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약제저장실에 들어 가서 기동용기함을 여는 순간 느낌이 쎄했다. 분명히 우측에서 두번째 전기실 기동용기가 약제량 미달이라고 지난번 보고서에 적혀 있는데 우측에서 세번째 발전기실 기동용기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저울로 재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교체된 것은 멀쩡했던, 아무 문제 없었던, 세번째 발전기실 기동용기였고, 두번째 전기실 기동용기는 여전히 빈 병이었다. '하... 이거 이거... 하... 우리 업체가 교체한 거면 뭐라고 관계인 선생님께 말씀드리냐... 체면이 참...'
이후 펌프실에 들어 가서 성능시험배관을 보는 순간 또 다시 느낌이 쎄했다. 분명히 주펌프1번 유량조절밸브가 누수된다고 지난번 보고서에 적혀 있는데 주펌프2번 유량조절밸브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고난을 거듭거듭 주시는 것입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유량계 전단 개폐밸브를 열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교체된 것은 멀쩡했던, 아무 문제 없었던, 주펌프2번의 유량조절밸브였고 주펌프1번의 유량조절밸브는 여전히 누수가 발생했다. '하... 이거 이거... 하... 이것도 우리 업체가 교체한 거면 또 뭐라고 관계인 선생님께 말씀드리냐... 체면이 말이 아니네...'
황급히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우리 회사가 공사한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살았다. 하마터면 두 손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사죄하며 빌 뻔했네. 그나저나 다시 교체하라고 해야지. 뭐, 어쩌겠나. 문제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소방서에 연속 두 번 동일한 지적이 들어가도 어쩔 수 없지. 이행완료보고서가 저번 점검 때 들어갔을텐데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다시 하면 되겠지. 예전에 소방서에서 이행조치 확인할 때에도 제대로 이행 안 되었던 게 부지기수였는데.'
문득 점검 시작 전 관계인 선생님의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번에 지적하셨던 것 싹다 고쳤으니 이번엔 문제없을 겁니다. 그거 다 하느라고 애먹었어요. 허허. 봐보세요. 문제없을 겁니다."라고 관계인 선생님께서는 호언장담 말씀하셨다. 마치 어려운 숙제를 다 해내고 나서는 선생님께 칭찬을 들으려는 학생 같았다. 입가에 옅게 번진 미소에는 힘든 과제들을 완수하여 소방안전에 이바지했다는 보람감도 묻어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웃음의 파괴자가 될 것이다. 그 뿌듯하고 행복한 마음의 세계에 무참히 불화살을 퍼부어댈 침략자가 될 것이다.
이후 식당 주방에 들어갔다. 슬림한 은색 소화기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보고는 쎄한 느낌을 다시 받았다. 혹시나 하고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역시나 K급 소화기가 아닌 HCFC-123 소화기였다. '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역경을 매번 주시는 것입니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사장님께서 므흣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씀하셨다. "아, 그거, 저번에 지적하셔 가지고 사놓은 겁니다. 어후, 일반 빨간 소화기보다 꽤 비싸더라고요! 이제 비치했으니 문제 없겠죠?"
이제 그 물음에 대하여 내가 답을 할 차례이다. '네, 문제 없습니다. 잘하셨습니다.'라는 답을 듣기를 사장님께서는 바랄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소망의 파괴자가 될 것이다. 그 꿈과 희망에 가득찬 마음의 세계에 무참히 물대포를 쏘아댈 침략자가 될 것이다.
첫댓글 공포영화인가요? 오금이 저리네요ㅎㅎ
ㅋㅋㅋ 슬픈현실이겠지만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필력이 상당하시네요
재미있습니다
너무 공감되어 재미있게 봤습니다
다음화도 올려주세요^^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참 채미집니다.ㅋㅋ
항상 재미있고
현실에 와 닫는것 같습니다
제가 절대 상명하복 생활만 25년1개월
하다가
처음 일반 회사를 다니니
저의 보조선생님들 8년을 같이 다니고
비록 ㅇㅖ의업고 불통이지만
업무에 대해서는 그나마
감사하게 생각해야 겠네요ᆢ
간혹 답글에 이상 사람들이
올려도
언잖아 하지 마시고
항상 건강하세요ᆢ