사이를 화목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 사이를 중재할 때 비록 그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윽박지르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겠다.
오히려 예수님과 같이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설득력있게 권면함으로써 효과적인 중재를 하여야 하겠다.
(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쳐 주셨다.
① 이방인 집권자들은 권력을 임의대로 사용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자들 뿐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권력은 누리는 것이요 그것은 개인의 유익을 위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권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러므로 권력자일수록 그에게 그것을 담당시킨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집권자는 이러한 진정한 권력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함부로 권력을 행사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적 집권자의 예를 들어 높고자 하는 제자들을 훈계하셨다.
② 성도들은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셨다.
그리고 우리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의 자세는 그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며 섬기기를 즐겨하는 그리스도의 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