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의 가을
Dreaming (꿈)/Ernesto Cortazar & photo by 모모수계
창덕궁(昌德宮)의 가을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습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다가, 후일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입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궐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는 백성을 가르쳐 감화 시킨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돈화"는 백성을 가르쳐 감화 시킨다는 뜻이라고...
진선문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은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연산군 2년(1496) 궁내의 숭문당(崇文堂) 건물이 소실되어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었다. 원래 용마루가 없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이건하여 다시 세우면서 용마루를 새로 얹었다.
희정당은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한국 건축에 없던
밖으로 돌출한 현관이 부가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현관은 순종의 자동차 진입을 위해 첨부한 서양식 시설이다.
인정전 - 창덕궁의 정전
인정문(仁政門, 보물 제813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다.
입구가 세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가운데는 왕이 드나드는 어문(御門),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인정전 앞에 있는 넓은 마당은 조정(朝廷)이라고 한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모여 조회(朝會)를 하거나, 각종 국가 중요행사를 치렀다.
가운데 어도(御道) 양쪽으로 품계석들이 늘어 서 있고, 관원들은 관직에 따라 그 앞에 위치하게 된다.
景福宮의 勤政殿, 昌德宮의 仁政殿 등 대궐 안 正殿 앞뜰에 정1품을 선두로 해서
東班:文官은 동쪽, 西班:武官은 서쪽 자리에 두 줄로 종9품까지 차례로 세워두었다.
동반과 서반을 합하여 양반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대되는 말은 상놈. 흔히 쌍놈이라고 불렀다.
앞 쪽의 넓적한 '드므'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고 뒤에 있는'부간주'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대조전
왕비처소인 大造殿...
경복궁의 교태전과 같이 왕자를 많이 생산하기 원하는 의미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왕의 씨를 많이 받기위해 후궁도 여럿 두었습니다. 왕들이 일찍 죽는 원인이 되지요.
용마루가 없이 曲瓦로 마감한 무량각 지붕...
氣를 차단하는 용마루대신 氣를 환원시킬 수 있는 둥근 곡와로 지붕마감을 했을것이라는 설...
화계
후원쪽은 3~4단의 장석으로 설치된 화계...
철마다 꽃이 피어나게 하는 작은 화단이고...
화계를 조성한 것은 왕비의 무료함을 딜래주기 위한 목적도 있고...
풍수지리적인 의미에서 백두대간의 정기를 왕비의 침전으로 끌어모으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언덕 또는 산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함...
승화루
승화루(承華樓)는 세자 전용 도서실이었던 건물로서 당시엔 소주합루(小宙合樓)라고 했다.
삼삼와
보춘정
낙선재
낙선재로 들어가는 문인 장락문
樂善齋 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고 합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헌종 13)에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집이다.
그뒤로,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고종황제의 외동딸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옹주,
일본의 왕녀로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했던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
첫댓글
덕혜옹주와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가
머문 낙선재에 들어서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작년 가을에는 낙선재 앞 마당에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귀한 사진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낙선재에 머물렀던 분 들이지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그 곳의 홍시를 드셨다니
흔치않은 행운입니다
감사합니다 기우님
초등학교 5학년 때
창경궁( 그때는 창경원이라 했음)으로 수학여행 왔었답니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
그 후 여러 번 가보았네요~^^
오늘 이렇게 가을 풍경 속의 창경궁을 보니까
올 가을에 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청솔 님!
감사 합니다~~^^
네 창경궁도 꽤 괜찮은 궁궐입니다
일제에 의해 동물원이 되었던 곳
지금은 다시 많이 복원되었습니다
가보시면 옛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두용님!
글과사진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