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리꾼의 추억기(追憶記)
작자 미상
나는 1965년에 전남 순천 서면 판교리라는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들판이 놀이터였고 삼밭이나 목화밭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부모님 따라 들이나 산에서 보내며 허드레 농사일을 도왔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을 먹일 꼴을 베러 논두렁이나 산언저리 구석구석 안다닌 곳이 없었다. 겨울이면 땔감을 하느라 앞산 뒷산에 올라 고자배기(나무를 자르고 난 밑둥치)나 솔잎 긁어모으기에 바빴다. 어쩌다 시간나면 어린이 만화신문 <소년동아>를 종이가 닳도록 온 동네 아이들이 돌려가며 보았다. ‘도깨비감투’ ‘주먹대장’ 등의 만화를 본 뒤에는 어린 마음에 의협심을 발휘하며 우쭐해 했고, ‘엄마 찾아 삼만 리’를 읽고서는 짠한 마음에 남몰래 몇 날 며칠을 한없이 울기도 했다.
설 쇠고 정월 보름날에는 악귀 쫒는다며 빨간 팥을 넣고 찰밥을 지어 여러 날을 장독 위에 얹어 놓고 틈날 때마다 먹었다. 하루 종일 동네에서 귀신 쫒는다고 풍물 칠 때 어른들 놀음에 아이들도 좋아라 어른들 춤추는 것 따라 어울리지도 않는 보릿대춤을 신나게 추었다.
어찌어찌 날이 가서 강남 갔던 제비 돌아와 처마 밑에 집 지을 적에는 우리도 마냥 좋아라 마루 끝에 걸터앉아 제비더러 신기하게 집도 잘 짓는다고 추임새를 했다. 보리가 익을 즈음이면 코끝이 온통 보리 냄새로 배었고, 울퉁불퉁한 논두렁길로 다닐 때는 곱게 잘 익은 고소한 밀을 한 움큼 따서 손바닥으로 깔깔하게 비벼 껍질은 후후 불어내고 토실토실한 알맹이를 입에 털어넣고 껌처럼 오래도록 씹었다. 논마다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 그림자 드리우고, 산에는 소쩍새가 솥 적다고 ‘소쩍소쩍’ 밤새 울었다. 보리가 다 익어 타작할 때는 들에 있는 보리 짚단을 일일이 지게로 져 날라 자그마한 집 뜰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타작했고, 아이들은 타작이 끝난 까실까실한 보릿대를 두엄자리에 옮겨놓고, 그 속을 들락거리며 오두방정을 떨고 놀았다.
저 건너 산비탈 밭에 심은 하지감자를 캘 때는 흙 속에서 기어 나온 땅강아지를 잡아 검정 고무신에 담아 장난도 쳤다. 모를 심을 때는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울력으로 모를 심었고, 이 집 저 집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가 논두렁에서 놀다 새참 오면 숟가락 들고 함께 거들었다. 논 가장자리에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따서 고무신에 가지런히 담아 가지고 행여 누가 뺏어 먹을까 아껴가며 야금야금 먹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일을 마치면 어둑어둑한 뻐꾸기 우는 산길을 따라 소나무 껍질같이 오돌토돌한 엄마 손을 잡고 보채는 걸음으로 돌아왔다.
농번기 때는 초등학교도 일주일씩 방학을 하는데 무상으로 받던 빵도 일주일 분량을 한꺼번에 받아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농번기가 지나고 일손이 한가해지면 외지에서 들어온 하루짜리 천막 영화관의 인기가 대단했다. 어린 아이들도 관람료 25원씩 내고 들어가 멍석 깔아놓은 바닥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엄마 없는 하늘 아래>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보면서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팔월 백중이 되면 온 골짝 마을 대항 체육대회가 열려 그날만큼은 온 마을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어른들은 아침 일찍 쇠꼴 한 짐씩 베어놓고 하나둘 짝을 지어 학교로 모였다. 스피커에선 판소리나 육자배기 가락과 <동백아가씨> <사랑은 눈물의 씨앗> <님과 함께> 같은 노래들이 온종일 구성지게 울렸고, 동네 아이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을마다 아낙네들은 맛난 음식들 준비하여 바람이 선선하고 그늘진 아름드리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기 마을 이겨나 신나게 응원을 했다. 체육대회가 끝난 해거름녘에는 서투른 논두렁 장구재비가 장구를 어깨에 들쳐 메고 폼나게 치는 가락에 맞춰 다 함 께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늙어지면 못 노나니/화무는 십일홍이요/달도 차면 기우나니라/얼씨구 절씨구/차차차/기와자 좋구나/차차차” 하면서 손가락 안주에 막걸리를 마셔가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재미나게 놀았다. 어둑어둑할 무렵 집으로 돌아와 마당 한 켠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있노라면 하늘엔 수많은 은하수가 쏟아질 듯 반짝거렸고, 간간이 떨어지는 별똥을 보며 어른들은 “아이고, 누가 또 저승으로 갈랍갑네”하면서 근심스럽게 말하다 잠이 들곤 했다.
철 이른 가을벌레들은 두엄자리나 담장 사이에서 밤새 울어댔고, 소막의 황소는 큰 눈을 살포시 감고 목에 두른 워낭을 간간이 흔들어대며 저녁나절에 먹은 풀을 연신 되새김질했다. 나락이 익어갈 때는 산이나 들판에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려 있어 늘 입이 바빴다. 그러는 사이 강변 목화밭 무명 타래는 탱탱한 볼을 터뜨리고 새하얀 목화솜을 눈이 시리도록 파아란 가을 하늘에 선보였다. 그 위로 고추잠자리들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춤을 추었고, 동무들은 내려앉은 잠자리를 잡으려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기어가며 잔뜩 공을 들였다. 그러나 잠자리는 그만 눈치채고 공중으로 날아가버리니 멋쩍은 동무가 괜히 피식 웃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추석이 다가오면 햅쌀로 차례상 올린다고 집집마다 올벼 쪄놓울 때 아이들은 저마다 한 움큼씩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추석 선물로 사다 준 새 신발을 장롱에 숨겨놓고 먼지도 앉지 않은 새 신발을 옷소매로 연신 문지르던 일이 새록새록하다. 고대하던 추석이 돌아오면 객지 나갔던 형들과 누나들이 한 손에는 정종 들고 또 한 손엔 사과 꾸러미 들고 “엄마 아부지” 부르면서 집 마당으로 들어서니, 엄마는 절구통에 떡 찧던 손을 놓고 “아이고, 어서 오너라. 내 새끼야! 객지에서 얼마나 고상이 많냐. 오느라 욕봤다”하시며 오랜만에 만나 얼싸안고 날 새는 줄 모르고 좋아했다. 추석날 아침 차례 모시고 대나무 소쿠리에 밤, 대추, 꼬막, 조기, 사과, 배, 떡, 막걸리를 담아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돗자리도 알뜰히 챙겨 아버지, 삼촌, 당숙, 사촌형들과 함께 나란히 논두렁길을 따라 산소로 가는 길은 한없이 설레기만 했다. 추석 쇠고 사람들은 또다시 객지로 떠나고 누런 들녘에는 허수아비만 쓸쓸히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며 부지런히 오가는 참새들과 우두커니 고향 들녘을 지키고 서 있었다.
추수 끝난 들녘엔 서리 내려앉아 쓸쓸하고 스산한데, 먼 길 떠나는 기러기가 파아란 서쪽 하늘로 아스라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은...”으로 시작하는 동요를 논두렁 가에서 동무들과 한껏 불러젖혔다. 서리 맞은 감잎은 빠알갛게 물들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마다 빠알간 홍시들은 주렁주렁 걸려 걸려 속없는 까치들만 설레게 했다. 멍석에 널어놓은 나락은 가을 햇살에 그새 잘도 여물어갔다. 또 어쩌다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 있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내 일처럼 슬퍼하며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추렴하여 정성스레 예의를 갖추었고, 예쁘게 꾸민 꽃상여에 망자를 실어 태우고 동네를 떠날 적엔 온 산골을 울리는 상엿소리가 마치 가는 이를 그리워하듯 한없이 서글펐다. 동네 이웃 할머니들은 짝을 지어 돌담에 기대어 “아이고, 저 양반 좋게 살았는디 쌔가 빠지게 고상만 허다 가네. 쯧쯧쯧”하고 혀를 차시며 치맛자락을 끌어다가 찐하게 울었다. 망자도 가기 서러웠던가, 꽃상여에 주렁주렁한 종이꽃을 감나무 끄트머리에 떨궈놓고, “인제 가면 언제 올거나”하며 선소리꾼 땡그랑땡그랑하는 요령소리 따라 저승길로 가버렸다. 그런 일을 치르고 나면 동네가 한참이나 쓸쓸했다.
음력 시월이 돌아오면 유자는 잘 익어 향기롭고, 장독가 담장에 기대선 치자나무 열매도 노랗게 물들어 빛이 참 고왔다. 치자 열매 따다가 삼베 물을 들일 때는 동네 아낙네들 마당에 모여 능숙한 솜씨로 삼베길쌈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정겨웠다. 남자 어른들은 짚으로 새끼를 꼬며 초가지붕에 얹을 날개를 새로 짜느라 분주했고, 초가집 지붕을 이는 날엔 장정들이 다 모여 온 집안에 막걸리 냄새가 진동했다. 초가삼간 새 옷으로 단장을 하고 시원치 않던 구들도 고쳐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뒤꼍 굴뚝에선 탐스러운 연기가 포송포송 힘차게 피어올랐다. 해질녘엔 온 동네가 연기로 자욱하고, 소막의 누렁소도 밥 달라며 음매음매 울고, 닭들도 먹이 찾느라 마당가 땅만 연신 파헤치면서 못생긴 대가리를 좌우로 연신 되작거렸다.
첫눈이 내리면 아이들이 제일 먼저 뛰어나와 동무들과 함께 펄쩍펄쩍 뛰면서 하얀 눈을 손으로 잡으려 했고, 따라 나온 바둑이도 신이 나서 천방지축 뛰놀았다. 펄펄 내리는 눈을 밟고 노느라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다가도 “밥 먹어라”하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고는 바깥에서 노느라 찬 바람에 부르튼 빠알간 볼을 문지르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데웠다. 아버지가 끓이는 쇠죽 냄새 온 집안에 가득하고, 엄마의 밥 짓는 냄새는 어린 맘을 재촉하여 밥상도 차리기 전에 숟가락 들고 정잿간 문턱에 걸터앉게 했다. 방에는 술 익어가는 냄새와 황토벽 흙냄새가 좋았고, 콩시루엔 물소리가 끊임없이 뚝뚝뚝거렸다. 윗목 시렁에 매달아놓은 메주는 주렁주렁 파아란 곰팡이 꽃을 피우며 예쁘게 삭아갔다. 마당 한 켠에서 할아버지의 새끼 꼬는 소리, 아이들이 도롱태(굴렁쇠) 굴리고, 전쟁놀이하고, 자치기, 오징어놀이, 팔방놀이, 딱지치기, 연날리기, 말좆박기, 물총쏘기, 기마전, 구슬치기, 줄넘기, 숨바꼭질 등을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뉘엿뉘엿 한 해가 저물어갔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고향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소리 가락이었다. 농촌의 한 해 정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들 살면서 보낸 세월이었다. 부모들은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틈 없이 밤낮으로 일만 하느라 손은 소나무 껍질처럼 오돌토돌해졌고, 얼굴도 구릿빛이 되었다. 일상의 오가는 말도 순박하고 간단했다. 아재, 당숙, 고숙, 이숙, 품앗이, 놉, 울력, 이녘, 저녘, 갱변(뱃가), 까끔(산), 논, 밭, 삽, 곡괭이, 괭이, 구와, 삼태기, 거름, 소막, 호미, 쟁기, 지게, 바작, 씻나락, 짚, 매상, 가마니, 바가지, 갈퀴, 장작, 군불, 거시기 등 순박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서러운 인생들이 흘러갔다. 사대육신 성한 곳 하나 없어도 자식 먹이려고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다가 병들고 늙어 죽으면 그 서러운 땅에 소리 없이 묻혔다.
고춧값, 배춧값 똥금되는 날엔 한숨으로 땅이 꺼질 듯했고, 큰자식 대학 등록금 만들려고 송아지 때부터 어미 소기 되도록 하루도 쉴 틈없이 쇠꼴 베어다 금쪽같이 공들여 키웠더니, 소값이 똥금되던 날 아버지는 쓰디쓴 막걸리만 벌컥벌컥 마셔대며 “어쩌고 살거나 어쩌고 살거나” 하시면서 앞산 부엉이 따라 밤새도록 우셨다.
이렇듯 고달프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농촌 일들이 '소리가락' 아닌 게 없었다. 서러운 맘 하소연할 데 없고, 맺힌 한 풀 데 없어 육자배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셨다. 밭뙈기 하나라도 장만하려고 손바닥이 쩍쩍 갈라지도록 어찌어찌 버티며 살아가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한숨들이 소리가락으로 찌들어 울려 나왔다. 못배우고 가난해도 마음에 응어리진 한을 구성진 소리가락에 얹어 기막히게 풀어낸 것이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술 정서'가 여지없이 이와 같다. 판소리를 하기로 작정했던 '알뜰한 뜻'도 그런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다. 그날은 장날이어서 방과 후 어머니와 함께 집에 가려고 시장으로 갔다. 어머니가 동네 분들과 함께 시장 길바닥에 나란히 앉아서 배추 파는 모습을 보고, 어린 내 맘은 왠지 한없이 서러웠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함께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짠해 보여 왠지 모를 설움에 가슴이 아렸었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길을 가다가 우연히 국악원에서 흘러나온 판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의 인연이 된 것이다. 판소리를 처음 접한 순간, 애수 어린 음색과 성음이 여지없는 시골의 아픔과 한처럼 들려왔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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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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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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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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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판소리, 트로트가
우찌해서 나온지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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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한을 품어 내는소리 판소리와 흥과 삶의 사연들 합한 것이 트로트인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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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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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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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