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영어 못한다. 그래도 미국 사람들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다.
내가 영어를 못해 불편한 적은 많지만 그렇다고 사는데 큰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영어를 못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다.
누군가가 만일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내게 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잘못되었음을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등하게 대우해달라고 부탁한다.
영어를 못한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니까.
문제는 내 자식들이 어렸을 적에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아빠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면서 놀릴 때마다 슬퍼진다는 것이다.
1993년 3월 3일 미국에 아주 살러 왔다. 17년 간의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아이 둘이 유학하고 있는 미국으로 온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와 있던 아버지는 한국과 미국을 왔다갔다 하고 내가 전적으로 중학교 다니는 딸과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살게 되었다. 한국에서 집 팔고 갖고 온 돈으로 오자마자 집을 샀다. 그리고 가드닝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일본인이 하던 비즈니스를 인수 받으며 일꾼들도 인수 받았다. 히스페닉계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가드닝 비즈니스는 한 마디로 남의 집 정원의 잔디나 나무 등을 관리해주고 다달이 돈을 받는 사업이다.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이기에 일꾼들을 매일 아침 일하는 차를 맡겨 두는 차고에서 만나 조회를 하고 집에 와서 밥먹고 놀며 지냈다. 가끔 손님들의 요청이나 부탁 등이 있으면 그 사항들을 처리하고 돈을 청구할 일이면 돈을 청구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낮시간이 무료했다. 그래서 비디오 가계를 하나 샀다.
아침에 가드닝 일꾼 들을 한 번씩 안아 주고 전날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일 내보낸다.
집에 와서 밥먹고 10시쯤 비디오 가계 문 열면 되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비디오 가계에 있으니까 답답했다.
그래서 비디오 가계에 일할 직원을 구하고 학원을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Anaheim시와 Gardena시,
두 곳에서 아내와 함께 학원을 했다. 물론 학원 선생님들도 구했다.
그러니까 하루 일과가 이렇다.
아침 7시 차고에서 Huntington Beach시에 있는 차고에서 가드닝 일꾼들과 조회
집에 돌아와 아침 먹고 잠시 쉬다가
오전 10시 Orange시에 있는 비데오 가게에서 문열고 잠시 일하다가
오후 1시 직원이 오면 집으로
오후 3시 Anaheim 학원 오픈
오후 3시 Gardena 학원 오픈
오후 9시 비데오 가게 문 닫고 집으로
그러다가 제일 먼저 가드닝 비즈니스를 팔았다.
그리고 학원 하나는 문닫고 하나는 팔았다.
비데오 가게를 하다가 비데오 도매상도 샀다.
그리고 1999년 비데오 가게와 도매상을 다 팔고 커다란 비즈니스를 하기로 마음먹고
사업체를 찾아 다니며 5~6개월을 허비했다.
그러다가 라디오 코리아에서 아나운서를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다.
대학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기에 응시했다.
노느니 일하면서 사업체를 찾겠다는 생각에
마이크 앞에서 실기 테스트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장희 사장 인터뷰하는데
내 이력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던 이장희 씨가 방송 광고 영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나운서 봉급이 얼마 안 되는데 광고 영업은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성큼 먹이를 물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2. 영어 못해서 불편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 자신은 그 불편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드닝 비즈니스를 한 1년 반 정도 했는데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 우리 일하는 자동차를 뒷차가 받는 사고가 있었다.
보험에 들어 있었기에 보험회사에 연락했고
보험회사 직원이 만나자고 했다. 보험회사 직원은 자동차의 파손이 어느 정도 심하고
기타 장비들이 손상이 없는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파손이 있었던 몇 가지 장비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큰 문제가 없다고 했으나 자꾸 더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미국인 나이 지긋한 여성 분이었는데 내가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뭔가 내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때 그분께 영어로 멋기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그 멋진 말을 하지 못한게 한이 된다.
그냥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두 번째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손님 중의 한 분이 내게 직접 전화를 했다. 일본인 여성이었다.
우리 일꾼이 자기집 정원에다가 꼭 X을 싸고 간다는 거다.
정원 나무들 뒷편에 사람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이 있어서 우리 일꾼들이
일할 때, 커텐 뒤에서 몰래 봤다는 것이다.
얼른 와서 X을 치고 다음 주부터 자기 집 일을 그만 두라고 했다.
부지런히 달려갔다. 푸짐하게 퍼질러 놓은 X을 말끔히 처리하고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겠다고 싹싹 빌었다. 그러나 그 여성분은
강경했다. 그래서 그 남편의 일터(자동차 정비소)로 찾아갔다. 어떻게 그사람이
일하는 곳을 알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 여성의
남편을 찾아가 사나이대 사나이로 얘기했다. 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으냐?
넌 한 번도 밖에서 실례한 적 없냐? 내가 한국에서 선생을 했는데 교실에다가 싸는 놈도 있었다.
싹싹 빌었더니 다음부터 그 친구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계속 내게 일을 맡기겠다고.
알겠다고 하고 우리 일꾼 알레한드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음주부터는 그집에 갈 때 선글라스 꼭 끼고
모자도 푹 눌러 쓰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도 그집 주인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로 그쳐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보다 더 멋지게
감사를 표현하지 못해 아쉽다. 그가 가끔 생각난다. 나이 지긋한 점잖은 분이었는데....
마지막 하나 더,
우리 손님 가운데 해병대 기와 성조기를 일년 열두달 낮밤 구별하지 않고
게양대에 매달아 놓고 사는 해병대 출신 할아버지가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수금하러 가면-대부분의 손님들이 수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데 이렇게 집에서 받아 가라는 분들도 있었다- 나를 붙잡고 쉬지 않고 얘기한다. 행여 내가 빨리 갈까봐 얘기를 그치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부터 한국전을 거쳐 월남전까지 전쟁 얘기를 비롯해 당신이 참전했던 전쟁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에 관해 얘기한다. 우리 아버지도 한국 해병대 출신이라고 하자 더 신이나서
얘기를 한다. 만날 때마다 똑 같다.
대충 알아 들으면서 모두 알아듣는다는 듯이 표정을 짓고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그분께 미안하다.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다.
영어 정말 잘 못한다.
첫댓글 시의원까지 하신분이 너무 겸손 지나치세요.
ㅎㅎ 비슷한 경험 저도 많습니다.
지금도 매년 새해 레죨루션에는 좀 더 고급 영어향상…계획이 꼭 들어 갑니다. 물론 늘 용두사미…지요.
시의원이라니요. 시의원이 아니라 플래닝 커미셔너 했지요.
그때 영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동네 로타리 클럽도 탈퇴하고
시에서의 활동을 다 접었습니다. ㅎㅎㅎㅎ.
엉터리 영어의 결말을 본 거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는 배짱 하나로 버티지 않았나 싶네요.
우리 애들이 냉정하게 얘기합니다. 아니 놀립니다.
아빠, 영어 잘 하는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엉터리였다며
그래도 그렇게 뻔뻔하게 얘기 할 수 있었냐며 놀립니다.
저는 이대로 살다가 가렵니다. ㅎㅎㅎㅎ
영어는 아무리 좀 한다고해도 더 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목마름으로 남아있는것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처음 미국에 왔을때 워낙 팝송을 즐겨듣고 좋아했던터라 영어가 겁이나질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지 49년 지금 다시 점검해보니 나 자신 영어 실력이 별로라는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지금의 영어 실력은 내가 한국에서 처음 왔을때와 한치의 발전이 없다는걸 느끼고있습니다. 그 당시에 써놓은 영어문장을 보면서 흠 지금은 이것보다 더 나아지지않았네 하는걸 느낍니다. 그때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클레스를 몇번 들었는데 그때 쓴 영어를 보면서 내가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문장을 쓸수없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기도했습니다. 영어는 대화보다는 글 쓰는것에 많은 욕심이 있었는데 본격적인 English literature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현상이겠지요.
예, 정말 무모했습니다. 미국와서 일년 지나서 한의과 대학에 들어갔지요.
영어반으로. 한글 반은 낮에 하기 때문에 일하는 저로서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저녁에 공부하기 위해 영어반으로 들어갔는데
강사 내지는 교수들이 중국인, 한국인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는 영어 강의를 듣다보니
점점 더 어려워졌고,
한의과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한의사 라이센스 딴 후에도 먼저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더라고요.
1년 반 허송세월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함께 공부 시작한 우리 동기 8명 중에 한의사가 된 사람은 두 사람이며
그 중에 한 명은 한의 개업했다가 다시 자기가 하던 부동산으로 돌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치과에서 의사를 돕는 치과 간호사 일을 했는데 치과일 하면서 파트 타임으로 한의사 일을 하다가
지금은 한의원을 개업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어 얘기하다가 딴 데로 흘렀네요.
저는 이대로 살다 갈 생각입니다. 물론 고3 담임 선생님 말씀대로 죽을 때까지 공부한다는 자세로 살고는 있습니다.
언젠가 스몰비즈 하는 한인들이 자기 비즈에 관한 영어만 조금하고 나머진 눈치밥이라고요..
영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넘사벽 입니당...ㅎ
멋진 성님의 영어발음을 하루빨리 듣고잡네요..
ㅎㅎㅎㅎㅎ. 기절하실 겁니다. 사투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