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Ivan Petrovich Pavlov]
(1849.9.26. ~ 1936.2.27.)
1890.4.24 러시아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 생리학 교수로 임명되다
연구원들이 실험용 개의 볼에 있는 타액선에 캡슐을 부착한다. 개의 타액 분비량을 측정하기 위해서이다. 연구원들은 그 개를 방음장치가 완비된 실험실로 데리고 온다. 개가 방음된 실험실에 익숙해질 때쯤 연구원들은 그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구속 장치를 채워 놓는다. 개는 매우 갑갑해하며 요동을 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소동을 부리지 않고 조용히 있게 된다.
파블로프는 이 유명한 실험 이후 '조건반사'라는 말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실험이 시작된다. 개 앞에 놓여 있는 그릇에는 고기 가루가 원격 조정에 의해 전달된다. 이때 개의 타액 분비는 자동적으로 기록된다. 연구원들은 유리창을 통해서 개를 볼 수 있지만 개는 그들을 볼 수 없다. 개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외부의 시각과 소음과 그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실험실에 홀로 있는 것이다. 이제 연구원이 개 앞에 있는 창문에 전등을 켠다. 개는 약간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침을 흘리지는 않는다. 몇 초 후에, 개의 그릇에 이 장치를 통해 고기 가루가 전달되고 전등은 꺼진다. 개는 배가 고프다. 기록 장치는 개가 침을 많이 흘리고 있음을 기록한다. 이 타액 분비에는 아무런 학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배고픈 개가 고기 가루를 보고 침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 이제 다음 절차의 실험이 계속된다. 이번에는 전등은 켜지지만 개의 앞에 놓인 그릇에 고기 가루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개는 침을 흘린다. 단지 전등의 불빛이 켜졌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 개는 음식에 불빛을 연합시키는 학습을 한 것이다. 불빛만 보고서도 그것과 고기 가루를 연결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는 불빛만을 보고도 침을 흘린다.
파블로프(가운데)와 그의 연구원들이 '조건반사 실험'에 사용된 개와 함께 있다.
이것이 파블로프의 그 유명한 조건반사 실험이다. 이 실험 이후 파블로프는 ‘조건반사(conditioned reflex)’라는 말을 세상에 내놓는다. 오늘날 그 단어를 수록하지 않고서는 어떤 심리학 개론서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리고 이 ‘조건반사’라는 말과 더불어 그는 우리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심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 그는 무의식을 탐구했던 프로이트 만큼은 유명하지 않지만 “내게 열 명의 어린아이를 맡긴다면 그 아이들을 거지든, 불량배든, 의사든, 변호사든 어떤 사람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뻐기던 행동주의의 대가 웟슨보다는 유명하다. 실제로 파블로프는 심리학자이기보다는 생리학자인데도 말이다.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행동의 최소 단위'를 찾아라
심리학(psychology)은 ‘마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라는 말과, ‘연구한다’는 의미를 지닌 로고스(logos)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해석하면 심리학은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 이란 뜻이다. 심리학은 역사가 짧다. 학문의 본격적인 역사는 고작 130여 년에 불과하다. 독일의 심리학자 빌헤름 분트가 라이프치히 대학에 최초의 실험실을 개설한 것이 1879년의 일이다. 130년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다는 철학의 역사에 비한다면 얼마나 짧은 시간인가. 철학은 제왕의 학문이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학문들이 철학에서 갈라져 나왔다. 정치학과 사회학이, 물리학과 천문학 등 같은 어머니를 둔 이 모든 학문들이 이제는 독립해서 제 각각의 영역을 꿰차고 있다. 심리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스스로 과학의 독립된 한 분야로 인식되고 있다. 빌헬름 분트의 실험실에서 발간되던 연구 논문집의 처음 이름은 <철학연구>였다. 그러나 그 후 <심리학 연구>로 바뀐다.
개의 소화 작용에 관한 실험 과정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백여 년 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과 신체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여겼다. 마음은 영혼의 표현으로 여겨졌고, 영혼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물질적인 신체의 일부분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 이러한 생각의 선봉에는 17세기의 데카르트가 있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였다. 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 그때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시절에 심리학자들은 그 자신의 연구 영역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심리학을 ‘마음’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신체에 대해 독립적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방법론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물리적인 영역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것(마음)에 대해 어떻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어려움은 초창기 심리학자들을 당혹시켰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내성(內省)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자기들 마음의 상태를 스스로 기록했다. 자신들의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을 분석해 내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한 사람의 관찰로만 보고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한 사람은 바로 관찰자 자신이었다.
이러한 정신주의적 심리학에 대한 불만은 20세기 초입에 결국 행동주의라는 커다란 흐름을 낳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윗슨은 심리학이 과학으로 자리잡으려면 운동이나 말과 같은 관찰 가능한 행동에 집중해야 하며 의식과 생각 따위의 정신적 현상에 관한 연구는 그 현상들이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은 공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웟슨은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이 조건형성의 결과이며 환경이 특수한 습관을 강화시킴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조건 형성된 반응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행동의 최소 단위로 분할되었다. 복잡한 행동은 분할된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여겨졌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그 작은 단위를 ‘행동의 원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것들을 마치 물리학자나 화학자들이 원자를 다루듯 연구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처음에는 영혼을 그리고 차례로 마음과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는 행동만을 잡고 씨름하고 있다.”는 철학자들의 조소 섞인 말처럼 심리학은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에서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연구로 그리고 이제는 인간의 행동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겨 왔다. 1920~30년대 이후 많은 심리학자들, 특히 미국의 심리학자들에 의해 행동주의는 크게 확장되었다. 바로 그 행동주의의 처음에 웟슨이 있었고, 그보다 먼저 러시아의 파블로프가 있었다.
끼니 거르기 일쑤였던 가난 때문에 아내와 떨어져 살았고, 고학으로 학위 받아
이반 파블로프는 1849년 9월 중앙 러시아 랴잔에서 태어났다. 시골 목사의 맏아들이자 교회지기의 손자였던 그는 열 한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 고전어, 철학을 배웠고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1870년 파블로프는 신학교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전공으로 생리학을, 부전공으로는 화학을 공부했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던 가난 속에서도 파블로프는 저명한 생리학자들의 지식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받아 들였다. 가정교사 일과 조교 수입으로 근근이 대학을 다니던 그는 188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블로프는 1881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친구인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초기에는 가난 때문에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자신이 편안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평생을 헌신한 부인에게 돌렸다.
1890년 4월 24일, 파블로프는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의 생리학 교수가 되어 1924년 사임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새로 설립된 실험의학연구소에서 그 이후 45년 동안 그는 소화선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904년 소화선에 관한 연구로 러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다. 위와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액이 신경계통, 특히 미주신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을 발견한 공로였다.
파블로프의 연구 활동은 세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1874년에서 1888년까지다. 이 시기에 그는 그다지 큰 통증을 유발시키지 않고 실험용 동물을 외과 수술하는 기술을 개발해 나갔다. 그는 순환계, 특히 환경 변화에 따른 혈압의 변화를 연구했다. 이 무렵 그는 심장 박동의 리듬과 강약을 조절하는 심장 신경 얼기에서 나가는 신경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시기는 1888년~1902년이다. 이 시기에는 소화선에 관해 연구했다. 외과적인 실험을 통해 정상적인 동물의 위액 분비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연구 업적은 저서 <소화샘 연구에 대한 강의>에서 정점에 달했다. 마지막 시기(1902~1936)에 파블로프는 조건반사를 통해 뇌 피질의 기능을 해명하는데 전념했다. 정신 현상과 높은 수준의 신경 활동을 객관적, 생리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그는 동물의 물리적인 (또는 심리적인) 활동을 양적으로 측정하는 데 침샘 분비를 이용했고, 조건반사와 척수반사사이의 유사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연구소에서 개를 수술하고 있는 파블로프(가운데)
"거리에서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연구소에는 제 시간에 도착하라"
파블로프는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좌와 우 모두에 반대했다. 1917년에 있었던 러시아 2월 혁명에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침없이 말했다. “볼셰비키가 하는 일들이 러시아에 대한 실험이라면, 나는 그 사회적 실험을 위해 개구리의 뒷다리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비난하곤 했다. 그 시기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소련의 고위층들은 파블로프의 생리학적 접근이 마르크스 유물론을 공고히 하고 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의 연구를 지원하고 그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1924년 파블로프는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성직자들의 자녀들이 의학 아카데미에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나도 성직자의 아들이다. 만일 당신들이 나머지 사람들도 축출한다면 나도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블로프는 자기 자신에 무척이나 엄격하고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밑에서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들에게도 자신의 규율과 엄격한 기대치를 부과했다. 특히 시간 관념이 매우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거리에서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연구소에는 제 시간에 도착하라”고 말하곤 했다. 연구원들은 스탈린 정부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실험실을 ‘침묵의 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은 방음시설이 매우 잘 된 건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곳 실험실에서 근무하는 연구자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파블로프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한 실험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 그는 정신적인 현상 조차도 측정 가능한 생리학적 양으로 전환해 연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과정에서 조건반사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는 심리학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그는 현대 심리학의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더욱이 파블로프와 미국 행동주의의 창설자인 웟슨을 비교하면 파블로프의 자료와 해석이 훨씬 더 우수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웟슨의 저술 가운데 상당 부분이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개념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파블로프는 유능한 생리학자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실험주의자였다. 그는 어디엔가 이렇게 적었다. “실험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는 실험을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힘으로 여겼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이 그의 학문을 추동한 힘이었다. 파블로프의 학문적 열정은 죽음 앞에서도 멈춰 서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신경생리학자 한 사람을 침대 곁으로 불렀다. 그는 자신의 증세를 그 신경생리학자와 함께 검토하였다. 몇 시간 뒤 그는 숨을 거두었다. 1936년 2월 27일이었다.
-장석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