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얻으면 버리지 말라
잠 4:1-9
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7)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잠 4:1-9 / [무엇보다도 먼저 슬기로워야] 얘들아, 이 아비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려가 깊고 분별력이 있으려거든 내 말을 주의하여 들어야 한다. 2) 착하게 사는 길을 이 아비가 너희에게 이르겠다.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3) 이 아비도 네 할아버지한테는 아들이었으며, 또 네 할머니한테는 애지중지하는 어린 외아들이었다. 4) 네 할아버지께서 이 아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야, 내가 이르는 말을 네 마음속에 새겨 두어라. 내가 이리저리 일러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하느니라. 그래야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느니라. 5) 지혜를 얻으려고 애쓰거라.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려고 온 힘을 기울여라. 내가 하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 6) 지혜를 버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지혜가 너를 감싸 주리라. 여인을 사랑할 때 그 여인에게 빠지듯, 그렇게 지혜를 사랑해 보아라. 사람들이 보석을 소중하게 간직하듯 지혜가 너를 애지중지하리라. 7)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 지혜가 아니냐? 지혜를 얻으려고 애써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네가 땀 흘리며 애써 벌어들인 것을 모두 다 팔아 깨달음을 사들여라. 8) 지혜를 매우 소중하게 여겨라. 그러면 지혜도 너를 소중하게 여기리라. 지혜를 고이고이 품속에 간직하여라. 그러면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 지혜는 얼마나 휘황찬란하게 빛나는지! 머리 위에 얹어 놓은 화려한 화관과 같으니라.'
솔로몬은 지혜를 얻으라고 자녀들에게 당부합니다.
지혜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중요성 때문에 솔로몬은 이 같은 당부를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1:8-9; 2:1-6; 3:1-2, 21-26; 6:20-22; 7:1-3; 8:32-36).
주의하라(1-2) / 솔로몬의 당부는 '들으라', '주의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지혜가 중요한 만큼 그 지혜를 받아들일 수용성 또한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그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을 길러주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솔로몬이 아들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고 주의하기를 간곡하게 당부한 이유는 그 지혜가 주는 확실한 유익 때문입니다. '선한 도리'란 사람을 행복으로 이끄는 '유익한 교훈'이란 뜻입니다.
아버지 다윗의 가르침(3-5) / 솔로몬은 아들들의 아버지이기 전에 자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아들들과의 동질감을 형성합니다. 이런 동질감 형성은 최고의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중요성을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다윗은 왕의 업무뿐만 아니라 아들을 훈계하는 아버지의 역할에도 충실하였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가르친 "내 말을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는 교훈은 "순종하라 그리하면..."이라는 신명기의 논리(신 4:1; 5:33; 6:3)와 일치합니다. '얻으며...얻으라'는 동사(히. 카나)는 '돈을 주고 구입한다'는 뜻이며, 이는 지혜가 대가를 지불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순종하고 싶다면 이를 위해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Wiersbe)
지혜가 주는 유익(6-9) / "지혜를 버리지 말라"는 구절은 지혜를 한 번 얻었다가 상실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혜는 계속 간직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여성형 동사를 사용하여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합니다. 솔로몬은 신부를 소중히 대하듯이 지혜를 보호하고 사랑하고(6) 품으라(8)고 당부합니다. 그리하면 그 지혜가 우리에게 보호와 지혜와 영화를 줄 것입니다. '높이라'(히. 칼랄)는 단어에는 경매에서 매매호가를 높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돈, 명예, 쾌락의 가치를 높게 여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적용: 지혜만큼 중요한 것은 그 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입니다. 당신은 지혜의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민감하게 받아들이십니까?
우리는 다음 세대에 믿음이 전수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성경적인 방법을 다시금 찾아야 합니다. 지금도 믿음의 전수가 잘되는 가정을 보면 가정예배를 꾸준히 드리는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보면 자기가 얻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이 얻은 믿음의 중요한 가치, 이것을 말로 전해주고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 설 교 >
그리하면
잠 4:1-9 / 지성래 목사(예수사랑교회)
어느 분야의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그를 낳고 키워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는 아들이요 딸일 뿐이다. 잠언을 쓴 솔로몬도 그런 면을 시인하고 있다. 본문 3절에 보면,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고 하였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고, 그의 어머니는 밧세바가 아닌가. 그렇다. 그 어떤 뛰어난 지도자나 그 어떤 용맹한 장수라도 태어날 때에는 어머니 보기에 한 줌의 핏덩어리와 같은 연약한 생명이요 그 아버지가 보기에도 유약하고 어린 생명일 뿐이다. 그런 어린 생명을 낳아서 젖을 먹이고 사랑을 입혀서 키워낸 것이 아닌가.
뽀빠이 이상용 씨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주 중에 누가 카톡으로 그에 관한 글을 보내 왔기에 읽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뱃속에 넣고 임신 한 채로 충청도에서 열 달간 걸려서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가 아버지를 못 만나고 친정인 부여에 되돌아 간 후에 그를 낳았다. 병 덩어리 그 자체였고 못 먹어서 거품에 싸인 채 죽은 아이처럼 태어났다. 식구들이 그 애기를 소망이 없다고 땅에 묻었다. 평생 걱정거리이고 엄마 시집 못 간다고 묻은 걸 본 이모가 그 아기를 땅에서 캐서 솜이불에 싸 가지고 뒷산으로 도망갔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다. ㅇ이모는 이틀 만에 아기를 찾아서 죽은 것처럼 목숨만 겨우 붙어 있는 아기를 데리고 내려와 6년을 숨겨 키우듯이 키웠다. 여섯 살에야 걸음마를 시작해서 열두 살까지 여덟 가지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열세 살에 우연히 아령을 시작해서 18살 때에 다니던 대전고등학교에서 미스터 대전고로 뽑혔다. 미스터 충남도 되고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와 고려대학교 응원단장도 지냈다. 군대 생활은 ROTC 탱크 장교로 근무하고 나와서 22가지 외판원을 하였다. 28살에 T. V에 나와 뽀빠이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지금 저는 덤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무엇이나 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보냅니다. 세상에 가장 약하게 태어나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되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여러분! 철물점에 가 보면 못이 열 가지 상의 사이즈가 있죠? 다 쓸 데가 있습니다. 사람 사이즈도 다 쓸 데가 있죠. 엉뚱한 데 가서 꼴값들 하니까, 적성에 안 맞으니 불평만 늘고 파업하고 포기하는 거지요! 세상에 불확실한 게 하나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나 확실한 게 하나 있습니다. 꼭 죽는다는 겁니다. 케네디, 오나시스, 마릴린 먼로, 찰리 채플린 다 죽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다 죽을 건가 결정해야 합니다.”
최근에 새벽마다 다시 묵상하는 잠언에 보면 주옥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석류 알처럼 가득하다. 그 중의 일부 인 본문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훈계하고 교훈하는 형식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본문 4절과 8절에서 말씀하는 ‘그리하면’이란 축복의 약속과 조건이며 분부이며 의무이고 사명이며 본분의 강조이고 명령이다. ‘그렇게 살면 그런 결과가 주어진다.’는 인생살이의 등식과 같은 교훈을 구절마다 담고 있다.
이 험한 세상, 죄와 악이 가득하고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재물에만 관심을 갖고 불의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니, 불의하게 살아가려 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다. 가치관의 혼란을 갖게 하는 세상이다. 오직 성공, 오직 출세, 오직 지위, 오직 재물, 오직 힘, 오직 돈, 이런 식으로 계속되다가는 인류가 공멸할 것만 같은 불안 요소가 처처에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잠언은 그리하면 “살리라, 보호하리라, 지키리라, 높이리라, 영화롭게 하리라,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리라,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풍성하게 언약하고 있다. ‘그리하면’이란 어떤 삶을 하나님이 요구하고 기대하신 다는 말씀인가. 다윗은 평소에 아들 솔로몬에게 무엇을 강조하여 가르쳐 왔다는 말씀인가. 본문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로, 모세에게서 다윗에게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 교육과 신앙 교육의 근본을 들여다보게 하는 내용들 중의 일부이기도 하다.
1절에 ‘들으라, 주의하라’, 2절에 ‘떠나지 말라’, 4절에 ‘마음에 두라, 명령을 지키라’, 5절에 ‘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6절에 ‘버리지 말라, 사랑하라’, 7절에 ‘지혜를 얻으라’, 8절에 ‘지혜를 높이라, 지혜를 품으라’는 반복적인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대하는 바른 태도와 자세를 강도 높게 강조하고 있다.
잠언 1장부터 9장까지에는 15 가지의 솔로몬의 잠언이 기록되는데 그 중에서 본문은 일곱 번째 등장하는 지혜에 대한 충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명령을 지키라.
본문을 잘 관찰해 보면 잠언의 다른 곳에서는 ‘내 아들아’라는 단수로 말씀하였는데 본문 제 1절에서는 ‘아들들아’라는 복수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와 선한 도리와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대하여 주의하고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에 귀를 기울이면 명철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도리’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선한 도리’란 잠언 1장 5절에서 말씀한대로 들어서 학식을 더하고 지략을 더하게 되는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지혜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극찬을 받은 주인공이다.(행13:22)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향한 가르침은 깊고 심오하였다.
솔로몬이 아들에게 가르치는 형식의 ‘아들들아’라는 가르침은 그 자신도 아버지 다윗에게서 배웠던 하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신본주의 가치관과 지혜를 강조한 것이다. 당시나 오늘 날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본주의 중심으로 살아가는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제 각기 제 잘난 맛에 살고 으스대고 떵떵거리며 교만하게 자랑하며 살아가려는 이들이 적지 않은 때에 성경은 분명하게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는 강조는 무엇인가.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올해 92세이다. 그런 연세에도 요즘도 암으로 병약해진 몸으로 여전히 주일마다 교회학교를 섬긴다고 하지 않나. 그의 마음에 꽉 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마음을 넉넉하게 느낄 수 있다. 성경 교육, 기독교 교육, 하나님 중심 신앙의 바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는 4절의 강조는 솔로몬이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다윗의 무릎에 앉아서 듣고 팔베개를 베고 듣고 품에 안겨 성장하던 매우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 듣던 하나님 말씀이 아닌가.
이제라도 늦지 않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마음에 두어야 한다. 이는 남녀 노유 그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넉넉하게 접하지 못하고 성장해 온 그 누구일지라도 상관없다. 지금 오늘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결단과 각오가 필요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이 필요한 것이다.
그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77년에 민주당 출신으로 미국 제 39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취임사에서 인용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성경 말씀이 있다. 구약 미가서 6잘 8절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라는 명령이 아닌가.
다윗은 십 수 년 동안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며 죽을 고비도 수 없이 넘긴 후에 30살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사십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7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러 왕자들 중에서 특히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한 마지막 말이 있다. 열왕기 상 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선조가 되어야 한다. 후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도록 하여야 한다. 모세도 120살에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같은 내용을 강조한 바 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32:7)고 하였다. 그러면 아버지와 어른들에게 물어 듣고 배우고 믿고 마음에 두라는 하나님 중심 신앙이란 무엇인가.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32:3-4)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라는 강조가 아닌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의 강조는 모세의 대를 이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서도 나타난다. 가나안 정복과 분배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존귀하게 쓰임 받은 여호수아가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에 남긴 유언이 무엇인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이 얼마나 분명한 하나님 중심 신앙생활의 선언인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아들 솔로몬에게 이것을 분부하였다.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잠4:4) 이 얼마나 준엄하고 확신에 찬 가르침인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자녀들에게 끌려가지 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들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내가 말하는 명령을 지켜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가르침을 담대하게 할 만 한 가장의 권위를 지켜 나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명령하는 부모의 명령을 지키면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다.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무엇일까. 잠언 4장 10절에 보면,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고 말씀했다. 이는 설명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마음에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명령 따라 살아가면 그 인생이 이 땅에서부터 복되고 잘 되고 그 생명의 해가 길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선언이 아닌가.
지혜를 사랑하고 버리지 말라.
5절과 6절의 자세한 강조는 무엇인가.
“지혜를 얻으라,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아라, 내 입의 말을 어기지 말아라, 지혜를 버리지 말아라, 지혜를 사랑하라” 이 보다 더 자세하게 가르칠 수 있는 아버지의 훈계와 교훈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런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가야만 하는가.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리라,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리라”고 하였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비타민을 비롯하여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균형 있게 공급되도록 식생활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처럼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가꾸어가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중국 명나라 때에 양명학을 발전시킨 학자이다. 그가 주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론은 양명학의 근본이 되는 생활 강령이었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알고 있는 것을 생활 속에 실천하여야 한다는 강조가 아닌가. “양지(良知)가 천리(天理)다” 즉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곧 세상의 바른 이치다”라는 주장을 하며 지낸 관리였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여간 평화를 누렸다. 당시 중국에는 산적이나 마적 떼가 득실거렸다. 왕양명에게 강서지방으로 가서 저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느 날 낯설은 사람이 왕양명을 찾아 와서 만나려고 하자 위병이 그의 출입을 막았다. “선생님은 지금 강의 중이시니 진중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 때에 그를 찾아 온 손님이 “아니 요즘처럼 시절이 어수선한 때에 선생께서는 그럴 겨를이 있으십니까” 그 때에 위병이 “강의를 하시는 것은 선생님께서 날마다 하시는 일이십니다.”하고 대답해 주었다. 얼마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가 왕양명을 만날 기회가 왔다. “아니 선생께서는 이 어수선한 때에 유유하게 강의를 하며 지내신다니 놀랍습니다.” 그 때에 왕양명이 “산적의 침입을 막는 일도 어려운 일이로되 내 마음의 적을 막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 나 스스로가 날마다 강의를 하는 것을 통하여 내 마음을 지키지 아니할 수가 없다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본문에 반복되는 아버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향한 훈계와 교훈이 그러하지 않나. “훈계를 들어라, 주의하라,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어라, 내 명령을 지켜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아라, 지혜를 버리지 말아라, 지혜를 사랑하여라”는 강조는 한 마디로 묶어 말하면 “네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닌가.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키고 내 마음과 생각을 잘 지켜 나가는 생활은 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위급하고 소중한 일이 아닌가.
지혜를 사랑하고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잠언 4장 18절과 19절에 보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군대의 참모총장을 지냈거나 나라의 국무총리를 지냈거나 대학의 총장이나 종합병원의 원장이나 검찰 총장이나 국회의원이나 기업체의 회장을 지냈더라도 의를 떠나 악을 가까이 하면 그 앞길이 어둠과 같아서 결국은 그 악의 수렁에 빠지고 그 악의 덫에 붙잡히며 그 악의 올무에 걸려서 불행을 당하고 마는 법이다.
지혜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곧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고 악을 멀리하게 된다. “사악한 자의 길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잠4:14-15)라고 하였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세상의 그 어디에서든 악을 멀리하고 불의한 이들을 멀리하여야만 할 것이다. 사악한 자들의 실상을 잠언 4장은 자세하고 분명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잠4:16-17)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불의로부터 손을 씻고 눈과 귀와 입을 씻는 결단과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7절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이고 분부이다.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 갈수록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집사(송대관)인 모 가수가 지난 이년 여간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법원으로부터 사기 혐의로 기소될 위기에 있던 저들 부부가 무혐의 판결을 받은 후에 어느 교회에서 간증하는 내용을 보았다. 그는 2년 반 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가 100억짜리 이태원 집이 순식간에 남의 소유로 넘어가 버렸다고 했다. 고급 외제 승용차와 고급 외제 승합차도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 후에 지방 공연 다닐 때에는 동료 선후배 들이 빌려 주는 자동차를 빌려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빈털터리가 되고 인생의 맨 밑바닥의 쓴 맛을 다시 경험하여야만 했다고 했다. 그렇지 않나. 재물, 권력, 인기, 명예, 건강 이런 것들은 때가 되면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영원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나.
그런 간증을 한 후에 부르는 338장 찬송이 절절이 마음에 와서 닿았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살아 계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지혜를 사랑하고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그 인생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다.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과 감사와 행복과 은혜와 평강을 샘이 솟구쳐 오르듯이 해 주실 것이다.
지혜를 높이고 품으라.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서 지혜를 의인화 하여 교훈하였다. 8절에 보면, “지혜를 높이라, 지혜를 품으라”고 하였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그 인생을 높이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작은 존재가 아니시지만 그 분을 내 마음에 품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영화롭게 해 주신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 듯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를 품에 안 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품에 안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요즘 교회 안에서 대하는 가정마다의 어린 자녀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어느 가정의 자녀이든 품에 안아 주면 어린 아이들도 그 작은 팔로 나의 목을 꼭 끌어안는 모습을 본다. 어린아이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위해 주는 줄 다 안다. 그래서 그 작은 손, 그 약한 팔이지만 상대방을 꼭 안아 보려 하는 것이다. 8절은 말씀한다. “지혜를 품으라 그리하면 그 지혜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소중하게 여기며 가슴에 품고, 마음에 품고, 생각에 품고,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그 지혜의 말씀이 나의 삶을 영화롭게 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명철을 모두 소유하신 하나님 곧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고,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지혜를 높이고, 지혜를 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면 주님이 그 인생을 존귀하게 해 주신다. 주님이 그 인생을 높여 주신다. 주님이 그 인생을 영화롭게 해 주신다. 주님이 그 인생으로 하여금 그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게 해 주신다. 주님이 그 인생의 머리에 영화로운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
지난 번 종교 개혁지 방문 길에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활동하던 곳곳을 둘러보던 중에 바흐의 고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바흐가 살던 튜링겐의 아이제나흐에 있는 그가 살던 집과 그 앞에 잘 가꾸어진 크지 않은 정원과 그 가운데 우뚝 세워진 그의 청동 동상을 보았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중세 기독교 음악의 명문가였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가 아닌가. 무인 우주선 보이져 호에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을 실어 보낼 때에 바흐의 곡들을 담아 보냈다고 하지 않나.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음악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아이제나흐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성 게오르겐 교회(St. George's Church /Georgenkirche)에서 바흐는 출생 이틀 후인 1685년 3월 23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바흐의 다른 형제들은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 Martin Luther도 아이제나흐에 살 때(1498-1501년)이 교회의 성가대원이었다. 종교 개혁 후 20년 후인 1521년에는 보름스의회에 가고 오는 길에 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바흐의 가족들은 교회 사역에 강한 은사를 가지고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신앙’(信仰)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서 두드러졌다. 그의 일가친척들이 살아가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의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중에서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와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중세 기독교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또 다른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22살 때에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가 태어났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결혼 생활 14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그는 16살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였는데 자그마치 13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절반의 자녀들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아주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출산 환경이 그러하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와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1782)는 모두 아버지의 대를 이어 그들의 시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저들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기며 신앙생활도 잘 하였다. 그 시대에는 이들의 자녀들이나 또는 바흐 가문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공부해라, 공부해라”라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를 사랑하게 하자.
먼저 나 자신이 지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를 높이고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높여주시고 영화롭게 해 주신다. 그 머리에 영화롭고 아름다운 관을 쓰도록 존귀하게 이끌어 주신다.
음악, 미술을 비롯한 각계 각 분야의 예술 분야와 건축, 설계, 토목, 체육, 의학, 과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 철학, 신학, 사회학, 인류학,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지질학, 우주 천문학, 각종 공학 분야와 역사학을 비롯한 각양 학문 분야와 정치, 경제, 사회, 행정, 국방, 외교, 문화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지혜를 사랑하고, 그 지혜를 높이고, 그 지혜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되게 해 주실 것이다.
다시 성경 잠언 4장 8절을 보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그를 품으라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을 높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자.
성령님을 높이자.
주께서 그 인생의 범사를 이끌어 가시며 지도하시고 분명히 복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그 길을 돋는 햇살 같게 하시고 그 앞날을 한 낮의 광명한 햇빛과 같게 해 주실 것이다. 아멘
지혜와 지식
잠언 4:1-9 / 한경직 목사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四 ․七)
구약 시대에는 모든 자녀들이 마땅히 배워야 할 학문의 세 가지 부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는 율법입니다. 둘째는 예언서입니다. 셋째는 지혜문학이었습니다. 우리 구약 가운데 욥기나 잠언이나 전도서는 특별히 이런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들입니다. 이 교육주일을 당해서 이 시간 지혜와 지식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 혹 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성경가운데 어떤 때는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두 가지 말은 뜻이 좀 다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아는 것의 총칭을 가리킨 말이고, 지혜라고 하는 말은 아는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지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에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많아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말을 듣는 이들 가운데도 종종 미련한 사람들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사는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후에 그는 아편 맞기를 시작하여 아편 장이 가 되었습니다. 지식은 많지만은 미련한 박사올시다. 보통 사람이 늙어 가면 경험이 쌓여서 지혜가 늘어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서양 속담 가운데 미련한 자 가운데도 가장 절망적인 미련 장이 는 늙은 미련 장이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교육은 지식에 중점을 둡니다.
옛날부터 지, 덕, 체의 세 가지 방면을 골고루 주는 것이 원만한 교육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특별히 지육에 중점을 두어서 과학 교육에 치중하게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현대는 지식이 아주 발전된 시대요, 또한 지식의 팽창 시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우주에 대한 지식이 아주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인공유성을 쏘아 올릴 줄 알게 되었고, 우주 공간을 향해서 우주선을 발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는 달의 표면이 어떠한지 사진을 찍어다가 볼 수 있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흔히 계수나무가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토끼가 잇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바와 같이 달 위에는 나무란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는 물도 없고, 공기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중력 상태에서 사람이 공간을 걸어 다니는 체험도 얻어 봅니다. 아마 오래지 않아 달나라에 가서 금과 은을 캐다가 부자가 될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것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자체에 대한 지식도 굉장히 팽창하여 갑니다.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은 인간에게 있어서 알 수 없는 신비의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바다 속에 깊이 들어가서 집을 짓고 여러 달 있으면서 바다 속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혹은 지층을 연구하고 화석을 연구해서 인간이 세상에 나기 전에 지구의 역사가 어떠했다는 것을 찾아내는 지질학이란 과학도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또 인간의 기록에 빠진 인간의 역사를 고고학이란 학문을 통하여 더욱 탐구하게 되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이 지구 자체에 대한 지식이 발전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지구 위에 있는 여러 가지 생물에 대한 지식도 그러합니다. 현미경이 발명됨으로 인하여 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던 새로운 미균(黴菌)의 세계가 사람의 눈에 분명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연구를 거듭합니다. 생리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그 방면만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의 깊은 곳을 더듬어 내는 심리학도 점점 발전되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물질 자체를 분석해서 그 속을 연구해 보는, 우리가 어렸을 때는 들어도 보지 못한 원자 과학이 발전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의 국민학교 학생의 지식이 五十년 전 어느 박사의 지식보다 낫다. 아마 어느 면에서 이 사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이와 같이 많이 획득한 지식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二十세기는 분명히 지식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사는 이 二十세기를 지혜의 세기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앞으로 후대의 역사가가 판단 내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과거 七十년간의 二十세기는 그렇다고 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십니다.
二十세기 초기인 一九一四년에 제一차 세계대전이 폭발 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화재와 많은 재산이 파괴되었습니다. 수 없는 인명의 살생을 악마처럼 감행한 것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一九三0년대부터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주 사변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지나 사변을 일으켰고, 결국은 第二차 대전으로 번져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해서 피차에 살상을 한 것입니다.
만일 화성에 우리 인간과 같은 존재가 있어서 이 지구성에 사는 인간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본다고 할 것이면 그들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거 같습니까?『지구에 사는 이간이란 동물은 이상한 동물이야. 사람의 생명 하나를 위해서 여러 의사들이 밤잠을 자지 않고 병을 고쳐주어 생명을 구해 놓고, 여러 해 연구를 거듭해서 문화를 창조하고,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예술품을 만들어 놓고는 또 갑자기 사람을 몇 천 몇 만을 한꺼번에 죽이고, 여러 해 건설한 것을 며칠 사이에 다 파괴시켜 놓고 하니』라고 얘기할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과학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기술을 인간의 공리보다도 인간 자신과 문화의 파괴에 사용했으니 그 얼마나 미련합니까?
지금도 월남에는 이런 성질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유진영에서는 월남 문제를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인 해결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공산진영은 아직까지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청이불문(廳而不聞)이올시다. 이 월남 문제가 평화적으로 잘 해결되겠느냐? 혹은 이문제로 말미암아 마지막에는 제三차 전으로 발전되고 뭇 인간의 문화와 인류 자체가 원자 전으로 파괴를 당하겠느냐? 전세계에 잇는 사람들이 이 문제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 二十세기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깨닫습니까? 전세계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지식보다도 지혜입니다. 지금까지 얻은 모든 지식과 기술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쓸 만한 지혜 있는 인간이 요구됩니다.
지혜 있는 정치가, 지혜 있는 사회 과학자가 요구됩니다.『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옛날 잠언의 교훈은 오늘날 현대에 있어서 얼마나 적절한 교훈입니까?
여러분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지식은 과학을 통하여 얻으려니와 이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지혜의 근본이 어디 있습니까? 디모데 후서 三장 十五절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 이런 글귀를 기록했습니다.『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미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고 인류의 문화와 인류 자체를 구원케 하는 지혜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가르쳐 주는 책은 아닙니다. 이런 지식을 바로 써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二十세기에도 필요합니다.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쓰는 법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이 교훈 하는 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간추려서 간단히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지혜문서 가운데 하나인 욥기 二十八장 二十八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곧 명철(明哲)이니라.』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편 五十三편 一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신론은 악하다기보다는 사실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안으로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에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생활을 한 모든 철인, 지인 등 모든 위대한 인물은 비록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마는 보이는 것과 같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생활을 한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글 가운데 신목이 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비록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하나님의 눈이 번개 불과 같이 밝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지혜 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왜 오늘날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가 이러한 참혹한 세계가 되었습니까? 주를 경외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렇게 부패와 부정으로 가득히 쌓인 사회가 되였습니까? 우리 사회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입니다
로마서 一장 十八절 이하를 찾아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계시와 그 영광과 능력이 어떠한 것을 인간의 속에서 나타내 보여 주셨고,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도 나타내 보여 주셨건만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마음이 어두워져서 살아 계신 하나님 대신에 짐승이나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이성 뿐 아니고 여러 가지 죄악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기사를 우리가 읽어 볼 수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첫 걸음이올시다..
고린도 전서 一장 二十四절을 읽어보면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분명히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 말씀하시기를 『그런고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하나님의 지혜를 그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지혜를 받아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첩경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통하여 배운 바 좋은 지식과 기술을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사용하면 내 개인뿐만 아니고 우리 온 민족, 아니 인류 전체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혜를 생각할 때에 야고보서의 교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三장 十三절 이하를 읽어보면 거기에 야고보가 지혜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좇아오는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철학이라고 하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 가운데 세상을 좇아온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인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혜 이외에 위로부터 좇아 내려온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첫째로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矜恤)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 거짓이 없어서 화평의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입니다
성경에 가르쳐 주는 지혜는 남을 속이는 사특한 세상 사람의 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성결과 화평과 과용과 양선과 모든 선한 열매가 가득 찬 그리스도의 생활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얻어야 나도 우리 사회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과학적 지식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쓸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 지혜는 성경 가운데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이 지혜는 곧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가 믿고 그를 내 마음에 영접해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자연히 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가운데 화라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어렸을 때의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에 신문 배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부자 집에 신문을 돌리러 갔는데 큰 철창문이 있어서 신문을 멀리 던져 넣느라고 그 살창 문으로 멀리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때 언 듯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머리는 문안에 있고 몸은 문 박에 있으니 내가 문안에 있는 것인가, 문밖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 생각으로 한참 있다가 다른 것은 잊어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대문을 왈칵 열었습니다. 목이 대문에 걸려 나가서 부러질 뻔하였습니다. 그가 후에 하는 말이 내가 문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는 몰랐지마는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잇다. 그것은 사람이란 안에 다 들어가 있든지 밖에 온전히 나와 있든지 해야지 절반은 들어가고, 절반은 안 들어가는 것은 가장 미련한 일이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 미안한 말이지마는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마는 머리는 교회에 있고 몸은 다른 곳에 있는 분은 없습니까?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사람이올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려면 온전히 영접하세요. 하늘 문이 열렸을 때에 온전히 들어가세요.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이 다 이 지혜를 배워서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이 교육주일에 참 지혜를 아울러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8권 中에서 (一九六六년 十월 十六일)
잠언 강해
잠언 4:1-9 / 안정섭 목사 강해
3:27-35절은 어떻게 지혜를 끌어안고 살 수 있는지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고 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원하실 때 돌려드려야 한다고 했다. 절대로 물질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남을 굴복시키고 착취하는 힘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로운자는 축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산다면 현실 생활에서 언제나 큰 손해를 본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 것이다. 물질을 자기 것으로 사용하며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말씀은 그런 마음을 가진 아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왜 그렇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 또 그러면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I. 아버지의 훈계를 간직하라(1-2)
1절은 원어에서 “아들들아!” 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첫째 명령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이다. 훈계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도록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똑 같은 내용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면 귀를 막고 안 들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둘째 명령은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라고 한 것이다. 명철이란 반복되는 훈계 속에서도 ‘아하!’ 하고 깨닫는 것을 말한다. 반복되는 아버지의 훈계를 귀 기울여 잘 듣고 실천하다 보면 그 중에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지겹더라도 참고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것이다.
2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라는 말에서 도리란 말은 붙잡는다는 말에서 온 말이다. 귀 기울여 들은 말씀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인데 그것도 선한 것을 붙잡고 있게 해 준다는 뜻이다. 선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아비의 훈계를 잘 듣고 ‘아하!’ 하는 명철을 깨달으면 하나님 기뻐하시는 선한 것을 붙잡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선한 도리는 2절 뒷부분에서 “내 법” 이라 했는데 이는 토라라는 말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 아버지가 가르치는 것이다. 붙잡고 있다가도 별로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버리기 마련이다. 마치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워 잡고 있다가 그냥 버리는 모습과도 같다. 하지만 아비가 가르쳐 준 토라는 붙잡고 절대로 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비의 반복적인 가르침의 목적은 토라를 계속 붙잡고 버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하!’ 하는 명철이라는 깨달음이 없으면 쉽게 잊어 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고 ‘아하!’ 하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소중함을 알고 간직할 수 있게 된다.
II. 아버지의 교훈들(3-9)
원어에서 2절에 준다(נתנ)는 말이 9절에도 나온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내용들은 잘 듣고 버리지 말아야 하는 아버지의 가르침들이다. 3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2절에 이어 왜 잘 듣고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이다. 유약하다는 말은 어리기에 약하고 보드랍고 아주 민감하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도 그렇게 부모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4절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쳤다면 정말 사랑하기에 가장 귀한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뜻이다. 가르치신다는 말은 본래 던진다는 뜻인데 문답식으로 주고받으며 가르친 것을 뜻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게 질문을 하고 질문에 아이가 답하면 그 답을 근거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이르기를” 이라는 말은 공식적인 강의를 뜻한다. 아들을 앉혀놓고 길게 설명해서 가르쳤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두 가지 가르치는 방법으로 배웠다는 뜻이다.
아버지도 이렇게 할아버지에게 가르침과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할아버지에게서만 온 것이 아니라 대대로 전해 온 것이다. 그것을 이제 아들에게 전달해주며 부탁하는 말이 4절 뒷부분에 나오는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이다. 원어를 직역하면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말을 꽉 잡고 있게 하라” 라는 뜻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전달 받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꽉 잡게 했다면 다음에 할 일은 “내 명령을 지키라” 이다. 지키라는 말은 보초를 서라는 뜻이다. 내 마음이 아버지가 전해 준 하나님의 명령을 꽉 붙잡게 했다면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항상 보초를 서가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잘 지키지 않으면 금방 마음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는 책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만약 말로 전해주고 기억하게 한 말씀 중 하나라도 놓친다면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맛소라 학파가 구전으로 전해받은 성경을 기록했었는데 맛소라 학파는 주후 500-900년 사이 맛소라 학파 학자들이 말로 전해지던 성경을 글로 기록한 것이다. 1970년에 이스라엘 사해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과 대조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은 정확하게 입에서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자손들에게 가르쳐 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켰다면 그 다음에는 “살리라” 라는 것이다. 개역이나 새번역은 NIV와 같이 미래형으로 번역했지만 원어의 의미는 계속 그렇게 살라는 명령형이다. 붙잡고 잘 지켜 간직한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5절은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어라” 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살았다면 그 다음 순서는 삶으로 실천한 그 말씀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란 삶의 경험을 근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을 짜는 것이나 항해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배를 운항하는 것 같은 것을 말한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이 담겨있다.
그 지혜를 얻으며 라는 말에서 ‘얻다’ 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삶의 경험들을 자신의 경험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또 명철을 얻으라는 말도 값을 지불하고 명철을 사라는 뜻이다. 명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지불하고 사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돈을 지불하고 사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담긴 삶의 지혜와 명철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들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지혜는 계속해서 여인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과 근동지방 사람들은 아내를 얻으려면 많은 돈을 지불하고 사와야 했었다. 그 책임은 부모가 아니라 본인이 져야 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사와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7년간 일을 했던 것은 야곱이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금이 없었기에 크레딧 카드로 아내를 사고 7년 동안 갚을 테니 일단 아내를 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혜라는 여인은 그렇게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털어서 주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5절 끝부분에는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라” 했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얻은 지혜와 명철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얻은 지혜와 명철을 잊는다는 것은 돌보는 것을 멈춘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재산을 다 털어 사온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거금을 주고 아내를 사왔다 해도 계속 돈을 들여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주고 옷도 사주고 아내가 원하는 귀금속과 명품 백도 사줘야 한은 것이다. 그렇게 계속 아내에게 투자하고 돌보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도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온 아내를 계속 돌보는 것처럼 정성껏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기지 말라는 말은 본래 값을 지불하고 사온 아내로부터 자신을 확대시킨다는 뜻이다. 비싼 값을 주고 사와서 오랫동안 돌보다 보면 아내는 이제 완전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은 확대하고 아내는 축소해서 무시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항상 자신을 축소시켜야 하고 절대로 자신을 확대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진리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 한국 남편들은 “아내의 말은 항상 옳다” 라고 하기도 하고 아내의 말을 거역해서 자기를 높이는 남편들을 간 큰 남자로 말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신을 확대시키고 높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돌보는 것을 멈추어도 안되고 또 그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을 확대시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기지 말라는 말의 뜻이다.
6절에서 지혜를 버리지 말라는 말도 역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온 아내에 비유해서 하는 말이다. 오랫동안 살다 보면 아무리 비싼 값을 주고 사온 아내라도 싫증나게 된다. 게다가 본래 아내들의 특성인 잔소리까지 많다 보니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잔소리가 많아도 아내를 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도 아내들처럼 우리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 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그냥 버리고 떠나지 말라는 뜻이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지혜를 돌보는 것을 중단하는 것과 지혜로부터 자신을 확대해서 왜곡시키는 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버리고 떠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잔소리해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지혜가 보호자가 되어 너를 지켜줄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지겨워진 아내가 잔소리까지 계속 해 대도 아내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키고 사랑하고 돌보며 산다면 아내는 남편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잔소리 하는 아내나 남편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잔소리 심한 하나님의 지혜도 버리지 않으면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내가 항상 성경 말씀만 페북에 올리다보니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지겹게 느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깨달음이나 재미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다. 그 때마다 내 아내는 정말 싫어한다. 당장 내리라고 할 때가 많다. 내가 올린 글 때문에 문제를 삼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듣기 싫지만 그래도 들어야 한다. 아내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잔소리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가 하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버리고 떠나지만 않는다면 지혜는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버리고 떠나지 않는 것의 반대말은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 버리고 떠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말이 부부간이나 남녀간에 쓰이면 성적인 친밀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림으로 이 말을 그린다면 남녀가 꼭 끌어안고 키스하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도 부부관계처럼 그렇게 친밀한 관계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는 마치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처럼 주의 깊게 너를 주시하고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깊은 관계를 갖게 되면 여성들은 모성 본능으로 자기 남자를 지키고 보호해 주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도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7절에서 아내를 사듯 지혜를 사라는 말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지혜를 사랑하고 또 지혜가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안다면 지혜를 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네 가진 모든 것을 다 지불하고 명철을 사라는 것이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고 사려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얻고 깨닫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하라는 것이다.
8절의 지혜를 소중히 여기라는 말은 지혜를 높이 올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주변보다 더 높이 올리라는 뜻이다. 이는 전 재산을 들여 사온 여인을 끌어안고 키스하던 남자가 이번에는 그 여인을 높이 들어 올리는 그림이다. 사랑하는 지혜를 모든 것을 다 주고 샀으니 너무 기뻐 끌어안고 키스하다가 그 기쁨을 참지 못해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처럼 사랑하고 기뻐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지혜도 너를 사랑하여 너를 그렇게 높여줄 것이라는 것이다. 지혜를 높이면 그 높이 올려진 지혜는 자신 위에 사랑하는 남자를 세워준다는 것이다.
또 8절 뒷부분에서는 지혜를 가슴에 품으라 했다. 이는 높이 올렸다 내린 여인을 가슴 깊이 품고 사랑하는 그림이다. 5:20절에서는 부정한 여인을 끌어안고 성관계를 갖는 모습에서 이 말을 사용했다. 이는 아가서처럼 에로틱한 모습이다. 그렇게 지혜와 깊은 관계를 맺고 그렇게 깊이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너를 존귀하게 할 것이라 했다. 누구든 여인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를 존귀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해서 존귀하게 만들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깊이 사랑하여 가슴 깊이 품으면 지혜는 너를 존중하여 존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존귀하게 만들어주는가? 9절에 보면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라고 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관은 꽃이나 나뭇가지를 엮은 것으로 승리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에게 씌워주는 것이기에 평화가 뒤따르는 것이다. 또 영광스러운 왕관을 씌워준다 했다. 그 승리한 개선장군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왕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마무리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산다면 세상에서 손해 보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사온 아내와도 같다는 것이다. 아내란 오래 살다 보면 싫증도 나고 지겨울 수도 있지만 결혼서약에 근거해서 인내하고 계속 돌보며 진정한 기쁨으로 깊이 사랑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자신을 보호해주고 존귀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혜도 지겨워도 버리지 말며 깊이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최고로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신혼의 달콤한 사랑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가? 부부간에도 처음의 그러한 감정은 혹시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인내하며 진정으로 사랑해왔다면 더 깊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그렇게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니라면 지금부터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