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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5권, 2년(1547 정미 / 명 가정(嘉靖) 26년) 5월 28일(무인) 1번째기사
조강에 나가자 검토관 유경심이 지방관의 방자한 행동에 대해 아뢰다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유경심(柳景深)이 아뢰었다.
“신이 백성들의 일을 익히 보았습니다. 비록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라는 명령이 내려져도 수령들은 조금도 거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중종 때 경자년646) 과 신축년에 혹심한 흉년이 들어 경차관(敬差官)과 어사(御史)를 내려보냈었는데 지나갈 때는 반드시 수십개의 자루를 만들어 쌀 한 말씩과 소금 몇 되씩을 담아서 민가에 놓아두었다가, 지나가고 나면 바로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것이 굶주린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문폐사(問弊使)가 비록 각 읍(邑)을 두루 돌아다니지만 말을 못하도록 수령이 백성을 엄하게 금지시킵니다. 혹 어떤 사람이 굶주린다는 말을 아뢰면, 노비일 경우에는 반드시 그 주인을 곤장쳤고 백성일 경우에는 반드시 그 호주(戶主)를 곤장쳤습니다. 때문에 한 사람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백 번 문폐사를 파견한다 하더라도 어디에서 듣겠습니까. 만일 백성의 말에 의하여 수령이 파직되면 이어 부임한 수령이 반드시 ‘이 사람이 수령을 파직시켰다.’ 하고서 온갖 방법으로 얽어 묶어 반드시 곤장을 쳐 죽게 합니다. 수령들의 방자한 행동이 지금만큼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戊寅/上御朝講。 檢討官柳景深曰: “臣慣見民間之事。 雖有賑饑之命, 守令略不擧行。 中宗朝庚子、辛丑年, 最爲饑荒, 敬差官、御史, 過必造數十帒, 盛一斗米ㆍ數升鹽, 置諸民家, 過後卽移置于他處。 此於饑餓之民, 有何益也? 問弊使雖遍行各邑, 守令嚴呵禁止。 脫有一人告饑, 若人之奴則必杖其主, 若百姓則必杖其戶主, 故無一人以實告之者。 雖百遣問弊使, 何從而得聞乎? 若以民言, 罷其守令, 則其繼往之守, 必曰: ‘此民能罷守令。’ 多般羅織, 必杖殺之。 守令之恣行, 未有甚於此時也。”
선조실록 2권, 1년(1568 무진 / 명 융경(隆慶) 2년) 12월 19일(계사) 1번째기사
주강에서 《논어》를 강하고 유경심 등이 곡식 관리 등에 대해 건의하다
상이 문정전(文政殿) 주강에 나아가 《논어》 선진편(先進篇)을 강론하였다.
호조 참판 유경심(柳景深)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사내(司內)의 지출 경비 등의 일이 전에 비하여 많은 듯한데, 혹시라도 흉년이 들거나 혹 나라에 쓸 일이 많아지면 국가의 예산이 감축될 것은 뻔한 형세입니다. 거기에다 각사(各司)의 양곡이 모두 도적을 맞고 있습니다. 풍저창(豊儲倉)은 국초 이후 운영해 온 양곡이 28만 석인데 그중 이미 썩어 흙이 된 것이 많으니 먹을 수 있는 미곡이 어찌 10만 석이나 되겠습니까. 각사 어느 곳인들 긴요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군자 삼감(軍資三監)과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의 양곡이 가장 중요하니, 이곳의 관원은 반드시 적임자를 뽑아 만 30개월이 된 뒤에 교체시키기를 조종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해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법전(法典)의 규정 내에는 해사(該司)의 서리 또한 정원이 있습니다만, 그 인원수대로 정하여 보내지 않을뿐더러 비록 승지의 전유를 받들어 인원을 정하여 보낼 경우라 하더라도 일찍이 1개월을 넘기는 사람이 없으므로 각사가 텅 비게 됩니다. 만약 해사 서리들의 이름을 문서로 만들어 호조에 보내 비치하고, 호조가 입계(入啓)한 뒤에는 이조가 혹시 이송시킬 경우 호조가 즉시 추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각사를 감찰하는 데 있어서도 각사의 월령법(月令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오늘의 청대(請臺)엔 이 사람이 갔다가 내일의 청대엔 또 다른 사람이 가니, 비록 봉서(封署)하는 데 허술한 점이 있다 한들 어떻게 알 것이며, 봉서를 뜯어서 보내더라도 어느 감찰이 자기가 봉서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오사(五司)의 월령 감찰(月令監察)에 또한 강직하고 명민한 관원을 뽑아 보내되, 이들도 반드시 만 30개월로 과만(瓜滿)을 정해야 합니다. 각사의 청대가 있을 때에는 다른 감찰을 보내지 말도록 하여 봉서하는 것을 분명하게 살피도록 하며, 조치할 일은 별도로 조정에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온당할 듯하다. 하지만 제대로 조치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백성들을 핍박하여 긁어모으는 것은 참으로 해서는 안 된다. 조정에서 의논하면 자연 처치할 수 있는 방도가 나올 것이니 의논하는 것이 온당하다.”
戶曹參判柳景深進啓曰。臣見司中經費等事。比前似繁。而或年運凶荒。或國事多有用處。國計消縮。勢使然也。且各司之穀。盡被偸竊。如豐儲倉。國初運來之穀二十八萬石中。已成塵土者多。可食之米豈卜萬石哉。凡各司何處不開。而三監,廣興倉,豐儲倉米麪最重。官員必擇其人。滿三十朔遞代。依祖宗朝故事可也。法典內該司書吏亦有定數。而不爲定送。雖有捧承傳定送之時。而曾無一朔之久。各司盡爲空虛。若該司小名成冊送于戶曹。戶曹入啓後吏曹或移送。則戶曹卽時推尋何如。目監察亦有各司月令之法。而近來則今日請臺。此人往焉。明日請臺。他人往焉。雖有封署之虛。何以知之。雖有割封送之。而何監察言其非我署也。此五司月令監察亦擇剛明之員。必滿三十朔。其司請臺。勿使他監察分送。使得審察其封而措置之事。別議朝廷可也。。上曰如是爲之甚當。但雖有措置之事。刻民聚斂則固不可爲也。議諸朝廷。則自有處置之事。議之爲當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전교에 ‘백성에게 해를 끼치며 취렴하는 것은 해서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듣고보니 매우 겸격스럽습니다. 백성들에게 과중한 조세를 거두어 들이면 국가의 근본이 먼저 손상되니 이러한 일은 참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은 이러한 줄을 모르고서 우선 눈앞에 닥친 일만을 급하게 여겨 함부로 백성들에게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보통으로 여기는데, 전교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그야말로 생민들의 복입니다.
조정에서 자연 조처할 것이지만 특별히 폐단이 없도록 한 뒤에야 고쳐 나갈 길이 있는 것이지 잠시 데면스럽게 처리한다면 고쳐지기 어려울 듯합니다. 정사와 호령에 있어서도 조치가 정당하지 못하면 위에서 아무리 옳게 마음을 쓰시더라도 시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미열한 소신의 생각에 항상 깊이 걱정되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어 지탱하여 나갈 수 없게 된다면 과중한 조세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것을 미리 알아 헛된 비용을 줄여야 구제할 수 있는데 세상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심히 보아넘기고 간혹 걱정하는 이가 있기는 하나 그처럼 절박한 것인 줄은 모릅니다. 식량은 백성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홍범 팔정(洪範八政)에 첫째로 식(食)을 말하였고, 《주역(周易)》에도 ‘무엇으로 인민을 모이게 하는가. 재물로써 한다.’ 하였습니다. 하루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일시에 고갈된다면 아무리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견감하는 등의 일이 조정에서 아무리 호령을 하더라도 모두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난번에 황해도와 평안도는 여러 차례 중국 사신을 치루어 특명으로 견감할 것을 호조가 외방에 이문(移文)하고 외방은 백성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마땅히 공납해야 할 조세가 감면된 것을 기뻐하며 이미 준비하였던 물자를 저들 나름대로 모두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각사(各司)에서 재정이 모자라 공납을 폐지시키기 어렵다는 내용으로 계속 계청하고 곧이어 백성들에게 공납할 것을 독촉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은 이미 준비했던 물자를 다 써버렸기 때문에 필시 사서 바쳐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여느 때보다 몇십 배 힘겨워 백성들의 괴로움은 전보다 더욱더 심하였고 그 당시 수령이 그러한 폐단을 극론하였는데 듣기에도 처참하였습니다. 주상께서 구중궁궐에 계시면서 민생을 걱정하여 그들의 공납을 견감시키라는 조처를 내리시고 반드시 백성들이 은혜를 받았을 것이라 여기셨겠지만 백성들은 어느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1년 경비는 매우 많은데도 지난해의 세입(稅入)은 7만 석뿐이니 옛일을 고찰하여 경비를 일체 감축시키고 수입에 따라서 지출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3년 농사에 1년 먹을 양식이 남아야 하고 30년에 10년의 양식이 남아야 된다. 국가에 3년 먹을 양식의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국초 이래로 저축한 것이 28만 석이었는데 먹을 만한 것이 10만 석에 불과하다면 가령 내년 세입이 10만 석이 된다 하더라도 4만 석을 끌어 써야 하고 후년에 또 그와 같이 하여 3년이 되면 비축하였던 양곡이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황정욱(黃廷彧)은 아뢰기를,
“소신이 전에 경연에서 고자(庫子)들이 양곡을 훔쳐가는 데 대해서 아뢰면서 서원(書員)을 모두 없애고 고정 인원의 서리(書吏)를 배정시키면 방납(防納)의 길을 막을 수 있고 도적질하는 폐단도 없앨 수 있다고 아뢰자 이조와 호조가 같이 의논할 것으로 전교까지 내렸었는데, 그 뒤에 들으니 이조에서 서리들을 배정하여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신은 이러한 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큰 일의 조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아뢴 서리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위에서 몰랐었는데 이제 들고서야 시행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러한 일도 시행되지 않았으니 중대한 일은 필시 시행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옳은 것이다.”
하였다, 유경심이 아뢰기를,
“이조에서 비록 배정하여 보낸다 하더라도 꼭 일을 담당할 만한 사람을 보낸 뒤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보내자마자 겨우 10일도 안 되어 곧바로 다른 데에 이송합니다. 그리고 양곡을 관리하는 각사에는 서리들이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본시 가려 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번에도 배정하여 보내라고 하였지만 또 시행되지 않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조의 관원을 치죄해야 할 것이다.”
景深曰: “吏曹雖稱定送, 而必以任事者定送, 然後可爲, 而纔定送, 不十日還卽移送矣。 且米麪各司, 則書吏不肯求往, 故本不擇定矣。” 上曰: “然則令之不行, 先自吏曹。 今者已命定送, 而不無又不行也。 如此則治罪吏曹官員可也
하였다. 기대승이 아뢰기를,
“서리의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조가 봉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근래 국사가 글러진지 오래 되었으므로 서리들이 소소한 각사에는 가기를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가더라도 또한 오래 있지 못합니다. 고자·서원들은 훔쳐 먹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는데 새로 들어간 서리가 시종 내막을 모르는 데다 관원도 신임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 머물 생각을 하지 않으며, 또한 머물다 보면 축난 양곡을 나누어 물어내야 하는 곤경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온갖 수단으로 회피하려고 하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폐단을 개혁하려면 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비록 서리를 배정하여 보낸다 하더라고 그들은 미열하여 글을 모르니 갑자기 서원을 다 없애서 부릴 만한 사람이 없으면 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떠한 법을 만들고 하루아침에 시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서리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배정하여 보낸 뒤에 서원을 점차로 감축시키고, 법령에 있어서도 시행 기한을 느긋하게 정하여 조정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서원을 없애고 서리를 배정하는 것은 부득이한 계책이며 소신의 생각에는 각사의 관원을 가려 쓰는 것이 근본이 된다고 봅니다. 반드시 혼매하고 용렬한 관원을 도태시키고 훌륭한 관원을 뽑아 차임시킨 뒤에야 근본이 점차 좋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유경심은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을 모두 구임(久任)시키지 못하더라도 지금 아뢴 이 오사(五司)의 관원만은 30개월이 만료된 뒤에 교체시키는 것이 유익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원·서리들은 관원이 자주 교체됨으로 인하여 훔쳐 먹고 있지 않습니까.”
景深曰: “各司官員, 雖不得盡爲久任, 而今此所啓五司, 必滿三十朔相遞代, 則可知有益也。 書員、書吏等, 因緣官員數遞, 豈不偸食乎?”
하고, 기대승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폐단있는 법을 고치려면 반드시 폐단의 근원을 알고서 다스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려고 하면서 그 근본은 버려두고 말류만을 다스리면 성사시키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일마다 폐단이 없는 것이 없으나 그중에서 방납(防納)이 가장 큰 폐단으로 조정의 대소 신료가 모두 개혁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미욱한 소신의 생각으로는 예전부터 유전되어 점차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고쳐버렸더라면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대로 누적된 폐단이 지금까지 1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근본은 다스리지 아니하고 곧바로 시원스럽게 개혁하기를 마치 눈앞에 닥친 일을 해치우듯이 하려고 하니 혹 거기에서 발생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곤란한 일이 생겨 또 시행되지 못한다면 이 폐단 외에 다른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방납의 일에 대해서는 위로 묘당에서부터 아래로 백관들까지 내년 정월부터 시작하여 영원히 개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마는, 그 사이에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혹 제대로 고치지 못하여 아예 개혁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면 국사만 소란스럽게 될 뿐입니다. 1∼2년을 지나고 보면 시비를 마땅히 알 수 있을 것인데 혹시 제대로 바로잡지도 못하고 또 다른 폐단이 발생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니 이 관사의 폐단과 저 관사의 일을 각기 그 사례에 따라 개혁시켜야만 하는 것으로, 마치 풍병을 치료하고 종기를 치료할 적에 그 병에 적합한 약을 써야만 잘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헤아려보지도 않고 한꺼번에 시행하려고 한다면 그 형세가 절로 시행되기 어려운 것이니 자세히 살펴서 시행해야만 모든 것이 완전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5권, 4년(1571 신미 / 명 융경(隆慶) 5년) 6월 14일(갑진) 2번째기사
병으로 체직된 평안 감사 유경심의 졸기
평안 감사 유경심(柳景深)이 병으로 체직되어 돌아오다가 장단(長湍)에 이르러 졸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유희춘의 일기에 ‘이 사람은 지향하는 바가 바르고 재기(材氣)가 뛰어났으며 사람을 아끼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 더욱이 재간이 출중하여 조정에서 병조 판서로 삼을 만하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이렇게 죽었단 말인가.’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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