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산 / 강순지
트럭이 친정집 좁은 올레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일출봉 위로 흰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훅하고 코끝에 와 닿는다. 코끝에서 폐 속까지 바다 냄새로 출렁인다. 바다와 모래밭은 여름날의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까맣게 그을릴 때까지 바닷물 속에서 자맥질하던 기억이 물결 따라 일렁인다. 짭조름한 바람을 맞으며 모래언덕에 핀 연보라색 순비기꽃이 손을 흔든다. 소꿉친구가 배웅하는 것 같아 창밖을 보는 척하며 붉어지는 눈을 비볐다.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운 숲길이 시작된다. 방지턱을 넘으며 트럭이 덜컹하고 흔들린다. "살살, 조심조심." , 트럭의 짐칸을 살피며 놀란 목소리로 남편에게 당부와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오래된 항아리들이다. 적당히 세월의 때가 묻고 쿰쿰한 냄새도 나는 듯하다. 항아리를 옮기기 전에 차 바닥에 헌 카펫을 깔았다. 항아리 몸통을 천으로 두껍게 감싸고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묶었다. 행여나 깨지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집에 도착한 후 미리 만들어 놓은 자리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항아리들은 트럭 뒷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오느라 고단했던지 주둥이를 하늘로 향하고 더운 김을 토해낸다. 속을 씻어내고 항아리 몸도 반질거리게 닦는다. 냄새를 우려내기 위해 물을 채웠다. 항아리는 세수한 아이처럼 말끔하다. 나무 그늘에 앉아 햇볕에 나앉은 항아리를 한참 바라본다. 가져오길 잘한 것 같다. 어머니의 장독대는 이제 텅 비었다. 우리 집 장독대에는 새 식구로 북적인다. 장독대 위로 팽나무 가지가 길게 손을 내밀고 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다. 재산이라곤 달랑 당신이 살던 집 한 채였다. 집은 제사를 모실 자식이라고 아들 내외에게 주었다. 친정집이 없어지는 것 같아 서운하다. 그깟 명의가 뭐라고, 동생 집이 된다고 해도 추억이 있는 한 여전히 나의 친정집이라고 서운함을 달랬다.
이제 남은 거라곤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이다. 헌 장롱과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밖거리 방에 있는 반닫이 궤 두 짝이다. 위로 언니 둘은 궤 한 짝씩을 갖기로 했다. 언니들은 어머니가 지녔던 물건이 하나도 없으면 나중에 섭섭할 거 같다고 낡은 궤를 하나씩 끌어안는다.
궤 속은 투박하고 어수룩하게 산 어머니의 모습처럼 여기저기 흠집투성이다. 속을 바른 한지가 군데군데 찢기고 누렇게 변했다. 궤는 옷장이며 보석상자였다. 어머니는 옷을 싼 보자기를 계절마다 풀고 묶고를 반복했다. 지금은 보자기 속의 옷을 거의 버리고 두꺼운 스웨터 두어 벌만 빨간 보자기에 싸여 추운 겨울을 기다린다.
서랍에는 딸들의 초등학교 졸업사진과 오래전 군대 간 아들이 보낸 편지와 누렇게 바랜 유채 재배 계약서가 있다. 어머니는 흐린 눈을 비비며 자식의 얼굴을 찾아 졸업사진 속을 더듬었을지도 모르겠다. 백열등 아래서 점자를 읽듯 자식의 시간을 헤아렸을까. '보고 싶은 어머니'로 시작하는 아들의 편지는 베개 밑에 뒀다가 아들이 제대한 후에야 궤 안에 고이 접어두었을 테다. 기한이 지난 유채 재배 계약서는 오래전에 버려야 했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는 계약서 봉투를 몇 번이나 열었다 다시 제자리에 넣었을 것이다. 그러다 전당포에 맡겨두고 찾지 않은 물건처럼 잊었으리라.
언니들은 어머니 삶과 자신의 유년 시절을 유산으로 받은 셈이다. 궤를 열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과 콧물을 흘릴 게 눈에 훤하다.
나는 항아리를 받았다. 된장을 담았던 항아리 한 개, 간장 항아리 한 개, 몸통이 갸름하게 생긴 것과 작은 단지들까지 모두 다섯 개다. 갸름하고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에는 금이 간 자리에 알루미늄호일을 일회용 밴드처럼 붙여 놓았다. 항아리 빈속에 지푸라기가 거미줄에 붙어 대롱거린다.
“아이고, 이젠 이것도 그만해사키여. ᄒᆞᆫ자국이 힘들다.” 몇 해 전, 된장 가르던 날 어머니는 폐업을 선언했다. 어머니 나이 팔십 중반이었다. 발자국을 내놓을 때마다 오르막을 오르는 고물 자동차처럼 위태로웠던 터라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김치며 된장, 간장을 싸서 보내는 게 낙이었던 분이다. 포기하는 일은 많아지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항아리를 주면 농사지은 콩으로 장을 담아 먹겠노라고 달콤한 공약을 했다. 장을 담아본 적도 없는데 항아리를 달라고 했다. 항아리를 가지고 와도 하루아침에 장을 만들 재간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장 만드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게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항아리를 끌어안고 보니 덜컥 겁이 난다. 무겁고 조심스럽고 자칫하면 자리만 차지할 이 물건을 어쩌면 좋을까.
올봄엔 비가 많이 와서 제대로 콩 수확을 기대하긴 어렵게 되었다. 미리 사둔 소금만 여섯 포대다. 이 일을 어쩐담. 항아리를 두드리면 퉁퉁 배곯은 소리를 낸다. 이 속을 무엇으로 다 채울까. 항아리들은 아직도 어머니의 부지런한 손길과 맛있는 장맛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항아리의 배를 쓸고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한다. 어머니의 장맛을 흉내 내는 건 어림도 없겠지. 에라, 모르겠다. 항아리에 어디 장만 담으란 법이 있나. 콩이나 보리도 담고 미역도 담아두고 주둥이 넓은 것에는 소금도 담아 두련다. 예전엔 고팡에 곡식을 담아두던 배불뚝이 항아리도 있었고 부엌에는 물항아리도 있었다. 쓰임이 다양하니 천덕꾸러기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다 약속대로 장을 담아 봐도 좋겠다. 어머니가 장을 만들 때 곁에서 도와 왔으니 쉬 배워지지 않을까.
어머니의 푸근한 허리를 감싸듯 항아리를 안는다. 항아리 속에 담기고 퍼냈을 것들을 생각한다. 어깨에 짊어진 가족의 생계, 밭으로 바다로 내딛는 숨찬 걸음걸음, 가슴을 치는 설움과 남몰래 흘린 눈물 그리고 자식들이 잘 살아가길 바라는 기도가 섞인 어머니의 시간을 안는다.
유산 속에는 남긴 자의 삶이 녹아있다. 땀과 눈물과 한숨과 한때는 보람이었던 것, 간절히 바랐던 것들의 이야기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물건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물건 속에서 이야기를 찾고 이야기 속에서 삶의 흔적을 찾는다. 유산은 유형과 무형으로 전해진다.
항아리들이 멀리 떠나온 날, 저녁 해가 장독대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다. 항아리들의 그림자가 길게 눕는다. 곤한 시간을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