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연중 제10주일) 한계를 넘어
지역 축제 프로그램 중에 노래자랑이 있는지 여러 사람이 차례로 노래를 부른다. 대부분 반주와 관계 없이 목이 터지게 부른다. 반주와 잘 맞지 않는데도 그렇게 목청껏 부르는 걸 보니 나름 멋지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게 사람인가 보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기를 바란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진리는 하나고 심판도 하나다.
공자는 나이 일흔에 이르니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의 모든 권한은 넘겨받으셨으면서도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셨고, 그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살게 하는 양식이었다(요한 4,34).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은 세상살이에 잘 맞지 않았던 거 같다. 최고 의회 의원 니코데모가 밤중에 찾아와 고백했던 거처럼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시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요한 3,2). 그런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그 당시 율법 체계에 잘 맞지 않았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니까 예루살렘, 지금으로 치면 중앙정부에서 그분을 조사하러 율법 학자들을 보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치료하고, 부정한 이들에게 손을 대셨다. 어떤 심판도 벌도 내리지 않고 모두 다 그 즉시 용서한다고, 하느님이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율법에 따르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니 그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예수님의 친척들도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다(마르 3,21-22). 그들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을(요한 3,8) 자기 한계에 가두어 두려고 했다. 그래야 편하고 이해할 수 있고 또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제멋대로 살며 자신을 진리 판단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참으로 자유로우시고, 그분의 자유로 우리는 용서 받고 구원받는다. 예수님이 자유분방해서 딱딱한 율법 체계에 맞지 않은 게 아니라 세상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던 거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따를 수도 있고 안 따를 수도 있고, 하느님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고’ 이 세상 것만 생각하며(필리 3,19)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시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떤 죄든 용서받음을 안다.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해도 용서받는다(마르 3,28). 오늘 전례 화답송 후렴처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다(시편 130,7).” “주님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2-4).”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한계가 없어서 가둘 수 없다. 그것이 그분의 자유다. 이걸 믿지 않는다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거다. 영원한 죄에 매인다(마르 3,29). 여기서는 이것을 애써 외면하고 지낸다고 해도 마지막에 하느님과 만남까지 제멋대로 외면할 수는 없다. 심판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예수님, 주님은 저희 사고 틀에 맞지 않는 분이십니다. 학자도 가족도 성모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우신 주님을 따라 저도 제 한계를 넘어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어머니처럼 무한히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