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래 진주 연지사종 환수국민행동 사무총장 | |||||||||
"내 것을 내가 가져오는 건 당연한 거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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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강제병합 100년에 맞춰 총리 명의로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일본이 강탈한 우리 문화재 반환 방침이 정해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진주의 대표 약탈 문화재인 진주 연지사 종의 환수가 이루어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우리나라 3대 종, 임란 대 수탈 조 사무총장은 "시민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이자 많이 받는 질문이다. 이런 의구심은 시민들의 피해의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내 것인데 당연히 가져와야 하고 가져올 수 있다. 빠르냐 느리냐의 문제이고 우리 세대냐 다음 세대냐의 차이만 있을 뿐 분명히 가져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에서 약탈 문화재를 본래의 장소로 돌려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소송도 수백 건이 잇따르고 있다. 그런 면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 사무총장은 "일본 내에서 국보적인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관리 상태로 보면 국보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국보이긴 하지만 개인 소장물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전하면서 국보 지정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제기했다. '과연 진주에 있던 거냐'는 물음에는 "연지사 종이 보관된 일본 조구진자(常宮神社)의 역사를 기록한 '소지'에 '(연지사 종을) 진주에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조선 종의 연구자들과 전문가들도 진주 종이라고 알고 있다. 일본의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가져왔다고 돼 있다"고 대답했다. 조 사무총장은 "2년 전 환수 운동이 시작됐고 이제야 겨우 진용을 갖췄다. 연지사 종 환수 국민행동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내 다섯 개의 지원단체로 확정되면서 지원도 받고 있다. 국민행동의 기본적인 뼈대가 갖춰졌고 참여하려는 시민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며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며 "진용을 갖춘 만큼 앞으로 어떤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느냐가 문제"라고 밝혔다. "현재 여러 가지 연구자료를 통해 연지사 종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앞으로 연지사 종의 약탈 과정과 일본에 소장된 과정, 신국보 지정과 그 근거를 비롯한 일본 내 자료에 대해 정리를 해야 한다. 진주에서는 진주 도심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지사지를 찾는 조사활동에도 착수했다. 이런 것들을 모아 오는 12월에는 학술발표회도 열 계획"이라고 조 사무총장은 밝혔다.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다 종 이야기 듣고 운명처럼 참여 조 사무총장은 환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 구축임을 강조했다. 종을 소유한 측과 원래 주인이 편안하게 소통하는 관계 구축이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구진자를 방문하는 사람 중에는 험한 말을 하면서 일본 측에서 귀찮아하고 있다. 실제로 조구진자 측에서 '창구를 단일화하자'는 제안을 국민행동에 전하고 있을 정도다. 조 사무총장은 진주에서 고교 졸업 후 극단 현장에서 연극을 하다가 서울예대를 거쳐 MBC에서 일했으며 탤런트 최불암 씨와 소극장 운동을 하는 등 서울에서 문화기획자 겸 공연연출가로 활동했다. 조 사무총장이 귀향한 것은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마침 2007년 개천예술제 기획위원장과 60주년 총 감독직 제의가 있어 진주로 돌아왔다. 진주의 이야기를 만들다가 연지사 종에 대한 얘기를 듣고 운명처럼 환수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조 사무국장은 "연지사 종은 진주 문화의 원류이자 정서적인 가치가 대단하다. 우리나라 3대 종의 하나가 현물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반응이 너무 냉랭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아 의무방어전 차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지도자가 나서서 낚아채 앞장서 주면 좋겠다. 나는 영원한 스텝이다. 남 앞에 나서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고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른 것이어서 쑥스럽고 민망하다. 앞으로 서울에서 쌓은 인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삼아 지역에서 문화기획과 공연 연출가의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 밝혔다. 연지사동종이란? 연지사동종은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8년(833년)에 만들어져 진주 연지사에 보관됐으나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수탈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11㎝, 입지름 66㎝인 이 종의 용통(勇筒)은 통일신라시대 고유의 양식인 3단으로 파도무늬 등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아랫부분에 2개의 당좌(撞座)와 2구의 비천상(飛天像)이 배치돼 있다. 이 종은 일본이 1952년 신국보로 지정했으며 현재 후쿠이현 조구진자(常官神社) 보관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